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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온전히 받아들인 사람이 가진 자기확신을 봤죠”
트랜스젠더퀴어 10인의 초상화를 전시한 ‘활동가’와 ‘예술가’ 인터뷰
살면서 “여자가 그런 건 쫌…”이라는 말은 자주 들어봤다. 여성으로 보인다는 것 때문에 겪은 일들을 나열하자면 끝이 없지만 “여자예요, 남자예요?”라는 질문을 받은 적은 없다. 머리카락이 꽤 짧았을 때도 그랬다. 화장을 해서? 키나 몸집이 크지 않아서? 몸의 곡선이 드러나는 옷을 입어서? 목소리 때문에? 정확한 이유야 알 수 없지만 분명 어떤 이유가 날 여성이라고 구분할 수 있게 했기 때문일 것이다.
여성으로 보이기 때문에 겪은 일들은 때때로 날 꽤 화나게 만들었지만 그게 문제였을 뿐, 내가 스스로를 여성이라고 인지하는 데엔 별 문제가 없었다. 세상이 나에게 지정해 준 여성이라는 성별이 내게 괴리감 없이 잘 들러붙던 거다. 그래서였겠지, 트랜스젠더퀴어 이슈에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게 아니라, 나에게 ‘긴급하지 않은 이슈’였다는 변명을 덧붙이고 싶지만, 확실히 무심했고 그래서 무지했다.
그런 나에게 트랜스젠더퀴어 친구들이 생겼다. 너그럽고 친절한 친구들 덕분에, 뻣뻣하기 그지없던 시스젠더(Cisgender, 타고난 지정 성별과 본인이 정체화하고 있는 성별 정체성이 일치하는 사람)인 나의 삶도 조금씩 달라졌다. 친구를 통해 트랜스젠더퀴어 10명의 초상화를 전시하는 “BEYOND THE BINARY”(이분법 넘어) 전시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다.
AA프로젝트 - ‘BEYOND THE BINARY’ 전시 홍보물
전시 오프닝 날이었던 지난 11월 22일, 서울 마포구 연남갤러리에서 박진영 작가를 처음 만났다. 10개의 작품을 하나하나 세심하게 설명하는 그의 모습은 ‘예술가들이 다 저랬던가?’ 의문이 들 정도로 좀 달라 보였다. 그는 단지 작품을 설명하고 있지 않았다. 그 속에 담긴 인물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었다.
전시장을 나서기 전에 박진영 작가에게 다가가 “따로 한번 전시에 관한 이야기를 더 듣고 싶다”고 했다. 자신은 인터뷰를 할 정도가 아니라며 손사래 치는 박 작가를 겨우 설득한 후, 박진영 작가와 이 프로젝트를 함께 진행한 박에디 활동가에게도 인터뷰를 요청했다. 그리고 약 3주가 지났을 무렵, 드디어 두 사람을 만났다.
-전시 이름이 AA프로젝트-‘BEYOND THE BINARY’였죠. AA프로젝트의 의미는 아티스트(Artist) X 액티비스트(Activist)라고 알고 있는데요. 아티스트 박진영과 액티비스트 박에디, 두 분의 인연이 궁금해요.
에디: ‘무지개예수’(성소수자 그리스도인 및 성소수자와 함께하고자 하는 그리스도인 모임)에서 활동할 때니까 아마 3~4년 전일 거예요. 그땐 박진영 님이 목회 활동을 하셨고요. 사실 우리 두 사람이 별도로 같이 활동하거나 그렇진 않았어요.
진영: 맞아요. 무지개예수를 통해 서로 연대하는 자리에서 알게 되었고, 개인적으로 같이 뭔가 한 적은 없었죠. 다만 제 입장에서는 에디 님이 트랜스젠더 인권활동가로 워낙 유명하니까 팬심이 항상 있긴 했어요.
에디: 저도 팬심 있었다고 써주세요! 목회 활동하실 때 항상 뒤에 천사가 보였다고요.(웃음) 우린 목회자와 신자의 관계였고, 또 함께 종교에 대한 궁금증을 해결해 가는 그런 사이였죠.
진영: 무지개예수에서 만나긴 했지만, 전 우리가 종교 안에서 만났다는 생각은 별로 안 들어요. 저는 목회 활동하면서 만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을 목회 대상으로 보진 않았거든요. 오히려 신자들로부터 배우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어요. 퀴어 커뮤니티는 제가 몰랐던 세계였으니까, 그런 면에선 신자들이 제 선생님이었죠.
전시 오프닝 행사 중, 박진영 작가와 박에디 활동가의 모습.
-이런 프로젝트를 어떻게 시작하게 된 건가요? 그림 전시라는 게 쉽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 교회에서 목회자와 신자로 만난 사이잖아요.
에디: 한동안 서로 못 본 시기가 있었어요. 제가 뉴질랜드에서 좀 시간을 보냈고, 돌아와선 좀 다른 일을 하느라 바빴고요. 진영 님이 개인적으로 조금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다는 얘길 듣긴 했는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딱히 뭐 있을까…’라는 생각만 하고 있었죠. 그러다가 오랜만에 다른 단체 행사에서 만났어요. 반갑기도 하고, 그냥 뭐든 같이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뭔가를 하면 진영 님의 힘든 마음이 좀 가벼워지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시작이었어요.
진영: 제가 정말 힘든 순간에 에디 님이 ‘날 위로하고 싶어 하고 도와주고 싶어 한다’는 걸 느꼈어요. 그때 전 누군가의 위로가 필요한 사람이었고, 에디 님이 제 옆으로 온 거죠. 그리고 팬심이 있었다고 했잖아요. 저한텐 크게 느껴지는 사람이었는데, 그런 사람이 먼저 말을 걸어 주는 게 너무 고마웠어요.
에디: 당시엔 진영 님이 그림을 잘 그리는 줄 전혀 몰랐어요.(웃음) 그런데 얘기를 하다 보니까 그림 공부했었다는 말을 하더라고요. 제 활동의 목표가 퀴어(queer) 가시화, 사회적 소수자들의 목소리를 담는 건데, 진영 님이 그림을 그린다고 하니 이런 메시지를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겠다 싶더라고요. 우리 둘이 함께할 수 있는 지점을 발견한 거죠.
-퀴어 커뮤니티 안에도 다양한 사람들이 있잖아요. 특별히 ‘트랜스젠더퀴어’들의 초상화를 그리게 된 계기가 있나요?
진영: 제가 트랜스젠더퀴어를 그리고 싶다고 했어요. 목회 활동을 2년 동안 하면서 가장 마음 아팠던 일 중 하나가 교회 성소수자 커뮤니티 안에서도 다양성이 존중받지 못할 때가 있다는 생각이 드는 거였거든요. 저한테 개인적으로 연락하는 신자분이 두 분 있는데, 트랜스젠더에요. 그들의 영향으로 트랜스젠더 인권에 대해서 목소리를 내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많은 사람에게 공감받지 못하는 이들의 삶에 대해서 내가 어떤 목소리를 낼 수 있을까 늘 고민이었어요.
그러다 여러 이유로 목회 활동을 마무리하게 되었는데, 그냥 퀴어 커뮤니티와의 인연을 두고 떠나버리려고 하니까 마음이 너무 불편한 거예요. 할 수 있는 일이 남아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근데 같이 얘기할 사람은 없고 혼자 생각만 하다가 에디 님을 만나서 얘기하니까 ‘같이 하자’고 하시더라고요. 이렇게 (전시를 열 정도로)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상상도 못 했어요.
-작품에 에디 님의 초상화도 포함되어 있는데요, 진영 님이 제일 처음 그린 그림이라고 들었어요. ‘활동가’라 자신을 드러내는 일이 익숙한 편이라고 하더라도, 그림의 모델이 된다는 건 또 다른 부담이 있지 않았을까 싶은데요.
에디: 프로젝트 시작하기 전에 진영 님이 그린 작품을 봤는데 너무너무 잘하는 거예요. 내 그림을 잘 그려주겠구나 싶어서(웃음) 흔쾌히 하겠다고 했어요. 또 ‘내가 먼저 참여해서 스타트를 끊어야겠구나’ 싶었고요. 그래야 또 다른 누군가에게 부탁할 수 있잖아요. 근데 사실 97% 정도의 이유는 그림이 너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에요.(웃음)
참여자들을 모으는 방식에 대해선 처음엔 SNS를 통해 공개 모집을 하려는 생각도 했는데 그렇게 안 했거든요. 아직 사회에서 '트랜스젠더'나 ‘젠더퀴어’라고 하면 외향적인 부분을 쉽게 평가하는 문화가 있잖아요. 그런 걸 같이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할 것 같았어요. 그래서 주변에 활동하시는 분이나 우리 활동에 관심 있는 분들 중에서 트랜스젠더퀴어 정체성을 가진 분들을 조금 우선순위로 했어요. 근데 제안하니까 다들 흔쾌히 하겠다고 하더라고요.
-프로젝트는 언제부터 시작된 건가요?
진영: 에디 님 인터뷰를 3월에 했고, 그 뒤에 한두 명 정도 더 인터뷰했고요. 한동안 에디 님이 너무 바빠서…
에디: 7~8월부터 본격적으로 시동을 걸었던 것 같아요.
전시장 내 작품들. 참여자 10명의 색, 배경 그림 등이 모두 다른데 각자만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그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전시가 다시 열릴 수 있으면 좋겠다.
-그림의 대상이 된 참여자들과 인터뷰를 하고 그 내용을 그림 그리면서도 듣기도 했다고 하셨는데, 원래 초상화를 그렇게 그리는 건지 궁금하더라고요.
진영: 이 그림들은 그렇게 하고 싶었어요. 사실 초상화는, 모델이 앞에 있고 그걸 보고 그리면 제일 편해요. 근데 이 프로젝트는 ‘트랜스젠더퀴어 가시화’라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으니까 그냥 그릴 순 없었어요. 그 사람의 리얼함이랄까, 실제 얼굴보다는 그 사람이 담고 있는 스토리를 표현하고 싶었기 때문에 고민이 되게 많았어요. 결국엔 얼굴을 가장 강조해서 그리긴 했지만 제가 더 많이 담고 싶었던 건 얼굴을 포함한 스토리, 그리고 표정에서 드러나는 이야기였거든요.
‘내가 그린 트랜스젠더퀴어 분들의 초상화는 어떤 것이어야 할까?’ 또 ‘다른 사람이 아니라 트랜스젠더퀴어의 초상화는 어떤 느낌이어야 할까?’ 계속 고민했어요. 잘 그리고 못 그리고를 떠나서 딱 봤을 때 어떤 느낌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개인의 개성도 녹여 내야 했고요.
에디: 보여지는 것 외에 그 사람에게 뭐가 들어있는지는 말을 해봐야 알잖아요? 말이 아니면 글로라도 표현해야 하고. 근데 이 사회에선 보여지는 것만 신경을 쓰니까. 그래서 ‘이야기를 듣고, 그림으로 표현한다’는 것이 이 프로젝트에서 중요한 부분이었어요.
-연구자처럼 책도 많이 읽으셨다요.(웃음)
진영: 제일 재미있게 읽은 건 <젠더무법자>(케이트 본스타인, 바다출판사)고요. <트랜스젠더의 역사>(수잔 스트라이커, 이매진)도 좋았고 <오롯한 당신>(김승섭 외, 숨쉬는책공장)은 연구서니까 기본으로 읽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구요. 그리고 도란스 시리즈(<양성평등에 반대한다> 외 3권) 중에서 루인(트랜스/젠더/퀴어 연구자) 님이 쓴 파트도 열심히 읽었어요. 드라마 시리즈 <포즈>(Pose)랑 <테일 오브 더 시티>(Tales of the city)도 봤고요. 많은 도움이 되더라고요.
제가 감히 트랜스젠더퀴어에 대해서 안다고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작품을 한다는 게 스스로 부끄러웠거든요. 작품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실수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필요하다는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책을 읽고 나니 작품보다도 저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더라고요.
-권김현영 님의 책 <다시는 ____ 그 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첫 글을 보면, 20년 전에 처음으로 트랜스젠더 여성을 만난 일에 대한 게 나오는데요. 정말 좋았던 문장이 “그때 처음 나는 S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봤다. 거기에는 누가 뭐라고 해도 자기 자신으로 사는 걸 포기한 적이 없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단호함이 있었다”거든요. 박진영 작가님 그림에서 그 단호함을 본 것 같아요.
진영: 이 프로젝트를 하면서 그 단호함을 많이 느꼈어요. 제가 전시 홍보하려고 SNS에 올린 글에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사람이 가진 확신”이라는 말을 썼어요. 제가 만난 분들은 정말 자기 확신이 있는 사람들이었어요. 지금껏 만난 퀴어들 중에서도 이런 퀴어는 없었다!(웃음)고 느낄 정도로요. 자신을 온전히 받아들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자기 확신, 그게 저한테 가장 크게 왔던 부분이에요. 이건 비(非)퀴어도 가지기 어려운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정말 멋있었어요.
에디 님이 사실 나이로는 저보다 어린데, 항상 저한테 큰 존재로 보이는 게 늘 의문이었거든요. ‘왜 이 사람은 뭔가 초월한 것 같지?’ 알 수 없는 강인함이 있었어요. 아마 ‘일반 사람’들이 경험할 수 없는 고통의 시간을 경험했으니까. 그걸 겪어 온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강인함인가 보다 하고, 막연하게 생각했거든요. 근데 트랜스젠더퀴어 분들의 이야기들을 들어보니까 ‘막연한 생각이 아니라 진짜’라는 걸 알겠더라고요.
-에디 님도 같이 참가자들을 인터뷰한 거죠? 대부분이 지인이었다고 했는데, 인터뷰가 어땠는지도 알고 싶어요.
에디: 제 지인이잖아요. 같은 정체성을 가지고 있고, 같은 아픔을 공유하고. 그래서 가깝다고 생각했는데 각자 겪은 삶들이 너무 다른 거예요. 제가 배울 점들도 많더라고요. 어려운 시간을 견디면서 묵묵히 자기 길을 찾아가면서 얻어지는 것들이 있구나 싶었어요.
지인들을 좀 더 깊이 알게 된 것 같아요. 자주 만나진 못 하고 몇 개월 만에 연락해도 편안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들이지만, 이들이 겪은 삶에 대해선 나도 정말 몰랐다는 걸 깨달았고요. 사실 인터뷰 전엔 인터뷰가 좀 지루할 거라고 생각했거든요.(웃음) 잘 아는 사이니까. 근데 그들이 어떤 어려움을 겪었고 어떤 고비를 넘기면서 살았는지는 사실 각 잡고 물어보지 않으면 모르잖아요. 이번 기회에 좀 알게 되었달까. 그래서 정말 재미있었어요.
-인터뷰 내용 중에 특히 기억에 남는 게 있나요?
에디: 다 감명 깊었는데 한 분이 “트랜스젠더퀴어는 어썸(완전 멋있는, Awesome)한 존재”라고 말한 게 기억에 남아요. 그 사람이 살아온 이야기를 다 듣고 나니까 그 말이 가볍게 들리지 않더라고요. 그가 “어썸”이라는 말을 했지만, 사실 그의 삶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는 게 체감되더라고요. 그의 모든 것들이 저에게 이야기하는 느낌이었어요.
진영: 저한텐 인터뷰 과정이 또 하나의 공부, 배움의 과정이었어요. 제 생각이 계속 깨어지는 과정이기도 했죠. 사실 제 내면에서 트랜스젠더(세상이 부여한 지정 성별과 본인이 정체화한 성별 정체성이 불일치한 사람)와 젠더퀴어(남/녀라는 시스젠더 규범성에 벗어난 성 정체성을 가진 사람)에 대한 혼란이 있었거든요.
참여자 중에 논바이너리(젠더 이분법에 저항하는 사람들)인데 남성호르몬을 맞는 분이 있었어요. 왜? 이건 또 어떤 경우지?! 라는 생각이 들어서 혼란스럽기도 했어요. 근데 이런 모양은 남자고 이런 모양은 여자라는, 외모에 대한 성별 이분법을 사회가 규정한 거잖아요. 누군가는 그냥 이 모습이 좋아서 하는 거고, 내가 여자든 남자든 상관없이 내가 이 모습이 좋아서 사는 건데 ‘너는 남자처럼 했구나, 너는 여자처럼 했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것 자체가 성별 이분법에 근거한 거라는 걸 알게 되었어요. 물론 지금도 종종 혼란스러울 때가 있어요. 저도 성별 이분법에 쩔어서 살았으니까요. 아직 그걸 깨고 실천하는 게 어렵긴 하지만, 스스로 알아차리게 된 건 배움 덕분인 것 같아요.
박진영 작가가 그린 에디 활동가의 초상화. ‘영원한 생명’이라는 제목이 붙어있는 이 그림의 배경엔 고사리과 고대식물이 그려져 있다.
-많이 배웠다는 걸 이미 이야기하셨지만, 이 프로젝트를 통해 얻은 게 있다면 무엇일까요?
진영: 전 인생의 전환점이 된 것 같아요. 제가 기존에 가지고 있었던 가치관이 무너졌고 그걸 다시 새롭게 세우는 과정이었고요. 예전부터 젠더에 대해서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직접 사람들을 만났으니 정말 너무 큰 배움이었죠. 그리고 가장 크게 배운 건 나를 수용하고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방법. 그리고 용기. 제 삶은 항상 어떤 이데올로기나 이상을 좇는 삶이었거든요. 가장 이상적인 걸 추구하고 그것이 실현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살았는데, 이제는 이상만 좇지 말고 그냥 나의 모습에 직면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그대로 살아야겠다 싶어요.
이렇게 머리를 자른 것도 처음이거든요. 이런 것들이 스스로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사람들 앞에서 숨기거나 그런 게 없을 정도로, 저도 좀 자신이 생긴 거 같아요. 거의 20년 동안 항상 ‘머리카락 자르고 싶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었거든요? 근데 못 했어요. 왜냐면 그렇게 하면 뭔가 사회 낙오자가 된다거나, 아니면 제대로 일을 수행 못 할 거라는 생각이 컸거든요. 근데 막상 머리를 자르고 나니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더라고요. 기르는 것도 별거 아니라는 생각도 들고. 그런 것들에 대해 자유로워진 것 같아요.
‘이게 트랜스젠더퀴어 분들이 가지고 있는 자유로움’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내가 자신 있는 모습 그대로, 내가 먼저 나를 수용해 주면서 그렇게 편안하게 살고 싶다. 그동안 너무 거대 담론에 에너지를 많이 썼던 거 같아요. 물론 그게 중요하지 않다는 건 아니고요. 저도 일상을 살아가면서 여전히 계속 같이 참여해나가겠지만, 나 자신을 좀 더 들여다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전시를 보러 온 분들의 반응은 어땠어요?
에디: 다들 작품을 좋아해 주신 것 같아요. 참여자들도 정말 마음에 들어 했고요. 어떤 분은 자기 그림 옆에서 똑같은 표정을 하고 사진을 찍더라고요.(웃음) 누군가 저한테 그 친구가 어떤 사람이냐고 물으면 그 그림처럼 설명할 것 같거든요. 진영 님이 그걸 다 포착해 내신 것 같아요.
진영: 전 특히 두 분이 기억에 남아요. 한 분은 ‘성소수자부모모임’에서 오신 분이었는데 트랜스젠더 딸을 둔 분이었어요. ‘누군가에게 이 전시가 큰 힘이 되고 위로가 될 수 있구나’라는 걸 너무 생생하게 느꼈어요. 처음 만났는데 서로 자기 얘기를 술술 하게 되더라고요. 또 한 분은, 제가 목회 활동하면서 만났던 트랜스젠더 여성인데요.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사실 이분이 저한테는 동기부여가 된 사람이죠. 전시장에서 커피 한잔을 하면서 이야기를 나눴는데 ‘나 여기서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다’며 너무 행복해하는 거예요. 정말 큰 보람을 느꼈어요.
-액티비스트와 아티스트가 같이 프로젝트를 했는데, 박에디 활동가에게 ‘아트’이라는 건 무엇이고 박진영 작가에게 ‘액티비즘’이란 무엇인지 묻고 싶어요.
에디: 전 항상 듣는 사람이거든요. 활동하면서 사람들과 소통할 때 마음을 중요하게 보고, 봐야 하니까요. 그래서 항상 물어보고 질문을 하면서 사람을 이해하죠. 전 그렇게 이해하면서 끝나는데 ‘아트’라는 건 거기서 다른 걸 만들어내더라고요. 제가 무형으로 느끼는 걸 유형으로 표현하는 걸 보고, 이래서 예술이 필요한 거구나 싶었어요. 누군가가 ‘OO은 어떤 사람이야?’ 물었을 때, 어쩌고저쩌고 말하는 것보다 이 그림 하나가 훨씬 더 많은 걸 기억시킬 수 있고, 남길 수 있잖아요. 사실 활동가들은 누군가에게 자신의 활동을 기억시키고 남기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하거든요. 이런 예술이 활동의 다른 방식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진영: 전 종교의 울타리 안에 있었고, 그림을 그렸고. 이런 것만 하다가 갑자기 성소수자 목회를 하면서 제 삶이 활동 안으로 들어가게 된 거잖아요. 그래서 여전히 활동이나 운동이 익숙하지 않고 쉽게 이야기할 수 없는 부분이긴 해요. 다만 활동이라는 건, 우리가 바라고 꿈꾸는 세상을 위해 같이 뭔가를 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어떤 면에선 우리가 살아가는 그 모습 자체가 활동이라고 생각하고요. 각자 할 수 있는 걸로 꿈꾸는 세상을 만들어 간다고. 자신의 기질이나 성격이나 삶의 형편 등을 고려해서 자기가 행복하게 있을 수 있는 곳에서 뭔가를 하면 되죠. 어디에 내가 위치하던지 최선을 다해서 삶을 살아내고 그냥 나 혼자 잘 먹고 잘사는 게 아니라는 걸 계속 인지하면서 더불어 살아가는 그런 방식이 ‘액티비즘’ 아닐까요?
할 수 있다면 계속 프로젝트를 이어가고 전시도 더 많은 곳에서 하고 싶다는 박진영 작가와 인터뷰 후에도 말을 조금 더 나눴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지만, 그가 “예수는 경계가 없는 분이거든요”라고 한 말이 한참 귓가를 맴돌았다. 그렇다면 누가 경계를 견고히 쌓아 올리고 있는 걸까? 분명한 건, 지금 이 땅에 발을 딛고 살아가며 경계를 없애는 사람들이 있다는 거다. (박주연 기자)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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