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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사이드…동생의 죽음 앞에 ‘언니가 깨어나고 있다’

박서련의 소설 [마르타의 일] 서평에세이 (윤일희 기록)


 

“스트레스가 쌓이면 어김없이 책 읽는 꿈을” 꾼다는 소설가 박서련. 한 날은 이런 꿈을 꾸었는데, 만화 한 컷짜리였다. 귀여운 소녀가 땅을 보며 걷는다. 제게 다짐하듯 속엣말을 한다. “그래,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 없어.” 안도도 잠시, 험악한 댓글을 읽는다. “야이 기집애야 앞을 좀 보면서 걸어…” 섬뜩한 찰나 후, 그 소녀 앞에 놓인 덤불 속에 칼을 든 괴한이 서 있다.


소설 말미에 제공되는 작가의 말이 이토록 무서운 적은 없었다. 박서련 작가도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이렇게 썼다. “그게 왜 꿈이었는지 자꾸 생각하다 보니 이제는 아주 잊을 수 없게 되었다.”


박서련 작가의 소설 [마르타의 일](한겨레출판사, 2019)


소설가 박서련이 꾼 꿈이 원인인지 결과인지 모르겠지만, 소설 [마르타의 일]이 나왔다. 새벽 4시경 [마르타의 일]을 마친 나는, 소설 말미 반전의 공포가 하도 서슬 퍼레 덜덜 떨렸다. 이제 두려워할 필요 없다고 다독였는데… 여성에게 안전한 삶은 도달할 수 없는 경지인가?


무서워 뒤척이다 겨우 잠을 청해 설핏 잠이 들었다. 꿈을 꿨다. 일어났을 때 어찌나 생생했는지… 두려워하며 든 잠 속에서 내 무의식은 이 두려움이 분했던 모양이다. 나는 주인공 수아가 되어(모습은 물론 나였지만) 꺼림직하던 괴한을 아슬아슬하게 해치웠다. 어찌나 안심이 되던지 깨나서 혼잣말을 다 했다. “아, 잘했어. 잘 됐어.”


소설의 공포가 그저 픽션이 아니기에, 꿈으로라도 해소해보려 한 걸까. 생각해보니 허무하고 열 받는다. 생시라면 내가 무슨 능력으로 저런 장정을 상대해 ‘찬찬’ 해치우겠나. 무능한 몸이 원망스럽다. 꿈에서는 훨훨 나르며 누비는 ‘블랙 위도우’였는데….


2018년 박서련은 [체공녀 강주룡]으로 독자를 ‘심쿵’하게 했다. 그는 을밀대에 도도히 오른 강주룡(1931년 평양 평원 고무공장 파업을 주동하며 을밀대 지붕에 올라 고공 농성을 벌인 인물)의 결기를 소설로 기록해, 역사의 물결 속에 수장된 수많은 여성 노동자들을 현재로 소환해 내는 능력을 보여주었다.


박서련 작가의 전작 [체공녀 강주룡](한겨레출판사, 2018) 표지. 작가는 2015년 단편 「미키마우스 클럽」으로 실천문학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했고, [체공녀 강주룡]으로 제23회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했다.


그의 신간 [마르타의 일]이 나왔다. 사실에 기반한 역사 픽션인 [체공녀 강주룡]과 달리 [마르타의 일]은 추리물이다. 치열하게 살다 고작 31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체공녀 강주룡을 가슴에 두고, 그녀에게서 백여 년이 지난 지금 여기, 여전히 치열하게 살고 있는 젊은 여성 경아와 수아의 얘기로 들어가 보자.


[마르타의 일]은 호흡이 빠르다. 빠르니 긴박하다. 추리물답다. 주인공 임수아의 하루도 이만큼 촘촘하다. 그는 하루를 한 판에 같은 규격으로 잘린 두부모처럼 재단한다. 정해진 일정대로 단 몇 분도 허비하지 않으며 마치 로봇처럼 움직인다. 수아는 임용고시를 앞둔 마당에 동생 경아의 사망 비보를 듣는다.


그러나 하던 일을 작파하고 통곡하며 장례를 치르는 일 따위는 없다. 임용고시생에겐 그마저도 허영이다. 이번에 실패하면 또다시 ‘헬’의 나락으로 떨어지니 선택의 여지가 없다. 파트타임으로 일하며 공부하는 임용고시생의 삶이 팍팍하지 않은 게 이상할 터. 소설 속 수아의 하루를 같이 지내다 보면 어느새 노곤해졌다.


수아는 돌연 떠난 동생 경아의 죽음이 믿어지지 않는다. 죽을만한 까닭이 뭐란 말인가. 동생의 사후부검을 위해 수아는 메스를 쥐기로 한다. 그러다 장례식 중 익명의 남자에게 날아든 메시지로 경아의 죽음이 자살이 아니라고 확신하게 된다. SNS 셀럽이었던 경아의 SNS를 뒤지다 수상한 흔적을 찾은 수아. 한 치 흔들림 없이 임박한 시험 준비를 해내면서 동생의 살인자를 추적한다.


살인자를 좇으며 수아가 물샐틈없이 처리하는 일과는 그 나이대의 ‘취준생’ 여성이 얼마나 치열하게 하루를 살아가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헬조선’ ‘흑수저’의 하루는 가난한 지갑만큼 빠듯하다.


임용고시 필기시험을 패스하고 수업 실연과 면접을 남겨둔 수아는 살인자 추적에 박차를 가한다. 살인자가 연예인이라는 것, 그 악마가 동생에게 ‘물뽕’을 먹여 강간하고 임신까지 시킨 것을 알아낸 수아는 분노로 몸이 타버릴 것만 같다. 이 대목에서 독자는 실제상황인 ‘버닝썬 사건’을 겹치게 된다.


경아의 죽음이 살인이었다는 게 밝혀지자, 수아는 망설이지 않는다. 동생의 죽음이 자살이 아니라 살인이라는 것을 공권력과 법에 기대 밝혀내는 일은 김 오르지 않는 솥 안의 감자가 익기를 바라는 것만큼 어리석다. 수아는 어떻게 해야 하나를 고민하지 않는다. 가해자를 어떻게 죽일까를 고심한다.


수업 시연과 면접까지 말끔히 마친 수아는 마침내 경아의 목숨값을 받아내기로 한다. 이 결행은 성공할 수 있을까? 수아가 살인자를 처단하는 일은, 영화 [언니] 이시영의 활극처럼 현란한 유혈 낭자 액션일 수는 없다. 한탄스럽게도 우리에게 그런 ‘언니’는 실재하지 않는다. 대신 수아는 스마트함을 십분 발휘한다.


계략으로 살인자를 유인해낸 수아는 경아 대신 마지막으로 묻는다. 왜 경아를 죽였느냐고. 허무하다 못해 하찮은 대답은 여성혐오가 발현되는 ‘페미사이드’<여성(Female)과 살해(Homicide)를 합친 용어. 여성이라는 이유로 살해당하는 것>의 전형을 내보인다. 한국여성의전화에 따르면, 지난 6년간 이틀에 한 번꼴로 배우자, 애인 등 친밀한 관계에 있는 남성에게 살해되거나 살해당할 위기에 처한 여성이 발생했다. 이처럼 여성 살인 피해의 대부분이 ‘친밀한 폭력’으로 발생하는데도, 여전히 ‘데이트 폭력’, ‘가정 폭력’이라는 개별적인 사건으로 취급하며 ‘페미사이드’를 은폐하고 있지 않은가.


동생을 대신해 복수하는 ‘언니’? 소설이나 영화에나 있겠지, 의심하는 독자가 있겠지만 나는 이런 ‘언니’를 알고 있다. 어느 날 내 친구 A는 남편에게 반죽음이 되게 맞은 동생에게 긴급한 전화를 받는다. 한두 번도 아니고 내 이 놈을… 무자비한 구타에 치가 떨린 A는 집에 있던 칼을 신문지로 둘둘 말아 가슴에 품었다. 그길로 동생의 집으로 향했다. A와 동생이 죽고 못 살게 자매애가 좋았던 것은 아니다. 수아와 경아의 자매애도 뜨끈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동생의 남편이 내빼는 바람에, A는 마르타의 일을 결행하지는 못했다. 분노로 분연히 일어선 ‘언니’는 어제도 오늘도 있었다.


“마르타가 마리아에게 이리 와서 언니의 일을 도와달라고 했더니 예수는 오히려 당신의 일보다 덜 중요한 게 아니라고 했다던가… 선하고 지혜롭고 아름다운 여자에게는 악하고 게으르고 시샘이 많은 자매가 있다. 그렇다고들 한다.”(130쪽)


이 문구는 소설의 제목이 [마르타의 일]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하게 한다. 할 일을 했고 후회하지 않지만, 생전 처음 손에 피를 묻힌 수아는 두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담담하게 일상으로 복귀하려는 수아의 ‘언니됨’은 한 꺼풀을 탈각한 ‘다른 언니’의 모습을 보여준다. 울며 한탄하다 결국 죽은 탓을 피해자에게 전가하던 과거의 무력한 언니는 이제 없어야 한다. 언니들이 깨어나고 있다. 피해를 당하고도 그 탓을 자신에게 돌려 자신을 처벌하던 게 ‘내 안의 여성혐오’였다는 것을 이제 알아채고 있다.


며칠 전 지인의 바뀐 ‘프사’(프로필 사진)를 보고 울고 말았다. 차례로 세상을 등진 설리와 구하라가 같이 찍은 어여쁜 생전 모습이었다. ‘누가 이 여성들을 죽게 했는가’를 묻고 캐내는 일을 단순히 ‘추모’라 불러서는 안 된다. 부정해왔고 은폐해왔던 사회적 사실로서의 ‘페미사이드’를 인정하게 하고 어떤 대책을 강구할 것인가 논의해야 한다.


감히 여자 따위가 예수의 말을 듣고 있다고, 마리아를 질시하며 눈빛을 번득였을 예수의 남자들. 그녀를 시기하고 혐오하고 마침내 사악한 마음을 품었을 남자들에게서 마리아(경아)를 지키는 것이 마르타(수아)의 일이었다.


소설을 마지막은 지옥이 무한 반복되리라는 알람을 요란히 울려댄다. 몸서리가 쳐진다. 아, 끝이 아니었구나. 덤불 속에 흉기를 들고 여자를 노리는 괴한이 하나가 아니었구나.  (윤일희)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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