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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오늘 어떤 이야기에 웃었나요?
웃음을 주는 영화, 애니메이션 그리고 스탠드업 코미디
웃는다는 건 좋은 일이다. 웃음은 만병통치약이라고 할 만큼 그 효능이 널리 알려져 있기도 하니까. 하지만 많은 여성에게 있어서 ‘웃는다’는 건 때때로 쓰린 기억을 동반한다. ‘웃어야 했던 순간’들이 있기 때문이다.
회사 선배의 성희롱 발언을 그저 ‘웃으며’ 넘겼던 것, 일 때문에 만났는데 상대 남성이 보내는 불쾌한 시선과 손짓을 회피하기 위해 과하게 ‘웃으며’ 얼버무렸던 것, 면접을 보러 갔다가 “우리는 작은 회사라 해외 출장을 가면 (남성)이사님이랑 방을 같이 써야 한다”는 말에 어떻게 답해야 할지 몰라 어색하게 ‘웃었던’ 일 같은 것.
이때 웃음은 만병통치약이 아니라 응급처치약이었다. 사실 약 효과는 거의 없었고, 상처를 가려주기만 할 뿐이었다.
정말 시원하게, 혹은 까무러칠 정도로 큰 소리를 내며 웃을만한 일은 왜 점점 줄어들고 자책과 쓰라림이 남는 ‘웃었던 순간’들이 쌓여가는 걸까. 여성들의 줄기찬 미투(#MeToo)에도 변하는 것 같지 않는 세상에 대한 답답함 때문일까. 한 해를 정리해야 하는 시간이 다가오기 때문일까. ‘난 올해 뭘 했나?’ 싶은 생각이 들면서 조금 우울해졌다.
하지만 분명 소중하고 뜻깊은 순간들도 있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진짜 웃었던 순간도 있었다. 좋아하는 사람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며 웃었던 기억들, 좋아하는 걸 보고 듣고 느끼며 혼자 행복한 웃음을 지었던 일들.
내년에도 ‘웃어야만 했던 순간’들의 불합리와 불평등에 대해 계속 이야기를 이어가야겠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웃지 않는 사람인 건 아니니까, 그리고 웃음의 엔돌핀으로 에너지를 보충해야 하는 때이기도 하니까, 연말엔 즐겁게 웃을 시간을 가지면 어떨까 싶어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는 추천 영화와 영상 콘텐츠를 몇 개 골라봤다. (그동안 많이 알려지지 않았거나 생각만큼 언급이 되지 않았던 콘텐츠를 추천하고자 고심했다는 점을 알아주시길.)
#여성들이 겪는 현실을 코미디로 풀어낸 독특한 동화
<투카 앤 버티>(리사 헤너월트 제작, 2019)
<투카 앤 버티>는 30대 여성 일러스트레이터 겸 작가인 리사 해너월트가 만든 애니메이션 시리즈다. 코미디언인 티퍼니 해디시와 앨리 웡이 각각 주인공 투카와 버티의 목소리를 연기했다. 2019년에 공개된 최고의 쇼라는 호평을 받을 정도였지만 넷플릭스가 시즌 1만에 종결시켜버려 팬들의 분노를 일으켰던 작품이기도 하다.
온라인 스트리밍 서비스를 시작한 이후 다양한 작품과 신진 제작자들에게 투자했던 넷플릭스가 최근 연달아 기존 방영하던 콘텐츠나 이제 막 첫 시즌이 공개된 콘텐츠를, 특별한 이유 없이 종결시켜 버리는 문제가 이어지고 가운데, <투카 앤 버티>는 정말 의외의 결과였다.
정말 독특하고 재미난 <투카 앤 버티>를 이끄는 두 주인공은 작품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투카와 버티다. 큰부리새 투카는 자유로운 영혼의 대표 주자고, 노래새 버티는 소심한 현대 직장인의 모습으로 나온다. 둘은 서로 상극이지만 서로의 단점을 커버하고 채워주는 환상의 콤비이기도 하다.
<투카 앤 버티>는 예쁘고 아름다운 동화 이야기가 아니다. ‘어른들의 세계’가 지독하게 현실적으로 반영된 이야기다. 두 여성의 찐득한 우정은 물론 여성들이 겪는 성차별, 현대의 과도경쟁 사회를 살아가는 노동자들이 마주하는 차가운 노동 현실, 여성의 노동과 커리어에 대한 고민 등 공감할만한 소재들로 가득한 <투카 앤 버티>는 이 이야기들을 영리하게 코미디로 풀어낸다.
목소리 연기라 얼굴이 드러나진 않지만, 흑인 티퍼니 해디시와 아시아인 앨리 웡을 주인공으로 썼다는 점도 주목할 만한 포인트다. 게스트 캐릭터들도 마찬가지. 거의 30년 만에 아시아인들로 채워진 헐리우드 영화로 주목을 받았던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존 추 감독, 2018)의 아콰피나, 레즈비언 코메디언/배우 티그 노타로와 제인 린치, 트랜스젠더 배우 레번 콕스 등 다양한 목소리들이 선물처럼 등장한다. 그리고 아콰피나가 연기하는 버티의 ‘가슴’은 잊혀지지 않는 캐릭터 중 하나다.
의미 있는 시도들이 가득한 작품이고, 무엇보다 정말 재미있다. 이 시리즈를 종결시켜 버린 건 넷플릭스의 큰 과오로 기록되리라 의심치 않는다. 10개의 에피소드밖에 없다는 게 너무 아쉽지만, 또 그렇기에 금방 볼 수 있다는 점이 서글픈 장점이다.
#종교 영화에 대한 선입견을 버리고 수녀들과 노래를!
영화 <홀리캠프>(하비에르 엠브로씨, 하비에르 칼보 감독, 2017)
“17살인 청소년 수사나와 마리아는 어렸을 때부터 단짝 친구로 ‘가톨릭 청소년 여름 캠프’에서 여름을 보내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마리아는 휘트니 휴스턴 노래를 부르며 나타난 하느님을 만난다. 하지만 왜인지 마리아의 눈에만 보이고. 여름 캠프를 운영하는 수녀원엔 새로운 원장인 베르나르다 수녀원장이 등장한다.”
스페인에서 제작된 뮤지컬인 <라 야마다>(la llamada, ‘부름’이라는 의미로 영화 원제도 같다)가 원작인 이 영화는, 경건하고 조용할 것 같은 <홀리캠프>라는 이름과 달리 굉장히 펑키한 작품이다. 원작이 뮤지컬이다 보니 영화에서도 음악과 노래가 중요한 요소로 쓰이며, 그런 점이 전체적인 분위기를 발랄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음악과 노래는 종교 음악이 아니다! 반짝이 양복을 입고 휘트니 휴스턴 노래를 부르는 하느님이 나오고, 수녀들도 (스페인 음악을 잘 모르지만) 대중음악으로 들리는 노래를 부른다.
음악이 영화의 기본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는 역할을 하지만, 톡톡 튀는 캐릭터들이 사실 이 영화의 핵심이다. “너넨 너희가 쿨하다고 생각하겠지만 여기선 내가 쿨해!”라고 외치는 수녀원장은 고지식할 것 같으면서도 후배 수녀를 격려할 줄 알고, 아이들을 엄격하게 대하는 듯해도 이들과 소통하고자 한다.
수사나가 사랑에 빠지는 밀라그로스 수녀는 아직 자신의 일을 확신하지 못하고 헤매기도 하지만 성장해가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밀라그로스 수녀와 수사나의 귀여운 케미(조합)은 영화의 포인트이기도 하다. 종교와 퀴어의 비극적 조합은 널리 알려진 클리셰 중 하나인데 이 영화에선 그렇게 그려지지 않는다. 이 자체만으로도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마리아가 하느님을 봤고 스페인의 이 작은 수녀원에 하느님이 나타났다는 얘기는 예상대로 바티칸에선 완전 무시를 당하지만, 두 수녀가 마리아의 이야기를 허무맹랑한 소리로 넘기지 않고 마지막까지 함께 고군분투하는 장면도 꽤 귀엽다.
개인적으론 휘트니 휴스턴 노래를 부르는 하느님 역도 흑인 여성 배우가 맡았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있다. 그랬다면 너무 반발이 심했을까?! 종종 머릿속에 물음표가 뜨는 장면이 있기도 했고 마리아와 수사나의 마지막 의상은 ‘왜 하필 저런 옷을…’하며 ‘뜨악’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이 영화를 추천하는 건, 묵직한 주제를 바탕으로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이야기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다양한 연령대의 여성 서사를 볼 수 있다는 점도 장점이다. 자주 접할 수 없는 스페인 영화라는 점도. 거기다 뜨거운 여름 이야기를 겨울에 보는 묘미도 있으니까!
#코미디에 대한 당신의 생각을 완전히 바꿔줄 쇼
<해나 개즈비: 나의 이야기>(해나 개즈비 제작, 2018)
오래전부터 이 작품을 소개하고 싶었는데 적당한 기회를 찾지 못했다. ‘빨리 더 많은 사람이 <해나 개즈비: 나의 이야기>를 봐야 한다…’는 생각을 마음의 짐처럼 간직하고 있던 차라, 이 작품을 드디어 소개한다는 것 자체가 무엇보다도 즐겁다!
단언컨대, 내가 코미디를 보는 시선은 해나 개즈비의 스탠드업 코미디 쇼 <해나 개즈비: 나의 이야기>를 보기 전과 후로 나뉜다. 코미디란, 개그란, 농담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기존의 생각을 통째로 흔들었다. 또, 제대로 말할 수 없었지만 무언가 마음에 거슬렸던 부분을 시원하게 긁어냈다.
스스로 ‘노잼’(재미없는) 인간이라 생각하며 개그와 친해지지 못했던 이유, 웃겨야 혹은 웃어야 한다는 압박감에 때때로 시달렸던 이유, 그리고 ‘웃었던 순간들’의 이유. 고민하면서도 찾지 못했던 답을 해나 개즈비는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수많은 관중 앞에서 해나는 자신의 언어인 코미디를 통해 차근차근 이야기를 풀어간다.
동성애 혐오(호모포비아)가 심한 호주의 보수적 동네에서 자란 해나가 레즈비언으로 살아가기 위해 익혔던 자학의 농담 기술 고백, 그리고 더이상 그런 개그는 ‘나 자신 그리고 나와 비슷한 사람들을 위해서 하지 않겠다’는 선언으로 시작하는 <해나 개즈비: 나의 이야기>는 성별 이분법이라는 허상, 성폭력 트라우마, 예술의 가치까지 언급한다.
‘내가 언제 이렇게 풍성하고 진실되고 우아함을 잃지 않는 코미디를 본 적이 있었던가?’ 웃다가 울다가 점점 빨려 들어가게 되는 그의 입담엔 그야말로 출구가 없다.
<해나 개즈비: 나의 이야기> 중
거기다 “코미디를 그만둬야 할 것 같다”며 현재 코미디가 가진 많은 문제점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그런 코미디라면 더이상 할 필요가 없다’고 얘기하는 단호한 모습은 또 얼마나 환상적이게 멋있는지. 나중에는 정말 목소리를 높여 화를 내기도 하는데, 그때 해나는 이렇게 말한다.
“이런 긴장이 조성됐지만 저는 웃음으로 끝내지 않을 거예요. 여러분 모두 이 긴장을 직접 느껴봐야 합니다. 이 고통은 소위 ‘비정상’인 사람들이 가슴에 묻고 사는 것이니까요.”
해나의 이 말은, 객석을 가득 채운 관중들에게 ‘당신이 오늘 어떤 이야기에 웃었는지 잘 생각해 보라’고 경고하는 것 같아 간담이 서늘해지기도 하면서, 한편으로 굉장히 통쾌하기도 했다. 해나의 이야기는 소위 ‘비정상’으로 취급받는 사람들에게 분명 큰 위안과 위로가 될 것이다.
사실 <해나 개즈비: 나의 이야기>를 정말 꼭 봐야 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농담은 농담일 뿐’, ‘장난은 장난일 뿐’, ‘개그는 개그일 뿐’이라는 말을 생각 없이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사람들이다. 스스로의 계몽을 위해 꼭 봤으면 좋겠다.
모든 농담에는 이야기가 있고 사람이 있다는 그의 말을 많은 이들이 기억하길 바란다. 올해도 수고한 자신을 토닥이며 <해나 개즈비: 나의 이야기>와 함께 연말을 보내시길. 그리고 내년에는 부디 어느 누군가만 웃을 수 있는 일이 아니라, 함께 웃을 수 있는 일이 많이 생기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박주연)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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