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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톱과의 대화’ 난민 여성들의 이야기

네일쌀롱, 손톱의 기억을 듣는다는 것


※ 페미니스트 연구자들이 발굴한 여성의 역사: 가시화되지 않았던 여성들의 자취와 기억을 공적 담론의 장으로 건져 올리는 여성사 쓰기. 이 연재는 한국여성재단 성평등사회조성사업 지원을 받아 진행됩니다.  <일다> 바로가기


<네일쌀롱> 보이지 않지만 말하고 있는 목소리


손톱만으로 말하는 존재를 상상할 수 있을까? 누군가 자신의 모습을 완전히 드러낼 수 없는 상황에서도 무엇인가를 말하고 싶어 할 때, 듣는 이는 과연 어떤 대화의 장을 통해 응답할 수 있을까? 그리고 부분적으로만 드러나는 누군가의 몸에서 ‘우리’는 무엇을 읽어낼 수 있을까?


여전히 작고 취약한 이미지로만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존재들이 있다면, 이들의 표현을 듣고 말할 방법을 찾을 수밖에 없다. ‘난민여성’의 이미지, 그것은 난민과 여성 그리고 수많은 억압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더 단단하게 비가시화된다. 그 안에는 다양한 소수성이 존재하지만 난민여성은 이 모든 억압의 합이 아니라 각각의 고유한 존재로 서 있다. 이들은 자신의 유일한 몸을 어떻게 드러낼 수 있으며, ‘우리’에게는 어떤 듣기의 방식이 필요할까.


작아서 잘 보이지 않지만 분명 말하고 있는 존재에 눈과 귀를 모으며 이 글은 ‘손톱의 목소리’에 주목해 보고자 한다. 그것은 난민여성의 손톱을 손질해주며 이들이 살아온 삶에 대한 대화를 나누는 유튜브 <네일쌀롱>이다.


▲ 더 나은 이야기 시즌 1: Lynn’s 네일쌀롱 대문이미지 ©공익인권법센터 어필APIL 네일쌀롱 유튜브 


목소리의 주인을 대상화시키지 않으려는 하나의 시도로서, 이 영상은 ‘목소리-이미지’가 된다. 미술이나 영화라는 장르화된 시각적 재현방식을 벗어나 자신을 노출할 수 없는 자들이 목소리를 낼 때 나타나는 대화의 이미지. ‘손톱의 목소리’는 정형화된 난민여성의 이미지와는 별개로 개별적인 그/녀들의 삶을 증명하고 표현한다. 난민여성에 대한 재현이 유튜브라는 시각문화로 시도될 때 나타나는 한순간의 반짝임. 기대와 질문을 품고 이 영상에 접속해보자.


난민여성과 네일쌀롱: 허락된 손톱


공익법센터 어필(APIL)에서 제작하는 유튜브 콘텐츠 <네일쌀롱>(정식명칭은 [더 나은 이야기 시즌 1: Lynn’s 네일쌀롱] ‘난민 여성분들이 네일을 받으며 털어놓는 솔직하고 담백한 이야기’이다)은 난민여성이 활동가 Lynn에게 손톱을 손질받으며 대화를 나누는 친밀하고 가벼운 수다의 공간이다.


그동안 미얀마에서 온 S, 파키스탄에서 온 S, 요르단에서 온 중학생 L, 시리아에서 온 리함(가명), 우간다에서 온 레베카, 예멘에서 온 자밀라, 이집트에서 온 미야(가명)가 네일쌀롱을 다녀갔다.


여성들 대다수는 영상에서 가명으로 등장하고 얼굴이 공개되지 않는다. 중학생, 대학생, 10대, 20대, 30대, 비혼에서부터 기혼 여성까지 다양한 이들의 작거나 큰, 길거나 짧은, 연한 혹은 진한 피부색의 손이 화면의 중앙에 등장할 뿐이다.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손과 목소리로 우리는 이들의 성격과 표정을 상상한다.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어려운 상황을 말할 때는 목소리가 다소 침체되어있고, 현재의 나아진 점이나 미래의 기대하는 점을 말할 때의 목소리는 밝고 기대에 차 있다는 것도 느낄 수 있다. 이들의 이야기는 주로 난민이 되기 전의 삶과 어떻게 난민이 되었는지에 대한 것, 난민이 되고 난 후에 달라진 삶, 한국에서의 생활, 앞으로 하고 싶은 것 혹은 꿈에 대한 생각들이다.


레몬색 손톱의 S는 미얀마에서 온 소수민족 카친족이다. S는 고향에서 전쟁 때문에 가족들과 산에 들어가 살았을 때 밥을 짓기 위해 나무를 자르다가 손가락 끝이 잘렸다. 그래서 열 손가락 중 한 손가락의 손톱이 유난히 짧다. 반밖에 남지 않은 손톱이 이렇게 말한다. “열심히 살아온 손이죠. 예쁘진 않지만”(S).


매니큐어를 칠하기에 앞서 손톱을 손질하는 S의 큐티클을 제거하는 시간이 꽤 길다. 큐티클은 일종의 손톱 껍질이다. 손을 많이 쓸수록 많이 생기는 손톱 껍질이 제거되는 시간은 난민이 되기까지 그녀가 겪어온 시간을 의미할 것이다. 전쟁 때문에 한국에 오게 된 S는 얼마 전 난민 인정을 받았다. 그래서 인터뷰나 다큐멘터리 요청이 많이 오지만 S는 아직 자신을 노출하는 것이 두렵다고 말한다.


“저는 아직까지 (촬영할) 자신 없고 저는 안전하지만 가족이 아직 거기 위험하게 살기 때문에. 겁이 많다기보다 무서운 거 어렸을 때부터 있으면 그 사람은 평생 그렇게 (무서워) 하는 것 같아요. 맨날 두려운 것이 커서도 없어지지 않더라구요. 자신감이 없어지고.”(S)


▲레몬색과 글리터와 큐빅장식을 좋아하는 듯한 S의 손톱 ©네일쌀롱 유튜브 


이러한 정치적·종교적 박해의 사유는 분명 난민이기 때문에 겪는 노출의 어려움이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난민여성이 목소리를 내기 힘든 이유 몇 가지를 더 추측해볼 수 있다. 레몬색 손톱의 S는 현재 한국에서 남편과 아들과 함께 살고 있다. 네일쌀롱에서 네일을 받은 대다수의 난민여성들이 이렇듯 남편 혹은 가족과 함께 산다. 본국과 다른 종교적·문화적 차이, 그리고 언어적·인종적 차별은 이들이 사회로 나오는 데 어려움을 겪고 가정에 고립되게 만드는 중요한 요인이다.


대부분의 난민 관련 시위와 미디어, 기자회견에 등장하는 난민남성들의 목소리 뒤에는 육아와 가사노동으로 가정에 있어야 하는, 관습과 종교의 이유로 남성의 허락 없이 자신의 신체를 드러내지 못하는 여성들의 목소리가 있다. 이 인터뷰는 얼굴을 드러내지 못하거나 드러내고 싶지 않아 하는 난민여성들이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도록 ‘손톱’을 얼굴 삼아 목소리를 내도록 하고 있다.


손톱을 손질하는 사람과 손톱을 손질받는 사람이 대화하는 이러한 가볍고 짧은 인터뷰 방식은 기존의 무겁고 딱딱한 인터뷰 방식과도 일면 다르다. 말하는 사람의 눈과 입만 쳐다보며 어떤 이야기가 나올지 집중하고 말을 뽑아내는 방식이 아니라, 이 자리의 목적이기도 한 ‘손톱’을 바라보며 묵묵히 듣는 방식인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듣기 위주’의 태도는 말하는 사람을 그가 놓인 상황으로 정형화시키거나 특별화하는 방향이 아닌, 그 사람의 평범함 그리고 삶의 연속성 속에서 여러 상황과 사건을 듣는 일상적인 대화를 만들어간다. 그것은 상대방을 향해 관심과 집중을 기울이면서도 그것을 신기하거나 유별난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으려는 조심스러운 마음이기도 하다.


허락되지 않은 손톱


하지만 네일쌀롱의 에피소드 중에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는 두려움 때문에 촬영이 중단된 편도 그대로 올라와 있다. 매니큐어 색을 고르고 조금 대화를 나누던 난민여성은 갑자기 어딘가로 전화를 걸며 자리를 뜬다. 정확한 이유를 알 수는 없으나 인터뷰를 하며 ‘난민 인정을 받고 난 뒤 어떤 기자가 기사를 잘못 써서 그것으로 인해 본국에서 박해를 받을 위험이 커졌다’라는 언급을 한 이후에 일어난 일이었다. 아마 질문에 대해 대답을 하며 떠오른 과거의 기억이 이런 자리를 갑자기 불편하게 생각하도록 한 것 같다고 활동가는 추측한다.


이 여성이 네일쌀롱을 떠난 이유는 이런 편안한 대화조차 이상하게 각색되어서 기사가 될지도 모른다는, 그리고 그것이 겨우 안정을 찾게 된 일상을 파괴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일 것이다.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지 경험한 바 있는 이들에게 그 두려움은 충분히 현실적이다. 그런 점에서 인터뷰는 늘 과거의 트라우마를 되살릴 위험을 안고 있다. 과거의 사건은 단지 과거 안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현재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 얼굴을 드러내지 않더라도 두려움은 여전히 목소리에 묻어있다.


또한 네일쌀롱의 영상들 안에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사실 난민여성들이 난민 신청을 하는 이유 중에는 분명 ‘젠더 박해’나 성폭력의 문제들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잘 말해지지 않고 실제로 난민 인정을 받을 때 박해의 사유가 되기 힘들다. 그렇기에 점점 더 말하기 힘들어지는 현실은 이런 이야기들이 손톱을 통해서도 좀처럼 드러나지 않게 한다. 말할 수 없는 이야기들을 듣기 위해서는 어떤 다른 자리가 마련되어야 할까. 이들의  목소리를 듣고 얼굴을 재현하는 방식이 달라지지 않는다면, 그리고 듣는 자들의 태도가 달라지지 않는다면 아마 두려운 목소리들은 계속해서 남게 될 것이다.


선택하는 손톱


분홍색 손톱의 미야는 자신이 오늘 네일을 받으러 간다고 하자 남편이 ‘당신 꿈이잖아, 꿈은 이루어진다’고 말했다고 한다. 누군가에게는 일상의 한 부분일 네일이 그녀에겐 ‘꿈’이다. 그리고 내일 있을 한국어 수업에서도 손톱을 자랑할 거라고 말하는 그녀는 매우 들떠 보인다. 손톱을 강조하는 과장된 손짓을 하며 네일쌀롱 현장을 웃게 만드는 미야의 모습은 그녀가 자신의 화려한 손톱에 매우 만족한다는 적극적인 표현이기도 하다.


▲분홍색과 하트무늬를 좋아하는 미야의 손톱 ©네일쌀롱 유튜브 


손톱은 몸의 가장 작은 부분이며 쉽게 거칠어지고 소모되는 부분이기도 하지만 그렇기에 깎아내고 새롭게 다시 만들어낼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렇듯 어느새인가 회복하는 동시에 어떻게든 노출될 수밖에 없는 신체 부위인 ‘손톱’을 꾸민다는 행위는 어떤 의미를 지닐까. 


“색깔이 정말 예쁘네요. 이 색깔은 심지어 더 예뻐요.”(미야)


난민여성들은 네일을 받기에 앞서 자신이 직접 원하는 색깔과 디자인을 골랐다. 자신을 꾸미고자 하는 욕망이 어떻게 몸의 가장 작은 부분에서 비집고 나오는지 보여주듯 그녀들의 변화한 손톱은 하나같이 화려하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여성의 몸을 꾸미는 행위가 꾸밈 ‘노동’의 부분으로 이야기되는 것 저편에는 몸을 드러내는 것이 선택이 아니라 허락 내지는 제약이 되는 사람들의 욕망도 있다. 누군가 꾸미지 않을 여성의 욕망을 외칠 때, 난민 여성이 말하는 꾸미고 싶은 욕망은 이것들과 다른 지점에 서 있다.


이를테면 성폭력의 위험을 피하고자 남성처럼 위장하고 한국에 몰래 와야 했던 여성들에게 자신을 드러낸다는 것이 어떤 의미일지를 한번 생각해보자. 자신이 생각하는 아름다움의 기준으로 자신을 꾸며보고 싶다는 마음에는 더 많은 말들이 필요하다.


“바구니에/ 야채를 넣고/ 과일을 넣고/ 이만 원/ 계산대에 가보니/ 오만 원/ 과일 빼고/ 야채 빼고/ 참치는 놔두고/ 밥은 먹어야지/ 참치 고추장 참기름은/ 떨어지면 안 돼.”(‘꼭 사야 할 것’, 신경수)


민들레 장애인야학의 신경수 씨가 계산대에서 빼야 할 것을 고르면서 끝까지 지키는 몇 가지는 참치와 고추장, 참기름이다. 밥에 참치와 고추장, 참기름을 넣고 비벼 먹는 것을 좋아하는 그에게 이 세 가지 재료는 자신의 취향이자 “나의 음식”이다. 그냥 생존을 위해 먹는 똑같은 음식이 아니라 특별히 내가 좋아하고 내가 선택한 음식이다. 그것을 고병권은 “내가 ‘나’를 만나는 일”이라고 말한다. 겨우 음식 하나로 나를 성찰할 수 있냐고 되물을 수 있지만, 바로 그 작은 선택들이 모여서 ‘나’를 구성한다.(경향신문 2018년 4월 8일자, [고병권의 묵묵]「어느 탈시설 장애인의 ‘해방의 경제학’」 참조)


내가 원하는 장소와 내가 원하는 사람 앞에서 나의 맨 모습, 혹은 나의 가장 원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것이 허락이 아닌 선택이 되는 삶. 몸의 전부가 아닌 일부로서만 드러나며 솔직한 이야기를 꺼내놓을 수 있는 이들에게 그 작은 선택은 사소한 것이 아니라 매우 중요한 삶의 일부이기도 하다. 그것은 삶의 고단함과 안정적이지 못한 상황, 집과 가족이라는 소망 너머 계급, 인종, 성의 중층적인 억압 속에서 선택으로 고려해보지 못한 특별한 무언가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네일쌀롱 각각의 에피소드는 과거의 흔적을 지닌 맨손톱에서 시작하여 네일을 받으면서 변화하는 손톱의 모습까지를 보여주며 인터뷰를 맺는다. 미얀마에서 온 S의 반밖에 안 남은 손톱, 이집트에서 온 미야의 긴 손톱, 요르단에서 온 L의 작고 가는 손톱은 점차 큐빅, 글리터 장식의 레몬색 손톱, 하트 장식으로 포인트를 준 분홍색 손톱, 보석 장식처럼 화려한 보라색 손톱 등 다 다른 색과 디자인으로 변해간다.


서로 다른 손톱 모양처럼 난민여성들의 이야기 또한 다 달랐다. 과거에는 난민이 아니었지만, 현재 난민이 된 S, 레베카, 자밀라, 미야, 리함 이라는 사람의 존재를 느끼게 해주는 과정은 손톱이 손질되고 색이 입혀지고 변화하는 모습을 보는 과정과 겹쳐 보인다. 목소리를 경청하며 손톱이라는 아주 작은 신체의 부분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시간의 경험은 부분적으로만 드러나는 누군가의 삶을 상상하게 해주었다.


현재는 여전히 과거에 발목 잡혀 있지만, 또한 여전히 미래를 기대하고 현재를 살아가는 이에게 삶은 변화의 과정이다. 그 속에서 이들은 단지 난민 여성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대학에서 언론학을 전공했고 이집트 현 정권에 반대하는 시위로 인해 정치적 박해를 받아 망명한 미야는 여전히 언론학을 더 공부하고 싶고 언어를 더 배우고 싶고 통번역 쪽으로 일하고 싶다고 말한다. 나도 지금 이 자리에서 내 말을 통역해주는 ‘당신처럼’, 나와 나이가 비슷한 여성인 ‘당신처럼’, 내 능력을 활용해서 일하고 싶다고 미야는 말한다.


자신이 원하는 삶의 모습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이 장면은 난민여성들이 멈춰있는 시간 속에 사는 것이 아니라는 당연한 사실을 일깨운다. 미야는 이 부분을 언급하며 실제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당신처럼요.” 이때 당신이라는 이인칭 대명사는 스크린을 넘어 듣는 이를 향한다.


▲네일을 받는 리함의 손과 네일을 해주는 Lynn의 두 손이 맞잡은 순간 ©네일쌀롱 유튜브 


손톱의 기억


손가락 하나가 자꾸만 사라지는 인물이 있다. 그때 손가락은 희한하게도 늘 “미래가 아닌 과거로만 간다.” 마치 과거를 기억하는 것처럼 “손가락은 언제나 조금 곤란한 시간대로 사라”진다. “과거로 과거로” 사라지는 손은 남겨진 몸과는 별개로 자신만의 기억을 지닌 채 다른 손가락보다 조금씩 더 늙어간다.


정세랑의 소설집 <목소리를 드릴게요>의 첫 번째 이야기이다. 이 소설의 말미에는 어느 날 손가락이 사라지지 않도록 해주는 연고가 발명되는데 하필이면 투명 매니큐어처럼 생겼다. 과거로 돌아가고 싶지 않을 때, 연고를 바르듯이 매니큐어를 바르는 사람을 상상해본다.


손과 손가락, 그리고 손톱이 들려주는 이야기. 우리는 대화할 때 보통 목소리가 나오는 누군가의 입을 보며 말하고 듣는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 순간 몸은 온몸으로, 눈으로, 손으로 각각 말하고 있다. 그렇게 손은 손이 경험한 것을 기억하고 말한다.


난민여성이 인터뷰하며 자신의 과거를 떠올릴 때마다 우리는 그 손에서 전쟁 때 숲에서 나무를 베던 손, 밥을 짓던 손, 가족과 작별 인사를 하던 손, 난민신청서를 작성하던 손을 상상한다. 거칠어지고 베이고 굳은살이 생긴 손의 서사. 얼굴을 드러낼 수 없는 이들을 위해 손이 남긴 기억을 목소리와 함께 듣는 반짝이는 순간을 이 영상은 만들고 있다.


손톱을 손질하는 사람의 두 손과 손톱을 손질받는 사람의 두 손을 가만히 지켜보다 보니 영상 속 손들이 서로에게 기대고 서로를 붙잡고 서로를 쓰다듬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손과 손이 만나는 순간들을 통해 촉각이라는 감각과 세계의 이해를 연결시킨 하룬 파로키의 <손의 표현>(1997)이 떠오른다.


손의 촉각과 세계의 이해를 연결시킨 하룬 파로키 작 <손의 표현>(1997) 중

사실 무언가를 ‘이해하다’라는 뜻으로 쓰이는 ‘파악(把握)하다’라는 말의 한자어에는 ‘손으로 잡아 쥔다’라는 뜻이 있다. ‘이해하다’라는 뜻의 영어 표현인 comprehend, grasp에도 ‘두 손으로 무언가를 꽉 잡다’라는 의미가 들어있다. 이해한다는 말에는 어원적으로 손이 들어있다. 손으로 무언가를 만지면서 느껴보려는 마음, 손을 잡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어보려는 마음. 이해의 과정은 이렇듯 손과 만난다.


손톱을 얼굴 삼아 나누는 대화에서 처음 만나는 사람의 손을 잡으며 난민여성과 활동가의 손은 미세하게 떨렸을지 모른다. 손톱을 손질하는 짧은 시간을 거치며 두 손은 조금씩 온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그 맞잡은 두 손의 떨림, 촉감, 온기는 스크린을 넘어 서서히 퍼져나간다. 손톱을 꾸미는 그 자리에는 앉아있지 않았지만, 나에겐 낯선 누군가의 손을 가까이에서 오래 들여다본 경험이 남았다.


과거를 말할 때 잠시 흔들리는 목소리와 움찔하는 손가락의 떨림, 네일을 마친 후 달라진 손톱을 이리저리 움직여보는 들뜬 손짓을 나는 ‘보았다’. 그때 손은 이미지이면서 목소리가 되어 촉각으로 시각으로 청각으로 ‘기록된다’. 미얀마에서 온 S와 파키스탄에서 온 S, 요르단에서 온 L, 시리아에서 온 리함, 우간다에서 온 레베카, 예멘에서 온 자밀라, 이집트에서 온 미야. 이제 나는 이들의 손을, 손톱의 이야기를 ‘기억한다’.


필자 소개: 전솔비. 문화연구자. 차이와 경계, 정체성의 문제를 중심으로 동시대 시각/영상 문화를 연구하며 글을 쓰고 전시를 만들고 있다. 기획한 전시로는 <Outskirts-경계의 외부자들>, <1인실의 세계> 등이 있으며, 현재는 소수자 운동과 시각문화가 주고받는 언어에 대한 고민 속에서 <난민x현장>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고 지속적으로 쓰기 위해 좋은 질문들을 찾는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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