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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일본으로…조선인 차별과 싸우며 살아내다

[페미니즘으로 보는 식민/분단/이주] 조선인이자 일본인 김연순의 여정(하)


※ 일다는 식민-전쟁-분단의 역사와 구조를 여성주의 시각으로 재구성하는 기획기사를 연재합니다. 다양한 페미니스트 연구자들이 식민지배와 내전, 휴전으로 이어진 한국 현대사가 낳은 ‘여성의 이동’, 군 성폭력과 여성동원 등의 젠더 이슈를 제기하고, 사회구조와 여성 주체들 사이의 긴장을 드러내며 전쟁/분단/이주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합니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바로가기


(편에 이어서중국에서 충북 제천으로 온 후, 외할아버지는 가난한 아이들의 교육기관인 학술강습회 대용 교원을 했다. 할아버지가 남긴 사진 앨범에는 “제천읍 신백 학술강습회 졸업기념 1945년 3월 20일”이 쓰여 있고 학생과 함께 외할아버지가 찍힌 사진이 남아 있다. 자유주의자였던 외할아버지는 조선말로 수업을 하다 교장과 대립한 것 같다.


우리 어머니는 일본인 학교에 다녔지만, 학교에서는 ‘조선인’이라는 말을 듣고 마을에 돌아오면 ‘일본인’이라는 말을 들으며 친구가 없었다고 한다.


충북 제천읍 신백 학술강습회 졸업사진에서 앞 열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외할아버지다.


광복 후, 일본으로 귀국명령 받은 남편과 이별하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패전과 동시에 조선은 광복을 맞이했다. 미 군정은 조선에 있는 일본인들에게 송환 명령을 내렸다. 공식적으로 미 군정에 의한 일본인 송환사업은 1946년 2~3월에 끝나지만, 할아버지의 수첩에는 “1946년 4월 14일 경찰에게 귀국명령을 받음”이라고 쓰여 있다. 외할아버지가 끝까지 가족과 함께 조선에 잔류하길 원하셨음을 알 수 있다.


외할아버지는 조선을 떠나며 ‘일본에서 생활 전망이 생기면 편지를 보내겠다’고 하셨던 것 같다. 외할머니는 호적상으로는 일본인이었지만, 미 군정의 잔류 가능 조건에 따르면 한국병합으로 일본인이 된 조선인은 강제 송환에는 포함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조선에 남을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할아버지는 귀국명령을 받기 전 우선 제천의 여관에 수용됐다. 어머니의 수기와 외할머니의 증언을 통해, 그때 외할아버지만 특별대접을 받았던 것 같다. 외할아버지가 조선말로 수업하는 등 조선의 민족성을 존중한 것이나, 아내가 조선인이라는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4월 18일 청주에서 트럭에 실린 할아버지는 국민복에 보따리를 짊어지고 할머니는 도로에 주저앉아 울었다고 한다.


다시 생계의 기둥을 잃은 어머니들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했던 것 같다. 강도 사건이 다발하는 등 불안정하고 혼란한 광복 직후 조선의 상황에서 외할머니의 바느질만으로 가계를 지탱하기는 힘들었던 것이다. 기르던 애견을 식용으로 팔아야 했던 슬픈 이야기를 어머니에게 들은 적이 있다.


여자 홀몸으로 외할머니가 딸과 엄마(내 증조모)를 먹여 살리는 일은 예삿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경제적 가난뿐만 아니라 ‘일본인과 결혼한 여성’에 대한 민족적 반발도 적지 않았던 것 같다. 어머니가 다니던 일본인 학교는 광복을 기해 일본인 학교였던 흔적을 모조리 지워버렸음을 연구 과정에서 볼 수 있었다.


일본에 송환된 외할아버지에게 연락이 온 것은 3개월 후였지만 어머니는 1년 후로 착각할 정도로 길게 느꼈다. 외할머니의 증언에도 “‘편지를 보낼게’라고 했는데 편지도 안 와서 다른 여자와 함께했냐고 한때는 포기했었다”고 되어있다. 당시 어머니는 한글을 배우러 갔는데, 외할머니가 외할아버지와의 상봉을 포기하고 어머니를 조선인으로 키우려고 했던 것일까? 어머니는 한글을 재미있게 공부했다고 한다. ‘무늬만 일본인’이라는 짐이 없어져서일까.


일본으로 귀국한 외할아버지는 귀환선 안에서 알게 된 사람과 함께 오카야마에서 시미즈구미 하도급 토목회사에서 일하게 되었다. 후에 나의 아버지가 외할아버지에게 들은 바로는, 외할아버지는 일본으로 건너간 후 외할머니나 어머니와의 관계를 청산할까 망설였던 적도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결국 외할아버지는 조선에 있는 처자에게 자신이 있는 곳 주소를 알려주고 일본에 오라고 편지를 보냈다. 거기에는 호적초본이 첨부되었고 “일본에는 냄비, 가마솥도 없으니 가져오라”고 적혀있었다고 한다.


가진 짐을 머리에 이고 등에 짊어진 외할머니와 어머니는 1946년 8월 14일 부산항을 떠나 일본으로 향했다. 딸과 손녀를 배웅 나왔던 증조할머니(단옥)와 이승에서의 이별이자 외할머니의 삶의 여정 속 세 번째 결단이었다. 증조할머니 69세, 외할머니 33세, 어머니 12세 때였다.


일본 주고쿠 지방의 오카야마(岡山)에서 세 사람


귀환선을 탄 외할머니에게 일본은 신세계였는가?


콜레라 소동에 휘말리는 등 귀환선 생활은 비참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당시를 생각하며 “일본의 산을 처음 봤을 때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일본은 아름다운 나라라고 느꼈어”라고 하셨다. 어머니에게 일본은 가난의 고통과 ‘친일’이란 꼬리표에서 벗어나 살아남을 수 있는 신천지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패전 후의 일본 사회로 들어가 또 다른 갈등에 휩쓸렸을 뿐이다. 생전 외할머니와 어머니가 보여주었던 끈질긴 생활력과 강인함은 일본 사회의 조선인 차별의 산물일 지도 모른다.


영어를 할 수 있었던 외할아버지는 진주군(연합 점령군) 관련 일을 맡아 하셨고, 거기서 받은 밀가루 등으로 외할머니가 찐빵이나 라면을 만들어 팔았다고 한다. 처음에는 외할아버지가 포장마차를 끌고 외할머니는 그 뒤에서 밀고 다녔다고 한다. 이런 노동이 익숙하지 못한 외할머니는 뒤에서 누군가에게 몽둥이로 얻어맞는 기분이었다고 회상하셨다.


그러나 이윽고 두 사람은 작은 돈을 모아 시작한 고깃집이 번창해서 생활도 편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인 차별은 여전히 따라다닌 것 같다. 내가 어릴 적(1950년대) 벚꽃놀이 등에 나갈 때, 외할머니는 치마저고리를 입으시고 동포들과 노래를 부르고 춤도 추셨다. 이웃들은 외할머니가 조선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할머니의 친구들은 모두 조선인이었다. 그리고 어머니는 친구가 적은 사람이었다.


평소엔 별일 없었지만 뭔가 이해관계가 생기면 사달이 났다. 토지 매매나 등기의 문제로 지주나 이웃에게 노골적으로 차별받은 이야기, 외할머니가 키우던 강아지를 잠시 데려간 동네 아저씨가 돌려주지 않아서 돌려달라고 하자 “조선인 주제에!”라며 무시했다는 이야기도 들은 적이 있다.


내가 가장 확실히 기억하는 것은 나한테 이웃집 아이가 “조센진!”이라고 말해서 화가 난 할머니가 그 아이 집에 “조센진이 어디가 나쁘냐!”며 호통을 치러 갔던 일이다. 나에게도 손주가 있는데,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손주가 그런 일을 당한다는 것은 자신이 차별받는 것보다 수백 배, 수천 배 얼마나 괴로운 일이 아니었을까.


그러한 일본 사회 속의 조선인 차별과 싸우면서, 바람을 피우고 가출을 반복하는 외할아버지를 돌보면서 외할머니는 일본 사회 속에서 씩씩하게 살아가셨다.


기모노를 입은 외할머니


외할머니는 조선인에 대한 일본 사회의 (민족적) 차별 속에서 잘 살아남는 법을 터득했다. 차별에 의한 억압을 피하려는 심리적 기제로서의 ‘일본인화’다. 당시는 조선인 차별이 노골적인 형태로 나타나 휩쓸렸던 시대다. 차별 때문에 자신이 조선인임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있었다. 외할머니는 때로 “나는 일본인이다”라고 하셨다. 일본 남자와 결혼해 일본 국적을 가진 일본인이라는 뜻이기도 했지만, 거기에는 다른 의미도 있었다. 피차별 대상인 조선인 일반과 자신을 분리하며, 자신을 개별화함으로써 무의식으로 민족적 갈등을 벗어나려는 기제가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자신을 다른 조선인과 분리하고 차별의 이중구조(자신이 피차별 입장에 있으면서도 일본인으로서 조선인을 차별하는 의미)에 의거하여 갈등을 극복하려 한 것은 외할머니로서는 살아가는 지혜였을지도 모른다. 외할머니가 생전에 “내가 죽으면 이것을 입혀줘”라며 준비한 수의는 포목 가게에 주문해서 만든 일본 기모노 수의와 자신이 꿰맨 조선풍의 모자와 버선이었다. 외할머니의 마지막 여정은 일본과 조선을 잘 아우르는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조선문화공연을 하는 나를 본 외할머니의 눈물


1994년 나와 아들은 조선문화공연에 출연한 적이 있다. 아들은 사물놀이 북을 쳤고 나는 한복을 입고 조선 노래를 불렀다. 관중석의 외할머니와 어머니는 울고 계셨다. 그 눈물은 디아스포라(흩어진 사람들, 본토를 떠나 타국에서 살아가는 집단)의 길을 걸어온 회고의 눈물인 동시에, 차세대들을 위한 희망의 눈물이었을 것이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부터 나는 교사를 하면서 시민활동으로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자 지원 활동 및 한일 시민교류를 해 왔다. 외할머니는 ‘위안부’ 피해자인 이용수 할머니나 김순덕 할머니, 재일교포 1세이고 한센병 회복자인 김태구 할아버지 등과 만난 적이 있다. 그전까지 외할머니의 삶이 완행열차를 탄 여행이었다면, 인생 후반부는 신칸센을 탄 것 같았을 것이다.


외할머니 시대에 여성의 인생은 유교 도덕에 묶여 있고 외할아버지와 결혼해도 외할머니는 차별과 계급적인 갈등 속에서 해방되지 않았다. 외할머니는, 그런 가족사를 이어받은 손녀인 내가 당신이 조선인임을 당당하게 공개하고 활동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외할머니 시대는 부정적인 의미로 인식된 민족성이 지금 나에게는 긍정적인 키워드가 되었다. 이 가치관의 대 전환은 외할머니에게서 신칸센을 탄 것처럼 어지러운 변화였을 것이다. 내가 다시 한-일을 잇기 위한 활동을 하고 있다는 것이 외할머니와 어머니는 자랑스러웠을 것 같다.


활터에서. 외할머니의 모습

나는 지금 한국 성공회대학교에 유학하면서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를 다룬 김금숙 작가의 만화 《풀》(김금숙, 보리, 2017)의 일본어 번역 출판 작업 중이다. 외할머니 시절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여행 스케줄이 속속 채워지고 있다. 앞으로도 계속 초특급 꿈의 열차를 타자.


지난 2019년 12월 7일 나와 아들은 제천에 사시는 친척과 함께 외할머니의 고향 청풍호를 찾았다.

“할머니가 분명 하늘나라에서 기뻐하실 거야.” 아들에게 말했다.

청풍의 산도 물도 조용했다.


쓰즈끼 스미에. 1952년생. 히로시마현 내에서 중학교 교사로 평화인권교육을 했다. 인권을 기초로 한 성교육의 내용으로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를 다뤘다. 시민활동으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을 지원하는 활동(관부재판을 지원하는 후쿠야마 연락회 대표 등)을 해왔다. 2013년 연세대학교 어학당에서 본격적으로 한국말을 배우고 2016년 성공회대학 NGO대학원에 입학했다. 2019년부터 사회학부 박사과정에 재학 중.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옥선 할머니의 생애사를 다룬 만화 『풀』의 일본어 출판(1월 말 예정)을 준비하고 있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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