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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을 매개하는 몸, 그 기억에 담긴 역사

[페미니즘으로 보는 식민/분단/이주] 어느 재일여성 무용수의 삶


※ 일다는 식민-전쟁-분단의 역사와 구조를 여성주의 시각으로 재구성하는 기획기사를 연재합니다. 다양한 페미니스트 연구자들이 식민지배와 내전, 휴전으로 이어진 한국 현대사가 낳은 ‘여성의 이동’, 군 성폭력과 여성동원 등의 젠더 이슈를 제기하고, 사회구조와 여성 주체들 사이의 긴장을 드러내며 전쟁/분단/이주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합니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바로가기


“몸은 그 자체가 일종의 매체라고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심리적, 정신적 기억 과정들이 신경으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체세포로도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몸은 습관화를 통해 기억을 고정하고 정열의 힘을 통해 그것을 강화한다.” (알라이다 아스만, 『기억의 공간: 문화적 기억의 형식과 변천』 그린비, 2011)


오사카의 조선인 여성들 사이에서 배운 ‘크리올’ 언어


1948년생 김영자(가명) 씨는 재일조선인 2세 여성이다. 영자 씨의 부모는 1930년대에 제주 한림에서 밀항선을 타고 일본 야마구치현에 있는 항구도시 시모노세키로 건너간 후, 각지에서 일을 하다가 오사카 이쿠노에 자리를 잡았다. 당시 ‘동양의 맨체스터’로 불릴 정도로 아시아 최대의 공업 도시로 발전한 오사카는 큐슈, 오키나와, 조선 등지에서 비숙련노동자들이 유입하여 대규모 노동시장을 형성하고 있었다.


어린 영자가 살았던 지역에는 신사복 공장이 많았다. 많은 조선인 여성들이 재봉 ‘마도메’(미싱 제봉 작업 후 손으로 하는 옷마무리) 일을 담당했다. 특히 어머니는 손재주가 좋아서 공장 세 곳의 작업을 맡아 집에는 늘 일거리가 쌓여있었다. 속옷 차림의 어머니가 솜털이 날아다니는 다다미방에서 고향 출신 아주머니들과 함께 마도메 작업을 하는 모습은 영자의 삶의 원풍경이다.


양장은 일본사람보다 조선사람들이 다 잘했어. 역시 저고리를 집에서 다 작업했으니까 기술이 있었지. 아줌마들이 ‘마도메’ 일을 할 때는 그야말로 속옷 차림으로 다다미 위에서 수다 떨면서 작업하는 거야… 학교에서 돌아오면 마도메 일거리가 이렇게 쌓여있어. 어머니도 자야 하니까 나도 같이 손가락에 가락장갑 끼고 다 배웠어. 단추 끼는 것부터 시작해서. 웬만한 옷은 다 만들 수 있게 되어버렸어.


영자는 3명의 오빠들과 2명의 동생들 사이에서 어려서부터 온갖 살림을 떠맡아야 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영자 씨는 학교를 그만두었다. 일본에서 자라면서 “일본어도 제대로 못 배웠다”는 것이 영자의 콤플렉스였다. 그에게 학교에서의 공부는 늘 사치였다. 영자에게는 다다미 위에서 배운 동네 아주머니들의 수다, 즉 생활 속에서 배운 제주말이 유일하게 몸에 밴 언어였다. “아이고 에이꼬, 오가상 집에 아루까~” “오가양 이에 아루요~” 제주말과 오사카말이 섞인 크리올(creole) 언어야말로 영자에게 조선말이자 일본말이었다.


1960년대 오사카 조선인 부락. 출처: 『写真集猪飼野‐追憶の1960年代』(新幹社, 2003)  ©曺智鉉


해방의 공간으로 기억되는 조선중학교 시절


일만 하던 영자의 생활이 변하기 시작한 것은 중학교 때부터였다. 그를 딱하게 바라본 어느 교사가 조선학교에 다닐 것을 권유했다. 집에서 떨어진 조선중학교를 영자 씨는 남들처럼 버스를 타지 않고 걸어서 통학했다. 중학교 3년간의 조선학교 시절, 영자는 집안의 돈 걱정과 일본 아이들의 따돌림 없이 처음으로 자신의 욕망을 펼치기 시작했다.


조선중학교에는 반 인원 40명에 12반까지 학생들이 있었다. 그리고 출신 초등학교에 따라 조선반/일본반으로 나눠졌다. 재일조선인들 중에는 식민지 시기에 일본으로 이주한 사람들뿐 아니라, 해방 후 남한의 국가 폭력과 전쟁의 현장에서 피란을 온 사람들도 상당수 포함되었다. 오사카에는 “사돈의 팔촌까지” 연고 관계를 따라 고향 사람들이 다 모여들었다.(권혁태, 이정은, 조경희 엮음, 『주권의 야만: 밀항, 수용소, 재일조선인』 한울, 2017, 제4장) 밀항으로 건너온 학생까지 포함하면 오사카의 조선학교는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아이들이 모인 카오스적 공간이었다. 같은 반에는 김영자가 3명씩 있었다.


조선학교에 학생 수가 많았던 것은 밀항자들의 증가 때문만은 아니었다. 1950년대 중후반 조선학교를 둘러싼 환경에는 연이은 변화가 있었다. 1955년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이하 총련,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소속감을 갖는 재일조선인 조직)가 결성된 이후 재일조선인들 사이에서 귀국운동(공식적으로는 1959년부터 1984년까지 9만 명 이상이 이북으로 귀국함)이 시작되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가는 귀국선이 출항하는 모습. BBC코리아 http://www.bbc.com/korean/news-50755513     ©적십자국제위원회아카이브 ICRC ARCHIV


새로운 민족운동의 고조와 귀국의 열망 속에서 1960년대 조선학교 취학자 수는 점점 증가했다.(배지원, 조경희 엮음, 『재일조선인과 조선학교: 투쟁의 시간, 삶의 공간』 선인, 2017, 제1장) 한국전쟁 시기에 조선학교에 입학한 영자의 선배 순자의 경우, 귀국사업으로 이북으로 간 동창생들과의 아픈 이별의 기억이 선명하다. 이에 비해 오사카의 조선인 부락에서 살다가 조선학교에 편입한 영자에게는 귀국사업과 같은 공식적 사건은 중요한 기억이 아니다. 그에게 새로 입학한 조선학교는 정치적이기보다는 상대적으로 자유롭고 해방적인 공간으로 기억되고 있다.


“우리학교 가서 제대로 된 우리말 배우게 되고, 무용에 눈을 떴어요.”


춤으로 세상과 만나다


영자 이야기의 중심에는 조선무용과의 만남이 있다. 원래 운동을 잘하고 몸이 유연했던 영자는 조선중학교에 들어가자마자 무용부에 스카웃되었다. 타고난 신체 능력과 남다른 노력으로 다른 무용수들을 금방 따라잡았다.


한편, 춤에 푹 빠져들면 들수록 집안일이 소홀해져 어머니가 심하게 반대했다. 어머니에게 혼이 나 밤새 울면서 빨래를 하다가도, 다음날은 학교에서 춤을 줬다. 어느 날 사람들 앞에서 춤을 추는 영자를 어머니는 빗자루를 들고 쫓아왔다. 어머니에게 춤이란 게이샤나 기생이 되기 위한 몸짓이었다.


그런데 사실 영자가 춤에 매료된 것은 원래 어머니의 모습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영자는 어머니를 따라 제주 고향 친목회에 종종 다녔다. 고향 소식과 함께 음식과 술을 나눠 먹는 친목회에서 영자의 어머니는 흥이 오르면 늘 춤을 췄다. 일본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영자에게는 낯설고 이상한 춤이었다. 오히려 일본의 전통 축제인 마츠리 때마다 추던 일본식 ‘본오도리’(盆踊り, 음력 7월 15일 밤에 마을 주민들이 모여 추는 윤무)라면 자신이 있었다.


조선학교에 가보니까 모두가 엄마가 췄던 그 ‘이상한 춤’을 자랑스럽게 추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영자의 생활세계 속 가치체계의 전환이었다. 작은 손동작과 안짱걸음으로 추는 단순한 ‘본오도리’가 좁고 은밀한 영자의 삶을 상징했다면, 조선무용의 다이내믹한 동작은 영자의 정열을 발산시켜 몸을 해방하게 했다. 이 몸짓의 변환과 몸의 기억은 영자 이야기의 핵심을 구성한다. 조선무용은 어머니의 모습으로 상징되는 가난과 노동, 무학과 고달픔으로 가득한 영자의 생활세계를 풍부하고 가치 있는 것으로 바꾸는 결정적인 계기였다.


어머니도 친목회에서 술을 먹고 분위기가 오르면 춤을 췄는데, 그것이 예술이 된다고는 생각을 못 했던 거지. 내가 스트레칭하면 다리를 왜 그리 벌리냐, 다리를 올려서 뭘 보이려고 하냐고 난리였다. 게이샤나 스트리퍼와 비슷한 부류로 생각을 했다. 어머니도 그 당시는 예술단이라는 것이 뭔지도 모르고…


그런데 어머니가 어느 날 춤을 보러왔어요. 동네 아주머니들이 “에이꼬 가와이이, 언니 아이고 좋수다게” 라고 칭찬했더니 그때부터 어머니가 (내 춤을) 보러오기 시작했어. 여기저기 다니면서 춤을 췄는데, 그때부터는 어머니가 아무 말도 안 했다. 멀리까지도 보러왔다. 역시 동네 아주머니들이 칭찬해줬으니까.


1960년대 재일조선중앙예술단 무용. (출처: 임추자민족무용단 페이스북 페이지 https://facebook.com/imchujabuyoudan)


중앙예술단의 최연소 무용수로 데뷔하다


영자는 스스로 매료되었고 사람들에게 감흥을 안겨주는 무용을 계속 추구하기를 원했다. 어려서부터 생계와 집안일을 맡아온 영자에게 공부는 사치였고, 일본 사회에 적응하지 않고 멋대로 사는 오빠들을 보면서 공부에 대한 목표나 희망을 품기도 어려웠다. “말을 하지 않고 춤을 추는 것”이 훨씬 좋았다.


1960년대 재일조선인 운동에서도 예술운동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1955년 6월에 재일조선중앙예술단(이하 중앙예술단)이, 1959년 6월에는 재일본조선문학예술가동맹(이하 문예동)이 결성되었다. 이로써 동포 대중들의 지향성과 생활 정서를 고무하는 예술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오사카에도 문예동 지부 및 강습소가 있었다. 중학교 졸업 후 매일같이 창문 너머로 무용 강습을 보고 있던 영자는 문예동 사무원으로 일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조선무용을 배우기 시작했다. 낮에는 전화 담당, 밤에는 춤을 추는 나날이 영자의 청춘이었다. 학교에서 배운 것과는 수준이 다른 예술단의 무용에 매료되어 급속히 각성되어 갔다.


나에게는 안가면 너무 아까운 곳이었다. 이런 세상이 있다고는 꿈에도 몰랐다. 조선학교 다닌 후부터 세상에 눈을 떴어. 춤이 나를 해방시켰다고 할까. 일본학교에서 칭찬받아 본 적이 없었다. (조선인) 차별은 너무나 일상적이어서… 집에서는 오빠들에게 밥만 했어요. 밥하는 것은 에이꼬의 일. 그런 일상에서 살아왔으니까, 드디어 내 길을 찾았다고 흥분했다.


무용 연습에 집중하는 동안 또 다른 기회가 찾아온다. 영자의 춤을 본 중앙예술단 간부들이 그에게 도쿄에서 활동할 것을 제안한 것이다. 때마침 중앙예술단에서 1964년 도쿄올림픽에 참가하는 북한대표선수단 환영 공연을 준비하는데, 도쿄에서는 무용수가 전적으로 부족한 상태였다. 16살이라는 어린 나이었지만 현장에서 바로 활약할 만한 인재로 영자가 뽑힌 것이다. 나이도 숨겼고, 또 영자라는 일본식 이름은 영숙이라는 민족적 이름으로 바꿨다. 어머니의 반대를 무릅쓰고 영자는 중앙예술단의 최연소 무용수로 도쿄에서 데뷔하였다.


조국을 매개하는 몸…평양의 ‘진짜 예술’을 밀수, 전파하다


중앙예술단이 크게 도약하는 계기가 된 것은 역시나 귀국사업의 시작이었다. 즉, 조선으로 향하는 귀국선 왕래를 통해 조선예술이 직접적으로 도입되고 전문가에 의해 전습되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최승희(1911~1969년. 일제 강점기부터 활동한 현대무용가이자 안무가로 당대 ‘세계 10대 무용가’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해방 후 월북하여 1950년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조선무용가동맹중앙위원회 위원장, 무용학교 교장, 국립무용극장 총장 등을 역임했다)의 『조선민족무용기본』(1958)과, 기본동작이 수록된 영화필름 「최승희류 조선무용」(1962)이 보급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현대무용가 최승희(우측)가 조선민족무용의 기본적인 춤동작 체계를 정리한 이론서 『조선민족무용기본』(조선예술출판사, 1958) 북한 문헌. ⓒ이제이컨설팅


조선 정부는 무대 소품, 의상, 악기, 레코드 등을 대거 지원하였다. 이는 동포사회에 있어 조선무용 교류의 단초가 되었다.(김지은, 「재일조선인의 민족무용에 대한 고찰: 총련계 민족무용의 전승을 중심으로」, 『대한무용학회논문집』 제76권1호, 2018) 중앙예술단은 ‘문화선전대’(문선대) 혹은 ‘문화공작대’(문공대)로 불리면서 각지를 돌아다니며 동포들 앞에서 공연을 펼쳤다. 


그런데, 자유로운 왕래가 어려운 상태에서 ‘조국’의 예술을 어떻게 일본으로 가져올 수 있었는가. 흥미로운 것은 1960년대 초반 빈번히 오고 간 귀국선 내부에서 조선예술 전수가 진행되었다는 사실이다. 니이가타에 정박 중인 배에 들어가서 조선에서 온 예술가들과 접촉해 직접 지도를 받았다. 영자 또한 그렇게 전수를 받은 무용수 중의 한 사람이었다.


당시 귀국선이 오면 이틀 정도 니이가타항에 정박했는데, 그때 적십자사 직원들의 눈을 피해 배 밑에서 접촉했다. 조선의 공훈 배우 인민배우들이 숨어있었다. 유명한 칼춤 선생님도 거기서 만났다. 너무 기쁜데 울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3~4명이 새벽에 몰래 들어가서 이틀 동안에 동작을 다 배워야 했다. 적십자 사람들이 수시로 자신들 영해에 간첩이나 밀수품이 없는지 순찰을 하는데, 그들이 없어졌다 하면 쫙 들어가서 한꺼번에…


그 역할에 뽑히는 것도 명예이긴 하지만 거기서 죽도록 배워야 한다. 작품 4개 정도를 익혀야 한다. 지금처럼 영상을 쉽게 찍을 수 없었으니까 기억할 수밖에 없었어. 그렇게 그 유명한 작품들 우리가 다 몸으로 배우고 왔다. 근데 또 마지막에는 간부들 앞에서 얼마나 정확히 배웠는지 발표를 하는데, 배가 흔들리니까 멀미하면서 이쪽 갔다 저쪽 갔다 하면서 겨우 춤을 췄다. 그렇게 배운 춤을 다시 단원들에게 가르친 거다.


작품 하나를 전수 받으면 동작만이 아니라 음악과 의상 무대 소품 등을 다 전달받았다. 재일조선인들은 무용 전수를 받는 대신 과일이나 화장품 등을 사 가지고 배에 들어갔다. 배가 출항해버리거나 일본 출입국관계자에게 들킬지 모른다는 두려움보다는 동경하던 예술인들과 만나 교류하는 기쁨과 보람이 더 컸다.


‘선상지도’ 과정에서 중앙예술단에서는 급속히 조선예술의 모방과 복사가 진행되었다. 영자는 어느 순간부터 동포들이 점점 평양의 ‘진짜 예술’을 원하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북한의 ‘진짜 예술’의 매개자로서 이를 전파하는 것이 영자의 사명이었다.


중앙예술단은 1964년 도쿄올림픽에서 북한대표선수단 환영 공연을 계기로 성악, 무용, 기악의 전문부서를 갖춘 예술단으로 발전했다. 또 악기도 서양악기 위주에서 민족 악기 편성으로 개편하고 민족적 성격을 강화하였다. 녹음테이프를 썼던 반주 음악도 라이브 연주로 전환했다. 젊은 예술인들은 운동의 제일선에서 흥과 열정을 돋구는 일을 담당했다. 중앙예술단은 창단 10년도 안 된 1964년에 공연횟수 1500회를 기록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한영혜, 「재일조선인 사회 민족무용의 전승과 아이덴티티」, 『일본비평』 창간호, 2009)


민족악기 전달식에 참석한 동포들의 모습. 출처: 몽당연필 자료실 http://mongdang.org/kr/bbs/board.php?bo_table=school_series&wr_id=42     ©월간 『이어』 2018년 10월


영자는 일본 각지를 돌며 10개월 동안 순회공연을 하는 일이 일상이 되었다. 편리한 여행 가방도 고속버스도 없었던 시절, 80명의 단원이 무거운 짐을 들고 야행 열차를 갈아타면서 전국각지를 이동했다. 일본의 고도성장기인 1960년대 당시 총련계 예술인들에게는 북한과 일본 간 문화교류와 우호친선을 통해 국교 정상화를 추진한다는 과제가 있었다. 중앙예술단은 각지에서 동포들뿐만 아니라 일본 시민사회의 열렬한 환대를 받았다.


젊은 여성의 몸을 선호하는 무용계를 떠나다


1970년대에 들어 총련에서는 ‘조국 자유 왕래’ 캠페인을 벌였다. 그 결과 조일 간 친족 방문과 스포츠, 경제, 학술, 문화 분야 교류를 위한 해외 도항과 재입국이 인정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정식 왕래를 통한 조선무용의 습득과 재생산 체계가 완성되었다. 문화와 기술의 ‘밀수’는 이렇게 끝이 났다.


1974년 중앙예술단은 처음으로 평양을 방문하여 혁명가극 <금강산의 노래>를 직접 현지에서 전수 받아 그 성과를 선보였다.(영자는 그때 받은 기념품이라며 김일성 이름이 새겨진 시계를 풀어 보여줬다.) 조선에서의 공연을 성공리에 마친 후, 중앙예술단 단원들은 공훈 배우의 칭호를 수여 받았다. 그리고 ‘금강산가극단’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재출발하게 되었다.


재일조선인들의 독자적 문화예술과 일본 시민사회와의 교류의 장을 제공해 온 조선중앙예술단은 1974년 이후 이렇게 ‘조국’의 국립해외예술단으로서의 성격을 강화하였다.


재일조선인 무용공연. (출처: 임추자민족무용단 페이스북 페이지)


그러나 가극의 등장으로, 말과 글을 몰라도 여러 사람이 즐겨볼 수 있었던 대중적인 노래와 무용의 앙상블 무대가 사라지고, 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알아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엘리트주의 요소가 강화되었다. 자막도 필요하고 역사 설명도 필요했다. 예전처럼 일본 전국에서 불리는 일이 점점 적어지니 재정난에 빠졌고, 그 결과 단원 150명을 절반으로 줄이게 되었다.


‘조국’의 무용을 전파하는 일에 집중해온 영자에게도 성숙과 변화의 시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결혼과 출산을 거친 영자는 베테랑 무용수로서 후세대를 양성하는 지도원으로서 역할을 맡았다. 그런데 주변을 보니 30대 여성 무용수들이 다 ‘세대교체’라는 이름 하에 무대에서 배제되고 있었다. 그 무렵 가극단 단장의 입에서 여성혐오 발언을 들은 영자는 심각한 모욕감과 회의를 느꼈다.


민족예술에서 무용은 늘 중심적 위치에 있었다. 민족 악기가 상대적으로 유지비가 드는 것에 비해 무용은 음악과 몸짓 하나로 민족적 정서를 극적으로 표현할 수 있었고, 글을 못 읽는 1세들과 일본인들도 쉽게 즐길 수 있는 대중성을 가졌다. 또 독무보다 조직화 된 군무가 기본인 무용은 사회주의 예술의 성격에도 적합했다.


이와 같은 무용의 대중성은 한편에서 여성의 대상화를 수반하고 있었다. 수려한 외모와 젊은 몸, 유연한 몸짓을 추구하는 조선무용은 성숙해진 영자가 생각한 “흙내 나는” 예술과는 점점 거리가 멀어져 갔다. “애들 허리나 엉둥이를 보고 예술을 평가하는 분위기에서는 절대로 좋은 예술을 창조할 수 없다.” 영자는 남자 간부들 앞에서 현재의 예술운동의 한계를 호소하고 가극단을 떠났다.


경계의 재설정, “흙내 나는” 예술과 원초적 몸의 기억


“영자의 춤은 조선 맛이 난다.”


가극단 간부들도 그렇게 평했다고 한다. 다른 무용수들의 춤은 발레의 영향이 컸던 것에 비해 영자의 춤은 어머니의 제주말과 몸짓, 조선의 장단이 몸의 기억으로 축적되어 어떤 토속적인 정서를 표현하고 있었다. 영자가 말한 “흙내 나는” 예술을 찾아다니면서 영자는 이미 자신의 생활 세계의 일부였던 고향 제주도와의 관계를 되찾고 한국을 왕래하기 시작했다.


춤과 전통의복을 비롯한 한국 예술문화는 영자의 원초적인 몸의 기억을 다시 자극하고 새로운 영감을 안겨줬다. “원래 한복 치마는 항아리 모양이어야 한다. 그리고 자연 옷감, 마, 모시 자연 옷감은 인체에도 영향이 있다. 그런 걸 입어야 사람이 산다는 것은 한국의 문화를 통해 배웠다.” 그 후에도 영자는 자신이 가진 문화적 자본을 동원하고 움직였다. 한복, 메이크업, 스카프 등 패션 관련 강좌를 진행하고 수백 명의 학생들을 지도했다. 모두 다 조선무용을 췄던 무대 경험이 반영된 것이었다.


글쎄, 난 원래 몸 움직이는 것을 좋아했다. 근데 어머니… 그게 어머니가 저고리 입었던 모습, 두루마기… 우리 어머니는 친목회 갈 때 저고리 위에 두루마기를 입었다. 빨간 립스틱 바르고. 그런 모습을 그 지저분하고 작은 방에서 계속 보고 있었다. 그런 기억들이 내 안에 다 남아있다… 어머니의 춤이.


필자 소개: 조경희(趙慶喜). 일본출생. 성공회대 열림교양대/동아시아연구소 조교수. 역사사회학을 전공했고 현재 일본학, 식민주의, 이주, 소수자 문제 등을 연구하고 가르친다. 주요공저로  『전후의 탄생: 일본, 그리고 조선이라는 경계』(2013), 『귀환 혹은 순환: 아주 특별하고 불평등한 동포들』(2013), 『아시아의 접촉지대: 교차하는 경계와 장소』(2013), 『주권의 야만: 밀항, 수용소, 재일조선인』(2017), 『〈나〉를 증명하기: 동아시아의 국적, 여권, 등록』(2017), 『두번째 ‘전후’: 1960-70년대 아시아와 마주친 일본』(2017) 등이 있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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