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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제 노동자는 지금도, 미싱을 돌린다
<기록되어야 할 노동> 미싱사 홍은희 씨의 이야기 (류현영 기록)
※ <일다>는 <여성노동자글쓰기모임>과 공동 기획으로, 지금까지 기록되지 않은 여성노동자들의 ‘일’을 이야기하는 인터뷰를 싣습니다. “기록되어야 할 노동” 연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아 보도됩니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바로가기
봉제업, 방직공장 풍경은 옛날 얘긴 줄 알았는데…
봉제업 하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단어들이 있다. 시다, 재단사, 미싱사, 평화시장, 동대문, 그리고 1970-1980년대 노동운동의 불씨를 당긴 전태일 열사와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
이후 봉제업은 저임금 노동에 기반한 수출 위주 산업으로 호황을 누리다 1990년대 더 값싼 노동력을 찾아 동남아시아 지역으로 옮겨갔고, 그렇게 국내에서 봉제업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린 듯했다. 나 또한 해외 공장에서 생산된 저렴한 가격의 옷을 당연하게 사 입었다. 이제 동남아에서 들여오지 않는 옷이 어디 있느냐고 생각하면서.
하지만 아니었다. 우연히 손에 들어온 ‘서울봉제노동조합 창립’ 리플릿을 보고 여전히 그 자리에서 옷을 만드는 봉제 노동자들이 있다는 걸 알았다. 지금도 재단을 하고 미싱을 돌려 생계를 꾸려가는 노동자들이 있다는 것을.
궁금해졌다. 그렇다면 2019년의 그들은 어떨까. 무엇이 달라졌고 무엇이 그대로일까. 봉제업에 종사하는 이들은 대부분이 여성이다. 그들의 목소리를 한번 담아 보고 싶었다.
미싱사 홍은희 씨가 일하는 봉제공장 모습. ⓒ홍은희 제공
밤잠을 쪼개 가며 익힌 미싱 기술
1984년쯤, 열여섯인가 열일곱 살에 서울로 올라와 처음 봉제 일을 시작한 홍은희 씨(52세)는 경력 35년 차의 베테랑 미싱사다. 서울에 이미 터를 잡고 있던 외가댁의 외숙모 소개로 들어간 수출 전문 봉제공장이 첫 직장이었다.
“셔츠나 트레이닝복같이 해외 수출하는 제품을 주로 만드는, 인원이 백 명 정도 되고 기숙사도 있는 큰 공장이었어요. 거기서 처음엔 오야(미싱사)가 박아 놓은 거 따는 작업(줄줄이 연결된 옷을 하나하나 분리하는 작업), 다음 작업이 쉽도록 옷감을 추리거나 다림질하는 거, 이런 잡무를 다 맡아서 했어요. 나중에는 조금 올라가서 주머니 꺾는 일을 했고.”
이 공장에 2년 정도 근무하다 동대문 쪽으로 옮겨 갔다. 영세공장이 밀집한 지역이었다. 당시 영세공장에는 주로 골목에 나붙은 모집 공고를 보고 찾아가는 경우가 많았다. 그때만 해도 그런 모집 공고가 다닥다닥 엄청나게 많이 붙어 있었다.
“그때 언니랑 서울에 같이 와 있었기 때문에, 혼자서는 무서워서 못 가겠지만 언니랑 같이 다니니까 모집 공고를 보고 들어갔어요. 처음에 들어간 데는 거의 2-3개월도 못 있었던 것 같아요. 일이 너무 많아서 하루에 거의 두세 시간밖에 못 자고, 일은 힘들고, 복지도 제대로 안 되고. 거기 있던 재단사가 다른 데를 소개해 줘서 옮겼는데, 종로5가 보령약국 뒤쪽에 있던 공장이었어요.”
하지만 옮긴 곳에서도 그다지 오래 일하지는 못했다. 공장에 문제가 생겨 나오게 됐는데, 봉제 쪽은 워낙에 이직이 많은 편이기도 했다.
“이직 많이들 해요. 월급제 공장도 그렇지만, 특히 도급제라고 해서 객공 있잖아요. 객공은 대체로 일을 찾아다니는 경우가 많아요. 옛날에는 어디 가나 잠을 못 잘 정도로 물량이 넘쳐났어요. 그런데 지금 같은 경우는 일이 워낙 없으니까. 이쪽에 일이 있으면 하다가, 2-3주 일이 끊긴다 그러면 일이 있는 쪽으로 이직을 하죠. 저는 웬만해선 직장을 잘 옮기는 스타일이 아니어서, 전에 있던 데는 한 11년 다녔고 지금 있는 곳도 한 3년 넘었거든요. 그렇게 많이 옮겨 다니지 않았는데, 다녀 봐도 거의 다 비슷해요. 사장하고 일할 때 말이 제대로 통하느냐가 중요하죠. 불화만 안 생기면 오래 있으려고 해요.”
영세공장에서 일하며 대공장에서는 제대로 익히기 어려웠던 봉제 기술을 익힐 짬이 생겼다. 대공장은 다 라인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일을 배울 여건이 안 되기도 하고 챙겨서 가르쳐 주는 사람도 없었다. 하지만 영세공장은 사정이 좀 달랐다.
“초기에 일이 새벽 1시나 2시에 끝났어요. 예전에는 다락방이 엄청 많았어요. 거기에 재단하는 방 만들어 놓고 한쪽에 칸막이를 쳐서 기숙방으로 썼는데, 거기 묵으니까 시간이 되잖아요, 잠을 조금 못 자더라도. 그래서 퇴근하고 잠깐씩 30분이라도 좀 (미싱) 밟아 보고 주머니도 만들어 보고 지퍼도 달아 보고 하면서 익혔죠. 저는 좀 빨리 익힌 편이에요. 1년 안 돼서 사장이 혼자 해도 되겠다고 하더라고요. 그때부터 객공을 시작했어요. 엄청 일찍. 다른 사람처럼 베테랑이 아니기 때문에 많이 벌지는 못했어요. 그냥 시다 월급보다는 조금 많은 정도? 처음엔 단가가 낮아도 쉬운 것부터 작업을 시작했죠.”
미싱 작업 중인 홍은희 씨의 모습. ⓒ홍은희 제공
공장 ‘소속’이지만 노동자는 아닌 객공
봉제업에서 객공이란, 일정한 임금이 아니라 작업량과 단가에 따라 돈을 받는 일종의 프리랜서다. 본인의 기술력으로 사장과 ‘계약’을 맺고 일한 양만큼 돈을 가져가는 식이다. 하지만 객공은 여느 ‘프리랜서’와는 다르게 공장에 출퇴근하며 일한다. 분명 공장 ‘소속’인 것이다. 그럼에도 전혀 고용 노동자로서 인정받지 못한다.
“(공장에) 소속되어 있긴 해요. 분명 공장에 들어가 그 안에서 일하는 사람은 맞아요. 그런데 공장에서 말할 때 각자 사업주라고 하죠. 어차피 일해서 사장하고 반반 나눠 갖는 거니까, 근로계약서나 4대 보험 같은 건 없으니까, 아예. 소속되어 있는 건 맞는데, 또 소속 자체가 없는 거죠. 사장이 사람을 구해요. 그러면 가서 보고 할 만하네, 괜찮을 거 같아요, 그러면 그냥 출근해서 일하는 거예요. 그게 다예요.”
각자 사업주라 불린다고 해도 어쨌든 공장에 ‘소속’되어 있다 보니 자신이 원하는 만큼만 일할 수도 없다. 사장과 관계를 맺고 일을 하니 어느 정도는 공장의 물량을 맞춰 줘야 한다.
“(공장에서 요구하는 물량을) 맞춰 주지 못하겠다면 그만둬야겠죠. 웬만하면 상호 간에 얘기를 해서 최선으로 시간 안에, 너무 늦게까지 일하지 않고 맞춰 주려고 해요. 너무 바쁘면 밤 12시까지도 하긴 하는데, 요즘은 밤 10시까지만 하려고 해요.”
객공의 임금 체계는 월급제와 다르다. 사장이 의류 가게에서 일감을 일정 단가에 받아 오면 그 단가를 객공과 5대 5로 나눈다. 물론 딱 그렇게 떨어지는 건 아니다. 디자인에 따라 작업이 좀 수월하면 6대 4로, 좀 복잡하고 까다로우면 4대 6으로 나누기도 하는데, 사장이 그 단가를 밝히지 않고 정해 놓은 금액만 결제해 주는 곳도 적지 않다. 자신이 공정한 단가를 받고 있는지 알 수 없는 것이다.
“여기는 그나마 나은 게, 신상 샘플을 하게 되면 (사장이) 상의를 좀 해요. 샘플을 해 봤는데 이런저런 부분에서 시간이 걸린다, 아니면 이건 쉽게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식의 조율을 하죠. 웬만해선 이 정도면 괜찮겠다 하고 다 넘어가는데, 이건 도저히 안 되겠다 싶으면 얘기를 하죠. 이런 얘기를 안 하면 한도 끝도 없이 계속 내려가요, 가만있으면. 어, 불만도 없네, 그럼 다음엔 오백 원 깎아 볼까 이렇게 되거든요. 그래서 중간에 한 번씩 얘기를 해야 유지가 되더라고요, 적정선이.”
그렇다면 월급제로 운영되는 공장은 어떨까. 직원이 10인 이상 되는 경우 월급제를 많이 하는데, 그런 공장은 예전에 비해 상황이 좀 나아져서 대부분 저녁 7시 정도면 일이 끝나고 토요일도 격주로 쉰다. 그리고 좀 ‘깨인’ 사장들은 직원 퇴직금이나 4대 보험을 보장해 주기도 한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4대 보험이나 상여금, 퇴직금을 보장해 주는 데가 아주 드물어요. 그리고 일감이 없어서 며칠 쉬면 그걸 다 빼고 월급을 주는 거예요. 그건 월급제가 아니죠. 말만 월급제이지 일당제나 마찬가지인 경우가 허다해요. 그리고 출퇴근 시간이 정해져 있다고 하지만 야근을 하는 경우가 훨씬 많고요.”
상황이 이렇다 보니 숙련 기술자인 흥은희 씨 입장에서는 차라리 객공으로 일하는 게 더 낫다. 시간도 상대적으로 좀 자유롭게 쓸 수 있고, 벌이에서도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월급제는 오전 9시에 시작해서 저녁 7시까지 일을 하잖아요. 평균적으로 나오는 물량이 있어요. 그리고 객공처럼 그렇게 죽어라 일하지 않아요. 객공은 일하는 만큼 받으니까 몇 장이라도 더 하려고 하다 보니 장수 차이도 나고 금액 차이도 나요. 그리고 객공은 사람마다 실력 차이가 있으니까 거기서도 차이가 나죠. 실력이 좀 떨어지는 사람은 월급보다 조금 더 가져간다 그러고, 실력 좋은 사람은 두 배 이상 가져간다 할 정도예요.”
장시간 노동, 다치는 거 감수하면서 이 일을 하죠
공장의 작업 환경은 예전보다는 개선되었다. 대부분 환풍기는 기본으로 설치하고, 먼지를 빨아들이는 흡입기를 들여놓은 공장도 있다. 한두 시간만 일해도 눈에 보이게 먼지가 쌓이는 일이라 이런 장치 없이는 제대로 숨을 쉬며 일하는 게 불가능할 정도다. 하지만 여전히 휴식 시간이나 휴식 공간을 기대하긴 어렵다. 객공이 대부분인 공장에선 정해진 점심시간조차 없는 형편이다.
“월급제 같은 경우는 점심시간을 30분에서 한 시간 정도 주기도 하는데, 우리는 점심시간이 따로 없어요. 점심이 오면 10분에서 15분 정도 후다닥 먹고 바로 또 일하는 거예요. 한 공간에서 같이 일을 하니까, 누구 한 명이라도 먼저 미싱에 앉아 일을 시작하면 다른 사람들도 쉬고 있을 수가 없는 거예요. 한 장이라도 더 만들려고 하다 보니까 그렇게 돼요. 화장실 가는 시간 빼곤 종일 계속 앉아서 일한다고 보면 돼요.”
객공 미싱사들은 휴식 시간도 미싱 앞에 앉아 장시간 작업을 한다. (출처: Pixabay)
대부분의 봉제 노동자가 하루 12시간에서 15시간 이상까지 장시간 노동을 한다. ‘당일 주문-당일 납기’를 맞추려면 어쩔 수 없다. 게다가 요즘에는 일감이 늘 있는 게 아니라서, 있을 때 최대한 벌어놔야 한다. 그러니 장시간 노동을 감내할 수밖에 없고, 제대로 쉬지도 못한 채 종일 거의 미싱 앞에 앉아 작업을 하는 것이다.
“지금 공장에서도 다른 사람들은 밤 11시나 12시까지 일해요. 저는 10시 넘기지 않겠다고 하고 들어왔기 때문에 10시까지밖에 안 하는데, 다들 욕심이 있으니까 그때까지 일하는 거예요. 그런데 저는 차라리 아침에 조금 일찍 나와서 일하는 게 더 낫더라고요. 밤에 퇴근하면 집에서 또 이런저런 할 일이 있잖아요. 그런 거 다 하고 자려면 최소한 10시에는 퇴근을 해야 해요. 그래서 요즘에는 다른 분들도 조금씩 생활 패턴을 바꾸더라고요. 아침에 조금 일찍 나오고 10시에 퇴근하고.”
아침에 일을 더 하든, 밤에 일을 더 하든 장시간 노동인 건 마찬가지다. 그렇게 일을 하지 않고는 안정된 생활을 꾸려가기 힘들다. 그러니 당연히 몸이 성할 수 없다.
“여기저기 다 아프죠. 특히 관절이 안 좋아요. 계속 한 자세로 일하니까. 어떨 때는 손가락을 이렇게 구부리고 작업을 몇 시간씩 하니까 일이 끝나도 손가락이 펴지지가 않아요. 그러면 주무르고 풀어 주고 해서 펴는 거죠. 그러고는 또 일을 해요. 다치기도 많이 다쳐요. 여기 이 손가락도 바늘에 드르륵 박혀서 흉터 생긴 거고, 여긴 베인 거고. 다들 마찬가지예요.
산재 처리 같은 거 없어요. 객공은 4대 보험도 없으니까. 일하다 다치면 사장이 보고 병원에 데려가요. 치료비는 내줘요. 그런데 뭐 그 정도 가지고, 별거 아니네 그러는 경우도 있어요. 예전에는 기계에 손가락을 다치면 무조건 미싱 기름에 담갔어요. 그러면 귀신같이 피가 멎어요. 그게 (몸에) 엄청 안 좋은 건데, 다들 그렇게 하라고 들어 왔으니까 그냥 그렇게 했던 거예요. 몸 아픈 거, 다치는 거 다 감수하면서 이 일을 하는 거죠.”
줄어드는 일감, 길어지는 비수기
봉제업이 호황을 누리던 1980년대부터 쭉 봉제업에 종사해 왔지만, 봉제 노동자의 처우는 크게 개선되지 않았다. 노동운동이 한창이던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에 변화의 물결이 잠깐 일기는 했지만 그것으로 끝이었고, 오히려 1990년대 중반 이후 대부분의 공장이 저임금 시장인 동남아시아로 옮겨 가면서 일감이 눈에 띄게 줄어들어 상황이 더 안 좋아졌다.
서울 지역 봉제인 및 봉제업체 현황. ⓒ전국화학섬유식품산업노조 서울봉제인지회
“1989년, 1990년에 청계피복노조랑 그 주변의 많은 단체가 임금 협상도 해 보고 시간 단축도 해 보고 그랬어요. ‘8시까지만 일합시다’ 이런 식의 시간 단속을 해서 한때 그렇게 됐던 적도 있긴 해요. 그런데 그건 정말 짧게였어요. 일단은 일하는 사람들이 욕심이 있다 보니까, 사장들이 시키는 것도 있지만 본인 욕심 때문에도 그걸 못 지킨 경우가 많아요. 나는 더 벌어야 한단 말이야 이러면서. 그래서 그때 조금 나아진 것 같았는데, 어느새 보니까 다시 제자리예요.
지금 변화된 거라면, 제일 큰 게 일감이에요. 그때는 일은 힘들어도 일감 걱정은 안 했어요. 그때는 매장들이 크니까 한 디자인으로 한 달 두 달씩 했는데, 지금은 디자인 하나로 하루도 못 해요. 장수는 적어지고 디자인은 많아지고. 보통 하루에 여섯 일곱 가지씩 해야 하는 상황이라 오히려 지금이 그때보다 더 힘들지 않나 싶어요.”
그러면 일감이 넘쳐나던 때엔 돈을 그만큼 많이 벌었을까? 대답은 ‘아니다’였다.
“사장들이 돈을 긁어모았죠. 우리는 별 차이 없었어요. 그때는 사장이 가게를 하면서 공장도 같이 운영했거든요. 그러니까 중간 마진도 필요 없이 다 사장이 벌었던 거죠.”
봉제업은 갈수록 영세화되고, 그렇다 보니 일을 배우려는 젊은 인력도 없어 고령화되어 가고 있다. 게다가 갈수록 비수기도 길어져 지금은 6개월, 길면 7개월까지 비수기인 경우도 있다. 아예 일을 할 수 없는 기간이 계속 늘어나는 것이다.
“예전에는 비수기가 없었죠. 겨울에도 미리 작업을 해 놨다 한꺼번에 보내고 그랬는데, 지금은 일단 물량 자체를 안 만들어요. 그리고 큰 물량은 다 외국에서, 동남아에서 만들어 오잖아요. 그러니까 국내에선 소량 작업만 하는 거예요. 비수기가 늘어날 수밖에 없죠. 예전에는 디자인이 나오면 몇 장씩 미리 만들어 놨어요. 그런데 지금은 그게 아예 없어져 버렸어요. 그러다 보니 가끔가다 한두 달 잠깐 작업하고 주문 들어오는 거 몇 장씩 하는 정도. 많이 힘들죠.”
일이 없으면 그냥 쉬는 것밖엔 답이 없다. 다니다 보면 일감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라서 객공은 그런 일감을 찾아다닐 수도 있긴 한데, 그것도 여의치는 않다. 겨우 하루 이틀 비는 경우 다른 데 가서 일하기도 애매해서 그냥 ‘대기조’처럼 일감을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 대부분이다. 또 요즘에는 일감 경쟁이 붙어 사장들이 단가를 무조건 낮게 부르는 경우까지 종종 있다.
“다녀 보면 단가가 너무 싸서 못하겠는 데도 있어요. 사장들끼리도 일감 싸움을 해요. (디자이너가 샘플을 들고 가면) 여기서는 만 원에 해줄 수 있다 했는데, 다른 데서는 8천 원에 해줄 수 있다 해요. 그러면 단가가 점점 떨어지는 거죠. 지금 일하는 공장에는 크게 불만은 없는데, 어느 정도 선을 지켜 주면 좋겠는데… 사장들도 자기 욕심 때문에 일감을 따 오려고 자꾸 단가를 낮추니까, 본인도 당연히 손해인데….”
내가 만든 옷이다, 미싱 기술자의 자부심이 있기에
홍은희 씨는 오랫동안 이 일을 해 오면서 그만두고 싶다는, 다른 일을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없을까.
“일을 그만두고 싶다고 생각했던 적은 있어요, 너무 힘들어서.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뭐 달라지는 게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런 적은 있지만 다른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어요, 희한하게도. 그만두고 나가서 다른 일 하는 사람도 많이 보긴 했어요. 대부분 보험 쪽으로 많이 갔어요. 그때 한창 붐이 있었거든요. 저는 그냥 천직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에요. 정말 정신없이 일만 하면서 살았는데, 아이들 키워야 하니까. 그런데 아이들이 딱 대학 졸업하고 나니까 마음이 편해지더라고요. 아, 이제 됐다 하는 생각이 들면서요.”
손가락이 굽도록 미싱을 돌리고 아이들 얼굴 볼 시간도 없이 매일 밤늦게 퇴근하면서도 아이들을 위해 빼먹지 않고 꼭 했던 일이 있다. 바로 토요일 밤에는 무조건 치킨 한 마리 사다가 아이들하고 먹으면서 대화를 나눈 것이었다.
“그건 제가 정말 잘한 일 같아요. 매일 밤늦게 퇴근하니까 아이들 자는 얼굴만 보고 얘기할 시간도 없었거든요. 지금 둘 다 졸업하고 직장 생활을 하는데, 애들이 몸이 아파도 절대 결근을 안 하는 거예요. 내가 ‘힘들면 오늘은 좀 쉬어’ 그래도, ‘아니야, 그럼 내 일을 누가 하겠어’ 그러면서 꼭 출근하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어느 날 ‘왜 그렇게 열심히 해?’ 그렇게 물어봤더니, ‘엄마가 그렇게 열심히 일했잖아’ 그러는 거예요. 정말 너무 감동받았어요. 아, 내가 잘 살아 왔구나, 애들이 그걸 알았구나 싶어서.”
봉제 일을 ‘천직’으로 여기며 열심히 살아온 보답을 받은 기분이었다. 그런 만큼 숙녀복 토탈, 즉 바지, 스커트, 브라우스, 남방, 바바리, 원피스, 코트 등 숙녀복 전 품목을 혼자 완성품으로 내보내는 미싱 기술자로서 이 일에 자부심이 있다.
“아마 저도 60이 넘으면 은퇴를 하겠죠. 그런데 그 이후에 구체적인 계획은 없어요. 은퇴를 할 수도 있겠지만, 여력이 된다면 아마도 계속 이 일을 하고 있지 않을까 싶어요. 옷 한 벌을 완성했을 때 아, 이게 내가 만든 옷이다 하는 자부심이 있어요. 그게 좋아요. 그런 게 없었다면 지금까지 이 일을 해 오지 못했을지도 모르겠어요.”
조금 적게 벌더라도 안정적으로 일하고 싶다
현재 봉제업에 종사하는 이들은 대부분 경력이 기본 15년에서 20년 이상으로 숙련된 기술자들이다. 그중에서도 대부분이 여성인 미싱사는 완성품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봉제업에서도 특히 핵심 지위를 차지하는 기술자다. 그런데 국내에서 이제 그 기술자들이 점점 사라져 가고 있다. 봉제업 내부의 변화가 없는 한 이런 상황은 개선되지 않을 것이다.
서울봉제노조 창립준비위원회 1차 회의를 마치고. ⓒ전국화학섬유식품산업노조 서울봉제인지회
“지금은 물량도 많지 않고 공장도 갈수록 영세해지고 있어요. 게다가 다 뿔뿔이 흩어져 있고 영세하니까 개선이 쉽지 않아요. 제 생각에는, 많지 않은 물량으로 영세한 사장들이 경쟁하기보다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공장 형태를 갖추고 월급제로 고용해 정규 노동시간 내에 꾸준히, 비수기 없이 다 같이 일할 수 있는 안정된 방식이 되면 좋겠어요. 조금 적게 벌더라도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다면 말이에요. 지금은 평생 일해도 은퇴하면 손에 남는 게 하나도 없어요. 불안할 수밖에 없죠. 그렇게 좀 개선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2017년, 봉제 노동자의 권익 향상을 도모하고자 발족한 ‘봉제사업단’은 기자회견문에서 “봉제 노동자들의 산업 안전과 실업 대책, 그리고 노후 문제는 말 그대로 ‘무방비’ 상태”라고 밝혔다. 그리고 2018년 11월, 서울봉제노동조합이 창립되었다. 청계피복노조 이후 거의 50년 만이다.
현재 봉제 노동자는 전국에 약 14만5천 명, 서울에만 약 9만 명이 있다. ‘사양산업’이라 치부된다 해도, 그 안에서 노동하는 이들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들의 노동이 더는 간과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바로가기
※ <기록되어야 할 노동> 기획 연재를 위해 자문해주신 분들입니다. 고주영(공연예술 독립프로듀서), 박준우(프리랜서 작가), 이민영(비전화공방서울), 이충열(여성주의 현대미술가), 최하란(스쿨오브무브먼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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