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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지촌 여성 셋 “재현의 실패를 드러내는 재현”
[페미니즘으로 보는 식민/분단/이주] 기지촌 여성의 증언 듣기
※ 일다는 식민-전쟁-분단의 역사와 구조를 여성주의 시각으로 재구성하는 기획기사를 연재합니다. 다양한 페미니스트 연구자들이 식민지배와 내전, 휴전으로 이어진 한국 현대사가 낳은 ‘여성의 이동’, 군 성폭력과 여성동원, 군사주의와 여성의 지위 등의 젠더 이슈를 제기하고, 사회구조와 여성 주체들 사이의 긴장을 드러내며 전쟁/분단/이주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합니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바로가기
책 『IMO: 평택 기지촌 여성 재현』의 실험
▲ 독립출판물 『IMO: 평택 기지촌 여성 재현』(대화: 장영미 이경빈 지니 이은진 최윤선 전민주. 텍스트: 이경빈 이은진. 사진/영상: 전민주. 디페랑)
기지촌 여성 증언집을 만들기로 하고, 연구자들(인류학 전공 이경빈, 젠더법학 전공 이은진)과 작가(전민주)가 만나 작업을 한 결과가 『IMO: 평택 기지촌 여성 재현』이라는 실험적인 독립출판물로 나왔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은 기지촌 여성들의 증언을 연구한 자신들의 작업에 대해 “재현의 실패를 드러내는 재현”이라고 말한다.
“기지촌 여성 증언집을 만들려고 했지만, ‘기지촌 여성’도 ‘증언집’도, 진짜 영미, 지니, 윤선도 없었다. 관계 속에서 맥락적인 영미, 지니, 윤선만을 말하는 게 능사도 아니었다. 기존의 ‘기지촌 여성’이 영미, 지니, 윤선을 표현하지 못하는데 답답함을 표현하는 이 책에서 당신은 영미, 지니, 윤선과 함께 또다른 ‘기지촌 여성’을 만들어가고 있다.”
이 글은 『IMO: 평택 기지촌 여성 재현』이 나오기까지의 과정, 즉 기지촌 여성의 증언집을 포기하고 재현에 실패하는 과정을 설명하고, 또 한편으로 이들이 책에서 “재현의 실패를 드러내는 재현”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게 무엇인지 알리고자 한다. ‘증언이란 무엇이고, 당사자의 목소리를 어떻게 들을 것인가?’의 문제를 되짚어보려는 것이다.
이 기사는 『IMO: 평택 기지촌 여성 재현』의 서론을 편집, 재구성한 것이며 인용된 구술 텍스트는 책의 본문 내용이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바로가기
매번 달라지는 진술 중 명백한 ‘하나’를 선택하라고?
우리는 기지촌 여성을 찾아가 대화를 하고 있다. 영미, 지니, 윤선이라는 세 기지촌 여성의 이야기를 듣기로 했다. 영미는 예전에 함께 살던 미군과 민속촌에 갔던 경험을 여러 번 이야기한다. 그런데 매번 이야기가 조금씩 다르다.
첫 번째 이야기
영미 : 나는 미군하고 민속촌에를 갔었거든, 갔었는데. 아이고. 나를 뚜껑을 열리게 만들었어. 이렇게 둘이 걸어가는데, 그러는 거야. 남자하고 여자하고 둘이, 아이고 양갈보. 이러는 거야-.
민주 : 나쁜 놈들이네.
영미 : 그래가지고 씨-발.
경빈 : (웃음)
영미 : 젊은 새끼야. 그래가지고 홱 돌아서 쫓아가니까 미군이 웨티투 웨티투[What do you do? What do you do?] 하는 거야. 이 씨이발 놈 메가지를 잡아가지고 귀싸대기를 갈겨버렸더니, 내가.
경빈 : 오-, 대-박.
영미 : 그래!
두 번째 이야기
영미 : 내가, 그 일 년채 잘해줬던 미군이, 민속촌에 놀러를 가자 갰어. 미군이 키가 적어도 뭐, 크잖아! 이렇게 걸어가는데, 어떤 그것들도 애인인가 봐. 한국여자하고 한국남자하고 가면서. 아이고 저거. 버드나무 매미 붙었다 그러는 거야-! 그게 나는 뭔 소린가 했어, 근데 키가 그렇게, 미군이 크니까 나는 적고. 그런 소리를 했던 가봐. 그러게나 말거나. 가가지고 민속촌에서 그렇게 놀고. 근데 열아홉이 됐어 이제 세월이 흘러가지고.
세 번째 이야기
영미 : 그러고 시장 같은 데 가끔 가지. 가끔 가면, 인제 그, 뭐 파는 거, 시장 안에 뭐 국수도 팔고 그러잖아. 거기에 가가지고 앉아서 국수도 먹고, 그러면 사람들이 막 쳐다본다? 나, 민속촌에를 갔는데
민주 : 응.
영미 : 미군이랑. 근데 아이 씨발, 뒤따라오면서 (높고 걸걸한 목소리를 흉내 내면서) 아—! 버드나무 매미 붙었네, 버드나무 매미 붙었네. 그러는 거야! 이제, 조그마하니까 이제. 버드나무, 매-미 붙었다구. 그러는 거야. 씨발, 이렇게 쳐다보니까. 남자하구 여자하구 둘이 오면서 보는 거야. 그래서 내가 이렇게 쳐다보고. 그냥 인상 팍 쓰고 말아버렸지. 거기 민속촌에 가서 술을 얼-마나 퍼먹었는지. 좌우지간에 와-. 진짜 동동주 독해!
경빈 : 머리 아파요.
영미는 그날 지나가는 한국인 커플에게 무슨 이야기를 들은 것일까? 그리고 그들에게 어떻게 반응했던 것일까? 영미에 대해 쓰고자 한다면 민속촌의 경험에 대해 재차 질문하면 되는 것일까? 그리고 고쳐 물었을 때 영미가 답변한 것을 사실로 믿으면서, 이와 일치하는 구술만을 남긴 채 다른 두 가지 구술을 지우면 되는 것일까?
이런 식으로 ‘사실’을 정해나간다면 이 여성의 삶에 대해 잘 정리된 생애사 연표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을 때 얻을 수 있는 것이 있다. 과거의 경험에 대한 명확한 ‘증언’을 포기하고 사실을 하나로 정하기를 포기한다면, 위의 세 가지 구술은 모두 어떤 사실을 담고 있는 말이 된다. 모든 사람이 그렇듯, 이들의 과거에 대한 기억은 말할 때마다 조금씩 달라지기도 한다. 우리는 그것을 다시 물어서 고쳐내고 하나의 진실에 도달하려 하기보다 그 변주 자체에 주목했다.
▲ 영미, 지니, 윤선 세 사람의 구술을 담아 기지촌 여성 증언집을 만들려던 우리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가고, “재현의 실패를 드러내는 하나의 재현”이 되었다. ©사진: 전민주
‘증언’의 실패가 더 많은 것을 말해줄 수도 있다
윤선과의 대화에서 윤선은 기지촌 경험, ‘아가씨 생활’, 연애,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피한다. 기지촌에서 자신이 본 일반적 사실만을 동떨어져서 관찰한 것처럼 이야기하거나, 부엌에 가버리거나, 갑자기 카메라가 좋아 보인다고 말을 돌린다. 때로는 화를 내기도 한다.
그런데 이러한 시도들도 단순히 증언의 실패일 뿐 아니라 더 적극적으로 무언가를 말해준다. 윤선이 어떤 상황에서 말을 돌리는지, 어떻게 말을 돌리는지, 회피한 다음에 급하게 덧붙이는 말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가 생생하게 발화된 경험보다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명백한 역사적 증언이 될 수 없는 말들도 그렇다. 여자가 미군에게 맞아 죽었다는 집에서 만났던 귀신 이야기는 제도나 기존의 역사적 사실과 비교하며 볼 수 있는 증언이 아니지만 단순한 허구의, 비어있는 말이 아니다. 때로는 말에 담긴 내용, 몇월 며칠의 경험보다는 말소리, 불쑥 튀어나온 좋은 미국식 영어발음 그 자체가 더 많은 것을 말해줄 수도 있다.
명확한 경험의 말하기를 포기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재현의 실패이지만, 오히려 재현의 실패를 드러냄으로써 말할 수 있게 되는 것들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기록 작업이 엄밀한 의미의 ‘증언집’이 되기 힘들어졌다는 점을 생각할 즈음, 그러면 어떤 이야기를 담을지 좀 더 고민이 깊어졌다.
TV가 우리보다 더 좋은 질문을 던질 때
면담을 하러 영미의 집에 가면 인사가 길어진다. ‘그래도 해야 하는’ 기지촌 성매매에 대한 질문을 던지면서 과거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는 우리와, 얼마 전에 담근 파김치, 어제의 길고양이, 옆 방의 짜증 나는 인간 이야기를 하려는 영미 사이에 줄다리기 같은 대화가 이어진다.
그런데 정말 이 줄다리기에 이기고 나서야 본격적인 이야기를 듣게 되는 것일까? ‘기지촌 여성’의 경험을 풍부하게 드러내는 이야기들은 일상생활의 이야기가 끝나고 준비된 질문을 시작했을 때 찾아올까?
하지만 준비한 질문이 시작되기 전 혹은 끝난 순간에 우리는 더 생생한 이야기를 듣게 될지도 모른다. 기지촌 경험에 대해 묻기로 했을 때 꺼내기 힘들었던 자녀에 대한 이야기는, 질문지에 적힌 질문을 다 마치고 TV를 켠 순간에 갑자기 나올 수 있다. 유니세프 광고에 나오는 굶주린 어린 아이의 이미지는 혼혈아에 대한 영미의 생각을 묻는 질문이 된다. TV가 우리보다 더 좋은 질문자가 되는 것이다.
또, 영미는 저자들의 연애에 관심이 많아서 방문할 때마다 연애의 진행 상황을 점검하는데, 이때 지나간 미군들의 이야기는 연애상담에 쓰이는 재료로 자연스럽게 등장한다.
▲ 책 『IMO: 평택 기지촌 여성 재현』의 “표기법 일러두기” 중에서
‘기지촌 여성의 경험’이라는 고정된 실체는 없었다
또한 이들은 ‘기지촌 여성’일 때에 연구와 운동의 대상이 될 수 있지만, 당연하게도 ‘기지촌 여성’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이어지는 대화 속에서 현재 일상의 이야기와 어린 시절의 이야기, ‘기지촌 여성으로서의 이야기’의 경계를 짓기란 쉽지 않다. ‘아가씨 생활’이라는 말에 때로 예민하게 반응하는 윤선에게 미군 대상 성매매를 했을 때를 특정해서 질문하고자 할 때, “기지촌에 계셨을 때…”, “일하셨을 때…”라는 말은 넌센스가 된다. 윤선은 지금도 기지촌에 살고 있으며, 최근까지도 서빙 일을 했기 때문이다.
역사적 존재로서 특정한 대상을 찾아갈 때는 당연히 그의 삶과 사고가 그 특정한 역사적 사건에 가장 사로잡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우리는 기지촌 여성의 구술을 들으러 찾아가면서 당연히 그가 ‘기지촌 여성으로서의 경험’에 가장 사로잡혀 있을 것이라고 가정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윤선은 어린 시절 계모에게 학대당한 경험에 가장 사로잡혀 있는 것처럼 보이며, ‘기지촌 경험’에 대한 질문은 곧장 계모에 대한 원망으로 빠지고 만다.
이제 ‘기지촌 여성으로서의 경험’이라는 고정된 실체가 있다는 생각, 또 그것을 잘 담아내야 한다는 목표도 포기해야 한다. 기지촌 여성의 ‘기지촌 여성으로서의 증언’을 읽으려고 한 사람들의 기대를 배반하는 것은 중요하다. 얼핏 보면 세 여성이 공통적으로 한 이야기라고는 전라도 사람에 대한 지역감정을 비친 것이 유일해 보인다.(지니는 현재의 애인을 만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기지촌 여성 증언집을 만들러 영미, 지니, 윤선을 찾아갔지만, ‘기지촌 여성’도 ‘증언집’도 포기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진짜 영미, 지니, 윤선이 어떤 사람인지를 쓰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도 쉽지가 않다. 아마도 쓸 수 있는 것은 나와의 특정한 관계 속에 있는 영미, 지니, 윤선인 것이다. 책의 제목 『IMO』는 이모라는 관계적 지칭·호칭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제 또한 고민해야 할 것은 만남 속에서 텍스트를 함께 만들어내고 있는 존재(묻고 있는 ‘나’)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면 대상을 편집하고 해석하여 재현하는 자인 ‘나’의 위치를 세세하게 드러내면 될까? 영미, 지니, 윤선을 재현할 때 굴절을 일으킬 수 있는 특수한 위치성(나의 성별이나 계급, 나이, 당시의 옷차림 등)을 나열하고, 구조적인 위치의 차이에 대해 성찰하면 되는 것일까? 하지만 이런 성찰은 나르시시즘적이고 과도한 자기 고백으로 이어지기 쉬우며, 다시 한번 대상화를 만들어 낸다. 또한 나의 위치에 대한 타인의 판단을 내가 온전히 알 수도 없다.
드러나야 할 것은 우리의 위치에 관한 강박적 나열이 아니라, 위치의 차이를 바탕으로 관계 속에서 재구성되는 상황들이다. 이를 위해 『IMO』에서 시도한 것은 대화의 형식이었다. 주고받는 대화를 살리면서 양자의 만남이 만들어 낸 것에 대해 쓰고, 그 상황 속에서 서로에 대한 판단이 드러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럼 이제 ‘기지촌 여성’이라는 이미지에 갇힌 영미, 지니, 윤선을 구해내고 관계 속에 있는 좀 더 개별적이고 맥락적인 모습으로 돌려놓으면 되는 것인가? 애초에 우리가 이 세 명의 여성을 찾아간 것은 이들이 ‘기지촌 여성’이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이들이 ‘기지촌 여성’이기만 한 것이 아님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을 개인으로 돌려놓고자 하는 사람들은 ‘망각하고자 하는 이들’ 아니던가. 개별의 기지촌 여성들은 구조적 피해자로서 ‘기지촌 여성’으로 묶일 때만 가시적 존재가 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들을 ‘기지촌 여성’(언젠가의 ‘양공주’, 혹은 피해자다움이나 운동가다움)에 가두지 않으면서도 사회적으로 출현할 수 있도록 하는 이중적 과제는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가?
정치적 올바름과는 동떨어진 말들
이들이 기지촌 여성이기도 했다는 점을 다시 생각하다 보니 찝찝한 부분이 있다. 이제 구술을 녹취한 자료들을 바탕으로 편집을 시작하려고 하는데, 책에 넣어도 되는 것인지 고민되는 부분들이 있는 것이다.
지니 : 그래도 또 뭐 딴 언니들은 뭐 우리가 뭐뭐뭐 외화에, 뭐 외화를 많이 벌어들여서, 우리는 뭐 애국, (퉁명스러운 말투로) 애국자는 무슨 애국자여.
경빈, 민주, 은진 : (웃음)
지니 : 무슨 말대 같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고 있어-. 애국자는 무슨 애국자야-? 말 되는 소리를 해야지, 솔직히 말해. 지 좋아서 지가 나와서 다 그렇게 된 거. 안 그래?
경빈 : (어색한 웃음)
지니 : 일본 위안부, 위안부들하고 우리하고는 (크게) 천!지 차이여. 하늘과 땅이지-. 그 사람들은 끌려간 거구-.
민주 : 응응.
지니 : 우리는, 자발적으로, 누가 뭐 너보고 이거 해라면 하겄냐? 내 좋아서 하는 거지, 이거는?
민주 : 빨리 은진 씨 소개, 얘기 해줘. 왜 우리가 위안부와 같이 갈 수밖에 없는지, 빨리, 설명해주세요.
은진 : (웃음)
경빈 : 니도 그렇게 생각하는 거가. (웃음)
은진 : (웃음) 그게
지니 : 아! 똑같진 않지! 안 똑같지!
은진 : 당연히 뭐, 뭐든지 아예 똑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지니 : 그래도 인제 뭐, 인제 뭐 그때 시대에 뭐뭐뭐 딸-라 벌어들였다는 거, 우리나라 못 살 때-. 그거 한 가지, 다, 딱 한 가지 잘핸 거는 모르겠다-. 나는. 나는 잘 모르갔어. 그거지 뭐-.
은진 : 그리고 그만두고 싶을 때 마음껏 그만두기 어렵게 그 안에서 이렇게 뭔가 빠져나가기 어렵게 만든 것도, 이제 다, 이건 법적으로도 강제라고 하니까요-. 국제법도 그렇고 그래서….
지니 : 그래, 막 도망은 못 가게 했어. 지키고 그랬어-. 그런 그랬는데. 아무리 지키고 그런데도 지가 빠져나올라면, 그때는 뭐 어리석고 또 요런 약에 취했으니까-, 정신이 흐리멍덩— 하잖아. 이게 뭐 꽃이 먼전지, 이파리가 먼저 올라오는지도 몰랐어, 진짜로.
은진 : 음.
지니 : 그런 세월을, 나는 진짜 허송세월을 그렇게 보내서….
경빈 : 그래서, 그럼, 그냥 이렇게 오늘 말씀하신 것처럼, 그냥 생각하시는 거? 지, 지금 생각,
지니 : (말 끊으며) 생각이 없지! 그때는!
민주, 은진 : (웃음)
일본군 ‘위안부’와 기지촌 여성이 전혀 다르다는 지니의 말을 책에 넣어도 될까? 더군다나 기지촌 여성이 처했던 구조적 피해를 인정받기 위한 운동이 한창 이루어지고 있고, 일본군 ‘위안부’ 운동과의 연대도 중요한데, 이 말은 우선 잠시 가려놔야 하지 않을까? 당사자가 피해자성을 부인하고 자발성을 선언하는 말을 직접 한 것인데, 기지촌 여성이 처했던 구조적 피해를 부인하는 사람들이 이 말을 가져다가 기지촌 여성 운동을 망치는 데 쓰면 어떻게 하나?
이뿐만이 아니다. 인종주의적 생각을 드러낼 때나, ‘백인 미군은 여자한테 맞고 산다’는 영미의 말은 미군폭력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방해가 되지 않을까? 정치적 올바름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말들은 어떠한가? 안 그래도 갖은 선입견에 둘러싸인 사회적 약자인데, 더 이해받지 못하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이런 말들은 지배 이데올로기가 반영된 잘못된 말이고 오해의 위험이 있기 때문에 책에 싣지 않으면 되는 것일까?
▲ 오해의 두려움 때문에 중요한 말들을 없앨 수는 없다. ©사진: 전민주
‘당사자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원칙에 대하여
사실, 이러한 고민은 당사자의 말에 절대적인 무게를 주었기 때문에 생긴다. 당사자의 말에 너무 절대적인 권위를 주었기 때문에, 그에 걸맞지 않은 당사자의 말을 숨겨야 할지 고민하는 역설적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오늘날 당사자의 말은 들리지 않는 중얼거림으로 남아있거나, 반대로 쉽게 명령이나 법칙이 된다. 스피박이 지적했듯이 서발턴(subaltern, 하위 주체)의 목소리는 사회에 들리지 않았고 언어 바깥에 있었다. 이런 목소리는 혼자의 것이며, 들리더라도 알아들을 수 없다는 점에서 중얼거림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또 그만큼 오랜 세월 동안 많은 사람들이 기존의 담론 속에서 들리지 않았거나 왜곡되어서야만 들렸던 목소리를 복원하기 위해 나서왔다.
그리고 이제 당사자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것, 당사자의 관점에 서야 한다는 것은 하나의 원칙이 되었다. 말 그대로의 목소리를 많은 수의 사람들이 듣고 기억하는 것이 곧바로 당사자에게 좋은 결과로 이어진다는 믿음이 생기기도 한다. 당사자의 가슴 아픈 피해의 문장, 혹은 감동적인 연대와 생존의 문장은 명령이 되어 널리 공유된다. 그 결과는 모두가 당사자를 바라보거나, 당사자에게서 올바른 말을 ‘폭력적이지 않게’ 이끌어내는 방법을 고심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당사자에게는 세밀한 경험부터 구조적 지적, 실천에 대한 규범적 판단까지를 올바르게 말 해내야 할 책임이 없다.
게다가 정작 당사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하면, 앞의 경우처럼 순수한 피해자의 말도 주체적 운동가의 말도 아닌 당황스러운 목소리들을 많이 만나기 마련이다.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말들, 피해자 스스로 피해자임을 부인하는 말들, 다른 약자에 대한 혐오 발언들. 이런 말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것이 잘못임을 가르칠 것인가? 계몽은 낡은 도덕이고, 당사자주의가 새로운 이 시대의 도덕이기 때문에 당황스러움은 더 커진다. 이러한 목소리들은 단순한 허위의식이나 고쳐야 할 대상이 아니다. 반대로, 명령으로서 당사자의 말에 적합하지 않으므로 숨겨야 하는 대상도 아니다.
비판해야 하는 것은 당사자의 말에서 곧바로 구조를 들으려는 게으른 태도, 혹은 당사자의 말 몇 가지를 빌려 구조적 피해를 무화(無化)하려는 시도(어떤 당사자가 자신은 피해자가 아니라고 말하는 목소리를 명령으로 가져와서 운동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다른 당사자가 자신의 피해를 주장하는 목소리에 대해서는 명령으로 들은 적이 없다)이지, 오해의 두려움 때문에 중요한 말들을 없앨 수는 없다.
기지촌 여성 스스로 자신은 일본군 ‘위안부’와 다르다고 말할 때, 그 말이 의미하는 바를 소중하게 들으면서도 구조적 층위에서 연결성을 발견한다면 연대할 수 있어야 한다. 기지촌 여성이 자신의 경험을 온전한 자발성으로 이야기할 때, 그 말을 피해자화에 대한 채찍질로 받아들이면서도 구조적 질문을 놓치지 않고 국가의 개입을 밝혀내어 책임을 물을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런 말들을 틀린 말로 없애버리거나 구조를 무화(無化)하기 위한 무기로 삼는 것이 아니라, 단지 또 다른 층위의 진실을 담은 말로서 들으면서, 그 말에 담긴 역사와 담론이 무엇인지 생각해야 한다.
당사자는 옳은 말만 해야 하는 사람이 아니다
당사자의 말하기를 무조건적인 법칙과 규범적 명령의 자리로 올려두는 것이 ‘당사자를 위해’ 좋은 것만이 아닐 수 있다는 점에서, 이 말을 명령과 법칙의 자리에서 끌어내리는 것은 중요한 정치적 실천이 될 수 있다. 그렇다고 이 끌어내림의 실천이 절대적인 타자의 말, 모호한 말, 운동가나 이론가의 번역이 필수적인 중얼거림의 위치까지 이루어지는 것 또한 문제를 다시 처음으로 되돌리는 것이다. 이들의 말하기를 중얼거림과 명령 사이의 폭력적인 진자운동에 가두는 시작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그 중간에 위치한 의견이다.(책의 제목 『IMO』의 두 번째 뜻은 In My Opinion이다.) 물론 ‘의견’이라는 말은 목소리를 들리지 않게 했던 구조적 위치의 차이가 없다는, 말하는 자와 듣는 자가 평평한 세계에서 동등한 자격을 가진 시민이라는 인상을 준다는 점에서 기만적일 수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들의 말하기를 명령과 중얼거림 사이의 중간, 의견 즈음의 위치에 두는 것이며 어쩌면 그 정도의 기만은 중요한 담론적 실천이 될 수도 있다.
즉, 서발턴(하위 주체)과 지식인이 만나는 예외적 순간에 서발턴을 서발턴이 아닌 자리, 담론장에서 의견을 말할 수 있지만 틀린 말을 할 수도 있는 사람의 자리에 두는 것이다. 영미가 우리와 다른 자신의 대북관과 정치관을 펼치는 것처럼, 가르치는 말하기를 하고 싶어 한다면 그대로 들으면서 그를 세상을 평가하는 개인의 위치에 놓아둬야 한다.
뿐만 아니라, 당신은 ‘절대적 당사자’를 만들어두고 그 뒤에 숨어서도 안 된다. 서발턴 말하기의 재현에서 지배 이데올로기가 반영된 말(가짜 목소리)과 회복된 목소리(진짜 서발턴의 목소리)를 구분하는 판단은 궁극적으로 지식인이 하게 된다. 기지촌 여성을 성매매 여성으로 표상하는 재현은 폭력이라고 비판받지만, 기지촌 여성을 운동가로 이끌어 내는 재현은 폭력이라고 하지 않는다. 즉 변화의 ‘정도’만이 폭력성 판단의 기준이 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규범의 ‘방향’이 폭력성을 판단하는 데 들어있다. 재현하는 사람이 어떤 방향을 ‘그들을 위한 것’이라고, ‘옳다’고 생각하는지가 전제되어있는 것이다.
기지촌 여성 증언집을 만들려고 했지만, ‘기지촌 여성’도 ‘증언집’도, 진짜 영미, 지니, 윤선도 없었다. 관계 속에서 맥락적인 영미, 지니, 윤선만을 말하는 게 능사도 아니었다. ‘기지촌 여성’으로 묶는 것과 기지촌 여성을 개인으로 돌려놓는 것의 이중과제 안에서, 명령과 중얼거림의 사이에서, 예상할 수 없는 관계와 상황 속에서 타자화하지 않으며 ‘기지촌 여성’을 서술하는 방식을 일률적으로 정의하는 것은 힘들어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우선 엄밀한 증언이 되기를 포기하고 재현의 실패를 드러내는 하나의 재현이 되고자 했다.
[필자 소개: 이경빈. 서울대학교 인류학과 석사과정. 기지촌 여성, 월남민을 연구하고 있으며 정치인류학, 역사인류학을 전공하고자 한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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