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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희롱이 ‘산업재해’로 인정되면 바뀌게 될 것들
<산업재해로서의 직장 내 성희롱> 저자 최윤정 인터뷰
“요즘 여성의 귀가길, 주거 안전 이야기가 많이 나오잖아요. 사실 여성에게 안전이라는 이슈가 굉장히 중요한데 노동환경 안전에 대해선 아직 논의가 많지 않은 거 같아요. 여성들이 일하는 직장이나 회사에서 안전한지, 정말 무엇이 ‘안전’인지 이야기해야 하지 않을까요?”
15년 전, 직장 내 성희롱을 산업재해로 봐야 한다는 논문(『‘산업재해’로서의 직장내 성희롱에 관한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2003)을 썼던 최윤정 씨는 올해 그 논문을 보강하여 <산업재해로서의 직장 내 성희롱>(푸른사상)이라는 책을 냈다. 15년이란 시간이 흘렀지만 직장 내 성희롱을 산업재해로 인정해야 한다는 의견은 아직 ‘소수의견’으로 치부된다.
직장 내 성희롱 피해도 산업재해에 해당한다!
그동안 직장 내 성희롱이 산업재해로 인정된 경우가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다. 성희롱 피해를 산업재해로 신청한 최초 사례는 2000년 부산 새마을금고 사건으로, 피해자가 전치 3주의 부상을 입은 사실이 확인되어 겨우 산업재해보상을 받을 수 있었다. 직장 내 성희롱으로 인한 ‘정신적 피해’에 대해 산재 승인을 받은 최초의 사례는 2011년 현대차 사내하청 여성노동자 성희롱 사건이다.
이후 직장 내 성희롱 피해자의 산업재해 신청/승인 건은 매우 드물지만 나오고 있고 2016년 8건, 2017년 10건 정도로 조금 늘고 있는 추세다. 얼마 전에는 재직 시절 동료 교수로부터 성추행을 당했다고 밝힌 남정숙 전 성균관대 교수가 근로복지공단으로부터 산업재해로 승인을 받아 “미투(#MeToo) 역사의 진전”이라며 기자회견을 한 바 있다.
<산업재해로서의 직장 내 성희롱>의 저자 최윤정 씨.
하지만, 최윤정 씨의 말대로 여성의 ‘안전’ 이슈가 많은 관심을 불러오고 있는 지금도 여전히 여성들이 안전한 노동환경에서 일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한 논의는 폭넓게 이뤄지지 않고 있다. 미투(#MeToo) 운동 이후 직장 내 성희롱의 개별적인 사건들이 알려졌지만 그저 ‘사건’으로 회자되다 말거나, 가해자의 처벌 방식에 이야기가 집중되곤 했다. 그에 비해 피해를 어떻게 회복시킬 것이며 피해자를 어떻게 지원할 건지, 어떤 사회 구조를 만들어서 이 문제를 예방할 건지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들리지 않았다.
책 <산업재해로서의 직장 내 성희롱>에선 이런 현실을 지적하면서 ‘직장 내 성희롱’이 왜 여성 노동자들의 노동환경, 건강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지를 설명한다. 미투 이후의 시대, ‘산업재해로서의 직장 내 성희롱’이 사회 분위기를 바꾸는 중요한 논의의 물꼬가 될 수 있겠다 싶어 저자를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인터뷰를 통해 지금 ‘산업재해’의 범위가 가지고 있는 한계를 짚으며 왜 직장 내 성희롱이 산재로 인정되어야 하는지, 여성이 안전한 노동 환경에서 일하기 위해 산재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 흥미로운 논의가 이어졌다.
산업재해는 ‘남성적 영역’?!
회사에서 스트레스 많이 받는 일이 생기면 ‘나, 이거 산재 신청할 거야!’라고 농담은 해도, 실제로 산재 신청을 할 수 있는 경우를 구체적으로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직장 내 성희롱이 산업재해로 인정될까? 라는 생각은커녕 많은 여성 노동자들이 ‘산업재해’를 자신과 먼 이야기처럼 느끼고 있다.
최윤정 씨의 설명에 따르면 “산업재해는 말 그대로 업무와 관련하여 다치거나 질병으로 이환된 모든 경우에 해당하는 포괄적인 의미”다. 하지만 실제로 ‘산업재해’로 적용받기 위해선 특정한 구성 요건을 만족해야 한다. 첫 번째는 업무상 사유에 의한 것이어야 하고, 두 번째는 상병이 업무와 관련되어 있다는 걸 입증해야 한다.
이 정도 설명만 들으면 직장에서 일어난 어떤 일로 질병이 생기거나 피해가 생겼을 경우의 대부분 산재 인정을 받지 않을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 사실 이 법이 생긴 취지와 목적은 꽤 제한적이다.
“산업재해를 사업주가 보상하도록 하는 산재보상법은 1963년에 재정되었다. 이건 당시 건설·제조업의 2차산업을 중심으로 산업화되기 시작하면서 소위 ‘굴뚝산업’에서 발생한 사고나 질병에서 노동자를 보호하고 이에 대한 보상을 제도화할 필요성에서 생겨난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산업재해를 ‘굴뚝재해’, ‘남성적 영역’이라고 인식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4차산업 시대라 불리는 지금도 여전히 “산업재해를 신체 부상과 같은 사고성 재해인 ‘굴뚝재해’를 중심으로 보수적으로 인식”하는 환경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노동시장에서 남성과 여성의 취업자 수가 57:43 정도 수준이라는데 산재 노동자의 남성과 여성 비율이 80:20이라는 지표”도 변화하지 않은 인식을 보여 주는 증거다.
<산업재해로서의 직장 내 성희롱>(최윤정 지음, 푸른사상, 2019) 표지 이미지
여성의 ‘노동 환경과 건강’에 관해 밝혀지지 않은 사실
물론 산업의 변화에 따라 산업재해의 범위도 변화해왔다. 2013년 법 개정 이후, 이전에는 주목해서 다루지 않았던 근골격계 질환, 업무상 과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등을 명시하면서 업무상 질병의 범위를 점차 늘려가고 있다. 그렇지만 여전히 한계가 있다. 특히 여성 노동자들의 질병 중에는 그 범위 안에서 해석되지 못하는 것들이 많다.
최윤정 씨는 “산업재해라는 건 기본적으로 의료적인 진단을 기준으로 하는데, 사실 여성 노동자들의 질병은 아직 의료화되지 않은 부분이 많다”고 설명했다.
“여성의 근골격계 질환을 심사하는 경우, 가사노동에 의한 것이거나 평소 생활습관 고령화 등에 따른 퇴행성 질환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업무와의 상병과의 상관관계가 불분명하다고 지적하는 일도 있다.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의사가 근골격계 질환과 같은 경견완 장애를 작업환경과 연관해서 발생하는 재해가 아니라고 단정 짓거나 이 증상이 ‘여성에게만 발생하는 심리적인 현상’으로 간주해서 인해 산업재해로 인정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직장 내 성희롱으로 인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나 우울증과 불안 등의 질병에 대해선 산재로 인정받기가 쉽지 않다. 최윤정 씨는 “최근에 여성 가스검침원들의 (성희롱을 겪는) 노동 환경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는데, 실제로 여성 노동자들이 일하면서 처하는 위험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또한 “막연하게 산업재해의 범위를 논할 게 아니라 실질적인 실태조사가 필요하다”며 “캐나다 등 해외에서 진행되었던 것과 같은 ‘여성 노동자의 건강 문제’에 대한 정부 차원의 조사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직장 내 성희롱은 단지 성적 수치감을 일으키는 사건이 아니라 그 이후 겪는 2차 피해로 인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우울증 및 불안, 적응장애 등을 유발할 수 있다는 점, 성희롱뿐 아니라 직장 내 성차별은 업무능력을 저하시키고 자존감을 떨어뜨리는 등 스트레스를 유발한다는 점, 남성 신체를 중심으로 설계된 도구나 장비가 여성의 건강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점 등. 여성 노동자의 노동 환경과 건강의 관계에 대한 조사와 연구는 너무 미흡해서 앞으로 해야 할 과제가 쌓여있다.
책에서 설명된 ‘여성과 직업건강 연구의 악순환의 구조’ 출처: <산업재해로서의 직장 내 성희롱>
‘산업안전’ 개념에 여성의 경험이 반영되어 있는가?
나아가 최윤정 씨는 “여성/노동 분야에서뿐만 아니라 의료/의학 분야에서 여성의 노동과 질병에 대한 세부적인 연구가 진행되길 바란다”고 했다. 산재보상 여부를 판단할 때 ‘의학적인 공증’을 통해 입증이 필요한데 아직 “산업 보건 영역에서 새로운 문제, 특히 여성 노동자의 건강 문제가 제기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희롱 피해에 대해 전문적인 지식이 있는 의사가 있다면, 피해자가 겪는 증상에 대해 수월하게 접근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피해자가 이를 말하기도 쉬울 것이다.”
성희롱 피해가 의학적으로 인식될 수 있도록 하는 일과 동시에 놓치지 않아야 하는 부분이 또 있다. “여성의 일은 남성의 일에 비해 안전하다거나 여성 노동자의 건강 문제가 남성의 건강 문제에 비해 가벼운 문제로 치부되지 않도록, 그래서 차별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거다.
최윤정 씨는 제도적으로 체계를 만드는 일도 중요하게 언급했다. “여성이 안전한 작업환경에서 일할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산업안전의 개념이 여성의 경험에 기반하여 확장·재구성될 필요”가 있으며, “산업안전보건법 체계에 관련 내용을 포함시키는 방식”도 논의해봐야 한다고 제안했다.
최윤정 씨는 “산업보건기준에 관한 규칙에서 직무 스트레스의 예방조치(669조) 안에 ‘작업계획, 근로시간 단축, 금연, 고혈압 관리 등 건강증진 프로그램 시행’ 외에 인간관계와 성희롱 등을 명시하여 실질적인 예방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하는 건 어떻겠냐”는 의견도 내놓았다.
‘산업보건기준에 관한 규칙’ 내용 (출처: 국가법령정보센터)
“산업안전 개념에 여성의 경험을 반영하는 일이 차별 효과를 가지고 오는 제도를 바꿀 수 있고, 결과적으로 평등을 실현하는 개념상의 적극적 조치로 인식될 수 있다”는 점에서 유용한 제안이다.
작년 6월, 민주평화당 조배숙 의원 외 12인이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제37조 제1항에 직장 내 성폭력, 성희롱을 추가하는 안을 발의한 바 있지만 위원회 심사에 머물러 있는 상태다. 여성 노동자의 안전과 건강을 위해서 제도적 대안을 만들어가는 논의와 시도는 계속되어야 한다.
산재로 인정되면 ‘성희롱 예방’ 효과도 커질 것
인터뷰 내내 최윤정 씨는 “여성 노동자의 건강과 안전”을 위해서 ‘산재’가 할 수 있는 역할이 있다고 몇 번이나 강조했다.
많은 사람들의 생각 속에서 직장 내 성희롱 피해가 산재 적용을 받을 수 있다고 인식되고 실제로 적용이 되는 일이 많아진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산재의 역할은 단지 보호만이 아니라 예방의 차원에서도 크게 발휘될 수 있다.”
일단 “피해가 드러나기 어려운 현실에서, 직장 내 성희롱을 사적인 문제로 보고 피해자를 비난하는 태도와 문화를 교정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또한 “직장 내 성희롱을 노동재해로 인식함으로써 여성이 안전하게 일할 수 있는 노동 환경을 위한 직장 내 성희롱 예방이 더욱 강조”될 수도 있다.
지금도 직장 내 성희롱 예방 교육은 실시되고 있지만 ‘형식적인 교육이나 부실한 교육 등’의 문제가 매번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성희롱 피해가 ‘산재’라고 한다면 사업장이나 사업주 입장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예방에 나설 가능성이 높아진다. “산업재해 예방 정책은 일반적으로 ‘무재해 정책’으로 표방되기 때문에 적극적인 관리와 감독의 자세가 요구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산재로 인정되면 피해자가 실질적인 피해에 대한 치료와 지원을 받을 수 있다. “피해자 대부분 성희롱 피해를 개인의 노력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진단하는 최윤정 씨는 이제 제도적으로 의료적 지원이 제공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와 동시에 “정신과 진료와 심리 상담 등 실질적으로 성희롱 피해를 치료할 수 있는 범위를 넓혀서 산재보상 체계를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고용노동부에서 안내하고 있는 ‘직장 내 괴롭힘 방지법’ 홍보 자료 (출처: 고용노동부)
7월 16일부터 시행된 ‘직장 내 괴롭힘 방지법’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다. 이 법에 따르면 직장 내 괴롭힘으로 인해 질병이 발생한 경우 산재 보상을 받을 수 있다고 하는데, 직장 내 성희롱의 산재 인정도 늘어날 수 있을까?
최윤정 씨는 “이 법으로 인해 직장 내 괴롭힘과 성희롱 이슈가 더 많이 이야기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램을 밝혔다. 사업장에서 괴롭힘에 대한 예방을 강화해야 하는 부분이나, 피해자의 질병에 대한 논의 부분에서 성희롱 문제와 일맥상통하는 부분들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과정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산재 신청 자체가 늘어나서 다양한 사례가 생기는 일도 중요한 것 같다”고도 전망했다. 다양한 여성 노동자의 경험이 공적으로 드러났을 때, 그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확장될 수 있으니까 말이다.
<산업재해로서의 직장 내 성희롱> 이슈가 “조금 더 대중적인 담론이 되길 바란다”고 이야기하는 최윤정 씨는 “이걸 계기로 다양한 분야에서 여성 건강에 대한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박주연 기자)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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