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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녀는 참지 않았다
2019 페미니스트 ACTion! ⑩구오(俱悟)
※ 혐오와 차별을 멈추라는 여성들의 목소리가 온라인에서 결집되어 거리에서도 울려퍼지는 시대, 지금 곳곳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되는 새로운 페미니스트들의 액션을 기록합니다. 이 기획은 한국여성재단 성평등사회조성사업 지원을 받아 진행됩니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바로가기
전래동화 줄거리, 해도 너무하네
“갈 곳이 없어진 선녀를 데려가 아내로 삼으세요. 참, 아이 셋을 낳을 때까지는 날개옷을 절대 돌려주면 안 돼요. 아이가 둘이라면 오른팔에 한 명을, 왼팔에 나머지 한 명을 안고 하늘로 올라갈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셋이라면 선녀 혼자서는 아이들을 데리고 갈 수 없을 거예요.”
사슴은 나무꾼에게 일렀다. 위기에 처한 자신을 구해준 나무꾼에게 보답하기 위해 계책을 알려준 것이다. 날개옷을 잃어버린 선녀가 나무꾼과 혼인하고 자식을 낳고 살게 된다는 이야기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전래동화 <선녀와 나무꾼>의 줄거리이다. 입에서 입을 통해 전해져 내려온 이 전래동화의 주인공은 타인이 목욕하는 모습을 관음하고, 남의 옷을 훔쳐 그것을 빌미로 혼인을 강제한다.
무언가 이상하지 않은가? 우리가 자라오면서 재미있게 읽고 들었던 전래동화, 찬찬히 뜯어보면 문제가 많다. 페미니즘에 눈뜬 사람이라면 어릴 적 읽었던 전래동화를 지금은 다시 들여다보기 힘들 정도일 것이다. 우리가 독서토론모임 <구오>를 이끌어가며 가부장적이고 남성중심적으로 편향된 기존의 한국 전래동화를 바꾸어 새로 써야겠다는 생각을 실천으로 옮기게 된 것은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선녀는 참지 않았다> 중에서 구오 삽화 (copyright 여름밤)
<구오>는 2015년 늦은 겨울 즈음, 다섯 명의 친구들이 모여 시작되었다. 같은 학교에서, 한 학기 동안 고전을 읽고 토론하는 교양 수업을 마칠 때 즈음, 종강 후에도 함께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눌 친구들을 서로 구한 것이 그 작은 시작이었다. 단순히 혼자 책을 읽고 자신만의 경험에 비춘 생각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구성원의 생각과 경험을 모아 ‘함께 새로이 깨달아가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모임을 시작할 때의 바람을 담아 ‘함께 구(俱)’, ‘깨달을 오(悟)’를 써서 ‘구오(俱悟)’라는 이름을 짓고, 그렇게 2015년 겨울부터 지금까지 함께 책을 읽고, 고민하고, 생각을 나누고 있다.
<구오>는 페미니즘을 화두로 결성된 모임이 아니었다. 하지만 함께 책을 읽고 논의하는 과정에서 구성원 모두가 페미니즘 이슈에 크게 관심 있다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매주 혹은 격주로 만나 읽고 싶은 책을 제시하고 선정했는데, 한 가지 분야에만 치중하지 않고 폭넓은 책을 접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페미니즘을 다루는 책뿐만 아니라, 문학/비문학을 넘나드는 다양한 책을 함께 읽었다. 때로는 책을 넘어 영화를 비롯한 문화콘텐츠 전반에 관심을 가지고 함께 논의해왔다. 우린 다양한 분야의 책을 탐독하면서도, 의도하지 않았지만, 항상 페미니스트의 관점에서 논의하고 이해하는 과정을 거치게 되었다.
선녀는 참지 않았다
우리가 여성주의적으로 재해석한 전래동화를 세상에 내놓게 된 것은 특정한 계기에서 비롯되지는 않았으나, 어쩌면 필연적인 결과였다. 수개월 동안 함께 책을 읽고 토의하며 문학을 비롯한 기존의 문화콘텐츠가 철저히 남성중심적 시각에서 쓰이거나, 가부장주의에 바탕한다는 점에서 늘 한계를 느꼈고, 답답한 마음이 컸다. 특히 아직도 ‘고전’으로 칭송받고 있어 수많은 사람이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작품들 속에서 온갖 종류의 차별과 혐오를 직면할 때, 분노를 거쳐 맥이 빠지는 경험을 수차례 했다.
그렇다고 그저 우울한 감정에 빠져있기에는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았다. 그래서 함께 고민하기 시작했다. 왜 여성들의 시각과 여성들의 서사를 담은 콘텐츠의 다양성이 이렇게 부족한가? 대체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가? 기존의 문화콘텐츠에서 대안적인 이야기가 없다는 점은 우리를 스스로 움직이게 했다. 늘 콘텐츠를 수용하는 자리에 있던 우리가 결국 직접 하나씩 우리 손으로 만들어가고자 마음먹은 것이다.
구오(俱悟) 회의 장면 (copyright 구오)
우리의 고민과 생각을 실천에 옮기기에 가장 적합한 소재는 전래동화였다. 아주 어릴 적부터 접하게 되는 콘텐츠이자, 전통이라는 이름 아래 차별의 고리를 끊어내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전해 내려오고 있는 이야기. 어릴 때 접한 동화의 내용은 자연스럽게 한 사람의 머릿속에 자리 잡아 특정한 방식으로 왜곡된 인식을 형성할 수 있다. 여성의 몸을 관음하고 여성의 삶을 유린하면서 그걸 재치있는 행동이라고 착각하는 남성들의 풍조에 나무꾼이 일조하지는 않았을까?
그래서 우리는 전래동화를 새로이 써내려 갔다. 선녀와 나무꾼, 우렁각시, 장화홍련을 포함한 열 가지 이야기를 우리의, 여성의 목소리를 담아 다시 썼다. 그리고 결과물을 온라인 크라우드펀딩 사이트를 통해 처음 선보였으며, 지난 5월 정식으로 책으로 출간하였다.
크라우드펀딩 사이트를 통해 처음으로 우리의 이야기를 내보였을 때, 우리 이야기에 공감하고 같은 고민과 문제의식을 지니는 사람들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지지와 응원을 담은 따뜻한 말을 보내주신 분들을 통해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한 믿음과 함께 앞으로 더 나아갈 힘을 얻었다. 어떤 독자는 책을 정말 꼼꼼히 읽고 책 속에서 발견된 오타를 하나하나 짚어 재출간 시 도움이 되길 바란다며 보내주시기도 하였다. 덕분에 우리의 이야기는 정식 출간되면서 더 좋은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선녀는 참지 않았다>(위즈덤하우스 2019)에는 독자들이 새로운 상상력을 펼칠 수 있도록 도왔으면 하는 바람이 담겨 있었고, 이 이야기를 접한 독자들은 또 우리가 용기를 내어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선순환의 과정이 이어져 왔다.
<선녀는 참지 않았다> 책 표지 이미지. (copyright 위즈덤하우스)
같은 장면, 다른 생각
전래동화를 새로 쓰면서 원고의 초안을 지인들에게 선보이고 퇴고하는 과정을 거쳤다. 그들이 어떤 장면에서 웃음을 터뜨리고, 어떤 장면에서 화를 내고, 어떤 부분에 공감하는지를 바로 곁에서 볼 수 있었다. 페미니즘에 관심이 있건 그렇지 않건, 대부분 상당한 공감을 표하며 이야기를 읽어주었다. 그러나 우리에게 충격을 안겨 주었던 것은 같은 장면을 두고도 읽는 사람에 따라 정반대로 반응했다는 사실이다.
어떤 이들은 선녀가 옥반지를 낀 손으로 나무꾼에게 응징의 주먹을 날리는 장면을 보며 깔깔 웃었다. 나무꾼에게 내린 ‘천일 간 투명 옷 입기’(초안에서는 투명 옷의 기한이 백일이 아닌 천일이었다) 형벌이 너무 약하다며 더 센 벌을 내려야 한다는 이들도 있었다. 전래동화의 묘미는 권선징악이며, 현실에서는 타협해야 하니 동화에서만큼은 타협하지 않고 잘못을 저지른 인물을 더 벌했으면 한다는 의견이 종종 나왔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선녀가 나무꾼에게 날린 주먹을 보고 더는 읽을 엄두가 나지 않는다고 했다. 천일 간의 투명 옷 형벌을 두고 나무꾼이 불쌍할 정도로 오래 괴롭히는 것이라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단순히 나무꾼에게 감정이입했기 때문에 나온 의견이 아니었다. 누구보다 페미니즘을 깊이 공부하는 이들도 던진 여성주의적 물음이었다. ‘힘’으로 잘못을 저지른 인물을 ‘벌’하는 서사가 현재의 남성중심적 사회구조와 무엇이 다르냐는 질문이다.
우리 사회는 권력과 자본이 사람을 지배하고 차별을 생산하는 기제가 작동하고 있다. 그 안에서 권력, 자본은 남성에게 편중되어왔다. 그래서 어떤 페미니스트들은 이 편중된 자원을 여성들이 동등하게 나눠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실상 <구오> 구성원들을 포함한 대부분의 20~30대 여성들이 깊이 공감하는 의견일 것이다.
여성이 동등하게 권력을 갖고, 기업과 국가기관을 비롯한 각종 분야에서 높은 지위에 오른 후 차별적인 제도를 개혁하거나 영향력을 행사해야 가부장적인 사회구조를 바꿀 수 있다는 인식이 우리 사이에 자리해있다. 일단 힘을 가져야 무엇이든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이다. 우리 이야기 속 바리데기가 왕이 되어 새로운 질서로 불라국을 다스리고, 홍련이 원님이 되어 장화의 누명을 풀어주는 것처럼.
그러나 이렇게 힘이 있어야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회가, 설사 그 사회가 여성이 권력을 쟁취하는 사회라 한들 진정으로 평등한 사회라 일컬을 수 있을까?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있는 남성을 여성으로 갈아치울 수 있다면, 피라미드의 구조는 그대로 유지되어도 괜찮은 것일까? 우리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그 어떤 차별도 존재하지 않는 평등한 세상이다. 그 세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구조 자체에서 벗어나려는 노력도 해야 한다.
우리는 권력 지향적 페미니즘에 의문을 품게 되었지만, 여전히 ‘이것 말고 다른 방법이 있어?’라는 의문을 함께 품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선녀와 나무꾼>에 대한 지인들의 상반된 반응을 접한 뒤, 나무꾼에게 투명옷을 선사하는 결말이 아니라면 어떤 방식으로 기존 서사의 부당함을 꼬집을 수 있을까 참 많이 고민했다. 선녀의 강인한 능력을 이용해 나무꾼이 선녀의 옷을 빼앗으려 한 것에 대한 대응으로 그의 옷을 똑같이 빼앗고 온 마을 사람들 앞에서 그의 잘못을 공표하는 대신, 어떤 방식으로 이 ‘관음의 역사’를 새롭게 지적할 수 있을지 말이다.
안타깝게도 결말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천일 간의 형벌 기간을 백일로 줄이고, 등장인물들의 대사를 조금씩 수정하는 것으로 마무리 지었다. 고민을 거듭하는 동안에도 하루가 멀게 쏟아지는 여성 대상 범죄 기사들을 보면서, 여성이 주인공이 된 미디어에 쏟아지는 근거 없는 비난들을 보면서, 여느 때처럼 분노를 느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장 차별에 맞설 방안으로 선녀가 나무꾼의 악행을 참지 않는 것 외에는, 다른 방안을 떠올릴 수가 없었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분들 중 우리가 새로 쓴 <선녀와 나무꾼>을 읽은 사람이 있다면, 그분들께도 질문을 던지고 싶다. ‘참지 않는’ 선녀를 보며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말이다. 선녀가 참지 않았던 방식에 대해 통쾌함을 느꼈는지, 안타까움을 느꼈는지. 어떤 쪽에 서 있든지 당신의 생각을 존중한다. 여성을 향한 차별과 폭력이 만연한 현재 사회를 바꾸기 위한 페미니즘의 모습은 다양하니까. 다만 우리는 편향된 권력 관계 속에서 누군가는 처벌하고 처벌당하는 현재의 질서 대신, 또 다른 방식의 페미니즘적인 대안이 있지 않을지 계속 생각해보고 싶을 뿐이다.
<선녀는 참지 않았다> 중에서 구오 삽화 (copyright 여름밤)
페미니스트 유토피아
우리가 전래동화를 통해 재현한 가부장제에 대한 비판은 두 가지 방식으로 구현되었다. 하나는 앞서 언급한 바리데기나 홍련처럼 여성 인물들이 주체적으로 행동하거나 권력을 쟁취하는 방식이다. 이를 통해 현실 사회에서 남성 권력에 의해 온갖 차별에 직면하는 이들에게 힘을 실어주고 싶었다. 또 다른 방식은 나무꾼처럼 질타받을 행동을 한 남성 인물을 처벌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가부장제의 폭력을 당연하지 않은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허나 이러한 방식은 모두 “개인”이 성공하거나 “개인”을 처벌하는 방식으로, 신자유주의와 맥을 함께 하고 있다. “주인의 도구로는 결코 주인의 집을 무너뜨릴 수 없다.”라는 흑인 페미니스트 오드리 로드의 말대로 권력과 자본이 차별을 주도하는 현 체제를 벗어나는 상상력을 발휘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사실 여성 개인이 성공을 이룩하거나, 남성 개인을 악마화하는 흐름은 경계할 필요가 있다고 느낀다.
이런 문제의식을 기반으로 최근 관심을 가지는 주제는 ‘여성 연대’와 주변부의 목소리를 듣는 작업이다. 우린 이 주제를 소박하게나마 새로 쓴 <박씨전>과 <반쪽이>를 통해 전달하고자 했다. <박씨전>에서 주인공은 옆 동네 여성들과의 유대감을 통해 외모에 대한 강박에서 벗어난다. 이 이야기는 최근 이슈가 된 탈코르셋 운동과 이를 지지해주는 연대와 응원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적어나갔다.
<반쪽이>는 원전에서는 전혀 주목받지 못했던, 반쪽이라는 주인공에게 팔려가는 여성이 새로운 동반자를 만나는 이야기로 바뀌었다. 앞으로 이런 여성 연대의 역사와 기록되지 않은 여성들에 대한 서사가 계속 쓰일 기회가 있길 바란다. 주류에서 배제된 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의 이야기를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작업은 우리가 생각하는 페미니즘에 좀 더 가까워지는 길이 아닐까?
페미니스트로서 하나의 텍스트를 새롭게 재해석해나가는 과정은 즐거운 동시에 지난한 과정이었다. 부당하거나 불편하다고 느꼈던 부분을 새롭게 다시 써보니 통쾌하기도 했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페미니즘적 상상력의 한계에 부딪힌 것은 아닌가 하는 고민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나아가 이 글을 페미니즘적이라고 할 수 있을지에서부터 어딘가 내가 놓친 혐오가 도사리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고민들까지. 우리는 어쩌면 ‘완벽한 페미니스트’라는 함정에 빠져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고민들과 함께한 치열한 시간 끝에 우리 이야기가 세상에 나왔다. 이 책이 세상에 나오게 된 것은 마음이 맞는 페미니스트 친구들과 이를 후원하고 지지해준 수많은 응원의 목소리 덕분이었다. 서로가 아이디어를 보태고, 첨언하고, 조언을 던짐으로써 누군가는 나와 생각을 함께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기쁨에 가닿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런 작은 마음들이 이 글을 끝까지 완성하고 세상에 내놓을 수 있도록 만든 원동력이지 않았나 싶다. 함께 세상에 대해 논할 수 있는 벗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행운인가!
우리는 우리의 이야기가 사람들에게 어떻게 다가갈지 여전히 설레고 궁금하다. 앞서 언급했듯이 완벽한 서사를 구축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기도 했는데, 최근 <페미니스트 유토피아>(휴머니스트, 2017)라는 책을 읽고 마음이 조금이나마 편안해졌다. 미국 페미니스트와 한국 페미니스트 64인이 꿈꾸는 각기 다른 유토피아는 페미니스트가 꿈꾸는 이상향에 대한 사고의 지평을 넓혀주었다. 여성이 단 하나의 단일한 정체성이 아니듯이, 페미니스트도 그렇다. 각자의 위치에서 저마다 중요하게 생각하고 꿈꾸는 세상은 가지각색이다. 이처럼 우리가 쓴 책도 기존의 것들을 새롭게 보는, 다양한 여성 서사의 하나로 읽어주었으면 좋겠다.
구오(俱悟) 회의 장면 중에서. (copyright 구오)
함께, 깨닫다
우리의 이야기는 10가지의 동화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도 여성주의적 문화콘텐츠를 생산하는 활동을 다양하게 지속해나갈 예정이다. 우선 여전히 변화가 필요한 채로 남겨져 있는 한국의 전래동화, 설화, 신화를 여성주의적으로 재해석하는 작업을 계속 진행하려 한다. 전래동화를 새로 쓰는 과정에서 여러 차례 후보에 올랐던 단군신화, 바보온달과 평강공주, 효녀 심청, 춘향전 등의 이야기를 더욱 다채로운 페미니스트의 관점을 담아 새로이 써 내려가고 싶다.
한국의 건국신화라고까지 일컬어지는 단군신화에서 단군은 의문을 품을 여지도 없이 남성 인물로 그려지는 모습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평강공주가 바보온달을 보필해서 왕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평강공주 자신을 위하고 돌아보는 삶을 그리며, 현재 우리 사회가 제시하는 성공의 기준에서 벗어난 삶의 방식을 찾는 모습을 그릴 수도 있다. 너무나도 당연하게 생각했던 모든 것들을 다시 돌아보고 물음으로써, 얼어붙은 사고의 틀을 깨는 상상력을 이야기를 쓰는 이와 읽는 이가 함께 빚어나갈 수 있도록 만드는 콘텐츠를 선보이고 싶다.
서툴게만 느껴지는 글을 세상에 내보인다는 것은 생각보다 무게가 느껴지는 작업이기에, 전래동화 다시 쓰기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스스로 많이 배우고 성찰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러한 배움을 토대로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좀 더 나은 사회를 위해 끊임없이 고민할 것이다. 그리고 다른 페미니스트와의 연대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최근 페미니스트의 이름을 건 다양한 문화콘텐츠가 등장하고 있다. 그런 콘텐츠를 생산하는 이들을 서점에서, 각종 SNS에서, 유튜브 영상을 통해 문득문득 마주하게 될 때마다 우리 모두가 함께함을 느낀다. 그리고 페미니스트로서 살아갈 힘을 얻는다. 이렇듯 우리는 서로가 서로의 용기고 힘이다. 누군가가 우리의 이야기를 읽으며 즐거움을, 위로를, 힘을 얻을 수 있기를 바라며, 오늘도 <구오>는 서로의 어깨를 두드려주며 나아간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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