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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성폭력’ 이야기라면 이제 충분히 들었다고?
[페미니즘으로 보는 식민/분단/이주] 초국적 여성연대의 장, 시민법정
※ 일다는 식민-전쟁-분단의 역사와 구조를 여성주의 시각으로 재구성하는 기획기사를 연재합니다. 다양한 페미니스트 연구자들이 식민지배와 내전, 휴전으로 이어진 한국 현대사가 낳은 ‘여성의 이동’, 군 성폭력과 여성동원, 군사주의와 여성의 지위 등의 젠더 이슈를 제기하고, 사회구조와 여성 주체들 사이의 긴장을 드러내며 전쟁/분단/이주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합니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바로가기
민간 주도의 법정, 시민법정(people’s tribunal)의 전복성
실제의 법정에서 항상 정의가 실현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법정은 때때로 최종 판결의 부당함을 드러내면서 우리에게 무엇이 진실인지 되묻게 만드는 장소가 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일본군 ‘위안부’ 관련 재판의 경우가 그렇다. 1991년, 김학순을 비롯한 3명의 원고가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지만, 이 재판을 시작으로 관련 소송은 ‘결국’ 모두 패소했다.
그러나 ‘정의’에 대한 ‘법’의 태만을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었던 세계의 여성들이 가해국 일본의 수도 도쿄에서 뭉쳤다.
민간 주도의 법정, 이른바 ‘시민법정’(people’s tribunal)은 주로 현실의 법정에서는 책임을 묻는 것이 불가능해진 상황에서 시도된다. 원래는 법정이 판결의 대상으로 삼는 ‘민’들이 거꾸로 법정을 만들어서 국가를 대상으로 판결을 내린다는 전복적인 의의가 있다.
▲ 2000년 12월 8일~12일 일본 도쿄에서 열린 여성국제전범법정의 모습. ⓒ출처: 여성들의 전쟁과 평화 자료관 wam(Women's Active Museum on war and peace) 홈페이지
2000년 여성국제전범법정: 국경을 넘은 페미니스트 연대
‘시민법정’의 형식을 빌린 2000년 여성국제전범법정(이하 ‘2000년 법정’)의 방청객은 나흘간 연일 천 명을 웃돌았고, 각국에서 3백여 명의 취재진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정치적 압력에 굴복한 일본 방송국 NHK가 제작한 다큐에서는 히로히토 천황에 대한 유죄 선고, 일본 가해병사의 증언 등이 삭제되고, ‘일본군’, ‘성노예’, ‘처벌’ 등의 용어도 일절 언급되지 않도록 편집되었다. ‘2000년 법정’ 이후 위안부 운동은 일본 국내에서 우익들에게 거센 공격을 받게 되는데, 오히려 이러한 역풍은 여성들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 것이었는지를 말해 주는 지표가 된다.
‘2000년 법정'은 일본 가부장제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천황에게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관련하여 유죄 판결을 내렸다는 점에서, 동시에 일본군 ‘위안부’였던 아시아의 피해여성들과 세계의 페미니스트들이 함께 말하고 듣는 장(場)을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사건이다. 특히, 마쓰이 야요리(松井やより)의 활동은 법정의 시작부터 끝까지 일본의 여성운동을 초국적 운동으로 주도했다는 점에서 특별히 주목할 만하다.
마쓰이 야요리는 아사히 신문사 기자로 일하면서 1970년대 ‘기생관광’과 공해수출 문제를 취재한 것을 계기로 여성과 아시아라는 주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남성 중심의 보수적인 일본 매스컴 업계에서 페미니즘은 일관되게 금기시되었기 때문에, 활동 후반기에는 그의 기사가 실리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 마쓰이 야요리의 모습과, 국내 번역된 그의 저서 『사랑하라 분노하라 용기 있게 싸워라』 ⓒ출처: 여성들의 전쟁과 평화 자료관 wam 홈페이지 https://wam-peace.org/en/publications
1994년 퇴직 후 페미니즘 운동에 전념하여 ‘2000년 법정’을 성공으로 이끌었지만, 2002년에 말기암 선고를 받고 82일 후 세상을 떠났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운명에 맞선 마쓰이는 사망 나흘 전까지 집필을 위해 펜을 놓지 않았고, 마지막까지 ‘여성들의 전쟁과 평화 자료관’(wam: Women's Active Museum on war and peace)의 설립에 힘을 쏟았다. 그의 뜻을 이어받은 동료들은 전시 성폭력을 ‘젠더 정의’의 관점으로 바라보고, 피해와 동시에 가해 책임자를 명확히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자료관을 2005년에 설립했다.
마쓰이 야요리는 죽음을 맞이하기 직전까지 “세상을 바꾸고 싶다”고 말했다고 한다. 너무 늦었지만 그에게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 ‘2000년 법정’이 단숨에 세상을 바꾸지는 못했지만, 법정을 구현하는 과정에 참여했던 이들과 법정을 목격한 이들과 전해 들은 자들의 삶이 변했고, 그들을 둘러싼 관계들의 자장(磁場)이 변했다고 말이다.
권력 없는 정의는 무력하다고? 이의 있습니다!!
파스칼은 “권력 없는 정의는 무력하다”고 말했다. 강제할 힘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2000년 당시에도 실효성 없는 ‘시민법정’에 대한 조롱 섞인 비난이 있었다. 그러나 법정이 열리기 전부터 이미 ‘위안부’ 피해당사자들은 법적 구속력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현실적으로 처벌할 수 없음을 알고서도 이 재판을 실현하길 원했을까?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은 기본적인 인간관계조차 믿지 못하게 되어 오랫동안 존재의 위기상태로 내던져졌다. 그러나 “산산이 부서진 자기감(sense of self)은 그것이 처음 세워졌던 방식대로, 즉 다른 사람들과의 연결 속에서 다시 세워질 수 있다.”는 주디스 허먼(Judith Herman)의 말처럼, 인간관계에 손상을 입힌 사건의 경우, 생존자의 사회적 세계를 구성하는 사람들이 그 결과를 바꿀 수 있는 힘 또한 갖는다. ‘2000년 법정’에서는 이처럼 ‘자기’와 ‘세계’를 함께 회복하는 계기를 가질 수 있었던 이들이 있었다.
“지금까지 정의를 요구해 온 10년간의 어려운 싸움 끝에 열리게 된 ‘2000년 법정'은 줄곧 바래 왔던 정의를 내게 보여주었습니다. 우리에게 귀 기울이고 우리의 존엄을 회복시켜준 재판은 이것이 처음이었습니다.”
-포마사 살리노그(필리핀 피해여성)의 증언 중에서-
지구 반대편, 과테말라 여성시민법정이 열리기까지
과테말라의 요란다 아기라르(Aguilar Yolanda)는 ‘2000년 법정'에서 전시 성폭력 피해자로 증언대에 섰던 인물이다. 그는 도쿄에서의 경험을 계기로, 과테말라에서 금기시되어온 내전(內戰) 시기 성폭력 피해 경험을 공유하는 장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2002년에 ‘전시 성폭력 피해자로부터 변혁의 주체로’라는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되었다. 우선, 각지에서 선주민들의 언어와 스페인어를 동시에 구사하며 피해여성들의 목소리를 듣고 전할 수 있는 여성 프로모터를 양성했고, 마을마다 작은 단위의 소모임을 꾸렸다.
그러나 피해자들이 바라는 가해자의 처벌과 보상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과테말라에서는 국민화해법에 따라 내전 시기의 정치범죄에 대해서는 면책이 보장되고, 성폭력에 대해서는 오히려 피해자에게 죄를 전가하는 사회적 인식이 만연했기 때문이다. 형사재판의 실현이 어려워지자, 요란다는 민간이 주도하는 ‘시민법정’의 개최를 주장했다.
▲ 2010년 3월, 과테말라 내전 시기 성폭력 범죄에 대한 책임을 묻는 과테말라 여성시민법정. ⓒ사진 출처: 일본 라틴아메리카 협력 네트워크(RECOM) http://jca.apc.org/recom
결국 2010년 3월, 과테말라시티대학에서 5백 명 이상이 참여한 가운데, 이틀에 걸쳐 과테말라 여성시민법정(이하 ‘과테말라 법정’)이 열렸다. 방청석에는 110명의 여성 원고들이 앉아있었고, 과테말라 치안부대에 의한 강간에 대해 처음으로 유죄 판결을 받아낸 마야 여성 후아나 멘데스를 비롯한 성폭력 피해자 5명이 ‘명예판사’로 임명되었다.
‘2000년 법정'과 달리, 증언자들의 익명성을 중시한 점이 눈에 띈다. 증언자들이 마을로 돌아갔을 때 불이익을 당하지 않도록 단상에는 실루엣만 보이는 가림막을 설치했다. 명예판사가 읽어 내려간 최종 판결에는 위법행위가 자행된 것에 대한 정부의 책임이 선고되었고, 내전 시기 인권침해에 대한 면책을 해제할 것, 국제형사재판소 설치 조약에 비준할 것, 국가 및 관계기관의 정보를 공개할 것, 피해자에 대한 보상을 실행할 것, 재발 방지를 위한 정책을 입안할 것 등 정부에 대해 15개 항목의 권고가 내려졌다.
실효성이 없음에도 ‘2000년 법정’이 피해당사자들에게 커다란 의미를 가졌던 것처럼, ‘과테말라 법정’은 당사자뿐 아니라 목격자들과 전해 들은 자들에게도 하나의 ‘사건’으로서 경험되었다. 여성들 자신이 전시 성폭력 문제를 ‘문제화’하는 과정을 함께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과테말라 법정’은 상징적인 퍼포먼스에 그치지 않고, 사회적 인식의 지평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탄력을 받은 민간 주도의 법정은 2013년에 다시 열렸고, 독재자의 죄를 추궁하기에 이르렀다.
▲ 2013년 과테말라 시민법정에 선 독재자 리오스 몬트. ⓒ출처: ICTJ(Justice Truth Digmity) 홈페이지 https://ictj.org/news/rios-montt-trial-looks-past-shapes-future-guatemala
한국이 가해국 위치에 선 ‘시민평화법정’ 의의와 과제
작년 봄, 서울에서도 베트남전쟁에 파병된 일부 한국군이 저지른 민간인학살에 대한 진상을 규명하고 그 책임을 묻기 위한 ‘시민평화법정’이 열렸다. ‘2000년 법정’을 롤모델로 하여 가해국의 수도 서울에서 베트남의 피해생존자들이 원고가 되어 대한민국을 피고로 삼은 민간 주도의 법정이었다.
‘2000년 법정’에서 공동 검사단으로 참여했던 이들과 후속 세대가 함께 2000년의 경험을 토대로, 그러나 이번엔 가해국의 구성원이라는 입장에서 법정을 꾸렸다. 따라서 ‘시민평화법정’은 가해자의 자리에 선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 자리이기도 했다.
재판부가 선고한 약식 판결문은 배상금 지급과 법적 책임의 인정, 한국군이 베트남 민간인에 대한 살인, 상해, 폭행, 성폭력 등 불법행위를 저질렀는지에 관한 진상조사의 실시, 한국군의 베트남전 참전을 홍보하고 있는 전쟁기념관을 비롯한 모든 공공시설에 진상조사의 결과를 전시할 것을 권고하였다.
▲ 베트남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평화법정(2018년 4월 문화비축기지) ⓒ출처: 시민평화법정 공식 블로그 https://blog.naver.com/tribunal4peace
‘시민평화법정’은 민간인학살에 초점을 맞추어 지난한 과정을 겪으며 현장조사와 증거자료, 그리고 피해자와 가해병사의 증언을 확보했다. 그러나 전시 성폭력 피해의 경우, 무엇보다 법정에서 증언할 증인의 확보가 어렵다는 일차적인 한계가 있었고, 준비과정에서도 충분한 논의를 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하지 못했다. 결국 베트남전쟁 시기 성폭력 피해는 재판부의 ‘진상조사 권고’에 간신히 그 자국을 남긴 채, 민간 주도의 법정에서조차 제대로 말해지지 못했다.
1970년대 반전평화운동이 간과한 ‘전시 성폭력’
베트남에서 자행된 전시 성폭력은 1970년대 당시 전쟁 당사국인 미국 내에서도 제대로 공론화되지 못했다. 당시의 미국 내 페미니즘 운동이 강간을 정치적인 문제로, 원치 않는 임신의 해결책으로서 임신중지를 공론화했던 시기와 맞물리는 데도, 평화운동에서 여성 이슈가 바깥으로 밀려났다는 것은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지점이다. 왜일까?
이전의 전쟁들처럼 베트남전쟁 중에도 강간은 뉴스로 다루어지지 않았다. 전시 성폭력의 실상이 드러난 것은 귀국한 군인들 자신이 목격하거나 가담했던 잔혹 행위에 대해 증언하는 공개포럼(Vietnam Against the War, VVAW)을 통해서였다. 그러나 이들을 중심으로 한 반전평화운동은 전시 성폭력을 고유의 중요성과 가치를 지닌 ‘문제’로 여기지 않았고, 이러한 이유로 페미니즘 운동과 ‘분리’되었다. 평화운동 배지에 새겨진 구호 “Stop the Rape of Vietnam.”에서 Rape가 의미하는 것은 ‘강간’이 아닌 ‘고엽제 살포’였다.
평화운동에서 분리된 페미니즘 운동의 힘만으로는 전쟁에서 여성이 겪는 문제로 당대 대중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엔 역부족이었다. 때문에 전시 성폭력이 국제적인 공론장에서 말해지기까지는 20여 년의 시간이 더 걸렸다. 그렇다면, 1970년대의 실패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할까?
서로를 위험에 노출시키는 ‘듣기’의 과정
평화운동에서 여성 이슈가 부차적인 문제로 다루어지지 않으면서도 함께 갈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혹자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시작으로 미투 운동에 이르기까지 젠더폭력에 관한 이야기라면 ‘충분히 들었다’고 말한다. 커밍아웃을 받아들이는 상황에서 청자는 ‘들을 수 있다’는 잠재성 때문에 듣기 이전에 존재한다. 따라서 ‘듣는다’는 행위 자체가 이미 말하는 자와 듣는 자 사이에 어떤 위계를 만든다.
그러나 ‘듣는다’는 건 위험을 자처하는 행위에 가깝다. 커밍아웃을 하는 이들은 청자의 변화를 부추기며 일종의 ~되기(Becoming)를 요청하기 때문이다. 도미야마 이치로(富山一?)에 따르면, 비커밍아웃 이후에 청자가 살아갈 세계는 이제껏 안주해 온 시민사회가 아니라, 위험에 노출된 세계다.
커밍아웃이 성소수자들의 생애사에서 지난한 과정을 겪으며 만들어낸 하나의 계기임을 생각할 때, 이 표현이 ‘아무렇게나’ 넓은 의미로 통용되는 것에 대해서는 경계해야겠지만, 전시 성폭력에 대해서 ‘말한다’는 것은 듣는 이들에게 비커밍아웃을 요청한다는 점에서 성소수자들의 커밍아웃과 맥락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전시 성폭력의 경험을 ‘듣는다’는 것은 말하는 자뿐 아니라 듣는 자까지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행위이다. 말하는 자들의 증언 앞에서 듣는 자들의 안온한 자리가 여지없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커밍아웃으로 인해 ‘우리’가 되는 프로세스는 신중히 말해져야 한다. 서로를 위험에 노출시키기 때문이다.
이미 ‘우리’의 삶은 어떤 사람들의 삶을 계속해서 위험에 노출시킴으로써 유지되고 있다. 이제 평화운동은 여성들의 경험을 듣는 과정을 거치면서, 지금까지의 운동을 지탱해왔던 토대를 산산이 부수는 것을 그 기점(起点)으로 삼아야 한다.
여전히 남겨진 ‘비밀’ 그리고 ‘다른 존재’들에 대하여
비커밍아웃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말할 수 없는 혹은 듣지 못하는 이야기들이 있다. 말해도 들어줄 것 같지 않은 상황에서는 커밍아웃이 아닌 ‘비밀’이 그 상황을 버티게 한다. 말하지 않음으로써만 살아남을 수 있었던 사람들. 40년이라는 세월 동안 일본군 ‘위안부’들의 침묵이 그랬고, ‘2000년 법정’에서는 ‘일본인’ ‘위안부’들이 그랬다.
‘일본인’ ‘위안부’의 존재는 1990년대의 국제적인 ‘위안부’ 운동에서도 좀처럼 드러나지 못했고, ‘2000년 법정'에서는 피해자로 인정받긴 했어도 충분히 ‘문제화’되지 못했다. 2015년을 전후로 관련 연구서들이 출간되면서 “직업 매춘여성은 위안부 피해자라고 볼 수 없다”는 주장들과 순결 이데올로기에 의한 사회적 낙인을 반박하는 움직임이 시작되고 있다.
‘시민법정’은 통상의 법정을 전복하는 힘을 지녔지만, 여전히 ‘법정’이라는 형식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말해질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사이의 차이 또한 극명하게 드러나는 장소이다. 무엇이 말해질 수 없었는지를 살피는 것은 피해의 범위를 넓히는 것이기도 하다.
▲ 전쟁은 동물들에게도 치명적인 해를 입힌다. 1914년 벨기에 할른 전투에서 살아남은 말이 죽은 말을 치우고 있는 모습. ⓒ사진 출처: Bibliotheque nationale de France
▲ 1917년 전선을 깔고 있는 전령견. ⓒ사진 출처: National Archive /Official German Photograph of WWI
전쟁피해의 범위를 확장하면 가해 책임이 분산되고 그 경계가 모호해질 것이라고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그러나 민간인학살과 전시 성폭력 너머엔 ‘시민법정’이라는 인간들의 범주로는 담아낼 수 없는 삶들이 있다. 제노사이드와 함께 반드시 에코사이드(echocide, 자연환경과 동식물을 대규모로 파괴하는 행위)가 언급되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전쟁은 동식물에게도 치명적인 해를 입힌다. 아프가니스탄 폭격 당시 철새들은 이동 루트를 바꿨고, 베트남전쟁에서는 수많은 동물들이 폭탄을 짊어진 채 적진에서 죽었다. 전쟁으로 오염된 토지와 숲과 바다, 그리고 그 속에 사는 동식물들은 줄곧 우리에게 비커밍아웃의 신호를 보내왔을 터이다. 이제는 온몸의 감각을 끌어 올려 그들의 절박한 시그널에도 귀 기울일 때가 되었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바로가기
필자 소개: 심아정. 독립연구활동가. 방송통신대학교 일본학과 강사. 동물, 전쟁, 여성, 폭력을 키워드로 공부와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최근에는 베트남전쟁 참전군인들이 행위자인 동시에 피해자로서 경험했던 폭력에 대해 말하는 장(場)을 만드는 기획을 하고 있고, 재일조선인 간첩단 사건과 병역거부 관련 재판을 기록하고 공론화하는 작업, 동두천의 장소성에 대한 아카이빙 작업을 진행 중이며, 난민 x 현장이라는 프로젝트에도 참여하고 있다. 수요평화모임(수평회)과 ALiM(Animal Lights Me)이라는 모임을 만들어 대학 바깥에서 새로운 공부와 활동을 시도하고 있다. 동료들과 함께 번역한 김시종의 시집 『화석의 여름』과 『계기음상』, 번역공동체 ‘잇다’의 친구들과 번역한 구리하라 야스시(栗原康)의 책 『마을을 불살라 백치가 되어라-백년 전 여성 아나키스트 이토 노에의 삶과 죽음』이 곧 출간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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