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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톡방 성희롱’ 방관하는 학교가 강간문화 키운다

#스쿨미투, 우리는 되돌아갈 수 없다(2) 


※ 스쿨미투 운동을 확산시키고 제도적인 변화를 가져오기 위해 활동하고 있는 <청소년 페미니즘 모임>에서 스쿨미투 현황과 의의, 과제와 전망을 담은 기록을 4회 연재합니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대물림 되어 온 남학생들의 집단 성희롱


작년 4월 4일, 나는 친구와 함께 남학생 기숙사에서 일어나고 있는 단체 성희롱을 전교생과 선생님들이 모이는 자리에서 고발하며 교내에서 #스쿨미투(#SchoolMeToo)를 시작했다. 


왜 미투 고발을 하기로 결정했느냐고 묻는다면, 사실 쉽게 대답할 수 없다. 그 당시에는 너무나도 당연한 결정이라 고민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피해 사실을 알고 나서 1년 넘게 지난 후에야 고발을 할 수 있었다. 이렇게 긴 공백이 있는 이유는 이것을 어떻게 알려야할지, 알린다한들 어떠한 결과가 있을지 불분명했기 때문이다.


내가 우리 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에도 비슷한 사건이 있었다고 들었다. 국어시간에 여학생들이 발표할 때 남학생들이 “보전깨”(여성 성기에 전구를 넣어 깨버린다는 뜻) 같은 용어를 사용하며 집단 성희롱을 한 것이다. 하지만 이듬해 들어온 신입생인 우리에게 남자 선배들은 이 사건을 두고 “여자와 남자 사이에 대립”이 있었다고 표현했다. 


당시 해당 사건이 문제가 되자, 주동자인 남학생은 학교 측으로부터  ‘신입생 대상으로 성교육을 하라’는 처벌(?)을 받았다. 그 선배는 우리에게 “남자와 여자의 성격 차이”에 관한 발표를 했다. 그리고 발표 후에는 (야동을 볼 수 있도록) 기숙사 인터넷의 보안을 통과하는 팁을 전수하겠다며 남학생들만 따로 불러모았다.


남학생들이 여학생을 향해 집단적 성희롱을 하도록 유도한 가해학생에게 신입생들 대상 성교육을 맡길 정도이니, 내가 학내 성폭력을 고발하더라도 학교에서 제대로 된 대응을 할 것이라는 확신이 들지 않았다. 선생님들께 남학생들의 만행을 담은 편지를 써볼까 생각하고 글을 썼다 지웠다 하는 것을 수십 번 반복했다. 그러나 편지를 써서 전달한다 한들, 남겨진 증거도 없고 증인은 나뿐이다. 아마 선생님들과의 대화 몇 번이면 내가 한 문제 제기는 유야무야 끝나버릴 것이다.


▶ 2018년 12월 22일, 스쿨미투는 끝나지 않았다 in 충청권 집회에서 사회를 맡고 있는 필자 이황유진 학생. ⓒ청소년페미니즘모임 제공


피해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 고발을 하지 못하니 매일이 힘들었다. 가해자가 누구인지 특정하지 못했지만, 여럿의 대화 속에서 일어난 성희롱이었기 때문에 단 한 사람만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았다. 정확히 누구인지 모를, 나와 내 친구들의 외모를 품평하고 성희롱을 한 남학생들과 매일 얼굴을 마주하고 생활하는 것이 너무 괴로웠다. 제일 고통스러웠던 것은 누가 우리를 향한 음담패설에 참여했는지, 또 누가 방관했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답답하고 괴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기 때문에, 친구가 “나 미투할거야”라고 얘기했을 때 같이 고발하기로 결정했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피해자가 있고 자신의 목소리를 낼 준비가 되었구나, 혼자서만 씨름하고 있는 줄 알았던 싸움이 훨씬 큰 문제였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이기도 했다.


우리가 힘들게 목소리를 낸 결과는?


오랜 시간 고민하고 큰 용기를 내어 시작한 미투 고발이지만, 고발 후 학교는 사실 크게 변하지 않았다. 어셈블리(주 1회 전교생과 교사들이 모여 국제교류나 대회출전과 같은 공지 사항을 나누는 자리, 가끔 학생들의 스피치도 있다) 시간에 친구가 “우리가 이렇게 미투(#MeToo)를 외치니, 위드유(#WithYou)를 외쳐달라”라며 발언을 마무리했을 때, 교실 안 분위기는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지금껏 공공연한 비밀이었던 남자 기숙사의 성폭력 문화가 수면 위로 드러난 것이다.


“정상적인 남자들” 사이에서 공유하던 정보와 대화가 이제 자신들만의 취미나 놀이가 아니라 ‘잘못된 것’임이 공개적으로 이야기되는 순간이었다. 여학생들은 아픔에 공감하며 같이 울기도 했다. 반면 가해학생들은 ‘큰일 났다’며 난처해했다. 그 교실의 분위기를 보면서 모든 일에 올바른 인과관계가 따르고 학교 분위기에도 변화가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내가 미투 고발을 한 날로부터 1년이 되어가는 시점에서 다시 이 일을 떠올리며 글을 쓰자니, 조금은 우울하고 무력감이 느껴진다. 언론 등에 인터뷰를 할 때 ‘스쿨미투 고발을 하고 무엇이 변했느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사실 바뀐 것은 하나도 없다. 학교 구조 자체가 변화를 위한 구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 스쿨미투 운동이 시작된 지 1년이 지난 2019년 2월 25일, 청소년 페미니즘 모임은 “이제는 페미니스트 대통령이 답변하시오” 기자회견을 하고 정부에 대책을 촉구했다. ⓒ청소년페미니즘모임 제공


스쿨미투 처리를 맡은 학교폭력위원회의 구성원은 전부 남성 혹은 남학생의 부모였다. 학교폭력위원회에서는 가해자에 대해 ‘서면 사과’라는 제일 낮은 수준의 처벌을 결정했다. 그렇게 해서 받은 사과의 편지에는 “기억도 하지 못할 정도로 무심하게 내뱉어왔던 말들 때문에 큰 상처를 받았을 것이라고는 생각해보지 못했다”라는, 책임을 회피하는 내용이 가득했다. 나에게는 1년이 넘게 악몽의 시간을 안겨다 준 말들을 자신은 기억도 하지 못한다니, 너무 억울했고 불공평하게 느껴졌다.


집단 성희롱을 한 가해자들이 진심으로 반성했는지도 의심스럽다. 우리 학년 남학생들에게 성폭력 문화를 물려준 졸업생들은 “운 좋은 타이밍(스쿨미투가 시작되기 전)에 졸업해서 다행이다”라는 말을 유머랍시고 했다. 학교폭력위원회에 이 사건의 가해자로 지목된 남학생에 대해서는, 크게 잘못한 것도 없는데 학생회장이라는 이유로 누명을 썼다며 동정하는 분위기였다.


남학생기숙사의 분위기가 바뀌었는지는 알 수 없다. 애초에 이러한 대화는 은폐된 ‘그들만의 공간’에서 이루어졌고, 내부자 고발을 통해서 나도 일부분만 들은 것이기 때문이다.


여성의 몸을 도구로, 트로피로 취급하는 ‘남성연대’


학내에서 스쿨미투 고발을 한 날로부터 1년이 되어가는 지금, 돌아보니 아쉬운 점이 많다. 가해자로 지목된 학생이 솜방망이 처분을 받은 것이나, 남학생들이 고발자들에게 입힌 수많은 2차 피해도 있지만, 가장 아쉬운 점은 우리가 문제 제기한 내용의 본질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와 내 친구가 고발한 것은 한두 명의 “비정상적인 남성”이 아니다. 나는 우리 학교 남자기숙사에서 대대로 전해져 오는 집단 성희롱 문화를 들춰낸 것이다. 남학생들은 단체 채팅방에서 자신의 이름 대신 지금까지 사귄 여학생들의 이름을 나열한 별명을 쓴다. 또 여학생과 로맨틱한/성적인 관계가 있는 남학생을 우월한 남성으로 대하며 여성을 철저히 트로피화한다. 그들에게는 여학생의 신체 부위를 만지는 것이 엄청난 성취물이다. 실수인 척하며 여학생들을 추행하고서는 “OO이 자신의 가슴을 만지게 해줬다”라며 왜곡해 이야기를 전리품처럼 나누기도 한다.


이러한 행위들은 남학생들이 여학생을 동등한 사람이 아닌 여성, 성적인 대상이자 자신들의 만족을 위한 도구로 보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이러한 형태의 성폭력이 매일같이 일어나는데, 몇년동안 ‘남성연대’ 속 어떠한 사람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은 것은 남학생들 사이에 이미 깊게 뿌리내린 성폭력 문화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학교는 이러한 사건을 단 한 명의 가해학생의 책임으로 축소했다. 마치 제일 잘못이 큰 남학생 한 명만 처벌하면 문제가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때문에 변한 것이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 지난 2월 25일, 대한민국 정부에 스쿨미투에 대한 제도적 응답을 요구하는 지지서명을 제출하고 있는 청소년 페미니즘 모임 활동가들. ⓒ청소년페미니즘모임 제공


그럼에도,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학내 처벌도, 가담한 학생들의 반성도, 남성 문화의 변화도 없었다는 사실은 고통스럽지만, 나 자신이 변했기 때문에 후회는 하지 않는다. 다른 것은 변하지 않았어도 내가 변했으니까 괜찮다니, 솔직히 너무 감성적으로 느껴지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조금 슬픈 말이다. 내가 1년 동안이나 열심히 변화를 위해 싸우는 동안 변한 건 나 하나뿐이라는 것인가? 하지만 나의 변화, 수많은 고발자들의 변화는 중요하다!


더 강해진 우리는 ‘강간문화’와 싸울 것이다


미투 운동의 핵심은 연대라고 생각한다. 학교에서 성폭력을 경험한 학생들은 오래 전부터, 학교가 생긴 이래로 있었을 것이다. 스쿨미투 운동의 중요성은 성폭력을 당한 학생들이 가만히 있기보다는 목소리를 내기로 결정했다는 것, 수많은 목소리가 모여 사회적으로 증폭됐다는 점에 있다. 우리는 각자의 목소리를 내었고, 내 목소리를 듣고 말하기 시작하는 자매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이러한 ‘말하기’가 모여서 우리는 교내 성폭력의 원인이 한두 명의 ‘괴물 교사’, ‘철이 안든 남학생’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배웠다. 학교의 구조가 문제인 것이다. 우리는 목소리를 냄으로써 혼자서 싸우고 있던 싸움이 사실은 훨씬 큰 싸움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나와 같이 싸우고 있는 사람들이 내 주변에 늘 존재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스쿨미투 고발 후 1년 동안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목소리의 힘’을 실감했다. 그와 동시에 아직 우리 앞에 긴 싸움이 기다리고 있음을 인지했다. 고발 이후 제대로 된 처벌이나 구조적인 변화는 아주 느리게 오고 있지만, 우리는 서로 연대하여 힘을 주고 받으며 각자의 위치에서 싸우고 있다.


▶ 2018년 11월 3일, 학생의 날 맞이 스쿨미투 집회 “여학생을 위한 학교는 없다” 현장에 여학생들이 남긴 ‘자신들이 학교에서 들었던 말들’ 중 ⓒ일다(박주연 기자)


아직 싸워야 할 많은 것이 남아있다. 성폭력 문화와 이를 바탕으로 하는 남성연대는 우리 학교 남자기숙사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학생들 사이에, 교사들 사이에, 직장에, 공공 영역에도 있다. 버닝썬 게이트와 정준영 사태로 드러나고 있는 한국 남성들의 ‘강간문화’도 바로 그 연장선이라고 생각한다.


스쿨미투 고발 1년 동안 나는 여러 장벽에 부딪혔다. 아직 바뀐 것은 거의 없어 보인다. 하지만 미투를 통해, 그리고 스쿨미투를 통해 우리는 ‘연대함으로써 이루어낼 수 있는 것이 많다’는 가능성을 보았다. 변화는 아주 천천히 오고 있지만, 오고 있다! 용화여고 스쿨미투 가해자가 불기소 처분을 받고, 부산의 한 교사가 스쿨미투 고발자를 명예훼손으로 고발한 사건처럼 막막한 순간들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미투”(MeToo, 나도 고발한다)라는 이름으로 연대하며 서로를 위로하고, 점차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아직 갈 길이 멀지만 스쿨미투는 너무나 중요한, 더 큰 변화를 위한 싸움을 해나가는 과정이다. (이황유진)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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