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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달장애여성들 “잠시만요, 이제 내가 말할게요”

‘대항적 말하기’를 통해 제한된 관계와 공간을 확장하다


※ 발달장애여성의 말하기, 우리 사회는 과연 얼마나 들을 준비가 되어 있을까요? 장애여성공감 이진희 사무국장이 발달장애여성 인권투쟁단 <반가워만세>와 지적장애여성 합창단 <일곱빛깔 무지개>의 경험을 공유합니다. 이 글은 세계인권선언 70주년 인권운동포럼 <불온한 세상을 향한 인권>의 두 번째 섹션 “가짜/진짜 프레임을 넘어서-대항적 말하기로 반차별 운동의 힘 찾기”에서 발표한 원고를 수정 보완한 것입니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실패해도 괜찮은, 실패하기 때문에 중요한 ‘말하기’


“잠시만요. 이제 내가 말할게요.”(장애여성공감이 2005년에 만든 ‘정신지체장애여성을 위한 성교육 매뉴얼’의 제목이기도 하다.)


발달장애여성이 자신의 말을 들어주지 않는 사람들을 향해 이야기한다. 그동안 말을 제지당하며 해석당하는 위치에 있었던, 말의 권력을 가지기 어려웠던 발달장애여성이 자신을 통제하는 상황과 관계를 제지하고 첫 마디를 떼기 시작한다. 과연 주변사람들은 어떤 표정을 지으며 반응할까?


어쩌면 그녀는 끝까지 말을 이어가기 어려울 수도 있다. 그 한 마디를 시작한 장애여성은 자신의 말이 가로막혔던 시간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을 거부할지도 모른다. 시작의 경험을 갖기 위해 100번 심호흡을 내쉬었을 수도 있고, 결국은 대화에 실패하여 친구와 실패담을 나눌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 말하기는 성공이 목표라기보다 100번의 심호흡과 실패담을 공유하는 것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실패를 겪음으로서, 발달장애여성이 자신에게 주어진/허락된/배제된/규정된 자리를 이탈하는 중요한 순간이다. 이제 대화의 맞은편에 선 이들이 다른 대답과 다른 관계 맺기를 준비할 차례다.


▶ 발달장애여성 자조모임 <반가워만세> 회원이 작년 10월 말 천호공원에서 피켓을 들고 침묵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장애여성공감


‘피해자/약자’다운 말만 들어주는 사회


많은 발달장애인 대상 성폭력 예방교육과 인권교육 매뉴얼은 “이럴 땐 이렇게 말해요”, “싫다고 얘기해요”, “크게 소리쳐요”, “내 감정을 표현해요”라고 교육한다. 위험에 대비한 말하기가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막상 발달장애인들은 일상에서 의견을 내거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을 제한당한다. 매뉴얼들은 상황과 맥락에 맞는 대화를 해야 한다고 교육하지만, 정작 당사자들이 그 상황에서 느꼈던 감정에 대해선 질문하지 않는다.


반면, 발달장애여성의 어떤 말은 공적 공간에서 과도하게 노출되고 해석된다. ‘아프다’, ‘성폭력이다’, ‘폭력이다’와 같이 피해를 드러내는 말들은 비교적 사회에 쉽게 수용된다. 발달장애여성의 정체성을 ‘취약하다’고 규정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피해자의 자격을 갖추지 않으면, 이들에게 말할 수 있는 공적 공간은 좀처럼 허락되지 않는다.


발달장애여성의 대항적 말하기가 사회에 제대로 공유되는 경우는 드물다. 당사자들은 주체적으로 자신의 피해 경험을 사회적으로 알리고 국가의 책무를 물어왔지만, 언론에서 장애여성은 여전히 취약한, 약자, 열악한 등 피해 강도를 강조하는 방식으로 등장한다.


특수교육 현장의 장애학생 인권지원단은 ‘관심학생’, ‘더봄학생’으로 장애학생을 구분하여 부르기도 한다. 이들의 인권은 안전과 보호 담론에 갇히게 되고, 더봄학생으로 분류된 장애청소년은 가해자/피해자로서만 공적 공간으로 소환되는 경험을 주로 하게 된다. 권리를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이 자신이 입은 피해를 증명하기 위해선, 사회적 취약성을 강조하는 것이 가장 가까운 방식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장애여성이 차별과 폭력의 피해를 인정받는 것과, 피해자의 자리를 떠나 (당연한)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이처럼 국가에 의해 분절된다.


수전 웬델은 <거부당한 몸>(거부당한 몸 장애와 질병에 대한 여성주의 철학, 강진영 김은정 황지성 공역, 그린비, 2013)에서 “전형적인 시민에게 주어지는 것과 비교할 때 종류나 다른 양의 지원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그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의존적이라고 간주된다”고 말했다. 자신을 ‘비정상적인 존재’로 보는 사회적 규정에 도전하지 않고서는 피해자의 자리를 이탈하기 어려운 이유다.


‘착한, 불쌍한, 불행한, 도움이 필요한, 슬픈…’ 등의 수사는 장애여성의 삶을 박제화한다. 박제는 살아 움직이지 않는/못한다. 하나의 표본으로 특정한 이미지를 상징하며 전시될 뿐이다. 사회적 소수자 집단은 이런 박제화된 이미지로 사회 속에서 전시되는 경험을 하며 살아가기 쉽다. 장애여성 운동은 오랫동안 피해자의 위치만을 강조하는 것에서 벗어나, 피해를 생산하는 사회 구조와 환경의 문제를 동시에 지적하려고 노력해 왔다.


▶ <반가워만세>는 장애여성공감의 발달장애여성 당사자 모임으로 2018년 결성되었다. ⓒ장애여성공감


<반가워만세> ‘하지 마, 가지 마, 먹지 마’를 벗어나다


발달장애여성이 자기 표현을 해도 주변인들이 무시하거나 귀담아 듣지 않아서 비가시화되기 때문에(곽민영, “정신지체여성의 성폭력 생존 경험에 대한 연구 -지속적 피해 경험을 중심으로」”, 2007) 대화할 때 눈치를 살피는 경우가 잦다.


장애여성공감에서는 경험적으로 발달장애여성이 전 생애에서 자주 듣게 되는 말을 3마이론 이라 부르는데, ‘하지 마, 가지 마, 먹지 마’이다. 하지 마는 행동을, 가지 마는 이동을, 먹지 마는 욕망을 통제하는 말이다. 이렇게 자신의 언행을 통제하는 주변인들과의 대화 속에서, 발달장애여성들은 ‘미안합니다.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와 같이 실패하지 않는 의사소통에 익숙해지기 쉽다. 관계와 공간에 대한 자기 주도성을 가지기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발달장애여성에게는 실패하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실패를 근거로 하여 ‘다음’을 만들 수 있는 장소와 관계가 필요하다. 발달장애여성이 ‘장소를 가진다’는 것은 기존에 자신에게 허락된 제한적인 공간에서 이탈할 수 있는 ‘관계를 넓히는’ 과정이기도 하다. 실패할 권리가 보장되는 공간, 그 실패의 탓을 장애여성이라는 정체성으로 돌리지 않는 공간. 불화하는 일상이지만, 실패를 지지하는 안전한 커뮤니티가 필요하다.


이러한 커뮤니티에서 발달장애여성들은 기존 사회의 역할을 답습하기도 하고, 역할 나눔과 약속 등 새롭게 필요한 규칙을 만들어 나가기도 한다. 무엇보다 내가 없으면 안 되는 시간이다. 나다운 내가, 우리를 만드는 시간이다. 자신으로서 존재하고 환대받을 수 있는 공간, 존중받고 실패를 통해 다음을 약속받을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이 필요하다. 남들 눈에는 그저 취미나 시간 때우기로 보이는 이 작업에 참여하는 것은 진지한 정치적 선택이다.


<반가워만세>는 장애여성공감의 발달장애여성 자조모임으로, 일상의 차별 경험을 바탕으로 인권을 이야기하는 팀이다. 지적장애여성 합창단 <일곱빛깔 무지개>와 장애여성학교 인권반, 지적장애여성 캠프 등 장애여성공감이 지속해온 발달장애여성 당사자가 만드는 권익옹호 활동의 흐름 속에 2018년 결성되었다.


작년 한 해 <반가워만세>는 발달장애여성들이 스스로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 배우고, 협력하고, 종종 포기하고, 갈등하며 한 해 활동을 일궈왔다. 긴 시간을 두고 함께 해결해 가는 과정이야말로 이들이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사회적 관계 맺기’다. 함께 싸워 줄 동료와의 말하기를 통해 나의 경험도 새롭게 구성될 수 있다. 나의 어려움에 대한 해법을 말하긴 곤란했지만, 동료의 어려움엔 훈수 두며 참견도 해본다.


▶ 천호공원으로 시위를 하러 나서던 날, <반가워만세> 회원들이 직접 쓴 피켓을 들고 함께 사진 촬영을 했다. ⓒ장애여성공감


한 번은 회원들이 차별을 겪었던 천호공원에서 항의 시위를 하기 위해 다양한 말하기 방법을 찾던 중, 침묵 1인 시위를 하기로 했다. 한 달 여 기간 동안 구호를 만들고, 어떤 말을 하고 싶은지 피켓을 쓰고, 드디어 10월 말 천호공원으로 나갔다. 이날 함께했던 활동가는 <반가워만세> 회원들이 회원방에서 연습했던 호기로움이 긴장으로 주춤하기도 하고, 천호공원 행동을 마친 후에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날카롭게 서로를 대하는 모습도 있었다고 했다. 그래도 천호공원에서 <반가워만세>는 ‘행동했다.’


지적장애여성 합창단 <일곱빛깔 무지개>의 콜라보


발달장애여성들은 동료를 만나고, 관계를 쌓아가고, 차별적인 구조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연대하는 사람들과 만나 새롭게 관계 맺으며 ‘장소를 확장한다.’


2018년, 장애여성공감의 지적장애여성 합창단 <일곱빛깔 무지개>는 장애여성공감 창립 20주년 기념식에서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의 게이코러스 <지보이스>와 콜라보 공연을 했다.


이들의 첫 만남은 2011년 장애여성학교 졸업식에 <지보이스>가 축하공연을 했던 7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곱빛깔 무지개> 단원들은 이후 꾸준히 지보이스 공연을 관람하며, 서로의 존재에 익숙해져 갔다. 첫 콜라보 제안은 2017년에 지보이스가 먼저 해주었지만, 서로를 더 알아가는 시간이 필요하다 생각하여 노래 워크숍만 지보이스 단원이 찾아와 진행했다. 그리고 다음 해 20주년을 맞이한 기념식엔 <일곱빛깔 무지개> 측에서 지보이스에게 초대장을 보냈다.


<일곱빛깔 무지개> 단원들은 콜라보를 위해 지보이스 연습실이 있는 친구사이 사무실을 두 차례 방문하며 영어발음 콩크레춰레이션을 ‘1)콩---레이션 2)콩그레이션 3)콩그레춰레이션 4)콩그리에이션 5)콩-----션 6)ㅡ,ㅡ 7)모르겠다’ 맞춰가며 서로의 문화를 배우고 익혔다. 지보이스 단원들은 장애여성들과 만남에 대한 경험이나 매뉴얼이 없었다. 그래서 이들의 만남은 ‘어떻게 만나고 대화해야 하나?’ 질문으로 시작했다. 평등한 관계 맺기는 관계가 쌓일수록 질문과 과제가 더 늘어나는 것 같다.


▶ 장애여성공감 20주년 공연, <지보이스>와 <일곱빛깔 무지개>의 콜라보 ⓒ장애여성공감


힘들 때 연락할 수 있는, 안부를 물을 수 있는 관계. 집이나 복지관이 아니라, 내가 가 본 친구사이 사무실이라는 공간, 가끔은 찾아갈 수 있는 새로운 공간. 이렇게 무지개에게, 지보이스에게 새로운 동료가 생겼다. 동료를 알아가기 위한 앞으로의 시간은 더 많은 차이를 깨닫고 소통의 방법을 찾아가는 과정일 거다.


커뮤니티 개그, 장애여성들의 대항문화 만들기


사회적으로 차별받는 우리는 절망만 공유하지 않는다. 관계와 공간 속에서 다양한 삶의 방식을 드러낼 수 있는 이야기들이 쌓여 가고, 동료와의 활동이 ‘기억’으로 남는다. 그것은 우리끼리만 아는 이야기가 되고, 문화를 공유한 이들이 서로를 알아채고 확인하는 사인이 되기도 한다.


장애여성공감에선 이를 ‘커뮤니티 유머’라고 부른다. 주류 문화에서 배제된 이들이 스스로의 정체성을 긍정하며, 우리를 소외시키는 문화를 비웃기도 하고 무시하기도 한다. 지보이스 단원 재우님은 ‘농담을 공유할 수 있는 사이야말로 최고의 연대’라는 인상적인 말을 했다. 일상을 겪지 않으면 알 수 없는 특징들은 커뮤니티 개그가 된다. 우리끼리만 재밌는 이야기들은 바깥의 규범과 보편을 시시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그러나 언제까지 우리끼리만 웃을 수는 없지 않은가.


장애여성공감의 잡지 <마침,>에선 장애여성운동의 하위문화를 모두가 제대로 느끼고 이해할 수 있도록 ‘이게 웃겨’라는 코너를 만들기도 했다. 카메라는 장애인의 몸이 꼬일수록 좋아한다며 ‘그래, 제대로 꼬아 주겠어’라고 얘기하는 장면은 ‘감동을 전시하는 언론’을 비판한다. 장애 1-6급, 정신연령 몇 살, 이런 방식의 의료적 기준으로 장애를 단정하는 사회에서 ‘장애란 이런 거야’라고 대꾸하는 방식이다.


▶ 장애여성공감이 발행하는 잡지 <마침,> 중에서 공감유머사전.


혼잣말을 하는 게 아니라 누군가와 소통하기 위해선 같이 말할 수 있는 동료와 공간이 필요하다. 발달장애여성들의 말을 듣고 소통하기 위해서는 이들의 말을 판단하고 평가하는 자리에서 스스로를 끌어내리고, ‘질문하는 존재’로서 서로의 위치를 바꿀 수 있어야 한다. 서로의 동료가 되어 곁을 만드는 것, 삶을 공명하는 상호적 관계가 일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동료 시민’의 관계는 만들어지기 어렵다.


‘말하기’와 ‘실패’는 다음을 만드는 과정이다. 실패의 경험으로 과정을 겪어나가는 것이다. 완결된 소통이 아니라 잘못 뱉은 말, 부적절한 표현, 말하지 못함, 듣지 못함 같은 경험들이 갈증과 갈등을 만들고, 점점 변화로 우리를 이끄는 것인지도 모른다.


발달장애여성에게는 해결하고 싶은 욕구와 분노가 있었지만, 실패하면 언제나 ‘정체성(장애)의 탓’으로 돌려졌다. 그래서 제대로 실패하는 과정을 가지기 어려웠다. 독립적 성취가 아닌 의존적 연대를 상상하려면, 어쩌면 우리는 끝없는 실패라는 파도를 함께 타고 넘어야할지도 모른다. 그 여정을 소란스럽고 까칠하지만 유머를 잃지 않고 나아가는 것이 혐오와 차별과 싸우는 길지만 강한 방법일지도 모른다. (이진희)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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