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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이주여성’ 위치에서 난민을 공부하다

<우리 자신의 언어로-독일 난민 여성들의 말하기> 연재 후기①



이주여성인 내가 독일의 여성난민과 만나는 방법


난민 인구가 141만 명(2017년 말 기준, 유엔난민기구 발표)이 넘는 독일에 살면서, ‘난민’은 사회 문제나 뉴스거리이기 이전에 일상적으로 마주치는 존재다.


독일 전역의 주.시.군 행정구역에서 인구 수에 비례해 난민을 분산 수용했고, 내가 2014년부터 살고 있는 프라이부르크시(남부 바덴뷔르템베르크 주 소속, 인구 21만여 명)에는 2천888명의 난민(2018년 기준)이 있다. 이들은 학교나 직장, 슈퍼마켓과 공원, 옆집이나 병원 같은 일상적인 공간에서 만날 수 있는 이웃이다. 따라서 난민 문제에 대해 잘 알고 싶고 또 관련 사회 공론장에 참여하고 싶다는 나의 욕구는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다만 독일에서 인종적 문화적 소수자, 즉 ‘이주여성’인 나는 내 나름의 관점과 감각으로 배움을 시작해야 했다. 독일 주류 언론이 보도하는 난민 이야기도, 백인 좌파 지인들이 갖는 친(親)난민 정서도, 내게는 어딘지 모르게 이질적이었다. 이들에게는 ‘어떻게 도울 것인가’라는, 난민에 대한 지원과 복지 담론이 당연하다면, 불안정한 체류권에 투표권도 없고 일상적으로 인종 차별을 겪는 나 같은 사람은 난민들에 대한 공감과 연대의식이 앞섰다.


서구 주류 사회의 눈과 해석을 거치지 않은 당사자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야했다. 그래야 독일 사회에서 타자(他者)인 내가 또 다른 타자를 ‘타자화’하지 않을 수 있을 테니까. 그런 자료를 찾던 중 국제여성공간(IWSPACE, International Women Space)이 만든 책자 <우리 자신의 언어로>를 만났다. 이를 찬찬히 공부하기 위한 계기를 마련하고, 한국인들에게도 그 내용을 전달하고자 나는 <일다>에 기사 연재를 제안했다.


<우리 자신의 언어로>는 거듭 생각해도 참 가치 있는 책이다. 여성난민 당사자들의 목소리, 특히 그들의 정치적 발화를 온전히 담고 있는 자료가 여전히 흔치 않기 때문이다. 제주 예멘 난민 입국과 관련한 한국의 언론 보도 양태를 분석한 글에서, 난민네크워크 변수현 활동가는 주류 미디어가 소수자인 난민을 다룰 때 주체적 행위자가 아니라 어떤 사건의 대상, 객체로 표현한다고 지적한다.


변수현 씨는 ‘갈등이나 대립 관계의 양상을 보일 경우, 주변화되거나 객체화된 집단들은 갈등의 주범으로 몰리게 되며, 사회 내의 비난과 우려의 대상으로, 또는 통제되어야 할 대상으로 묘사된다. 혹은 인터뷰를 통해 소수자를 주체적이지 못한 자선과 감동의 대상으로 묘사한다’고 썼는데, 독일이나 유럽의 주류 언론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런 현실에서 <우리 자신의 언어로>에 담긴 이야기를 번역하며 해제를 달고, 개인적인 노트까지 남기며 공부할 수 있었던 것은 내게 큰 복이었다.


▶ 2017년 말 기준 유럽연합 소속 6개 국가의 난민 인구를 보여주는 그래프. ⓒ출처: statista.com


<우리 자신의 언어로-독일 난민 여성들의 말하기> 연재 작업에는 아쉬운 점도 있다. 원문 책자는 발간 시기인 2014년 11월 이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한국어 번역기사는 2018년에야 이뤄져서 불가피하게 뒤쳐진 정보들이 있다. 서구중심적인 시각에서 탈피하고 싶었지만, 내가 구사할 줄 아는 외국어가 영어와 독일어라는 점의 한계도 자주 느꼈다.


그럼에도 ‘너를 더 알아가고, 너의 눈에 비친 나를 더 알아가자. 그렇게 우리가 같이 우리에 대해 더 많이 말하며 목소리를 모아보자’며 시작한 이 모든 공부와 글쓰기가 독자들에게도 도움이 됐기를 바란다. 우리가 난민 당사자 여성들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듣고, 그녀들과 연대할 수 있는 존재로 보다 성장했기를 바란다.


‘대규모 난민 수용’의 이면, 유럽의 위선과 정책적 실패


실은 이렇게 공부거리가 많은 프로젝트인 줄 미처 모르고 시작했다. ‘이주와 난민’은 독일 뿐 아니라 오늘날 국제사회 전체에서 매우 급박하고 중대한 문제이니 그럴 만한데, 나는 그야말로 무식해서 용감했다. UN에서 통용되는 난민에 관한 기본적인 개념 뿐 아니라, 빠르게 변하는 각국의 정책과 난민 유입경로, 난민 여성들 출신국가의 상황까지 알아야 할 배경 지식이 파도 파도 끝이 없었다.


이런 ‘굴착 작업’을 통해 새로 알게 된 많은 것들 중 하나만 꼽자면, 유럽연합이 백인 기독교 중심으로 지켜온 자기들의 기득권을 어떻게 공고히 하는지, ‘대규모 난민 수용’ 이면에 어떤 위선과 정책적 실패가 있는지에 관한 상세한 정보들이다.


집단 숙소 정책으로 난민들의 이동권을 박탈하거나 통제하고, 난민 인정 절차에 들어가는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자발적 귀국’ 제도를 만들어 몇 푼의 목숨 값을 쥐어주고 난민들을 되돌려 보내는 것. 생체정보를 수집해 난민을 감시하는 유로닥(EURODAC) 시스템의 처참한 실패. 그리고 유럽 국가들이 공동 예산으로 리비아 해안 경비를 강화해 ‘발칸루트’를 봉쇄해버린 2016년 3월의 ‘EU-Turkey Deal’까지….


결과적으로 나는 유럽사회에 대한 일말의 남은 동경이나 인종 평등에 대한 낙관을 다 버리고, 보다 냉철하고 비판적인 이주여성으로 살게 됐다.

▶ 2018년 10월 프라이부르크에서 열린 ‘국제 문화의 밤’ 콘서트 현장. 나는 이 콘서트를 준비한 시리아, 아프가니스탄 출신 여성들과 연대하는 마음으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한국 노래를 한 곡 불렀다. ⓒ하리타


당사자, 활동가, 담당공무원, 운동조직을 취재하다


독일 여성난민들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매회 긴 분량의 원고를 완성하기 위해 책상 앞에서 보낸 시간이 많았지만, 거기에 그치지 않으려고 애썼다. 밖으로 나가 묻고 관찰하고, 참여하려고 노력했다.


직접 취재로 진행한 인터뷰와 기관 방문 중, 이집트 카이로 출신의 페미니스트 A에게서 서구 사회가 주도하는 여성할례 철폐운동에 대한 비판적 관점을 얻었다. 현지의 문화적 맥락과 공동체가 필요로 하는 통과의례에 무지한 채로, 서구남성중심적 인권 개념에 기대선 해결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여성들이 공동체에 구성원으로 인정받기 위해 거치는 대안적인 의식이 필요하며, 이는 A나 독일어 망명해 운동가가 된 할례 피해자 빈투 보장과 같이 양쪽 세계를 모두 이해하고 있는 여성들에게 힘입어 논의될 수 있을 것이다. (관련 기사: 끔찍한 ‘여성할례’ 악습이 전부 폐지되는 날까지 http://ildaro.com/8205)


독일 바덴 뷔르텐부르크(Baden-Wurttemberg)주 뮤라커(Muhlacker) 군청에서 별정직 난민담당관으로 일하는 사비나(Sabine Rabl)에게서는 난민 숙소 정책에 대해 보다 체계적으로 들었다. 그리고 행정 실무자로서의 어려움과 전망도 접할 수 있었다. 사비나는 당시 해당 지역에 할당된 난민들이 일반 주택(3단계 숙소)에 입주하는 과정을 지원하는 업무를 맡고 있었다. 그녀는 주어진 일에만 머물지 않고, 대학에 새로 신설된 ‘난민과 통합’ 전공 1년 과정에 등록해 이주학(migration studies)은 물론 아랍어까지 배우게 되었다고 소식을 전해왔다.


‘제주 예멘 난민’ 사태와 관련하여 7월 초에 나간 대담기사 두 편을 위해서는 한국난민인권센터 고은지 활동가와 화상전화로 만났다. 우리는 독일과 한국의 난민 제도 정책을 비교대조하면서 문제점을 짚어나갔다. 난민혐오 정서나 무슬림포비아, 가짜뉴스 문제가 두 나라에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 또한 확인했다. (관련 기사: 하리타-고은지 대담① http://ildaro.com/8257 하리타-고은지 대담② http://ildaro.com/8258)


독일의 난민법이나 시스템이 답은 결코 아니라는 것은, 난민 법률자문 활동가 샬롯테가 다시 한 번 강조해 주었다. 베를린의 난민 임시숙소와 그리스 섬 키오스에서 난민들을 대면하며 자문을 해온 그녀는 독일의 이주난민법이 ‘시민-비(非)시민’을 기본 틀로 구성되어 명백한 차별의 기제로 작동하고 있다고 했다. 백인 기독교 시민과 나머지 사람들로 구분하는 인종차별적인 프레임 역시 짙게 깔려있어서, 난민들을 비숙련 저임금 일자리로 유도하고, 이들을 위한 주거지역 역시 교묘하게 분리시킨다는 점을 지적했다.


샬롯테의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가 난민 문제의 해결책을 논할 때 소위 ‘선진국’만 올려다볼 것이 아니라, 나름의 독창적인 시스템을 고안해 대규모로 난민을 수용하고 있는 터키나 레바논의 사례도 주목해야 한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관련 기사: 뱃속의 아이와 함께 지중해 난민이 되다 http://ildaro.com/8324)


8월에 직접 찾아간 국제여성공간(IWS)은 베를린 크로이츠베아크 구역의 어느 중고책방 2층을 전용공간으로 빌려 쓰고 있었다. 이들의 활동을 지지하는 책방 주인의 호의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고, 독립적인 사무실을 알아보는 중이었다. 국제여성공간이 지난 몇 년 간 보여준 왕성한 이주난민 당사자 활동이나, 베를린을 중심으로 맺은 넓은 좌파 네트워크, 그리고 중남미, 아프리카 출신 여성들을 주축으로 한 멤버들의 활기찬 모습에 비해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아직 정식 비정부/비영리 시민단체로 등록하지 않아서 <우리 자신의 언어로>와 같은 탁월한 저작물이 있음에도 출판을 통해 단행본 수입을 거두거나 관련 사업을 마음껏 펴지 못한다고 했다. 안정된 재정 기반이 없어서 지속적인 사업을 해나가기 어려운 것도 문제였다. 그럼에도 독일 사회의 제도적인 영역에 편입되는 것보다, 당장 연대가 필요한 집회 현장에 달려나가는 걸 우선시하는 이들의 모습은, 내게 시민운동의 본질이 무엇인지 되새겨보게 했다.


▶ 독일 비영리 단체 Academic Experience Worldwide e.V. 사이트에 내가 맡은 <난민여성과 독일의 젠더 평등> 세미나 소식이 올라가 있다.


내 삶의 변화: 그녀들과 만나다, 연결되다


난민 공부는 내게 ‘취재’나 ‘글쓰기’ 활동에 그치지 않고 삶의 체험과 나눔으로도 확장되었다. 지난 5월에는 <여성난민과 독일의 젠더 평등>이라는 주제로 프랑크푸르트에서 강연을 하기도 했다. 이주난민들 중, 특히 학력이 높고 자국에서 전문직 경력이 있는 사람들과 독일 현지 대학생들 간의 교류를 지원하는 비영리 단체 ‘Academic Experience Worldwide e.V.’가 주최한 세미나 중에서 하나를 맡았다.


참석자들이 이주난민 당사자였음에도, 여성난민들이 겪는 특수한 어려움이나 주된 망명 사유인 ‘젠더 박해’에 대한 인지가 높지 않았던 것이 내게는 의외였다. 난민 커뮤니티 안팎으로 페미니즘 운동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실감했다. 강연 때 ‘독일의 젠더 평등’이라는 포괄적인 내용을 뒤에 붙인 것은, 자유와 평등을 꿈꾸며 온 난민여성들이 독일의 젠더 차별과 불평등 현실에 또다시 부딪친다는 것을 상호교차성 관점에서 짚어보기 위해서였다.


중동, 북아프리카 무슬림 사회에 대해 너무 무지한 스스로를 자책하며 코넬리아 괴테 센터(Cornelia Gothe Zentrum, 프랑크푸르트 대학교 젠더학 센터)가 주최한 <터키의 페미니즘과 퀴어운동> 심포지움에 찾아가기도 했다. 이스탄불의 사반치 대학교(Sabancı University) 알타니(Altınay) 교수가 참석해 이틀간 세미나와 워크숍을 진행했는데, 문화인류학자로서 터키의 군국주의, 소수인종 박해의 역사를 여성운동의 흐름과 엮어내는 것이 흥미로웠다.


20세기 초반 오토만 제국 시기 페미니즘 제1의 물결 속에서 때로는 영미권보다 한발씩 앞선 터키 고유의 사상과 운동이 있었으며, 당시에 백인 페미니즘과의 교류도 꽤 활발했다는 고증이 최근에 속속 이뤄지고 있다는 이야기도 고무적이었다. 워크숍에 참석한 20여명의 여성들?다수가 자신의 뿌리를 탐구하려는 2,3세대 터키 이주민이었다?이 독일 시민이지만 ‘유색인종 여성’이자 ‘터키 집안의 여자’로 살아가며 겪는 혼란을 토로하는 모습, 페미니즘 이론과 분석을 통해 이를 해소하려는 열망 또한 인상 깊었다.


▶ 이스탄불 사반치 대학 알타니 교수가 프랑크푸르트에서 <터키의 페미니즘과 퀴어운동> 심포지움을 진행하는 모습. 프랑크푸르트 대학교 젠더학 센터 주최. ⓒ하리타


10월에는 ‘국제 문화의 밤’이라는 지역 콘서트에서 공연자로 나서, 100여명 앞에서 한국 노래를 불렀다. 내가 사람들 앞에 나서서 잘 하지도 못하는 노래를 부른 것은, 행사 준비를 맡았던 시리아와 아프가니스탄 출신 10대 여성들에게 힘을 보태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는 한국 전통문양 앞치마를 두르고 쌀의 소중함과 만물의 연결을 얘기하는 홍순관의 <쌀 한 톨의 무게>를 불렀다.


이 콘서트는 그 즈음부터 나가기 시작한 이주여성 모임을 통해 알게 되었다. 월요일 오후 3시라는, 애매한 시간에 열리는 모임이라 앞으로 꾸준히 나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스카프 쓴 여인들과 그들의 딸, 조카들을 만나는 그 자리에는 푸근함이 있다. 모임에선 함께 호박스프를 끓이며 할로윈을 기념하고, 성탄절을 앞두고는 펠트공예 키트로 알록달록한 실내화를 만들고 카드를 같이 쓴다. 세계 여러 나라 여성들의 섹슈얼리티 정치를 다룬 다큐 <Female Pleasure>를 보러 극장에서 만나기도 한다.


심각하고 거창한 토론이 오가지 않지만 소소한 일상을 공유하고 각자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이런 시간도 귀중한 것 같다. ‘우리 이주난민 여성들도 지금 여기 함께 살고 있다’는 단순한 사실, 거기서 피어나는 존재감과 연결감 또한 이 사회 공기 속에 더 퍼져야 한다. (※ 다음 편에서 <우리 자신의 언어로-독일 난민 여성들의 말하기> 연재 후기가 이어집니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필자 소개] 하리타(정세연)- 독일살이 5년차. 온갖 차이와 차별에 대한 감각이 곤두서있다. 일다에 <29살, 섹슈얼리티 중간정산> 칼럼을 연재했고, 이를 바탕으로 <오늘부터 내 몸의 이야기를 듣기로 했어>(2017)를 출간했다. 프라이부르크에서 환경사회학 석사 과정을 마쳤고, 젠더와 이주, 섹슈얼리티, 지속가능성을 주제로 글쓰고 행동한다. 하리타는 산스크리트어로 ‘초록’. facebook.com/haritamoonri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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