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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서 17년을 살고도 나는 여전히 난민 신세였다
<우리 자신의 언어로-독일 난민 여성들의 말하기> 케냐 출신의 ‘미미’
독일에서 살고 있는 난민여성들의 이야기를 하리타님이 번역, 해제를 달아 소개합니다. 베를린의 정치그룹 국제여성공간(IWSPACE, International Women Space)이 제작한 <우리 자신의 언어로-독일 난민 여성들의 이야기>에 수록된 내용으로, 이주여성과 난민여성으로 구성된 팀이 다른 난민여성들을 인터뷰하는 방식으로 구성됐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베를린의 크로이츠베아크 구역을 중심으로 한 난민 당사자 인권운동에서 활약했던 미미(Mimi)의 생전 목소리와 그를 추모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원문 제목: Even after 17 years living in Germany, Mimi has always felt like a refugee)
‘미미’라고 불렸던 케냐 출신 여성 미리암(Miriam)은 많은 동료 활동가들의 정신적 지주였다. 30대 중반의 젊은 나이였지만 몸을 아끼지 않고 활동에 몰두하던 미미는 2014년 6월, 게하르트-하웁트만 학교에서의 농성 이후 폐렴을 앓았다. 동료들의 증언에 따르면, 경찰이 의료진의 출입을 제때 허가하지 않고 식수 등의 생필품 공급도 통제해서 미미의 상태는 더 악화되었다. 그 해 12월, 경찰의 검거 작전을 피해 친구 집에서 지내던 미미는 결국 숨을 거두었다.
이 기사에 거듭 나오는 베를린 난민 당사자 운동에 대해서는 이전 기사 “그래, 나는 불법 난민이다!”(링크 http://ildaro.com/8287) 편에서 자세히 다루고 있다.
▶ 국제여성공간(IWSPACE)의 책자 <우리 자신의 언어로>에 실린 미미의 초상 일러스트.
난민 당사자 운동의 주역 ‘미미’와의 인터뷰
2014년, 미미가 살아생전에 응한 이 인터뷰는 이주민과 난민의 현실을 다룬 ‘28개 문의 집’ (The House of the 28 Doors)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베를린-드레스덴 예술가 그룹 ‘베베궁 누어’(Bewegung Nurr)에서 진행했다. 미미가 독백 형식으로 독일에서 난민으로 살아온 자신의 삶을 증언하고 있으며, 다음 링크에서 영상을 볼 수 있다. https://oplatz.net/?s=Sista+Mimi
미미: 안녕하세요! 저는 미리암입니다. 케냐에서 왔고, 36살입니다. 1997년부터 독일에서 살았습니다. 제가 케냐를 떠난 이유는 그 사회에서는 여성으로서 자기 목소리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일찌감치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질문이 많은 어린 소녀였던 저는 “여자는 말이 많으면 안 된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저는 여성들도 권리를 가질 수 있는 곳이 어딘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독일로 오고 나서 처음엔 많이 어려웠어요. 우선 언어를 배워야 했고, 새로운 문화와 생활방식도 익혀야 했습니다. 모든 것이 낯설었어요. 저에게 기대되는 것이 무엇이고, 뭔가를 성취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독일에 희망을 가득 품고 왔지만… 일이 잘 풀리지 않았어요. 저의 꿈은 그렇게 악몽으로 바뀌었습니다.
당시에는 독일에서 체류권을 얻으려면 결혼을 하거나 아이를 낳아야 된다고들 했습니다. 저는 서아프리카에서 온 한 남자를 알게 되어 그 사람에게 여기서 살 수 있는 방법을 물었습니다. 그 사람은 망명이나 난민 신청에 대해서 말해줬는데, 저는 처음 듣는 얘기였어요. 그가 케냐인들도 몇몇 살고 있는 포츠담 난민 숙소에 같이 가보자고 해서 저는 그를 따라갔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하는 말이, 이틀 전에 경찰이 와서 강제송환 목적으로 한 케냐인을 찾았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저한테 “경찰이 오거든 여권을 보여주지 말라”고 경고했고, 저는 신분증을 보여주길 거부해서 결국 체포되었습니다.
제가 17살 미성년이어서 난민 신청이 가능하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상황이 잘 이해가 안 갔습니다. 서아프리카 사람은 저한테 절차가 아주 복잡할 거라고 했거든요. 경찰은 저에게 이러저러한 관청으로 가라고 일러주고 교통권도 끊어 주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저는 아이젠휘텐슈타트(Eisenhüttenstadt)에 있는 중앙 난민 등록소로 갔고, 두세 달 뒤에 한 난민 숙소로 보내졌습니다.
숙소에서는 어떻게든 살아남으려 애썼어요. 거기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결혼을 하거나 아이를 낳은 것이었고, 저는 실제로 한 남자를 만났습니다. 그것도 난생 처음이었어요. 당시 19살이던 저는 결혼생활도, 누군가를 책임진다는 것의 의미도 제대로 몰랐습니다. 별 것 아닐 거라고 생각했죠. 결혼을 하면 체류권을 받을 수 있으니까, 독일에서 어떤 권리를 얻기 위해 해야 할 일들이니까 저는 했던 겁니다. 그런데 결혼은 여러 이유로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일 년 반 뒤에 법원 판결을 받고 이혼을 했습니다.
그러자 저보고 이 나라를 떠나라고 하더군요. 독일 남성과의 결혼 기간이 충분치 않아서 영구 체류권을 줄 수 없다는 거예요. 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영주권을 얻기 위해 싸우면서 오늘날까지 독일에 있습니다. 독일 정부는 종종 저를 강제송환하려고 했어요. 영주권은 17년이 지난 지금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제게는 제대로 직업 훈련을 받을 기회가 없었습니다. 아직도 이 사회의 일원이 되지 못한 겁니다.
▶ 영상 인터뷰에 응하고 있는 미미. 오라우어 학교 점거 운동이 한창이던 2014년의 모습이다. (출처: Vimeo)
17년을 살고도, 여전히 이 사회의 일원이 되지 못했다
그간 독일어를 배우려고 많이 노력했고, 많은 것을 스스로 깨쳤습니다. 저도 직업 훈련을 제대로 받아서 생계에 필요한 돈을 충분히 벌고 싶었어요. 그런데 이런 바람이 이루어진 적이 없네요.
베를린 크로이츠베아크 구역에 있는 잡센터(Jobcenter, 취업지원센터)에 매달렸어요. 저는 오디오 엔지니어가 되고 싶다고 했습니다. 제 케이스 담당 직원은 “이런, 그 직업은 (훈련에)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요. 독일에는 노인 돌봄 인력이 필요하거든요, 그 분야 훈련 과정을 들으셔야 됩니다. 제 말을 거부하면 센터에서 제재 조치를 할 수밖에 없어요. 지원금을 전혀 못 받을 거예요” 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하라는 대로 했습니다.
그런데 권유받은 과정은 일반적인 3년짜리가 아니라 6개월짜리 단기 과정이더라고요. 잡센터는 더 많은 사람이 센터를 거쳐 직업 활동을 시작한 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그런 방식으로 통계를 부풀리는 거였어요.
노인 돌봄 직업 교육을 이수했지만, 상황은 우스울 정도였어요. 자격증이 있음에도 생계에 필요한 돈을 제대로 벌 수 없었어요. 소득을 높여보려고 이후에도 잡센터를 몇 번이나 더 찾지만, 저한테 제대로 된 해결책은 아니었어요. 3년짜리 교육과정을 이수했더라면 월 1,100~1,200유로는 벌 수 있었을 텐데… 오디오 엔지니어 관련된 트레이닝은 결국 받지 못했고요. 그게 진짜 제 꿈이었는데요. DJ나 음악가가 되었다면 즐겁게 일했을 거예요. 그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어쨌거나 계속 독일에 있네요.
아프리카에서는 사람들이 노인들은 자발적으로 잘 돌봅니다. 사회가 노인들에게 배울 것이 있다는 인식이 있어요. 그런데 독일에서 제가 일했던 노인병원에서는 누구도 나이든 이들을 ‘돌보거나’ 따뜻하게 대하지 않더군요. 사람들은 그저 빨리 일을 해치우기 바빴어요. 공장의 조립라인에 있는 것처럼요. 직원들은 돌봐야할 노인들을 제대로 살필 시간이 거의 없었고, 그래서 환자들은 상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어요. 저는 이런 문화를 견딜 수가 없어서 그만두고 베를린으로 돌아왔습니다.
당시 라이헨베아거(Reichenberger) 거리 114A번지에 제 집이 있었어요. 집주인은 제가 12년 이상 거기에 살고 있으니까 그만 저를 내보내고 싶어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만기일이 없는 오래된 계약서를 가지고 있으니까 마음대로 할 수 없었지요. 집주인은 제가 살던 집을 아파트 두 개로 나눠 세놓고 싶어했어요. 집주인은 저를 강제퇴거 시키려고 행정 집행을 신청했죠. 어느 날 제가 집에 없을 때 제 물건이 집 밖으로 다 버려졌고, 레코드 컬렉션, 턴테이블, 스테레오가 다 사라져버렸어요. 제 서류와 사진도… 그야말로 모든 게 다 없어졌어요. 제 삶 전부가 법원의 명령과 집주인에 의해 지워져버린 거예요.
그 이후에 저는 노숙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즈음 뷔르츠부르크에서 베를린으로 난민활동가 그룹이 도착했고, 저는 그들과 제가 잘 맞는다고 생각했어요. 저도 제 집에서 쫓겨났잖아요. 강제퇴거 사건은 저에게 분명한 메시지로 다가왔어요. 그들은 베를린 크로이츠베아크에 가난한 사람들을 더 이상 원치 않는다는 것. 제 아파트 건물에서만, 집주인 클로저씨는 네 사람을 강제로 쫒아냈습니다.
※ 미미가 말한 뷔르츠부르크에서 베를린으로 온 난민활동가 그룹이란, 2012년부터 2년여 간 이어진 장기 천막 농성 그룹을 가리킨다. 이들은 뷔츠부르크(Würzburg)에 출발해 600km 걷기 집회 끝에 최종 목적지 베를린으로 왔다. 이주민이 많이 사는 구역인 크로이츠베아크(Kreuzberg) 오라니엔 광장(Oranienplatz)에 천막을 쳤다. 난민에 대한 독일 정부의 갖은 통제와 차별, 그중에서도 집단 숙소에 거주하도록 강제하는 정책에 전면 반대했다.
집에서 쫓겨나 노숙자가 되고, 난민운동에 가담하다
▶ 난민 인권 집회에서 확성기를 들고 발언하는 미미. 10대 후반의 어린 나이 때부터 독일에서 난민으로 살아가면서 인종적, 제도적 차별을 겪은 미미는 시스템의 불합리함과 인권에 점차 눈을 떴다. 죽기 전 몇 년간 베를린의 난민 당사자 운동 내에서 누구보다 크게 목소리를 높이고 용기 있게 집회와 농성에 앞장 선 인물이었다. (출처: oplatz.net)
저는 학교 점거 운동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어요. 그 학교는 제가 살던 라이헨베아거 거리에서 멀지 않았고, 저는 그 때 생각했어요. ‘좋아, 이게 우리 동네에서 계속 살 수 있는 기회다. 나는 이 동네에 참 오래도 있었어. 크로이츠베이크에서 행복하다구. 여기가 집처럼 편안해. 친구도 많고.’ 그렇게 해서 저도 학교로 들어가게 되었어요. 독일에 17년이나 살고도 여전히 스스로가 난민처럼 느껴졌다는 것도 점거 운동에 참여하게 된 이유였습니다.
※ 오라니엔 광장 농성에 참가한 3백 명 내외의 난민 활동가들 중 일부가 2012년 겨울, 추위를 피하기 위해 인근의 옛 학교[게하르트-하우트만 학교] 건물에서 스쾃팅[점거농성]을 시작했다. 미미는 이곳에 합류해 곧 주축 멤버가 되었다. 다른 활동가들과 더불어 요리하고, 공간을 지키고, 직접 연설문을 써서 집회에 나갔다. 미미가 마지막으로 쓴 원고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우리는 1951년 유럽인들이 서명한 제네바 협약의 <제 26조 이동의 자유>를 다시 한 번 상기하는 바이다.
“협약을 맺은 각 국가는 영토 내에서 난민들이 합법적으로 자유롭게 이동할 권리 및 자신의 거주지를 택할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 동일한 조건에 있는 일반 외국인에 대한 규정이 난민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우리는 이러한 우리의 권리를 알고 있다. 거주지를 택하고 독일 영토 내에서 자유롭게 이동할 권리가 있음을 알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기본적인 요구를 요구한다:
1. 거주 의무(Residenzpflicht) 규정의 폐지
2. 강제 송환 중단
3. 난민들을 비인간적으로 수용하고 사회 일원으로 살 수 없게 하는 집단 숙소 폐쇄
저는 크로이츠베아크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계속 쫓겨나고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 도시가 개발되며 자본이 유입되면서 부동산 값이 뛰고 원주민이 내몰리는 현상)이 심화되는 것에 반대하는 싸움도 같이 하기로 마음먹었어요. 크로이츠베아크는 서서히 “시키미키”(Schickimicki, 시크하고 트렌디한 것을 일컫는 속어) “하이티타이티”(Heititeiti, 사치스런, 상류층의)하게 변해가고 있었습니다. 이전에 이곳에선 누구나 살 곳을 마련할 수 있었고, 사람들은 나란히 어울려 살았어요. 저 역시 여기가 집이니, 다른 곳으로 갈 수 없었어요. 베딩(Wedding)이나 노이퀼른(Neükolln)이 아니라 크로이츠베아크가 내 집이니까요!
제가 왜 더 이상 이 동네에 살 수 없게 됐는지 이해할 수 없네요. 평범한 사람들은 이제 이 구역의 집세를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어요. 무척 슬픈 일이죠. 그 평범한 사람들이 바로 크로이츠베아크의 고유한 분위기와 풍경을 만든 장본인들이니까요. 이제 새로 들어오는 사람들이 자기들 마음대로 다 바꾸려고 해요. 이 사회를 분열시키고 망쳐버리는 것이나 다름없어요. 중산층은 크로이츠베이크를 장악하려 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마르잔(Marzahn)이나 헬러스도르프(Hellersdorf) 구역으로 이사 가야 할 처지예요. 정치적으로 옳지 못한 현실이죠. 모든 인간은 이 세상에서 자유롭게 살 권리가 있습니다.
이곳은 하나의 행성, 하나의 세상. 사랑은 하나, 혈육도 하나. 차별의 근거를 저는 찾을 수 없네요. 지구에 인간을 위한 공간은 충분합니다. 다 같이 살 수 있어요. 분류하고 구별하며 사람들을 서로 다른 집단과 계급, 비둘기집 구멍 같은 곳으로 몰아넣지 않고도요. 이 세상은 아름다운 곳이고, 정치인들이 “괴를리(Görli)는 어떻게 되는 건가?”라며 안달하지 않고도 함께 살아가는 것이 가능합니다.
※ 미미가 언급한 괴를리[Görli]란, 베를린 크로이츠베아크 구역 동쪽에 위치한 14ha 면적의 괼리처 공원[Görlitzer Park]을 가리킨다. 다양한 인종과 계층의 사람들이 두루 찾는 휴식 공간으로, 자유분방하고 대안적인 베를린의 랜드마크 중 하나였다. 그러나 지난 몇 년간 크로이츠베아크에 젠트리피케이션이 급속도로 일어나면서, 이 공원에 관해서도 자본과 공공 행정 간 재개발 논의가 지속적으로 있어왔다.
“아프리카 난민은 유럽 식민주의의 결과”
결론적으로, 이 학교는 사람들이 계속 살아가는 곳으로 남아야 합니다. 전 세계에서 온 난민들의 상징으로서요. 크로이츠베아크에 있는 다수의 난민들은 아프리카 출신입니다. 우리가 다 알다시피, 독일은 세계 제일의 무기 수출 국가예요. 무기 생산에 들어가는 자원은 여전히 아프리카에서 나오고 있죠. 그러니까 이 사회는 왜 난민들이 유럽으로 계속 흘러들어 오는지를 의아해해선 안됩니다. 저 반대편, 아프리카에는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당신에게 (인간다운 삶을 위한) 기회나 선택지가 없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가만히 앉아서 가족이 다 굶어죽기를 기다리겠습니까? 식민지배 때문에 이렇게 됐습니다! 이 난민들, 특히 아프리카에서 온 사람들은 유럽에 의한 식민지 건설의 결과이자 증거입니다. 이상할 게 하나도 없어요. 앞으로 수세대에 걸쳐 이런 현실이 계속될 겁니다.
나는 묻습니다. 우리는 언제쯤에나 다 같이 문제 해결에 나설 건가요?
▶ 미미가 생전에 오래 살았고 또 난민인권운동을 펼쳤던 베를린 크로이츠베아크에서 그의 죽음을 추모하는 사람들의 모습. 2014년 12월 13일 추모 행진이 있었으며, 이후 미미의 유해를 케냐 나이로비로 옮겨 장례식을 치르기 위한 모금 캠페인도 진행되었다. (출처: oplatz.net)
‘세계 인권의 날’에 숨을 거둔 미미를 추모하며…
다음은 2014년 12월 13일, ‘미미 자매’ 추모 행진에서 나타샤(Natasha A.Kelly)와 아바(Aba Yankah)가 발표한 추모글에서 일부 발췌한 내용이다.
우리 중 많은 이들이 그랬듯, 미미 자매는 잔혹한 경찰에 맞서 싸웠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자주, 경찰이 그 잔인함을 드러내는 대상이었습니다. 미미는 이 나라에 아주 뿌리 깊은 조직적 인종차별을 마주해야 했습니다. 그 경험 중 하나로, 그녀는 문 잠긴 경찰차 안에서 얻어맞았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몇 발짝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일어난, 그리 오래되지 않은 일입니다.
하지만 자유와 정의에 대한 갈망에 힘입어 미미는 지치지도 않았습니다. 죽지 않았더라면 아마 학교 점거 현장의 다른 동료 투사들과 더불어 지금쯤 감옥에 있었을 겁니다. 바로 이 수법, 정치적인 수법 때문에 말이지요! 책임을 져야 할 정치인들이나 대중들은 정작 침묵하며 한쪽에서 지켜만 볼 때, 가장 두드러지게 목소리를 내고 헌신하는 활동가들을 표적으로 삼는 것은 낡은 정치적 수법입니다. 우리가 여기 베를린에서 목격하고 있는 것은 전 세계 어디에서나 똑같이 작동하는 군사주의적 행태입니다. 조직적인 경찰의 괴롭힘과 잔혹성, 그리고 여러 형태와 규모의 살인.
경찰은 사람들을 감옥에 끌고 갈 수 없자, 그들 앞에 감옥을 만들었습니다. 예를 들어 경비요원들, 경찰과 구의회와 도시계발 업자들이 고용한 다국적 민간 경비회사 용역들이 있습니다. 용역의 역할은 인권운동의 지지 세력을 차단하는 것입니다. 미미가 절실히 필요로 했던 지원과 보살핌을 말입니다. 학교 점거현장에 오래도록 방문객이나 친구, 가족의 출입이 통제를 당함으로써 미미의 사회적 기반은 무너졌습니다. 여러 상황 속에서 혼자 남겨지면서 그녀는 천천히, 구조적으로 약해져갔습니다. 우리는 미미의 죽음에 경찰과 더불어 크로이츠베아크 구의회도 부분적으로 책임이 있다고 봅니다.
▶ 학교 점거 현장에서 몇 달 동안 폐렴을 앓던 시기의 미미.
구의회의 조치로 행해졌다는 어떤 공사로 인해 미미가 자기 방을 빼앗겼을 때, 식수 공급도 끊겼습니다. 그 시점부터 건강이 악화되었습니다. 몇몇 제한된 의료 인력만이 학교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경찰이 활동가들을 고립시키는 전략을 실행하는데 있어 미미가 표적이 되었습니다. 이는 신체적 정신적 필요와 안전, 사생활, 양심의 자유, 표현의 자유, 이동의 자유와 같은 기본권을 부정하는 백인 권력의 표적이 된 것과 다름없습니다.
며칠 전에 인권 침해 사건이 또 있었습니다. 학교에 누가 살고 있는지를 정확히 파악한 경찰은 이른 아침에 사전 예고나 수색영장도 없이 들이닥쳤습니다. 비상구를 점검한다는 것이 구실이었습니다. 경찰은 수색 끝에도 미미를 찾지 못했습니다. 당시 그녀는 이미 친구 집으로 피해 있었고, 거기서 생애 마지막 며칠을 그나마 평화롭게 보냈습니다. 머릿속으로는 계속 난민 운동 생각을 하면서요. 그때도 미미는 ‘정의 없이는 평화도 없다’고, 책임져야할 이들에게 주저 없이 말하고 있었습니다.
미미 자매, 케냐에서 태어났고 세계 시민이며 자유의 투사인 그녀는 2014년 12월 10일, 세계 인권의 날에 숨을 거두었습니다.
‘인간의 존엄은 침해될 수 없다.’ 미미는 독일 사람들이 헌법에서 이 문장을 삭제해야 된다고 말한 적 있습니다. 이 말에 따라 사는데 실패했으니까요. 그녀는 말했습니다. “나는 아프리카에서 여성은 목소리가 없다는 것을 어릴 때 깨달았고 그래서 집을 떠나왔다.” 미미는 끝내 목소리를 얻었고, 스스로 하나의 목소리, 난민 운동의 목소리가 되었습니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필자 소개] 하리타(정세연)- 독일살이 4년차. 온갖 차이와 차별에 대한 감각이 곤두서있다. 일다에 <29살, 섹슈얼리티 중간정산> 칼럼을 연재했고, 이를 바탕으로 <오늘부터 내 몸의 이야기를 듣기로 했어>(2017)를 출간했다. 프라이부르크에서 환경사회학 석사 과정을 마쳤고, 젠더와 이주, 섹슈얼리티, 지속가능성을 주제로 글쓰고 행동한다. 하리타는 산스크리트어로 ‘초록’. facebook.com/haritamoonri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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