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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들은 어디서든 존재감을 드러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의 언어로-독일 난민 여성들의 말하기> 나풀리 랑가 인터뷰


독일에서 살고 있는 난민여성들의 이야기를 하리타님이 번역, 해제를 달아 소개합니다. 베를린의 정치그룹 국제여성공간(IWSPACE, International Women Space)이 제작한 <우리 자신의 언어로-독일 난민 여성들의 이야기>에 수록된 내용으로, 이주여성과 난민여성으로 구성된 팀이 다른 난민여성들을 인터뷰하여 1인칭 에세이로 재구성했습니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수단 출신의 난민여성 나풀리 랑가(Napuli Langa)는 수단과 우간다 등에서 인권운동을 해왔으며, 2012년 경 독일로 이주한 후 베를린 난민 당사자 운동을 주도한 인물이다. 다음은 2015년 베를린에서, 국제여성공간(International Women Space, 이하 IWS)이 난민 활동가인 나풀리 랑가를 인터뷰한 내용이다.


난민 그룹에서도 여성의 목소리는 쉽게 묻힌다


IWS(International Women Space, 국제여성공간): 오라니엔 광장에서 때로는 유일한 ‘여성’ 난민 활동가였는데요, 그 경험이 어땠는지 들려주세요.


나풀리: 사실 힘듭니다. 여성으로서 싸우고, 액티비스트로서도 싸우는 셈입니다. 동지들 속에서도 남자들이 저를 둘러싸고 있어요. “나도 여기 있어. 내 말을 들어”라고 해야 하는데, 그게 항상 쉽지 않아요. 오라니엔 광장의 장기 농성에서의 제 경험을 토대로 말하자면, 제 목소리가 아주 묻혔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 자리를 지키기가 어려웠어요. 예를 들어 제가 텐트 안에 누워있으면 새로운 사람이 와서 저를 보고는 “착한 여자는 아닌가보다”라든가 “누구 부인인가?”라고 으레 말했어요.


제가 영어와 아랍어를 한다는 게 좀 도움이 됐죠. 자기소개를 할 수 있어서요. 하지만 한 사흘 자리를 비우고 돌아오면 소개를 다시 해야 돼요. 그 때 내가 누구인지 모두에게 분명히 인식시키려고 했습니다. 여성들이 입을 열고 말을 할 때 힘이 생겨요. 사람들의 존중을 받지요. 잠자코 있으면 짐짝 취급을 받고, 짐짝 마냥 회자되는 거예요. 이점에 신경을 쓰고 있어요. 내가 싸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하고, 그것에 대해 사과 따위 안합니다.


한번은, 첫 번째 난민 버스 투어에서 친구들 중 하나가 절 쳤어요. 논쟁을 하고 있는데 어떤 남자가 저를 한대 퍽 친 거예요. 제 머리와 얼굴을 때렸어요. 저는 앉아있고 그 사람은 서 있었고요. 이게 뭔가 싶었는데, 그 남자는 자기가 되려 공격을 받았다고 발뺌을 하더라고요. ‘내가 이걸 그냥 당하고 있을 수 없다. 여자라도 크게 한 방 날릴 수 있다는 걸 보여줘야겠다” 싶어서 다음 날, 그 사람이 앉아서 차를 마실 때 다가가서 똑같은 방법으로 눈가를 한대 쳐줬지요. 그 남자는 한 일주일은 눈을 못 뜨고 다니면서 제가 무슨 몽둥이로 때렸다고 말하던데요. 주변에서 보고 있던 사람들이 “주먹으로 한대 친 거야” 라고 일러줬지요. 저는 “여자 손은 펀치 못 날릴 줄 알았냐?” 라고 했어요. 제가 받은 건 갚아준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러니까 제가 여자라도 아무나 절 못 때려요.


하지만 전 여자들 그룹이 그리울 때가 있어요. 남자들은 자기들만의 생각이 있어요. 항상 남자들 사이에 있지만, 그 사람들이 하는 얘길 이해 못 할 때도 있어요. 저는 동료 여자들과 대화해야 돼요. 그런 게 많이 그립죠. 여자들은 이중으로 시달려요. 애들 있는 부부가 남편도 같이 운동하는 사람이면, 애 돌보는 책임을 나눠야 하는 거 아닌가요? 번갈아서 활동하면 되죠. 그게 뭐가 어렵냐는 말이에요.


무슨 논의를 하면, 여자들도 반드시 그 자리에 있어야 된다고 봐요. 거기서 현안에 집중하면서 ‘우리도 있다’고 목소리를 내야지요. 상황이 맘에 안 들게 돌아가도, 보이는 자리에 있어야 되요. 존재감을 드러내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지요. 가령 저는 국제여성공간이 지금 이렇게 여러 이슈에 참여하는 게 좋아요. ‘망명중인 여성들’(‘Women in Exile’이라는 단체)이나 국제여성공간은 역할이 커요. 독일에 16개 주를 다 커버해야 되니까요. 이 단체들 말고는 여성들이 주도하는 정치 참여 통로가 없어요.


여성들한테 나라 정세나 독일에 주가 몇 개냐는 상식적인 질문을 하면 아무것도 모르는 경우가 많아요. 정치인 이름이나 정당을 대라고 해도 못해요. 이게 바로 문제예요. 우리가 좀 더 모습을 드러내고 목소리를 내야 돼요. 한편으로 여자형제, 딸, 어머니가 있다는 남자들이 아직도 여성 동지들을 무시하는 것도 바뀌어야지요.


▶ 망명중인 여성들(Women in Exile) 활동가들. 2002년 베를린 집회에서 여성 난민들이 연대하기로 다짐한 이래 정기적인 모임을 갖다가 2011년 비영리단체로 등록해 직접행동, 교육, 네트워킹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2016년 버스 투어를 기념하며 난민 여성들 간 연대를 과시했다. 사진 왼편 상단에는 ‘투쟁하는 자, 패배할 수도 있다. 투쟁하지 않는 자, 이미 패배했다’라고 적혀있다. (출처: women-in-exile.net)


“여성들이 훨씬 더 강해요”


IWS: 난민숙소들을 찾아다니며 캠페인을 하는 버스 투어에 여러 번 참여하셨는데요, 난민숙소에 가면 다른 여성 난민들이 나풀리 씨를 어떻게 보던가요?


나풀리: 어제는 기센(Gießen)에 있는 숙소를 방문했는데, 입주 난민들이 절 보고 처음에 자원봉사단체에서 온 줄 알더라고요. 제가 먼저 그분들한테 “저는 난민이고, 제 신분증은 여기 있습니다”라고 말을 걸었어요. 그 사람들은 “우리는 여기를 벗어나기 두려운데, 어떻게 찾아올 생각을 다 하셨어요?”라고 하더라고요. 그 분들은 체류증을 얻고 싶어서 법이라면 다 따르고 있고, 또 겁을 먹고 있는 거지요. 그걸 보면서 여성 엠파워먼트가 더 필요하다고 느꼈어요. 누군가가 “난민 여자 여기 또 있어요. 같이 뭐라도 합시다” 라고 얘기해야겠다 싶었어요. 아직 여성들의 정치 인식이 좀 낮은 건 사실이죠. 그 사람들을 탓할 수 있나요? 남자아이, 여자아이 구분해서 키운 부모와 가족을 탓해야 해요.


IWS: 오라니엔 광장에 (난민 농성에 연대하기 위해) 찾아온 난민 여성들도 있었는데요, 오래 머물지 않았다고 들었어요.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나풀리: 한번은 집회에서 발언하고 있는데, 케냐에서 온 여자들이 저를 보고 “와, 나도 당신처럼 되고 싶어요. 어떻게 그렇게 앞에 나설 수가 있어요?” 라고 했어요. 그 중에 한명은 농성장으로 찾아와서 같이 활동도 하고 그랬죠. 이미 예전에 정치 활동을 해본 배경이 좀 있더라고요. 아이젠휘텐슈타트(Eisenhüttenstatt) 쪽에서 활약해서 사람들이 “여성 대사”라고 별명을 붙여줬대요. 그런데 그 분도 애한테 더 집중해야 된다는 스트레스가 많았어요. 본인 말고는 애 볼 사람이 없었거든요.


IWS: 독일에서 난민으로 살아가는 현실이 남녀 간에 다르다고 보세요?


나풀리: 우선, 제가 보기엔 여자들이 더 강해요. 남자들은 압력에 잘 굴복하거든요. 그런데 여자들은 인내심이 더 투철하고 긍정적이에요. ‘내일은 괜찮을 거야’ 라는 식으로요. 여자들은 엄마들이기도 한데, 애들을 돌보면서 “아가야, 내일은 좀 괜찮아질 거다”라고 말할 줄 알죠. 책임의식 때문인지 남자들처럼 술 퍼마시지도 않아요. 남자들은 전에 안 마시던 사람도 스트레스 받으면 술을 시작하거든요. 그런데 여자들은 “내가 술을 마신다고 뭐가 달라지나. 정신 차리고 할일을 해야지”라고 해요. 물론 여성들도 스스로 목숨을 끊고 그러긴 하지만요.


여자들은 난민으로 와 있어도 집으로 돌아갈 생각도 하고 있어요. 친척들이나 두고 온 아이들이 있으면 연락을 계속하고요. 애초에 피난 가는 남자들이 여자들보다 많아요. 왜 그럴까요? 남자들은 애가 열이 있어도 신경 안 쓰고 자기 한 몸 떠나고 가족을 곧 잊어버리기도 해요. “난 여기서 못살아. 떠나야 돼. 애들은 못 데려가니까 혼자 가겠다”고 하죠. 여자들은 아이를 두고 못 떠나요. 데리고 떠나든지 같이 죽어요. 그런 점에서도 여자들이 더 강한 것 같고요.


목표에 더 집중하고 한 눈 안 팔고요. 더구나 말이 앞서질 않아요. 입을 열기 전에 생각을 충분히 하고, 하겠다고 얘기한 건 책임을 져요. 구체적이라고 볼 수도 있겠네요. 뭐라 말해놓고 나중에 그게 아니라고 되돌리는 남자들에 비해서. 여성들이 훨씬 강합니다.


▶ 일간지 Der Tagesspiegel에서 나풀리 랑가의 ‘나무 농성’을 보도한 이미지. 이 밖에도 독일, 유럽의 여러 언론사에서 그녀의 농성 소식을 다뤘으며 독일 난민 인권운동의 한 상징이 되었다.


성차별 시스템을 고분고분 따르면, 차별은 더 강화돼


IWS: 기존에 살던 난민숙소를 떠나서 난민 당사자 운동에 뛰어들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나풀리: 수단에서 살던 시절부터 사회 문제에 관심이 있었어요. 스스로를 인권운동가로 정의해왔어요. 저는 풀뿌리 운동에서 사람들 사이에 다리를 놓는 역할을 할 수 있어요. 상황이 돌아가는 것을 잘 모르는 사람들, 혹은 정치인들을 대상으로 연결할 수 있겠고요. 아시다시피 저는 많이 떠돌았잖아요. 다양한 사람들을 접하다보니 제 인식이 확장된 것 같아요. 우간다에 있을 때는 ‘비폭력 수단 인권운동 조직’이라는 단체를 세운 적도 있어요. 단체를 운영하던 중에 망명 신청이 거부되어 떠나야 했어요. 이후 독일 난민숙소에 도착해서도 여기서 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독일로 처음 왔을 때, 브라운슈바이그(Braunschweig)에서 한 달 정도 난민숙소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난민 버스 투어 조직이 찾아왔어요. 사람들이 숙소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는데, 저는 무슨 일인가 보려고 나갔어요. 자기들도 난민이라고 하더라고요. 당시에 저는 난민 거주의무 규정이나 숙소 시스템이나 강제송환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었어요. 다만 의문은 갖고 있었지요. “내가 왜 여기 들어와 살아야 되지? 사람들이 왜 내 허락도 없이 방에 들어오지? 왜 독일어를 쓰라고 강요하지?” 이런 압력들이 싫었어요. 독일어는 안 그래도 배우려고 생각했죠. 저는 외향적인 사람이라 소통이 중요하고, 여기서 살려면 언어를 알아야지요. 하지만 그걸 강요해선 안 되는 거예요.


그런 스트레스가 많던 차에, 액티비스트들이 찾아왔길래 저는 ‘버스 투어를 나도 같이 해야겠다. 뭐가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참여를 해야겠어’라고 마음먹고 가담했어요. 차차 알아갔죠. 난민숙소가 감옥과 다름없이 운영된다는 것, 강제 송환이 행해진다는 것. “뭐? 내가 추방당할 수도 있다고?” 화가 나서 끝까지 가야겠다고 싶었어요. 나는 잘못한 게 없다, 이런 시스템에 편입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이게 저의 운동 동기이고요, 저는 사실 지금 부자예요. 친구가 많아서 부자예요. 돈과는 상관없이 아주 부자이고, 그거면 충분해요. 오라니엔 광장 농성 때부터 저는 집이 없어요. 하지만 친구들이 재워주지요. 버스 투어도 아무것도 없이 시작했는데 지금은 돈도, 버스도 생기고 있고요. 오히려 재산이 많은 사람은 시작을 못했겠죠. 저는 할 수 있어요. 그냥 웃으면서.


▶ 브라운슈바이그 시에서 인종차별에 반대하고 난민을 환영하는 시민들이 사용한 플래카드. 난민 당사자들의 인권운동은 시민들의 지지와 연대에 힘입기도 했다. 25만 명이 사는 중북부 도시 브라운슈바이그는 나풀리 랑가가 독일에 와서 처음 머문 곳이다.


IWS: 여성들에게 나와서 함께 싸우자고 제안을 한다면, 뭐라고 말씀하시겠어요?


나풀리: 활동가 기질 때문에 가끔 남자형제들에게도 이렇게 말해요. “여어, 오빠(동생), 세상이 나은 곳이 되려면 남녀가 협력을 해야 돼. 세상을 50대 50으로 나눠가져야 돼.” 사실 세상에 남자보다 여자가 많다고 하거든요. 남자들이 전쟁에서 죽고, 군인으로 훈련을 받잖아요. 그 틈에 여자들이 경제를 이끌고 권력을 잡은, 1차 세계대전 때와 같은 시기가 있었어요.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이죠.


어린 시절에 아버지 어머니와 많이 싸웠어요. 저더러 저녁 6시까지 집에 들어오라고 하면 알았다고 하고, 새벽 1시에 들어갔어요. 그러던 부모님이 지금은 저를 되게 자랑스러워해요. 제가 분명한 비전이 있다고 생각해서 존중하세요. 저는 아버지가 지역 사회나 나라, 세상과 싸워야 했다면, 저는 (딸로서) 스스로의 내면과 싸우고 괴로워한 게 불공평했다고 말해요. 아무튼, 여자들도 이제는 계획을 갖고 스스로를 파묻은 무덤에서 나와야 됩니다. 여성들이 시스템을 고분고분 따르는 시간은 그 시스템이 더 강해지도록 내버려 두는 시간이나 다름없어요. 우리 여자들은 시스템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을 때까지 약화시킬 수 있어요.


나무 위의 농성은 ‘여성들의 힘’을 받아서 한 거예요


IWS: 스스로에 대해서 좀 더 말씀해주실래요? 특히 나무 위에서 홀로 농성했던 경험도 있잖아요.


나풀리: 제가 앞서서 여자들이 더 강하다고 말했잖아요. 우리는 뭔가를 계획하면 끝까지 밀고 나가요. 제가 나무 위에 올라갈 때도 마음을 단단히 먹었고, 뭘 감당해야할 지 알고 있었어요. 오줌 똥 눌 자리도 없고 샤워도 못하고, 온갖 일이 벌어질 것을 알았지만, 끝까지 있을 생각이었어요. 사람들이 이제 그만 내려오라고 하면, 내가 내려가고 말고는 나를 끌어내리려고 내 권리를 빼앗아간 사람들한테 달려있다고 했어요.


사실 첫째 날은 남자들도 몇 있었어요. 그런데 경찰이 밑에서 지키고 있다고 오줌을 못 누더라고요. 경찰 머리 위로 오줌을 눠야 되는데, 그게 부끄러운지 수줍은지 하여튼 못하더라고요. 하지만 저는 누고 싶으면 언제나 “이봐 경찰! 저 쪽으로 안가면 머리 위로 오줌 눌 거야” 라고 했어요. 어쩔 때는 경찰들이 제 말을 무시하고 있다가 진짜로 오줌을 싸기 시작하면 달아났어요. 전 제가 원하는 바를 알았기 때문에 다른 것은 개의치 않았어요. 저한테는 제 기본권을 찾는 게 중요했죠.


나무 농성 때, 아주 추운 날씨에 비까지 내리는데 경찰이 밥을 못 먹게 했어요. 결국에 저는 설사가 나고 온 몸이 부어서 입고 있던 셔츠를 찢어야 했어요. 이런 일을 해낼 에너지가 어디서 나오냐고요? 다른 여성 동지들이 나무 밑에서 장미나 꽃을 들고서 제 이름을 불러주는 데에서 에너지를 얻었어요. 나만 괴롭다고 할 게 있나요? 그 사람들도 빗속에 종일 거기 서서 애들까지 데리고 와 있는데. 저는 거기서 힘을 받아서 걱정 말라고, 잘 헤쳐 나가고 있다고 스스로를 격려했어요.


▶ 독립방송 Ruptly에서 나풀리 랑가의 ‘나무 농성’을 보도한 이미지. Der Tagesspiegel에서 보도한 사진과 비교했을 때, 나풀리의 대조적인 표정이 눈에 띈다. 이 사건은 2016년 Yoel Diaz Vazquez의 비디오 아트 작업(youtu.be/kw4yNKH7fq4)으로 재해석되기도 했다. 영상은 나풀리가 시카모어 나무에게 조용히 말 건네듯 시작된다.


나무 농성이 이어지던 중에, 이번 일로 모든 난민 이슈를 다 해결할 수는 없다는 것은 저도 받아들였어요. 그런데 오라니엔 농성장에 상설 정보 부스(Info Point)와 서커스 텐트(크고 견고한 텐트)를 다시 세우는 것은 가능할 것 같았어요. 하지만 당시 교회 쪽 난민 지지자들도 텐트는 안 될 것 같다고, 논의 사항이 아니라고, 딜렉 콜랏(Dilek Kolat, 당시 베를린 시청 노동여성부 시장) 책임도 아니라고 했어요. 이제 그만 내려오라고요.


저는 동료들에게 뜻은 잘 알아들었다, 하지만 광장이 우리 활동의 거점이니, 거기에 정보 부스가 꼭 있어야 된다면서 뜻을 굽히지 않았어요. 광장 농성을 이어가려면 우리 쪽 요구 사항을 계속 밀고 나가야 된다는 것, 특히 텐트가 필요하다는 입장이었어요. 저는 철거당한 텐트와 부스를 돌려놓으면 바로 내려가겠다고 했지요. 하지만 경찰 쪽 책임자는 제 요구를 묵살하고 강제력으로 저를 끌어내리겠다고 했어요. 결국엔 그렇게 못했지요.


경찰은 콜랏 시장을 면담하길 원하냐고, 그가 근처에 와있다고 했어요. 저는 그게 좋은 전략이 아니라고 판단해서 거부했고, 대신 정보 부스를 돌려주겠다는 합의 내용을 문서에 남기라고, 콜랏을 비롯한 관계자들이 서명할 것을 요구했어요. 그 사람들이 서명하는데 15분도 채 안 걸리더라구요. 그리고 저는 내려왔어요. 농성은 5일 동안 이어졌는데, 저는 계속할 의향도 있었어요. 농성은 저 혼자 한 게 아니에요. 저도 어디선가 힘을 빌려온 거예요. 여성들의 힘이지요. 이 세상에 평화가 온다면 여자들이 그 일을 할 거예요. 빼앗긴 힘을 되찾아야 합니다.


아프리카 수단에서 여성 인권을 위해 싸운 시간들


IWS: 난민 당사자 운동에서 아프리카 여성들은 극소수예요. 대체로 정치적으로 활발하지 않지요. 다른 아프리카 여성들에게 뭐라고 얘기하고 싶으세요?


나풀리: 우리나라(수단) 얘기를 할게요. 거기선 이슬람 샤리아 율법이 적용되어 여자들이 집에 들어앉아 있어야 하고, 복장에도 규정이 있어요. 저는 북과 남 수단을 아울러 여성 인권을 위해서 싸웠어요. 먼저 여성들을 직접 만나고, 워크숍을 열어 신뢰를 쌓았어요. 사람들을 방문하고, 의견을 나누면서 여성 문제에 대한 인식을 키우려고 했어요. 우리 집에서 워크숍을 열어서 우리 어머니와 이웃들도 초대했어요. 심지어 이모들도 와서 참여하다가 나중에 적극적이 되었지요. 제 자매 둘은 이미 활동하고 있었고요. 우리는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역할을 줬어요.


저도 처음에는 워크숍에 참여자로 갔는데, 주최 측 사람들이 당시 20대였던 저를 보고 재능이 있다며 같이 일을 하자고 했어요. 저는 같이 하겠다고, 무엇을 하면 되겠냐고 물었지요. 제게는 남자 형제가 넷이고 남자 사촌도 넷이 있어요. 그네들이 저더러 빨래하고 밥 하라고 늘상 시키면 저는 어려서도 거기 의문을 품었어요. 여자들이 고립된 사회 분위기가 보였고, 그걸 깨야한다고 생각했어요. 우리 시골 마을에서 ‘비폭력’을 얘기하고, 가족계획 워크숍을 하고요.


시골에서는 여자들이 아이를 열 명은 나아야 형편이 나아진다고 생각해요. 아이들이 밭일을 돕고 밥도 짓는다고요. 셋 밖에 낳지 않으면 가난해진다고 생각하고요. 이런 인식을 바꾸는 데는 조심스런 접근이 필요해요. 여성들을 대상으로 워크숍을 열어서 열심히 내용을 전달해도, 참가자들은 온전히 이해를 못한 채 남편한테 가서 얘기하지요. 그러면 남편들은 아내더러 집이나 지키라고 하고, 자기들이 총을 들고 가서 “마누라 망치는 창녀들” 잡으러 왔다고 해요. 워크숍을 준비한 여자들은 몸을 피해야 했어요.


참가자 여성들의 의견을 묻고, 스스로 인식하는 문제점들을 먼저 말하게 하는 방식이었다면 잘 통했을 텐데. 교육 받지 못한 시골 여성들에게 다가갈 때, 기본부터 같이 얘기하고 분석해야 뭔가 해낼 수 있어요. 자기들이 존중받지 못하고 철장에 갇힌 신세라는 것을 서서히 알려줄 수 있어요. 앞으로 수단의 지역 단체들이 해나갈 숙제입니다.  (번역: 하리타)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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