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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케도니아 길 위에선 무슨 일이든 생길 수 있다

<우리 자신의 언어로-독일 난민 여성들의 말하기> 에티오피아를 떠나 1년②


독일에서 살고 있는 난민여성 당사자들의 이야기를 하리타님이 번역, 해제를 달아 소개합니다. 베를린의 정치그룹 국제여성공간(IWSPACE, International Women Space)이 제작한 <우리 자신의 언어로-독일 난민 여성들의 이야기>에 수록된 내용으로, 이주여성과 난민여성으로 구성된 팀이 다른 난민여성들을 인터뷰하여 1인칭 에세이로 재구성하였습니다. “Anything can happen in Macedonia road”라는 제목의 글 속 화자는 에티오피아 출신 여성으로, 이름은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아 보도합니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페이스북에서 찾은 브로커를 따라 한없이 걸었다


난민 밀수업자를 찾는 일은 무척 쉬웠다. 누구나 찾아가서 볼 수 있는 페이스북 페이지가 있고, 거기 전화 연락처가 나와 있다. 까다로운 점은, 업자들은 경찰이 난민을 가장하고 접근하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막상 만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암호를 알려줄 사람을 알고 있어야 한다. 업자들은 주로 커피숍 같은 데서 만남을 제안하고, 그 자리에서 사람들을 데리고 길을 떠난다. 또, 터키에서 난민이 되려면 외국인 신분이어야 한다. 시민권이 있는 자라면 불법적으로 그 나라를 떠나려할 리 없기 때문이다. 터키 시민은 그리스로 가는 비자를 발급 받을 수 있다. 목숨을 걸고 보트를 탈 필요가 없다.


밀수업자들에게 난민은 나이와 상관없이 누구나 똑같이 한 사람으로 간주된다. 한 사람 몫의 돈을 내면 한 명이 가는 것이다. 밀수업자들에게 난민들은 그냥 돈이다. 암호가 있기 때문에 터키에서 그리스로 가는 중간 중간 대부분 돈을 직접 내는 것이 아니라 암호를 댄다. 다만 그리스에서부터는 훨씬 까다로워진다. 밀수업자 여정에 동행하지 않고 난민들만 도보로 갈 경우에는 당연히 돈을 먼저 내야 한다. 한번 떠난 사람이 돌아오든 말든 업자들이 알 바 아니기 때문이다.


▶ 난민들을 겨냥한 한 밀수업체의 페이스북 페이지. 


*페이스북에 페이지를 개설한 한 난민 밀수업체의 이름은 “이즈마르(터키)에서 유럽까지 싼 가격에 비밀 운항”(Smuggling from Izmir to Europe for the cheapest price)이며, 자신들의 ‘보트 서비스’를 버젓이 광고하고 있다. 페이스북이 적발해 폐쇄시키기 전까지 해당 페이지 ‘좋아요’ 수는 4천개를 넘었고, 무사히 유럽에 도착한 사람들의 감격하는 모습이 담긴 인증샷과 동영상으로 가득 도배되어 있었다.


이 업체가 실제로 제공하는 것은 ‘여러분을 위한 관광 보트를 찾아 독일로 가세요. 이후에 가장 가까운 경찰서로 가기만 하면 왕처럼 살게 됩니다’와 같은 광고 문구와 달리, 정원 초과의 낡은 고무보트이다. 그마저도 많게는 2천 달러(약 200만원)를 내고서야 탈 수 있다. 2017년 한해만 2,400명 이상의 난민들이 지중해를 건너다가 익사한 것으로 집계된다.


돈만 내면 성별도 중요치 않다. 터키에서는 여자라고 따로 괴롭힘을 당하지는 않는다. 터키에선 불법체류 중인 외국인도 경찰에 피해 신고를 하면 가해자가 감옥에 갈 수 있다. 마케도니아에선 가는 길 내내 마피아가 정말 많았다. 터키에서는 경찰에 가서 “이 사람이 저를 쫓아와요”라고 하면 경찰이 나서준다. 하지만 마케도니아에서부터는 사정이 다르다. 마케도니아에 관한 괴담을 무수히 들었다. 가령, 여자들끼리만 길을 가면 안 된다. 그래서 알지도 못하는 젊은 남자들과 함께 가는데, 이들이 무슨 짓을 할지도 믿을 수 없다. 낯선 남자들이라도 동행하지 않으면 마피아를 만나 더한 일을 당할지도 모른다.


마케도니아 길 위에선 무슨 일이든 생길 수 있다. 지나가는 목격자가 있어도 피해자를 보호해주려는 노력 따위 안 할 것이다. 마케도니아에서 무슨 일을 일어난대도 거기 꿈쩍할 경찰은 없다. 길에서 강도를 당하고 경찰에 신고했다는 친구들이 있었다. 경찰은 마피아를 붙잡기는 했지만, 마피아가 사람들에게 갈취한 돈을 압수하고 난민들은 그리스로 되돌려 보냈다고 한다. 경찰의 행태가 이렇다. 거기선 그 누구도 도와주지 않을 것이다.


*마케도니아 마피아란, 마케도니아 공화국과 캐나다, 호주 등지의 해외 이주민 공동체에서 활동하는 불법 갱단이나 범죄 조직을 통칭한다. 발칸 지역(세르비아, 불가리아, 알바니아 등)의 다른 마피아 조직과 협력하며, 주로 불가리아를 통해 이탈리아나 러시아 마피아와도 접촉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스위스, 모나코, 룩셈부르크, 사이프러스와 같이 은행업이 발달한 곳들에서 돈세탁을 하거나, 밀수, 불법 마약-무기거래, 금품갈취, 차량절도, 사기, 도박, 인신매매, 청부살인, 사설경호, 성판매에 이르기까지 갖은 불법행위와 폭력을 저지른다.


해외에서 들어오는 자금이나 투자가 제한된 현실에서, 마케도니아의 은행 산업은 마피아가 연루된 불법 거래에 크게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근절하기 어렵다. 전 세계에 많은 기업이나 자선, 종교, 교육 단체들까지도 마케도니아 은행을 통해 돈세탁을 한다고 한다. 마케도니아의 사법, 행정, 재무 시스템 내 부패 문제 또한 심각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망명길은 쉽지 않았다. 나는 그 삼촌(내 뱃속 아이 아버지의 동생)과 같이 있었고, 그를 비롯해 우리 일행이었던 다른 젊은 남자들과 아이를 둔 가족도 있어서 무사히 마케도니아를 지났다. 마피아가 돈 외에 더 원하는 것이 있었다면 어쩔 뻔 했나. 내가 성모마리아 십자가 목걸이를 하고 있어서 마피아들은 내게 친절했다. 그게 이점이었다. 그들은 또 내가 큰 외투를 걸치고 있어서 처음에는 임산부인 줄 몰랐다가, 알고 나면 내게서 몇 발짝 떨어졌다. 심지어 마피아 가운데서도 좋은 사람들이 있었다.


기찻길을 걸으며 더한 것들을 너무 많이 보았다. 피가 난무한 것을 보았다. 사람들이 얻어맞는 것을 보았다. 가나인들이 꽁꽁 묶여서 도로에 버려진 것도 보았다. 마피아는 돈을 빼앗고 나서 이들이 쫒아오기라도 할까봐 묶어 놓았다.


대부분의 경우, 마피아와 난민 밀수업자들이 결탁하고 있었다. 업자들은 누가 오고 가는지 알고 있다. 예를 들어, 시리아 사람들이 대부분 돈을 좀 갖고 있다는 것, 주머니에 2-3천 유로는 갖고 있으리라는 걸 알았다. 업자는 시리아인들이 가족과 친구들에게 푼푼이 받아온 그 돈들을 다 모아 두었다가 가는 길에 강도를 당하는 (당한 행세를 하는) 것이다. 지금은 정확히 기억이 안 나지만, 우리가 가는 곳마다 마피아가 있었고 그들이 너무 많은 것을 빼앗아 갔다.


반면, 우린 경찰한테 발각되고도 추방당하지 않기도 했다. 경찰은 우리 일행 중에 아이가 넷이나 있고 임신한 나도 있어서, 가던 길을 그냥 계속 가게 했고 대로변 말고 다른 길로 가라고 알려줬다. 맨 처음 마주친 경찰들은 제복을 입지 않았던 것으로 보아, 아마 경찰이 아닐지도 모른다.


영하의 추위에 굶주린 만삭의 몸으로 국경 넘기


▶ 2016년 9월 영국 Hurst 출판사에서 나온 책 <Migrant, Refugee, Smuggler, Saviour>(이주민, 난민, 밀수꾼, 구원자). 저자들은 수십 억짜리 산업이 되어버린 난민 밀수업을 ‘무자비한 전문 범죄 네트워크’로 규정하고, 취재를 통해 지중해 뿐 아니라 사하라 사막 지역, 발칸 반도, 유럽 국가들의 수도에 파고든 밀수업의 실체를 밝힌다.


26일이 지나고 나서야 우리는 다음 업자를 만날 수 있었다. 알바니아계 마피아가 세르비아까지 우리를 데려갈 업자를 주선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으므로 우리는 따라 갔고, 그렇게 만난 업자에게는 ‘돈이 하나도 없다’고 말했다. 업자는 괜찮다며, 그래도 갈 수 있다고 했다가 결국 1천 유로를 요구했다. 우리 일행이 열 명이었으니 각자 100유로씩 내야했다. 먼저 어떤 농장을 통과해 걷게 되었는데 온통 진흙 밭이었다. 지난 몇 주간 기찻길을 따라 걸은 것에 비하면 끔찍했다. 목적지에 도착해서 우리는 수중에 500유로밖에 없다고 하고 그 돈을 다 줬다. 그 이후에도 걷고 또 걸어야 했고 우리는 다들 극도로 지쳐버렸다. 그래도 하룻밤 밖에 쉴 수 없었다. 다음날이면 어김없이 계속 걸어야 했다.


그 업자는 우리에게 차가 한 대 나올 때까지 걷자고 했지만, 몇 시간을 같이 가도 결국 차가 나타나지 않자, 우리에게 그냥 쭉 앞으로 가라고 하곤 자기는 빠졌다. 마침내 국경에 닿았는지 세르비아 경찰이 우리를 붙잡았다. 경찰은 내가 임신 중인 것을 보고 우리를 마케도니아를 돌려보내고 말았다. 아이가 있는 가족들을 먼저 들여보내다가 나를 보고는 “애가 여기서 나오겠구먼. 안되겠어. 돌아가세요!”라고 한 것이다. 마케도니아에서 우리는 똑같은 업자를 찾아가서 다시 시도했다.


이번에는 해냈다. 하지만 세르비아로 국경에 도착하기 전, 마지막으로 종일 걸을 때 상황이 너무 끔찍했다. 우리는 강에서 물을 퍼마셔야 했고 먹을 거라곤 빵과 치즈뿐이었다. 가는 길에 빵이 가득 담긴 봉지 몇 개와 치즈 두 세 덩어리를 100유로나 내고 사곤 했다. 장사치들이 우리가 불법 이민자들인 것을 알고 그렇게 판 것이었다. 우리에게 잘 대해준 농부들도 간혹 있었다. 우리가 굶어 죽어갈 때 빵을 내줬다. 막판에는 돈이 거의 다 떨어져 가, 전처럼 하루에 100유로씩 쓸 수 없었다. 끔찍했다.


세르비아에 도착한 우리는 뭔가 먹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 정말 행복했다. 세르비아에서 다음날 헝가리로 계속 가는 것이 계획이었지만, 비가 너무 많이 왔다! 이윽고 우리는 기차를 타고 국경 넘기를 시도했다. 아이를 데리고 있는 사람들은 성공을 했지만 나머지 네 명은 가지 못했다. 기차에 사람이 너무 많아서 일일이 검표하지 못했는데, 네 사람은 걸린 것이다. 그래서 나를 포함한 네 사람은 헝가리에 남아 있다가 다시 시도하려 했는데, 이번에는 돈이 없었다.


그 때, 시리아 사람 몇이 내게 다가와 출산예정일이 언제냐고 물었다. 그 당시로선 언제고 진통이 올 수 있었다. 이미 임신 9개월째였기 때문이다. 시리아인들은 나머지 사람들은 기차로 가고 나만 자기들 차에 태워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우리 일행이 거부했다. 함께 떠나왔으니 계속 같이 가야지, 나만 혼자 차로 가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 사람들은 낯선 우리에게 먹을 것을 사주며 나를 조금은 편하게 해주었다. 그 시리아인들은 (알고 보니) 밀수업자들이었는데, 우리에게는 돈을 전혀 받지 않았다. 여기 몇 년이나 있어서 사정을 안다면서 내게 헝가리에서 애를 낳으면 돌봐줄 사람이 없어서 너무 힘들 거라고 했다. 주변 나라의 인종차별 때문에 아기한테도 좋지 않을 거라고 했다. “당신은 특히 더 힘들겠다”면서 내게 20유로를 쥐어주고 우리 일행을 결국 다 차에 태워주었다.


그로부터 8시간 뒤, 나는 뮌헨에 있었다. 다른 이들은 뮌헨에 남고, 나는 다음날 베를린으로 왔다.


베를린의 한 병원에서 아담을 출산하다


내가 베를린 온 것은 3월 13일이고, 아들 아담은 4월 2일에 태어났다. 3월 12일에 출산을 했어야 하지만, 나는 여행 중에 애가 나오지 않기를 바랐다. 베를린에 도착해서는 당장이라도 나오겠구나 싶었는데, 도리어 보름이 지나도록 나오지 않았다. 사람들은 내 몸이 준비가 안 되어 아이를 붙잡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내 생각에 세르비아에서 헝가리로 가는 길에 출산을 했더라면 아들은 죽고 말았을 것이다. 영하 5도의 날씨였다. 그 때 내 몸은 너무 약해져있었고, 나는 제발 아이가 나오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런데 나중에 독일에 도착하고서도 한참 나오지 않을 땐, 좀 어이가 없었다.


▶ 25세 여성 시아 사나(Shiaa Sanaa)가 영국의 한 난민캠프에서 출산한 아이를 안고 있다. ⓒ출처: mirror.co.uk


아담이 태어난 그 날, R과 나는 검진을 받으러 다니던 병원 말고 다른 곳에 예약을 하러 가고 있었다. 그 때 양수가 터졌고, 찾아간 병원에는 당장 아이를 받아줄 의사가 없어서 예전 병원으로 달려가 출산을 했다. R이 거기에 같이 있었던 것이 정말 다행이다. 아이를 난민숙소에서 낳지 않아서 기쁘다. 그건 정말 끔찍했을 텐데.


[번역자 노트] 난민들이 의존할 수밖에 없는 ‘브로커’


예멘 난민의 제주도 입국 이후로 한국에서 난민 반대-혐오 움직임이 크게 일어났다. 반대론자들의 흔한 논리 중에 하나는 ‘가짜 난민’이 많기 때문에 받아들이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들이 말하는 ‘가짜 난민’은 페이스북 그룹을 만들어서 자기들끼리 소통하거나 밀수업자, 혹은 브로커를 통해 움직이는 사람들이다. 의도적, 계획적 망명은 망명이 아니라는 것인지? 혼자 힘으로 알기 어려운 정보나 가기 힘든 곳을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 얻으면 난민이라 할 수 없다는 것인지? 도통 그 논리를 이해 못하겠다.


다만 확실한 건, 요즘 시대 난민들은 대개 페이스북과 브로커 두 가지에 다 관련이 되어 있으며, 관련이 될 수밖에 없는 처지라는 것이다. 이것은 확실한, 팩트다. 당사자들의 증언도, 전 세계 언론과 관련 기관들이 말하는 바도 그렇다. 그러니 이제는 좀 더 많은 사람들이 현실을 직시했으면 좋겠다.


물론 페이스북은 밀수나 인신매매 활동과 관련된 포스트는 사용 규정상 모두 금지하는 입장이다. 자체 모니터링팀을 굴리고, 언론사나 사용자로부터 제보가 오면 즉각 게시물이나 페이지를 삭제하는 것을 방침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실시간으로 천문학적인 게시물이 올라오는 SNS서비스 특성상 효과적인 대응이 쉽지 않고, 그 사이 업자들은 얼마든지 손쉽게 새로운 페이지를 열 수 있다. 왓츠앱과 같은 기타 SNS서비스에도 비슷한 현상이 있어 최근 ‘E-Smuggling’이라는 용어까지 등장했다. UN과 같은 국제기구는 소셜미디어나 온라인 플랫폼 회사들에 더 강력한 조치를 요구하고 있다.


국제이주기구(International Organisation for Migration)에 따르면, 전세계적으로 인간 밀수업자(human smuggler)들은 연간 350억 달러를 벌어들인다고 한다. 난민 인구가 크게 늘었던 2015년에 밀수업 또한 언론의 많은 조명을 받았다. 알자지라(Al Jazeera) 방송은 9월 15일자 경제 프로그램 ‘Counting the Cost’에서 난민 한 사람 당 3천 달러를 낸다고 할 때, 당시 유럽에 들어온 36만4천302명을 곱해서 11억 달러라는 규모가 나온다고 계산했다. 그 해 유엔난민기구가 요청한 예산은 15억 달러였는데, 그 중 3억 이상이 조달되지 못한 것과 비교하면 어마어마한 액수의 돈이 비공식 불법활동, 그것도 취약계층 사람들의 주머니에서 착취된 것이다. 기막힐 노릇이다.



▶ 인간 밀수업에 대해 국제기구들은 경고하고 있지만, 사실 난민들은 이주를 감행하기 위해 브로커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기도 하다.


그런데 오늘 화자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녀가 길에서 만난 밀수업자들, 주머니를 탈탈 털리고 사기와 배신도 당한 그들에게 크게 원한을 품고 있지 않는 것 같다. 업자들이 ‘더 나은 삶’에 대한 희망의 실현을 가장 직접적으로 도왔고, 또 그녀가 자발적으로 돈을 내고 ‘서비스’를 이용했기 때문일까. 어떤 생존자 난민들은 자신에게 친절했던 밀수업자들을 ‘구원자’로 부르기까지 한다.


열 명이 넘는 난민 밀수업자를 직접 인터뷰했다는 패트릭(Patrick Kingsley)의 기사를 통해, 모하메드(Abu Mohammed, 가명)라는 업자 이야기를 들어보자. (2017년 3월 24일 뉴욕타임즈 기사 “A Migrant Smuggler Moves on, but Misses His Profits” 참조 https://nytimes.com/2017/03/24/world/europe/turkey-human-trafficking-refugee-crisis.html)


터키에서 밀수업으로 2015년 한해 80만 달러(약 8억원) 가량을 벌어들인 그는 인터뷰 당시인 2017년엔 일에서 손을 뗀 상태였다. 2015년 이후 터키와 그리스를 오가는 밀수가 95% 까지 감소한데다, 2016년 초에 발칸 국가들이 단속을 강화해서 일감 자체가 줄었던 것이다. 이스탄불에 사무실까지 차려놓고 밀수업을 한 그는 원래는 시리아에서 나고 자라 외과의 보조로 일했다. 말하자면 사람을 살리는 일을 했던 것.


유럽으로 가는 바다를 건너다 죽을 뻔하고, 결국 터키로 망명을 한 뒤에 그는 자신이 업자가 됐다. 일반 ‘고객’은 물론, 어린 아들과 친척들까지 배에 태워 유럽으로 보냈다. 그 일을 하며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고 부끄럽기도 했지만, 자신은 한사코 ‘정직한 브로커’였다고 한다. 이런 더러운 돈이 오가는 일(dirty business)엔 사기꾼들이 득실거리지만, 자기는 그 와중에 정직했다는 것이다. 그는 이스탄불의 난민 밀수업 허브인 악사라이(Aksaray) 지역을 걸으며 고객들을 만나던 카페와 구명조끼를 파는 가게, 차례를 기다리는 난민들이 노숙하던 공원을 보여준다. 그곳에서 난민 밀수는 지극히 일상적인 풍경 가운데 하나이다.


반면, 어떤 업자들은 조직적이고 의도적으로 폭력과 학대를 일삼는다. 특히 젊은 여성이나 아이들을 사창가, 인신매매 조직에 팔아넘기거나 이동 중에 성매매를 하도록 강요한다. 자기 수입을 늘리기 위해 ‘고객’들을 명백하게 목숨이 위험한 환경에 몰아넣는 것(정원 초과 보트를 운행하는 것, 버스나 트럭의 밀폐된 짐칸에 사람을 가득 채우는 것, 충분한 식량 없이 먼 거리를 걷게 하는 것 등)이 뚜렷한 예다. 가끔 외신에 나오는 끔찍한 사건 사고가 이렇게 해서 일어난다. 한국 사람들이 난민 밀수업에 대해 갖고 있는 제한된 정보와 인상의 출처라고도 할 수 있다.



불법 이주와 난민, 인간 밀수업은 서로 얽히고설켜 매우 복잡하다. 앞서 언급한 알자지라 경제 방송이 유로폴(EUROPOL; 유럽연합경찰) 청장과의 인터뷰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방송 영상의 일부를 발췌한 내용이다.


-앵커. 카말 산타마리아(Kamahl Santamaria): 유럽 거주자 중에서만 3만 명 이상이 밀수업에 연루되어 있다는 추청치가 있는데 어떻게 보는가.

-청장(Deputy Director) 발 반 게메르트(Wal Van Gemert): 실로 엄청나게 많은 숫자다. 우리 유로폴은 이 사안에서는 권한이 낮은 (low-enforcement) 지원 기관으로서, 수사나 경찰력 동원에 제한이 있고 주로 조사 활동을 한다. 현재 관련 인력은 1천4백 명이다.


-앵커: 밀수업자들의 행태에는 잔인함이나 도덕성 기준에서 불법적인 요소가 분명히 있지만, 자발적으로 돈을 주고받는 금전거래라는 점에서는 합법으로 봐야하는가? 유럽연합 기준에서는 어떤지?

-청장: 유럽 대부분 국가에서 사실 난민 밀수 행위는 불법으로 규정되어 있다. 많은 난민들이 생명이 위험한 상황에 놓이고 협박과 학대에 시달린다는 점에서 심각한 사안이다.


-앵커: 1천4백 명 인력의 역할은 무엇인가? 어느 방향으로 조사하고 있나?

-청장: 유럽연합국들이 요청해오는 크고 작은 케이스가 있다. 특정 업자의 번호 등 신상을 요청하는 작은 케이스가 진행 중에 커지기도 한다. 업자들이 어떤 식으로 의사소통하는지 그 패턴을 집중적으로 조사한다.


-앵커: 난민 밀수를 계획하고 실행하는 것이 디지털 기술로 인해 점점 정교해지고 있다. 스마트폰, 페이스북, 바이퍼, 왓츠앱과 같은 것들을 때문에 추적이 더 어려운가, 아니면 그 반대로 수월해졌나?

-청장: 언급했듯이 실행력이 적은 지원기관으로 우리는 실제 용의자를 추적하는 업무를 할 수 없고, 소셜미디어 관련된 동향을 계속 파악하고 있다.


-앵커: 사실 근본적인 해결책이 있는지 잘 모르겠다. 수요가 있는 한, 업계는 계속 존재할 것 아닌가.

-청장: 그렇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따라서 난민 신청자의 개별 이주가 아니라 범죄 행위에 해당하는 것들에 집중한다.


-앵커: 북아프리카와 같은 난민을 배출하는 국가들에도 인력을 파견하나?

-청장: 그렇다. 실제 수사 활동에 한계가 있지만 현지에도 인력을 보내 조사를 진행한다.


-앵커: 문제 해결이 잘 이루어지고 있느냐고 질문 드리진 않겠다. 현 사태는 심각한 수준이다. 다만 유로폴에서는 문제 해결 과정에 그간 발전은 있었다고 보는가?

-청장: 최근에도 큰 스캔들이 있었다.(트럭 짐칸에 가득 갇혀있던 난민들이 모두 죽은 채 오스트리아 국경 근처에서 발견됨.) 이 사건을 예로 들어보면, 우리는 기존에 밀수업 관련 데이터베이스와 사건 현장을 크로스 매칭(비교)해서 실마리를 찾아나간다. 수사가 진행 중인 기관들과 협조에 다른 사건들과 연결점을 찾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책임 소재가 밝혀지면  구속 조치에 들어간다. (영상 출처: https://aljazeera.com/programmes/countingthecost)


역시나, 이번에도 또, 현실은 결코 납작하지도 분명하지도 않다. 나는 마음 속의 혼란과 의문을 채 풀지 못한 채 글을 마무리한다. 베를린의 한 병원에서 태어난 아기, 아담의 삶에도 혼란과 질문이 가득할 것이다. 백인 기독교의 나라 독일에서 검은 피부의 난민으로 태어난 이 아이가 걱정스럽다. 엄마의 고통스런 발걸음만큼 거세게 출렁이던 양수를 건너 세상에 도착한 아이. 이 녀석과 나는 꽤 오랫동안 같은 사회에서 살아갈 것이다.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역시 답을 잘 모르겠다. 정의나 진보와 같은 개념들을 묻는 사람일수록, 약한 자의 편에 서고자 하는 사람일수록, 앎을 계속하고 고민을 거듭하는데 게을러져선 안 된다, 그 생각만 잠시 스쳐갔다.


[필자 소개] 하리타(정세연)- 독일살이 4년차. 온갖 차이와 차별에 대한 감각이 곤두서있다. 일다에 <29살, 섹슈얼리티 중간정산> 칼럼을 연재했고, 이를 바탕으로 <오늘부터 내 몸의 이야기를 듣기로 했어>(2017, 동녁)를 썼다. 독일 프라이부르크에서 환경사회학 석사 과정을 마쳤고, 젠더, 이주, 섹슈얼리티, 지속가능성을 주제로 계속 글쓰고 행동하려 한다. 하리타는 산스크리트어로 ‘초록’이다. facebook.com/haritamoonrider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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