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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 여성들의 저항과 연대의 역사를 듣다

파드와 알 라바디 팔레스타인 여성행동위원회연합 前 대표  (시미즈 사츠키)


이스라엘 점령 하에 있는 팔레스타인에서 오랫동안 여성인권을 위한 운동에 매진해온 파드와 알 라바디(Fadwa Al-Labadi)씨. 최근 일본을 방문한 그녀는 저항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고 있는 ‘여성들의 시민권’에 대해 강연했다. 일본의 저널리스트 시미즈 사츠키 씨가 이번 기회에 팔레스타인 여성들의 현재와 권리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자 파드와 씨를 만나 인터뷰한 내용을 싣는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이스라엘에 점령당한 팔레스타인 ‘여성의 위치’


▶ 파드와 알 라바디 ‘팔레스타인 여성행동위원회연합’ 前 대표. 1947년 예루살렘 출생. ⓒ촬영: 오치아이 유리코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나크바(대재앙). 1948년, 이스라엘 건국으로 인해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자신들이 살던 땅에서 쫓겨나 많은 수가 난민이 되었다. 파드와 알 라바디 씨는 그 바로 전 해에 태어났다. 아버지가 돌연사한 스무 살 무렵까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교사로 일했고, 나중에 대학에 진학했다.


팔레스타인 여성들의 권리를 위한 운동에 가담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부터다. “청년들과 자원봉사 그룹을 조직해서 지방과 농촌, 난민캠프에서 사회적 약자들을 지원하는 활동을 했습니다. 그곳에서 여성들이 직면한 문제를 알게 되었죠.”


당시 이스라엘에 점령당했던 팔레스타인에는 ‘자치’가 없었다. 공공 서비스도 매우 열악했다. 파드와 씨는 수요 조사를 하기 위해 유치원과 학교를 정비하는 활동을 폈고, 병원과 노인시설에서 일했다. 그러던 중, 남편의 폭력과 일방적인 이혼으로 인해 고통에 빠진 여성들의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


그녀들은 가정에서 학교에 다니는 것을 허락 받지 못해 읽고 쓰기를 못했다. 일을 하고 싶어도 아이를 맡길 시설이 없어 일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고등학교에 계속 다니고 싶어 하던 한 여성의 가족을 찾아가 파드와 씨가 함께 설득한 일도 있다.


그리고 1977년, 파드와 씨는 ‘여성행동위원회’를 설립했다. 동예루살렘과 라말라, 가자 지구에서 활동을 시작했는데, 점차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여성들의 희망에 기대어 교육, 재봉 기술을 개발하였고, 아이들을 맡아 교육해 줄 유치원도 운영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며 도움을 받았던 사람이 이후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여성들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었다. 종교의 차이나 지지하는 정당의 차이를 뛰어넘어 여성들이 서로 이어져있는 팔레스타인 여성행동위원회는 현재까지도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에 있는 난민 캠프(2015) ⓒ페민 제공


인티파다 이전부터 전개된 여성들의 저항운동


팔레스타인 저항운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여러 가족들 안에서 체포자나 희생자가 나왔다. 가옥 파괴도 일상적으로 일어났다. 여성행동위원회는 여성들이 정치활동과 저항운동에 참여하도록 독려하였으며, 이를 조직화해나갔다.


이 시기는 제1차 인티파다(intifada, 1987년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조직적인 반이스라엘 저항운동)가 일어나기 10년 전의 일이었다. “이런 기반이 있었기 때문에 인티파다가 일어나자마자 시위를 조직하거나 이스라엘이 봉쇄한 지역에 은밀하게 식료품을 운반하는 운동도 할 수 있었다”고 파드와 씨는 말한다.


파드와 씨는 정치활동에 관여하면서도 1986년까지 공립학교 교사로 계속 일하며 노동조합 활동을 이끌기도 했다. 하지만 인티파다 때 ‘학생을 선동하는 테러리스트’로 낙인찍혀 이스라엘 당국에 체포되었다. 그녀는 자신이 사는 마을에 연금 당했고, 직장에 나갈 수 없게 되어 직업도 잃었다.


첫 투옥은 1978년. 반(反)이스라엘 정치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일주일 간 독방에 있었다. “벌레가 기어가는 궤적을 쫓고 떨어지는 물방울을 센다. 그렇게 하면서 나쁜 상황에 사로잡히지 않으려고 했다.” 파드와 씨의 온화한 표정 속 날카로운 눈빛의 이유를 알 수 있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그녀는 상황에 굴하지 않고, 1988년에 동료들과 함께 새로운 투쟁의 방식을 찾아 ‘예루살렘 여성학센터’를 설립했다. “여성들이 당면한 문제와 현실적인 필요를 연구했고, 잡지를 발행하면서 편집장을 맡았죠. 우리 잡지는 여성들의 팔레스타인 저항운동, 체포와 박해의 경험, 그리고 여성들이 일상에서 직면한 차별과 폭력의 문제들을 다뤘습니다.”


여성행동위원회도 “저항운동을 하는 가운데 남편을 잃거나, 집이 파괴된 여성들을 돕고, 정치활동을 하다가 체포를 당하면 변호사를 소개하는 등 구체적인 활동을 했다.” 강건한 여성연대의 힘을 엿볼 수 있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립, 여성 참정권을 획득하다


1993년, 오슬로 합의(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PLO 간의 협정)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수립되었다. 여성행동위원회도 국가를 건설하는 활동과 여성의 정치 참여를 활동의 목표로 삼았다.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 안에서 일어난 남성들의 권력다툼을 거들떠보지 않고, 여성의 참정권을 획득하기 위해 정치의식 계발 활동을 시작한 것.


‘팔레스타인 기본법’ 제정위원회에도 관여하며 정부와 의회에서 여성의 대표성을 확보하고자 했다. 결국 1996년에 제정된 기본법에 이를 반영시켰다. 현재 팔레스타인 자치구 내에서 여성들은 완전한 참정권을 가지고 있다. 2005년부터는 정계에서 여성 할당제도 실시되었다.


여성행동위원회는 ‘가족법’을 제정하는 활동도 중요하게 생각했다. 여성들은 오랫동안 부당하게 권리를 침해당해왔다. 결혼과 이혼에 있어서 남성과 여성의 권리는 불평등했다. 가령, 남편이 이혼을 요구하면 여성의 의사와 상관없이 이혼이 성립하는 것이다. 재산분할이나 자녀양육권, 거주권 등도 현저히 여성에게 불리했다.


법 개정에 의해, 여전히 불충분하기는 하지만 이혼 시 여성의 의사도 확인하게 되었고, 아내가 이혼을 요구하는 것도 비로소 가능해졌다. 조혼을 막기 위해 결혼 최저연령도 여성 14.5세, 남성 15.5세로 제도화하며 일보 전진했다. 하지만 파드와 알 라바디 씨는 “결혼을 하기 위해서는 아직도 후견인의 승낙이 필요하다”고 말하며,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가정폭력, 성폭력 등 여성을 향한 폭력에 대응하며 피해자를 구제하기 위한 핫라인도 갖췄다. 여성행동위원회는 동등한 교육권과 노동권을 확보하기 위해 여성들의 취학을 돕고, 고용평등을 위한 활동에도 힘을 쏟고 있다.


▶ 2008년 베를린 영화제 관객상을 수상한 영화 <레몬트리>(에란 리클리스 감독)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경계에서 레몬농장을 가꾸는 여성의 이야기를 통해, 팔레스타인 여성의 삶을 보여준다.


점령지 여성들의 저항과 풀뿌리 여성운동의 힘


파드와 씨는 그 후 팔레스타인의 대학에서 근무했다. 첫 연구는 그때까지의 활동을 기반으로 한 ‘여성과 시민권’이었으며, 그 문제의식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그녀는 알쿠드대학(Al-Quds University) 젠더연구센터 소장으로 일했고,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000년 도쿄에서 열린 여성국제전범법정(12월 8일~12일 전시 성노예로 강제동원한 일본의 전쟁범죄를 단죄하기 위해 열린 국제민간법정) 국제공청회에 출석 차 처음 일본을 방문했다. 당시 파드와 씨는 점령 하 여성에 대한 폭력과 자신의 체포 경험 등을 발표했었다.


높은 분리벽으로 갈라져 있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지만, 파드와 씨를 통해 이곳의 가부장제에 대한 여성들의 저항과 40년에 걸친 풀뿌리 여성운동의 힘을 배울 수 있다. (통역: 후루자와 키요코)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남편과 다른 신분증을 가진 팔레스타인 여성의 삶

이스라엘이 세운 분리장벽과 신분증 제도가 미친 영향  (후루자와 키요코)


팔레스타인의 여성운동가이자 알쿠드대학(Al-Quds University) 젠더연구센터 소장을 역임한 파드와 알 라바디 씨의 연구 중 하나는 이스라엘의 아파르트헤이트(극단적 인종차별정책), 분리장벽과 신분증이 여성들에게서 시민권을 박탈한 실태를 분석한 것이다. 그 내용을 후루자와 키요코 교수(도쿄여자대학)가 소개한다. 후루자와 교수는 34년간 동티모르의 독립운동을 연구하고 지원하는 일에 헌신해왔다. 올 여름에는 팔레스타인 현지를 방문해 파드와 씨를 직접 만나기도 했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 이스라엘군의 폭격을 받은 팔레스타인 자치구(가자 지구)의 모습. ⓒ페민 제공


이스라엘 분리장벽이 팔레스타인 여성에게서 뺏은 것


파드와 알 라바디 씨는 1990년대부터 외국 유학을 계속하며 연구자로서 길을 밟아왔다. 그녀는 1970년대 이후 자신의 경험을 포함해 팔레스타인 여성 액티비즘을 기록하였고, 오슬로합의(1993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PLO 간의 협정) 후부터 제2차 인티파다(intifada, 2000년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조직적인 반이스라엘 저항운동)을 거치며 그것이 사그라드는 모습을 분석했다.


팔레스타인 해방운동에 참여한 여성들의 바람과는 달리, 1994년의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설립은 반동(구체제를 부활하기 위하여 취하는 정치적 행동)을 가져왔다. 남성 지도자들은 주도권 쟁탈전에 뛰어들었고, 해방투쟁에 기여한 여성들의 공헌을 무시하며 여성 등용을 거부했다. 여성운동은 기대하던 성과를 내지 못했다. 또한 외국의 원조가 여성들의 활동을 사업화하면서 오히려 풀뿌리 운동의 조직력은 약화되었다.


1990년대 후반, 유대인 입식지가 확대되며 팔레스타인에 토지와 물의 권리는 돌아오지 않은 채 ‘자치’의 실체가 드러났다. 그와 동시에 이슬람 세력은 보수화되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파드와 씨의 연구는 동예루살렘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시민권을 분석하는 ‘점령체제’의 문제와, 이슬람가족법이라는 팔레스타인 사회의 근간과 관련된 주제가 핵심이 되었다.


2000년에 제2차 인티파다가 일어나자, 이스라엘은 ‘테러리스트로부터 방어한다’는 명목으로 예루살렘시에서 팔레스타인 자치구를 격리시키고 일방적으로 ‘분리장벽’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파드와 씨는 그 벽과 이스라엘의 신분증 제도가 팔레스타인 가족과 커플로부터 ‘장’을 빼앗고, 관계성이라는 권리까지 침식하고 있는 실태를 이야기한다.


▶ 이스라엘이 세운 베들레헴의 분리장벽. 2018년 1월. ⓒ촬영: 미나가와 만요


그녀의 연구는 예루살렘 및 주변에 사는 ‘남편과 다른 신분증(ID)을 가진’ 팔레스타인 기혼여성 154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를 근거로 한다. 이스라엘은 1967년 전쟁으로 동예루살렘을 점령한 후, 신분증 제도를 도입해 피난 온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서 거주 자격을 박탈한 것은 물론, 거주의 권리를 극단적으로 제한했다.


ID(신분증)에 따라 ‘분단’된 가족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신분을 다음과 같이 구분한다.


-이스라엘 건국 때 지배하에 있었던 팔레스타인 사람은 제한적 이스라엘 시민권을 가진다.

-동예루살렘에 사는 팔레스타인 사람에게는 이스라엘 시민권은 없지만, 예루살렘 거주 자격이 있는 ‘청색’ ID를 부여한다. 이 ID로 팔레스타인 자치구에 가는 것은 가능하다.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 지구(팔레스타인 자치구) 주민에게는 이스라엘의 동의하에 ‘녹색’ ID가 발급되며 영주 자격이 부여된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자국의 영토라고 주장하는) 예루살렘 및 이스라엘 안에는 허가증 없이 들어갈 수 없다.

-이스라엘은 국외에 있는 팔레스타인 난민의 귀환을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들에 대해 ‘녹색’ ID도, ‘청색’ ID도 발행해주지 않는다. 팔레스타인 난민들은 외국 국적을 갖는 것으로 취급된다. 여행을 올 수는 있지만, 거주는 할 수 없다.


▶ 이스라엘 신분증 제도에 따른 팔레스타인 사람의 신분 구분 ⓒ제공: 후루자와 키요코


이번 조사에 응답한 여성들은 다음과 같은 거주 상황에 놓여 있다.


①남편이 ‘청색’ ID이고 아내는 ‘녹색’ ID인 경우. 아내는 ‘거주 허가’ 자격을 취득한 후 예루살렘 시내(분리장벽의 서쪽)에 거주한다. 거주 허가증은 반년마다 갱신해야 한다.

②‘청색’ ID를 소지한 아내가 ‘녹색’ ID를 가진 남편을 따라 예루살렘시 외부(분리장벽의 동쪽)에 거주하는 경우.

③분리장벽의 동쪽이지만, 서안과의 행정 경계 바로 앞이라는 변칙적인 지구에서 이스라엘에 세금을 내면서 ID가 다른 남편과 사는 경우. 여기에서는 아내의 ‘녹색’ ID를 유지할 수 있다.


이스라엘이 분리장벽을 세울 때, 그 지역에 있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거주지 선택을 강요당했다. 예루살렘 ‘거주 자격’을 우선시한다면, 집이 분리장벽의 동쪽에 있을 경우 처분해야 한다.


①의 경우, ‘녹색’ ID를 가진 아내는 예루살렘에서 ‘거주 허가’를 얻을 수도 있지만, 공공 부문의 일은 할 수 없고 사회보장도 제공받지 못한다. ②의 경우, ‘청색’ ID를 가진 아내는 예루살렘에서 일했던 사람이 그 직업을 잃게 되고, 나아가 7년간 예루살렘에 생활기반이 없다고 간주되면 ‘거주 자격’도 잃게 된다. 또한 ID가 ‘녹색’으로 바뀌면, 가령 이상출산 등의 사태가 발생한다 해도 ‘허가증’ 없이 예루살렘에 들어갈 수 없다.


‘녹색’ ID 소지자가 예루살렘시에 사는 애인이나 약혼자와 만나러 가는 경우에도 ‘허가증’이 필요하다. 허가 없이 월경했다가 체포되면 두 번 다시 허가가 나지 않는다. 또한, 2촌 이내에 투옥된 사람이나 순교자가 있어도 허가가 나지 않는다.


이번 조사에서 딸이 다른 ID의 남성과 결혼하는 것에 ‘반대’한다고 답한 사람은 55%였고, 33%가 ‘서로 사랑한다면 반대하지 않는다. 이것도 투쟁이다’라고 대답했다.


커플에게는 이별이나 사별도 일어나게 마련이다. 그런데 ‘녹색’ ID의 아내가 ‘청색’ ID의 남편으로부터 ‘이혼’을 당한 경우, 전 남편이 재혼하기 전에 ‘거주허가’를 갱신하지 않으면 그 ‘신청자격’을 잃게 된다. 또한 ‘거주허가’ 신청 중에 ‘청색’ ID의 남편이 사망하면 신청권은 소멸되며, 구직도 할 수 없게 된다.


2003년에는 더욱 차별적인 ‘시민권 및 이스라엘 입국법’이 제정되었다. 서로 다른 ID를 가진 커플의 ‘가족통합’이 중지되었다. 또한 ‘녹색’ ID의 남성이 ‘청색’ ID의 여성과 결혼을 이유로 예루살렘 ‘거주허가’를 신청할 경우, 남성은 35세 이상이어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커플에게는 예루살렘의 북쪽인 쿠플 아카브에서 사는 방법이 있다. 이곳은 인접한 동예루살렘과 분리장벽으로 나뉘어 있고, 검문소도 없기 때문에 ‘청색’ ID 소지자도 ‘녹색’ ID 소지자도 살 수 있는 곳이다. 하지만 이 지역은 인구 과밀로 불법건축물이 많고, 행정관할이 모호하기 때문에 공공서비스가 부족하며 치안도 좋지 않다.


▶ 이스라엘이 ‘불법 건축물’로 간주하고 파괴한 팔레스타인 사람의 집. 예루살렘 구시가의 동부. ⓒ촬영: 후루자와 키요코


이스라엘은 법을 둘러치며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무(無)권리 상태로 만들었다. 커플이나 가족 관계에 스트레스를 주고, 그 일상을 옥죈다.


이러한 억압 하에 있는 팔레스타인은 남성 우위 사회이기 때문에, 그 억압들이 여성에게 미치는 파급력은 더욱 크다. 파드와 알 라바디 씨는 “군사점령과 가부장제가 함께 작동하며 여성들이 필사적으로 확대해온 활동 가능 영역을 짓밟고 있다”고 진단한다. 로케트 탄과 미사일 작열만이 전쟁이 아니라고. 세계가 이 부조리한 상황과 억압에 함께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


※ <일다>와 제휴 관계를 맺고 있는 일본의 페미니즘 언론 <페민>(women's democratic journal)에서 제공한 기사입니다. 고주영님이 번역하였습니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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