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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일상에 담겨있는 한국전쟁의 비극, 다큐멘터리 <할매꽃> 
 

문정현 감독이 자신의 가족사를 밝힌 "할매꽃"

우리는 흔히 ‘역사’를 우리의 ‘작은’ 일상과는 동떨어진 거대한 어떤 것으로 여기기 쉽다. 그 역사를 살아온 무수한 개인들이 생존해있는 현대사조차도, 기록 속의 ‘역사적 사건’들이 우리의 현재에 어떤 식으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지 잊고 살 때가 많다.

 
다큐멘터리 <할매꽃>은 담담한 어조로, 우리가 잊고 있던 그 근본적인 사실을 통렬히 일깨운다. 감독 문정현씨는 자신의 가족사를 통해 우리 곁에 숨쉬고 있는 슬픈 한국의 현대사와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희생자들의 고통을 마주보게 한다.
 
도대체 왜,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던 것일까 
 
영화는 감독의 작은 외할아버지에 대한 의문으로 시작된다. 정신병을 앓고 계셨고 어린 시절 늘 공포의 대상이었던 작은 외할아버지. 돌아가시기 전까지 30년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적으셨다는 엄청난 분량의 일기 속에는 찬송을 부르고, 성경을 읽고, 기도를 드렸다는 같은 내용만 반복되고 있었다.
 
그렇게 한줄기씩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하자, 감독 앞에 “소설이나 영화로만 접했던 격전의 역사”가 펼쳐진다. 전라남도 산골의 한 작은 마을이 반상(班常)의 대립과 좌우의 이념으로 나뉘어 분열했다. 가족이, 친구가 서로 반목하고 죽이는 일들이 벌어졌다. 그 속에서 감독의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 그리고 외할머니의 오빠와 남동생도 좌익운동에 가담했다. 그리고 비극은 시작되었다.
 
작은 외할아버지는 좌익활동으로 잡혀간 형(외할아버지)을 찾아갔다가 경찰의 고문과 공포탄에 정신을 놓아버렸다. 외할머니의 오빠는 자수를 하러 가던 길에 당시 경찰이었던 절친한 동네친구에게 살해당했다. 그리고 이 사실은 극소수의 가족만이 아는 ‘비밀’이 되었다. 자식들은 연좌제의 사슬에 묶였다.
 

일본에서 대대적으로 진행된 북송사업

비극은 한반도에만 머물지 않았다. 일본에 건너가 있던 외할머니의 남동생은 이 소식을 듣고 그대로 머물다 조총련 간부가 되었다. 가족이 보고 싶어 한국정부와 방문사실을 밝히지 않겠다는 협상을 한 후 방한하지만, 체제홍보를 노린 박정희 정권에 의해 대대적으로 언론에 보도되고 만다. 이후 삶은 나락이었다.

 
북한체제에 헌신적이었던 그는 하나밖에 없는 딸을 북송사업을 통해 북한에 보냈고, 이 때문에 두 아들들과도 멀어져 혼자서 쓸쓸히 죽음을 맞아야 했다. 남은 두 아들, 어머니의 외삼촌들은 북에 홀로 보낸 여동생을 위해 국적을 한국으로 바꾸지 않고 일본사회의 차가운 멸시와 차별을 견디며 살아가고 있다.
 
모든 것을 가슴에 품고 가신 외할머니
 
작은 외할아버지에 대한 의문에서 시작된 영화는 한 가족의 역사에 드리운 현대사의 비극을 밝히는 데로 나아간다. 그리고 비극의 역사를 통해 상처 받은 이들, 무엇보다 모든 고통을 가슴 속에서만 삭이고 살아남은 사람들의 아픔을 돌보며 살아온 외할머니의 삶을 위로하는 진혼곡을 완성한다.
 
외할머니는 빨치산 활동을 했던 남편을 살리겠다는 일념으로 산으로 올라가 그를 데리고 내려온다. 이후 남편은 평생을 그녀 탓을 하며 술을 마시고 폭력을 일삼았다. 자신을 원망하는 남편과 미쳐버린 시동생의 가족까지 보살피며 혼자 집안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기에 가세는 점점 기울어 갔다.
 

외할머니는 비극의 역사를 가슴에 품고 가셨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도 늘 인자한 얼굴로 주위의 모든 사람을 보살피고 아낌없이 베풀기만 하셨던 할머니는 오빠가 경찰에게 살해되었다는 사실마저도 평생 가슴에 묻고, 오빠를 죽인 사람의 가족들에게도 아무 내색 없이 똑같이 대했다.

 
아끼던 전답을 팔던 날 새벽, 맨발로 전답들을 미친 사람처럼 헤매고 다녔다는 할머니는 자신의 장례식에 손님들이 푸짐히 드시고 갈 수 있게 음식을 넉넉히 준비하라는 유언만을 남기고 모든 것을 가슴에 품고 가셨다.
 
비극의 역사는 현재진행형 
 
<할매꽃>은 좌우이념대립과 한국전쟁이 가져온 비극이, 기실은 우리 개개인의 일상에 담겨있는 것이라는 걸 절절히 깨닫게 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의 정신을 확 두들겨 깨우는 것은, 그 모든 비극이 우리의 일상 속에서 지금도 현재진행형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할매꽃> 속의 가족들 중에는 ‘이제라도 말해야 한다’고 적극적으로 영화에 동조해 주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아직은 때가 아니다’라고 말을 꺼리는 사람들도 있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말하는 이들의 공포는 지극히 현실적이다. 여전히 색깔론은 유효하고, 국가보안법도 건재하며, 세상이 좋아졌다고 해도 ‘정권’ 바뀌는 것에 따라 손바닥 뒤집듯 세상이 바뀔 수도 있다는 걸 체험해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정권’ 하나 바뀌었을 뿐인데, 비판적인 보도를 냈다는 이유로 기자들과 PD들이 잡혀가는 세상이 되었다. <할매꽃>은 2007년 부산국제영화제 와이드앵글 부문에 초청돼 관객들에게 첫 선을 보였고, 최우수다큐멘터리상인 운파상을 수상했다. 조금 늦은 감은 있지만, 어떻게 보면 참 시의 적절한 개봉이기도 하다.
 박희정 기자 일다는 어떤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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