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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에 따라 변하는 ‘오늘의 할 일’

[도시에서 자급자족 실험기] 온습도계가 되어가는 신체


※ 필자 이민영님이 목공을 배우고 적정기술을 익히며, 동료들과 함께 전기와 화학물질 없는 도시를 꿈꾸면서 일상을 제작해나가는 과정을 독자들과 공유합니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비가 온다”는 말은…


서울시민 상당수가 오늘의 미세먼지와 초미세먼지 농도를 살펴보는 일로 하루를 시작하는 요즘, 비전화제작자가 된 나는 날씨예보까지 늘 챙기고 있다. 그것도 오늘예보가 아닌 주간예보를. 전기와 화학물질 없이 지내려면 날씨와 가까워져야 한다. 비전화제작자로의 일상은 기후라는 변수를 수용하는 일에 다름 아니다.


▶ 습도, 풍속 등 꼼꼼하게 기후를 확인할수록 햇빛식품건조기를 제대로 활용하는데 도움이 된다. ⓒ사진: 기상청 날씨누리 갈무리


“비가 온다.” 주어와 서술어로 구성된 이 짧은 문장은 내가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이냐에 따라 다르게 해석된다. 직장을 다니던 내게 비가 온다는 사실은 차가 밀릴 테니 평소보다 조금 일찍 출근길에 나서야 한다거나, 덜 젖거나 아예 젖지 않을 신발을 택해 신거나, 가방에 여분의 양말을 챙기는 약간의 수고를 더해야 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목공, 농사, 건축 등을 주로 하는 비전화(非電化) 제작자로서의 일과를 보내다보니 날씨는 그 누구보다 절대적인 힘을 발휘했다. 단순히 건축하기로 잡아두었던 일정이 독서토론으로 바뀔 가능성이 높아지는 정도가 아니다. 깻묵액비나 생선액비처럼 고농도 액비가 아닌 오줌액비 정한은 비가 오는 날 흩뿌려주기만 하면 돼, 조리개에 담아 물에 섞은 뒤 희석하여 뿌리고 다시 조리개를 닦는 수고를 덜 수 있다. 날씨에 맞추어 일을 하면 훨씬 수월하게 일할 수 있고, 반대로 때를 놓치면 힘들여 해야 하는 경우가 잦았다.


날씨와 친숙해져야 하는 비전화 일상


비 소식은 당일의 할 일만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내일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으면 태양광발전으로 전기를 공급하는 부엌은 전날부터 전력 소비량을 줄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비 오는 날 영락없이 휴대전화 손전등으로 조명을 대신해 식사를 준비해야 하는 상황이 닥친다. 비 온 후에는 작물이 키를 한 뼘 씩 키우기 때문에 잎채소 중 잘 자란 잎들은 미리 따주는 것이 좋다.


비 온 뒤에는 풀을 맨다. 물을 충분히 머금은 흙은 먼지 보복 대신 풀뿌리를 한결 수월하게 내어준다. 모종 심기에도 좋다. 평소라면 모종 심을 구멍마다 미리 물을 부어 흙을 적신 뒤 심어야 하는데, 비 온 다음 날이라면 바로 심어도 무방하다. 비 온 다음 날은 혹시 볏짚을 쌓고 흙으로 미장한 화덕이나 건축물에 빗방울이 튀어 곰팡이가 슬지 않았는지도 점검해야 한다.


▶ 비전화제작자 12명이 80평 남짓의 밭을 다품종 소량 재배한다. 그래도 한창때엔 잎채소가 무럭무럭 자라나는 속도를 매일 수확해 먹어도 따라잡을 수 없다. ⓒ사진: 비전화공방서울


계절의 변화와 어울려 산다는 건 상록수 잎이 연둣빛이었다가 진녹색이었다가 벼이삭처럼 누렇게 변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는 즐거움을 누리는 호사인 동시에, 기꺼이 날씨에 따라 내 행동 반경이 바뀔 수 있는 여지를 받아들이는 일이기도 하다. 아무리 내가 당장 건축부지에 콘크리트 기초를 부어넣고 싶은 마음에 들떠도 소나기가 멈출 기색 없이 쏟아지는 날에는 그 계획을 취소해야 한다.


기후 조건을 극복하려 애써온 사람들 


전기도 화학물질도 덜 쓰고 살 수 없을까? 인간 역시 잠시 지구라는 행성을 빌려 사는 동물중 하나일 뿐인데 다른 생명체에 피해를 주지 않으며 살고 싶어. 대단했던 신념은 종종 날씨에 따라 좌지우지되는 소소한 사건들을 겪으며 순식간에 무너지고 만다.


화덕에 미장 마감을 하려 흙 반죽을 열심히 하다가도 비가 쏟아지면 야외주방 옆 세워두었던 햇빛식품건조기로 뛰어가 실내에 낑낑대며 옮겨야 한다. 이번 주말에 건조기에 말린 과일들을 포장해 장터에 나가려던 계획을 하늘이 자비롭게 배려하지는 않는다. 평소라면 전기 식품 건조기를 플러그에 꽂기만 하면 해결될 사안이다.


▶ 토마토는 비에 약하다. 계속 해서 비가 내리면 성장점이 갈색으로 변하고 쭈글쭈글해지면서 시들어버린다. ⓒ사진: 영화 <리틀 포레스트> 갈무리


비만 오면 구멍이 송송 뚫리는 토마토를 보고 있노라면 왜 농민들이 비닐하우스를 선호하는지 십분 동감하게 된다. 무더운 볕 아래 수행하느라 물 당번이 하루에도 몇 번 씩 작업장에서 비전화정수기가 있는 부엌까지 주전자를 낑낑 대며 오가는 뒷모습을 볼 때면, 인간이 오랫동안 예상하기 어려운 자연에 저항하면서 항상성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온 데는 그만한 사유가 있었다는 걸 깨닫는다.


대도시 속 미어캣이 되어가고 있는 나


전기와 화학물질 없는 일상은 전력 등 외부요건에 좌지우지 되지 않는 일상일 줄 알았다. 한데 도리어 자연이라는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한 무언가와 매일을 협상하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날씨에 맞춰 일하려면 그만큼 자연을 감지하고 활용할 줄 알아야 하는데, 작업을 하면 할수록 내가 통상적인 자연의 흐름을 모르고 그 흐름에 맞춰 일해본 적도 없다는 자각만 커졌다.


기후에 따른 변수를 극복하기 위해 고군분투해온 선조들은 내 상태와 조건에 몰두하며 살아도 불편하지 않은 삶을 우리에게 선사해주었고, 동시에 주변 환경에 반응하는 현대인의 촉수는 퇴화해버렸다. 내게 비전화 일상에의 적응은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 잊힌 감각을 되살리는 일에 가까웠다.


▶ 비전화제작자 한 명 중 지인에게서 얻어온 매실. 청을 담으려 세척해 말리고 있다. 역시 속도가 생명이다. ⓒ사진: 오수정


‘출퇴근 시간 빼고 평일엔 매일 비가 왔으면 좋겠어. 주말만 화창하면 얼마나 좋아.’ 한때 품었던 이 마음이 얼마나 무심한 태도였는지. 여느 식당도 며칠을 흐리다 반짝 갠 날인지 한여름 같은 무더위가 일주일 내내 계속 되고 있는지, 날씨에 따라 문 앞을 기웃거리는 손님의 수가 달라지는 법인데 나 역시 그런 손님 중 한 명이었으면서 참 둔감했다.


전력에 의존하지 않으려면 기후와 기후에 따라 달라지는 자연의 상태에 예민해져야 한다. 자연은 더 이상 휴양지 잔잔한 바다 위로 내려앉는 석양이나 다큐멘터리에서만 접한 열대우림처럼 바라보고 즐기는 대상이 아니다. 수시로 대기오염 수준과 날씨를 휴대전화로 확인하고 그에 반응하며 몸을 재바르게 움직이는 나는 무언가에 몰입해있다가도 몸을 꼿꼿이 세워 주변을 두리번대는 대도시 속 한 마리 미어캣이 되어가고 있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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