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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장자연 사건 재수사와 함께 논의해야 하는 것들

죽음으로 고발한 ‘권력에 의한 성범죄’ 고리 끊어야



9년 전인 2009년 3월, 장자연이라고 하는 서른 살의 여성 배우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리고 며칠 뒤 그의 유서가 세상에 공개되었다. 그 내용은 언론사, 금융사, 연예기획사 관계자들에게 100차례 이상 술 접대와 성상납을 강요 받았다는 것이었다. “저는 힘 없는 신인 배우입니다” 라는 글과 함께 자신의 이름과 사인, 지장을 남긴 유서는 공개되자마자 큰 충격과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유서에 적혀있던 그 유력인사 명단에 얽힌 실체는 결국 드러나지 않았다. 검찰이 유서에 언급된 이름들에 대해 ‘강요 방조죄’ 무혐의 처분하며 수사를 마무리했기 때문이다. 소속사 대표만이 고인에게 폭행, 협박을 한 사실로 징역 4월, 집행유예 1년을 선고 받았다. 반면 고인의 유서와 사건을 세상에 알린 전 매니저는 소속사 대표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기소되어 ‘모욕죄’로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 사회봉사 160시간을 선고 받았다. 사건의 전말과 진실은 규명되지 않은 채 그렇게 묻혔다.


▶ 故 장자연 사건에 대한 검찰의 재수사를 촉구하는 여성운동계 기자회견 현장 ©일다(박주연)


2017년 9월 29일, 법무∙검찰개혁위원회의 권고로 12월 12일 ‘검찰과거사위원회’가 발족되었다. 그리고 ‘장자연 리스트’ 사건에 대한 재조사가 논의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과거사위원회는 ①검찰의 과거 인권침해 또는 검찰권이 남용되었다고 의혹이 제기된 조사대상사건 선정 ②‘과거사 조사단’ 조사결과를 통한 진상 규명 ③유사 사례 재발방지 및 피해 회복을 위한 조치 사항을 권고하는 활동을 하게 된다.)


지난 23일 오후 1시 20분, 서울여성플라자 앞에서 한국여성단체연합과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가 사건 재수사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어 진실을 밝히라고 외쳤다.


‘장자연 리스트’ 사건은 그 진상이 밝혀질 수 있도록 재조사되어야 마땅하다. 어느 유명인사들이 얽혀있는 사건이어서만이 아니다. 이 사건에는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함께 논의해야 하는 이슈들이 있다.


일터의 권력구도 속 노동자의 인권


연예계라는 특수성이 있지만, 사실 고인과 소속사 대표의 관계는 많은 노동자들이 남의 일처럼 생각할 수 없는 권력 관계의 공통점도 있다. 고용자와 피고용자 사이의 권력 관계는 비대칭적이다. 이런 ‘계약 관계’ 속에서 노동자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제한적이며, 때로 강제성을 띠는 일을 하게 되는 상황에 놓이기도 한다.


▶ 직장 내 성희롱 가해자의 직급 (출처: 한국직업능력개발원)


특히 이런 권력 구조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것이 ‘직장 내 성희롱’이다. 한국직업능력개발원에서 2017년 5월 발행한 자료인 ‘남녀 근로자 모두를 위협하는 직장 성희롱 실태’에 따르면, 성희롱 주요 가해자는 간부 및 임원(34.6%), 직속 상사(28.4%), 선임 직원(14.8%) 순이다.


직장 내 성희롱의 피해자는 남성노동자도 있는데, 이 때 가해자의 성비는 남자가 86.4%, 여자가 13.6%이다. 여성 피해자에 대한 가해자의 성비는 남자 78.0%, 여자 22.0%로 가해자의 성별은 남성이 압도적으로 높지만, 같은 성별 간에도 성희롱이 일어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직장 내 성희롱이 ‘여성과 남성’ 사이에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 구도 안에서 발생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성희롱 피해를 호소하면 ‘거절할 수 있는데 왜 안 했냐’ 등의 말로 피해자의 태도를 탓하는 여론이 따라온다. 상대방이 내 생계가 걸린 임금을 주는 위치에 있거나 그것과 관련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경우, 이 직장이 자신이 원했던 꿈이나 인생의 목표와 연결되어 있는 경우에 과연 노동자는 어떤 태도와 행동을 할 수 있을까?


삶이 걸려있는 일터의 권력구도 속에서 일어나는 부정의한 사건에 대해, ‘판단’과 ‘선택’에 대한 질문은 권력을 가진 자에게 던져야 한다. 노동자들이 윤리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는 존재여서가 아니라, 상하관계 속에서 선택을 하기 힘든 위치이기 때문이다. 장자연 씨가 죽음으로밖에는 자신이 겪은 일을 이야기하지 못했던 현실이 이를 보여준다.


‘왜 저항하지 않았는가’가 아니라 ‘왜 권력을 남용해 사람을 괴롭혔는가’ 라고 질문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 상식적인 합의를 이룰 때가 되었다.


성상납이라는 이름의 성착취, 그 무거움


이 사건에서 심각하게 다뤄야 하는 것은, 비대칭적인 권력 구조를 매우 악의적으로 이용한 심각한 성범죄라는 점이다. 고인은 직장 내 성희롱 이상의 ‘성상납’을 강요당했다. 한 인격을 모독하고 착취한 것이며 인신매매라고 볼 수 있는 큰 범죄다. (일다 2009년 3월 18일이자 기사 참고. ‘성상납’이 아니라 인신매매다 http://ildaro.com/4775)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이같은 성범죄는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가 많다. 사적인 영역이라고 생각하거나, 피해자의 진술을 의심하거나, 성범죄로 인한 피해에 대해 간과하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피해자가 유도한 것, 받아들인 것이라고 해석되는 경우도 많다.


▶ 여성가족부가 진행한 2016년 성폭력 실태조사 결과 중 일부 (출처: 여성가족부)


이러한 현실이기 때문에 성범죄를 당해도 신고하는 비율이 낮을 수밖에 없다. 여성가족부가 발표한 ‘2016년도 전국 성폭력 실태조사’에 따르면 성폭력 피해 경험자 중 누군가에게 피해 사실을 말한 적이 있는 응답자가 37.9%였고, 그 중 경찰에 직접 도움을 구한 경우는 1.9%에 불과했다.


무엇보다 성범죄를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에 변화가 필요한 때이다. 목소리 한번 내지 못하고 사라지는 피해자들을 이제는 붙잡아야 한다.


끊어내야 할 적폐, 남겨진 사람들의 역할


커다란 파장을 몰고 왔지만 ‘장자연 리스트’ 사건은 흐지부지 마무리되었다. 경찰은 리스트에 있는 이들을 조사한 결과 술접대를 받은 사실은 확인했으나 범죄와 연결 지을 수 있는 증거를 발견하지 못해 사건을 종결한다고 했다. 결국 ‘성상납을 받은/혹은 요구한 이들’은 누구도 처벌받지 않았다.


고인이 증거가 될 수 있는 문건들을 남겼음에도 수사기관은 진상을 규명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피해자가 증언할 수 없는 상황 등의 이유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그 명단이 ‘유력 인사들’이기 때문일 것이라는 해석이 유력하다.


특히 문건의 리스트에 있다고 알려진 모 언론사 대표와 관련해서는 공방이 뜨거웠다. 해당 언론사는 언론사와 대표 이름을 언급한 언론 및 누리꾼 등을 대상으로 대대적으로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했다. 하지만 소송에서 언론사는 대부분 패소했다. 추후에는 소송을 취하하면서 사건과의 고리를 끊어내고자 했다.


결국, 이 사건을 밝히는 과정은 또 권력구조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온다. 희생양을 만들어내고, 진실을 밝히지 못하는 우리 사회의 ‘비대칭적이고 불합리한 권력 구조’를 어떻게 바꾸어야 하는지, 변화를 위해 끊어내야 할 적폐는 과연 무엇인지 성찰이 필요한 시점이다.


그러므로 ‘장자연 리스트’ 사건에 대한 진상은 낱낱이 밝혀져야 한다. 결국 그건 남겨진 사람들의 의지에 달렸다. 떠난 피해자의 목소리를 남겨진 사람들이 대신 외칠 때, 사건에 대한 진실에 다가갈 수 있을 것이고 변화가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박주연)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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