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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추행 의사에 175년형 선고, 법정에선 무슨 일이…

156명의 여성들이 일주일 동안 증언대 올라



지난 24일, 미국 법정에서 성범죄자에게 최장 175년형이 선고됐다. 피고는 미국의 미시건 주립대학 체조팀의 주치의이자 미국 국가대표 체조팀 주치의기도 했던 래리 나사르(Larry Nassar). 그는 20년 동안 160명이 넘는 십대여성과 성인여성을 성추행한 혐의로 재판을 받았다.


미국의 양형 제도는 한국의 가중주의와 달리, 병과주의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한 범죄자가 여러 범죄를 저질렀거나 피해자가 여럿일 경우 처벌이 몇 배가 되기도 한다. 그러니 이 판결이 중요한 것은 성범죄자가 최장 175년형을 선고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이 선고가 나오기까지의 과정 때문이다.


‘국가대표 주치의’ 명성에 가려진 추악한 진실


국가대표의 주치의를 할 만큼 명성이 높았던 래리 나사르를 처음 고발한 건 레이첼 덴홀랜더(Rachael Denhollander)이다. 2016년 9월 레이첼은 <인디아나폴리스 스타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15살 체조선수였던 2000년에 미시건 주립대학에서 일하던 래리 나사르에게 척추 통증으로 인한 치료를 받았으며 그때 성적 학대를 겪었다고 진술했다.


레이첼은 ‘두려웠고 부끄럽고 당황스러웠다’고 말했다. “그는 유명한 의사였어요. 제 친구들도 그를 믿고 있었고, 다른 체조 선수들도 그를 믿고 있었죠.” 그런 상황에서 레이첼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고 경찰에 신고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사건을 잊지는 않았다. 변호사가 된 그는 세 아이의 엄마가 된 후에도 래리 나사르가 자신에게 저지른 행동을 고발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2016년, 마침내 레이첼은 미시건 경찰에 신고를 했다. 이어 올림픽에 출전한 경험이 있는 또 다른 체조 선수가 래리 나사르를 대상으로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이 일이 공개되자, 래리 나사르를 가해자로 고발하는 증언이 연이어 쏟아져 나왔다.


‘올림픽 메달 획득에 공을 세운 주치의’, ‘미국 체조 성공의 기여자’라는 평을 받던 래리 나사르의 진면목을 밝히기 위해 여성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나의 침묵은 끝났다” 156명의 7일간의 증언


드디어 래리 나사르는 재판대에 올랐다. 그리고 그 재판정에서는 156명의 여성이 7일 동안 증언을 이어갔다. 애초에 88명의 여성이 증언하기로 했지만, 자신도 목소리를 내고 증언을 하겠다는 여성들이 연이어 신청을 하는 바람에 재판은 생각보다 길어졌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여성들은 충분히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 증언에 참여한 알리 레이즈먼는 자신의 트위터에 이 재판에 참여한 생존자들의 이름을 알렸다. (출처: 알리 레이즈먼의 트위터)


랜싱 신문(Lansing State Journal)은 온라인 기사(‘By the way, enjoy hell’: Read the words of the many women who confronted Larry Nassar, By Laura Trabka)를 통해 1월 16일부터 24일까지 여성들의 증언을 영상과 함께 업데이트 했다.


“래리, 당신의 끔찍한 행동은 나의 많은 걸 빼앗아갔어요. 난 자기 혐오와 부끄러움에 시달려야 했죠. 하지만 나의 침묵은 이제 끝났어요.” -마사 스턴(Marta Stern)


“목소리도 힘도 없는 걸 한번 상상해 보세요. 하지만 래리, 그거 아나요? 이제 난 목소리와 힘, 둘 다 가졌어요. 그리고 난 이제 그걸 쓰기 시작할 겁니다.” -알리 레이즈먼(Aly Raisman) 런던&리우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래리, 난 여기에 있어요. 누군가한테 (당신이 한 짓을) 이야기하려는 게 아니라 모두에게 이야기하기 위해서요. 이제 당신도 알아차렸겠지만, 소녀들은 영원히 어리지 않아요. 그들은 강한 여성으로 성장해서 당신의 세상을 파괴하기 위해 돌아오죠.” -케일 스테판(Kyle Stephens)


“난 오늘 여기, 피해자가 아닌 생존자인 많은 여성들과 함께 있습니다. 당신에게 얼굴을 맞대고 그 동안의 속임수는 이제 끝났다고 말하려고 말이죠.” -제이미 댄츠셔 (Jamie Dantzscher), 시드니 올림픽 동메달리스트


“만약 빛을 두 번 다시 보지 못 봐야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게 바로 이 사람입니다.” -린제이 슈에트(Lindsey Schuett)


생존자들은 증언대 위에서 래리 나사르를 정면에 두고 당당히 말했다. 래리 나사르가 한 가해 사실 뿐만 아니라 그것이 얼마나 자신을 괴롭혔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이들은 자신의 위치를 단지 ‘피해자’로 두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두려움에 떠는 존재가 아니라 가해자에 맞서서 ‘이제 당신이 그 고통을 받을 차례’라고 말했다.


미 체조협회와 올림픽위원회에도 분노 쏟아져


여성들은 또한 이 사태를 방관하고 키워온 체조협회와 권력자들에게도 분노를 쏟아냈다. 이 사건이 범죄자 한 명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선수와 코치라는 위계 구조를 내버려둔, 그리고 선수들의 말을 믿지 않거나 무시하고 침묵시킨 이들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말한 것이다.


“USA 체조협회와 US 올림픽 위원회는 우리에게 훈련받을 수 있는 안전한 장소를 제공해 주지 않았습니다. MSU(미시건 주립대학)와 USAG(미국 체조협회)는 이 끔찍하고 용서할 수 없는 소아성애증 환자가 이렇게 오랫동안 활기차게 활동할 수 있게 내버려둔 것에 대해 부끄러워해야 할 겁니다. 너무 늦었어요.” -매기 니콜스(Maggie Nichols), 월드챔피언 금메달리스트


※재판정에서는 매기의 어머니 지나 니콜스(Gina Nichols)가 대신 증언을 읽었다.


“우리는 이 첫 전쟁에서 이겼지만 이게 끝은 아닙니다. 미시건 주립대학은 이제 그들을 향해 뭐가 오는지 알 거에요.” -베일리 로렌센(Bailey Lorencen)




▶ 미국 체조협회 이사진들은 래리 나사르 판결 이후 전부 사임했다. (USAG 협회 로고)


최초 고발자인 레이첼 덴홀랜더는 155명의 증언이 끝난 후 마지막으로 증언대에 올랐다. 고발의 시작엔 혼자였지만 그의 용기는 결국 많은 목소리를 결집시켰다. 그리고 그는 래리 나사르는 정당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어린 소녀의 가치는 얼마입니까? 어린 여성의 가치는 얼마입니까? 저는 이 소송에서 할 수 있는 만큼의 최대 형량을 선고해 주시기를 청구합니다. 지금 이 모든 생존자들이 그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피해자들의 모든 이야기를 경청한 로즈마리 판사


래리 나사르 사건의 판결을 맡은 로즈마리 아퀼리나(Rosemarie Aquilina) 판사는 기나긴 시간 동안 피해자들의 증언을 모두 들었다. 그리고 래리 나사르에게 최장 175년형을 선고하면서 판결문을 읽었다.


타임지가 발간하는 경제 매거진 포춘(Fortune)은 25일자 온라인 기사(Read the Judge's Emotional Remarks in Sentencing of U.S. Gymnastics Doctor Larry Nassar, By Kirsten Korosec)를 통해 이 역사적인 현장을 생생히 전달했다.


“판결을 말하기 전에 말하고 싶은 게 몇 가지 있습니다. 첫 번째, 피해자 여러분 당신들은 더이상 피해자가 아닙니다. 당신들은 생존자입니다. 당신들은 개개인 모두 강한 사람들입니다. (중략) 법무부에서 진행한 범죄 피해 조사에 따르면 매년 1천 건 중에서 310건이 경찰에 신고됩니다. 이 말은 2/3가 미신고라는 거죠. 생존자들의 목소리가 모든 사람들에게 당신의 목소리를 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레이첼(첫 고발자)이 목소리를 낸 것처럼, 계속하세요. 신고율을 높이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로즈마리 판사는 재판이 진행되면서 많은 격려와 지지를 받았으며 고맙다고 인사하는 이들도 많았지만, 이 재판이 자신 때문에 있는 게 아니라 피해 사실을 알린 생존자들 때문에 존재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리고 래리 나사르가 반성의 말을 담아 써서 제출했다는 편지를, 던지듯 날려버리면서 말했다.


“래리 나사르씨, 언론이 당신의 편지를 공개하라고 했지만 전 그러지 않을 겁니다. 의회와 언론은 이 의견에 반대할지 모르지만 여기엔 피해자에 대한 불필요한 이야기들이 있어요. 난 당신의 언어로 피해자들이 다시 피해자화 되는 걸 원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사람들의 약점을 이용했습니다. 하지만 난 취약한 사람이 아닙니다. 특히 당신에게요, 그리고 다른 범죄자들에게도요. 재판장에서 난 헌법을 지키기로 맹세했고 난 잘 훈련되어 있어요. 난 내가 뭘 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지금 그렇게 할 겁니다. 내가 이 생존자 자매들의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어서 영광이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당신에게 선고를 할 수 있는 것도요. 당신은 감옥 밖으로 두 번 다시 나갈 일이 없어야 합니다.”


“당신에게 175년, 2천100월형을 선고합니다. 즉 당신에게 사형 선고를 한 거나 마찬가지에요.”


재판정에서는 환호와 박수가 터져 나왔다. 로즈마리 판사는 래리 나사르의 행위가 자신이 주장하는 것처럼 ‘의료 행위’, ‘치료’가 아니라 자신의 지위와 권력을 이용한 악질적인 범죄임을 재차 강조했다. 그리고 자신에게 집중하는 언론을 향해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더 들으라’며 따끔한 충고를 더하기도 했다.


우리 사회는 생존자의 목소리를 들을 준비가 되었나?


많은 사람들이 래리 나사르 판결에 대해 미투 운동(#Me Too)의 결과라고 논평한다. 여러 피해자들이 자신이 겪은 성폭력을 고발했고, 그것이 심각한 문제라는 인식이 퍼졌기 때문에 이번 판결에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고 말이다. 나아가 이 판결은 ‘과도하게 모든 걸 성범죄로 받아들이는 예민한 사람들’이라는 백래시(backlash, 반격) 현상을 방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이며 더 많은 피해자들이 용기를 내는데 영향을 줄 것이다.


반면 국내에서는 2016년 ‘#OO계_내_성폭력’으로 많은 고발이 있었지만, 정작 수시기관이나 법정에서는 가해지목인들이 혐의 없음 결과를 얻음으로써 흐지부지되거나 오히려 피해자들이 명예훼손 등으로 역고소를 당했다.


하지만 낙담하기엔 이르다. 래리 나사르 사건도 이번 재판까지 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결국 래리 나사르 판결이 나오게 된 건, 피해 사실을 밝힌 강한 생존자가 있었기 때문이고 그 옆에 같이 서겠다며 목소리를 낸 또 다른 생존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들의 목소리를 들을 준비가 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국내에서도 성폭력 범죄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지난 29일 JTBC 뉴스룸에 출연한 서지현 검사는 검찰 조직 내 성추행과 그에 따른 인사 불이익에 대해 고발했다. 서 검사의 용기 있는 행동은 미투(#Me Too)의 파장을 불러올 조짐이다. 이 고발이 단지 고발에 머물지 않고 공정한 수사 절차를 거쳐 합당한 처벌이 이뤄질 수 있기를, 검찰 조직의 개혁을 이뤄낼 수 있기를, 생존자들의 목소리를 제대로 들어주는 사회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박주연)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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