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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이 가정폭력 ‘가해자의 대변인’ 노릇하나

피해자 쉼터에 난입해도 방관하는 공권력…여성단체들 ‘분통’



흔히 ‘쉼터’라고 불리는 가정폭력 피해자 보호시설은 폭력 배우자로부터 격리되길 원하는 피해자와 동반 자녀들이 살고 있는 공간이다. 법적으로 임시보호는 최장 7일, 단기 보호시설은 최장 6개월까지, 장기 보호시설은 최장 2년까지 머물 수 있다.

 

가정폭력 가해자로부터 피해자들을 보호하는 곳이기 때문에, 쉼터 활동가들은 입소자의 신상 정보가 드러나지 않도록 각별히 유의하는 등 피해자의 안전을 우선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지난 2일, 한국여성의전화 부설 쉼터에 가정폭력 가해자가 ‘자녀를 보겠다’며 침입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여성의전화 측에 따르면, 쉼터 활동가들은 입소자들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경찰에 신고했지만 출동한 경찰은 ‘위해 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격리 조치하지 않았다.

 

한 시간이 지난 후에야 도착한 여성청소년계 경찰관들은 오히려 “자녀를 보기 전까지는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겠다”는 가해자의 요구를 받아들이라고 했다. 그냥 자녀를 보고 싶다는 것뿐이라며, 경찰관 자신도 자녀를 둔 아버지라고 덧붙이면서 쉼터 활동가들을 매정한 사람들 취급했다는 것이다.

 

피해자들이 피신할 동안만이라도 가해자의 위치를 옮겨달라는 활동가들의 ‘부탁’도 거절한 경찰 덕분에, 사건 발행 후 3시간 30분이 지난 후에야 두려움에 떨던 입소자들은 활동가들이 가해자의 시야를 현수막으로 가린 틈을 타서 겨우 피신했다. 가해자는 활동가들의 사진을 찍으며 모욕했지만, 경찰은 이를 전혀 제지하지 않고 방관했다고 쉼터 측은 증언했다.

 

가정폭력을 4대악으로 지정해 근절하겠다고 공언한 지난 정권을 거쳐 ‘젠더폭력 방지 기본법’을 제정하겠다고 밝힌 이번 정권 하에 일어난 일이다.

 

올해는 ‘가정폭력을 예방하고 가정폭력의 피해자를 보호·지원함을 목적으로 한다’는 가정폭력방지법이 제정된 지 20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법에 따르면 가정폭력은 ‘부부 싸움’이나 ‘가정 문제’가 아니라 심각한 폭력이자 범죄이며, 피해자는 가해자의 위협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 받아야 한다. 그런데 이번 사태에서 경찰이 보여준 태도를 보면, 과연 무엇이 바뀌고 변화되었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 11월 9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경찰청 앞에서 한국여성의전화 등 424개 단체들이 경찰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한국여성의전화 제공

 

언제까지 가해자를 ‘아버지’의 이름으로 부를 텐가

 

가정폭력 피해자들을 보호하지 않는 경찰의 대응에 대해, 한국여성의전화를 비롯해 총 424개의 단체들이 강력히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9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경찰청 앞에서 열었다. 특히 참가자들은 이러한 사건이 한두 번이 아니며 계속 반복되고 있는 문제라는 점에 분통을 터뜨렸다.

 

“매번 경찰의 무지하고 비협조적인 대응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하고, 기자회견을 하고, 경찰 내 교육을 요구하였지만, 아직도 가정폭력 사건을 ‘가정 문제’로만 생각하고 있다. 언제까지 가해자를 아버지, 남편이라는 이름으로 부를 것인가.” (김홍미리 여성주의 연구활동가)

 

“쉼터는 피해자들이 찾아와 피해에 대응할 수 있는 힘을 키우는 곳이다. 쉼터마저 안전하지 않다면 피해자들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백미순 한국여성단체연합 상임대표는 위와 같이 말하며 ‘이런 일이 반복되는 이유가 경찰의 전문성 부재인지, 시스템의 문제인지 정확히 파악하고 대응하라’고 촉구했다.

 

어제 있었던 일이라며, 또 다른 가정폭력 사건을 브리핑한 활동가도 있었다. 경찰이 가정폭력 피해자와 활동가를 내내 고압적인 태도로 위축시켰다는 것. 해당 활동가는 이런 일들을 겪으면 가정폭력 피해자를 지원하는 활동을 해나가는 데에 자괴감이 든다고 토로했다.

 

쉼터는 피해여성들의 마지막 피난처

 

고미경 한국여성의전화 상임대표는 북받치는 감정을 누르고 어렵게 말을 꺼냈다.

 

“지난 30년 동안 가정폭력 추방 운동을 해왔다. 가정폭력을 추방하기 위해 사회적 인식을 바꾸고 정책을 만들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경찰은 피해자가 만나는 최초의 공권력이라고 몇 번이나 강조했었다. 그러나 2017년 11월 2일, 이 일이 일어났고 여전히 전국에서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다.”

 

고미경 대표는 이번 사건에서 경찰이 자식 한번만 보여주면 될 일이라고 했지만 정작 그 자녀는 쉼터에 들어와서 활동가들에게 몇 번이나 ‘여기는 아빠가 모르는 곳이죠?’, ‘여기는 아빠가 못 오죠?’라고 물었었다고 밝히면서, 누가 죽어야 그때서야 경찰은 보호에 나설 것이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가정폭력을 고발한 경험이 있는 피해생존자도 이렇게 호소했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폭력을 당하면 그 가해자가 바로 잡혀가는데, 가정폭력은 그렇지 않다. 남편을 형사 고발한다는 것은 정말 최악의 상황일 때, 더 이상 견디지 못할 만큼 힘들 때, 내가 죽거나 죽일 것 같을 때 하는 일이다’ 라고.

 

자신은 형사로부터 ‘일도 많은데 왜 이런 일로 우리를 힘들게 하냐, 솔직히 말해서 이혼 소송에 유리하게 하려고 하는 거 아니냐, 나중에 취하할 거 아니냐, 아줌마가 맞는 거 본 사람 있냐, 증인 있냐, 무고죄로 고발 당할 수도 있다’ 등의 발언을 들었다고 증언했다. 경찰의 태도를 보며 ‘가정폭력, 성폭력 피해여성들이 오히려 범죄자 취급 당하고 모멸감을 느끼는 상황이 많겠구나, 그래서 결국 싸우고 투쟁하는 것을 포기하는 일이 많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이어 “제가 쉼터에 있을 때도 가해자로 의심되는 사람이 찾아온 적이 있어서 이틀 동안 밖에 나가지 못한 적이 있다. 이제 몇 년이 지났는데도, 딸이 그 때 일을 이야기하면서 무서웠다고 이야기한다. 쉼터는 피해여성들이 갈 수 있는 마지막 피난처다. 더 많은 경각심을 가지고 피해여성을 위해 노력해 주셨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 11월 9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경찰청 앞에서 한국여성의전화 등 424개 단체들이 경찰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한국여성의전화 제공

 

경찰이 변해야 ‘폭력에서 벗어날 수 있어’

 

여성가족부가 지난해 전국 만19세 이상 남녀 6천명을 대상으로 조사하여 10월 26일 발표한 ‘2016년 가정폭력 실태조사’에 따르면, 부부 내 폭력을 경험한 응답자 중에서 100명 중 1명(1.0%)만이 경찰 등 주위에 도움을 요청한 것으로 드러났다.

 

신고를 하지 않은 이유는 41.2%가 ‘폭력이 심각하지 않다고 생각해서’, ‘집안 일이 알려지는 것이 창피해서’(29.6%), ‘신고해도 소용이 없을 것 같아서’(14.9%), ‘자녀들을 생각해서’(7.3%) 순이다.

 

피해자조차 배우자로부터 겪는 폭력이 심각하지 않다고 여기고, 또 경찰에 신고해도 소용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 가정폭력을 ‘사적인 일, 개인사’로 치부해 버리는 사회와 공권력의 태도에 큰 책임이 있지 않을까? 심지어 도움을 요청했을 때조차 경찰로부터 ‘왜 이런 걸로 신고하냐’ 등의 말을 듣게 된다면 가정폭력, 데이트 폭력을 비롯한 젠더폭력에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 수밖에 없다.

 

피해여성들이 용기 내어 도움을 요청했을 때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는 사회가 되려면, 일선에서 피해자를 보호할 수 있는 경찰의 역할이 절실히 필요하다.

 

피해자가 만나는 최초의 공권력인 경찰의 변화를 촉구한 이번 기자회견은 ◇철저한 진상 조사를 통해 책임자를 징계하고 공식 사과할 것 ◇가정폭력 및 여성폭력 피해자 지원시설에 대한 경찰의 인식향상 교육을 실시할 것 ◇제대로 된 가정폭력 사전 초동대응 대책을 마련하고 시행할 것 ◇가정폭력 피해자 보호시설 종사자의 안전을 위한 대책을 마련할 것 ◇가정폭력 및 여성폭력에 대한 정책 및 시스템을 전면 보완, 개편할 것을 요구하며 마무리되었다.  (박주연 기자)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전체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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