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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 여자’ ‘잘생긴 남자’ 그 미묘한 차이
<도영원의 젠더 프리즘> “예쁜 남자” 만들기
※ 세상을 바라보는 20-30대 페미니스트들의 관점과 목소리를 싣는 ‘젠더 프리즘’ 칼럼입니다. 필자 도영원님은 영국 글래스고대학교에서 인권과 국제정치 석사를 전공하고, 현재는 한국에서 프리랜서 인권노동자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머리카락에 층을 좀 냈을 뿐인데…
▶ 헤어스타일을 바꾸고 체중 감량을 끝낸 뒤의 내 모습. ⓒ도영원
작년 여름날의 일이다. 평생 동안 길러왔던 머리카락이 갑자기 남의 것처럼 낯설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내 안의 남자-소년이 강력한 자기 표현을 시작할 전조였다.
나는 단골 미용실의 의자에 앉아 ‘돌 속에 들어있는 진정한 모습을 꺼내 주는 것이 바로 조각’이라던 미켈란젤로의 심정으로, 헤어 디자이너의 현란한 가위질에 머리를 맡겼다. 긴 머리를 싹둑 잘라냈지만 아직도 뭔가 부족해 보였다. 동글동글한 짧은 머리는 여전히 ‘귀여운 20대 여성’의 헤어스타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럼 여기서 층을 좀 더 낼까요? 그런데 층을 내면 정말 남자 커트머리 같을 거예요.”
“(망설이다가) 네, 그렇게 해 주세요.”
머리를 40센티미터 가까이나 잘라내도 여전히 여자처럼 보이는데, 층을 좀 낸다고 뭐 그렇게 큰 차이가 날까 싶었다. 그러나 결과는 의외였다. 거울 속의 나는 조금 전과는 전혀 달라 보였다. 이제는 짧은 머리의 여자라기보다는 약간 긴 머리의 남자에 가까운 인상이었다. 머리카락에 층을 좀 냈을 뿐인데 이건 무슨 마법이었을까?
여자 외모와 남자의 외모, 그 자의적인 경계
성정체성의 변화를 겪으면서, 나는 새로운 스타일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내 신체 자체에 대한 위화감만큼이나 나를 거슬리게 한 것은 내가 여성스럽게 꾸미는 것에만 너무나 익숙해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긴 머리를 한 내 얼굴은 대학축제에서 여장을 한 남학생의 모습처럼 거북하게 보였다. 여성으로 특정지을 수 있는 요소가 너무 많은 몸은 내가 추구하는 스타일과 어울리지 않았다. 큰 엉덩이와 잘록한 허리는 영락없이 바지보다는 치마에 어울리는 몸매였다. 그런데 인터넷에서 스트리트 패션을 검색해 보면, 내가 원하는 스타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다 나보다 마른 몸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스트레스를 견디다 못해 큰 변신을 감행했다. 나의 젠더 표현이 변했다는 것은 무지개 깃발을 휘날리며 광고를 하지 않아도 누구나 알아볼 수 있었다. 구불구불하던 웨이브머리를 잘라버리고 짧고 남성적인 헤어스타일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몸무게를 15kg 감량하고 체지방률을 20%까지 떨어뜨리고 나니, 동경하던 스트리트 패션도 대부분 소화할 수 있게 되었다.
재미있게도, 정체성의 변화에 대한 특별한 설명 없이도 주변인들은 자연스럽게 이것을 일종의 성전환 의식으로 받아들였다. 머리를 자른 시점 이후로는 곧잘 나의 ‘남성미’를 칭찬받았다. 예전에는 고풍스러운 내 치마가 <차이나타운>의 김혜수를 연상시킨다고 말했던 친구가, 이제는 복근이 멋있고 ‘체대 미소년’ 같다는 칭찬을 하는 식이었다. 트랜스젠더리즘에 대해 무지하거나 내 젠더 정체성을 아예 알지 못하는 사람조차도 내 외모에 대해 “예쁘다”보다는 “잘 생겼다”는 표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내 스타일링의 변화가 마치 ‘이제부터 이 사람을 남자로 보시오’ 라는 스위치를 올려놓은 것 같았다.
트랜스 남성의 경험을 다룬 <3 FTM>이라는 책에는, 한 인터뷰이가 가슴 절제 수술을 하고 난 후에 내시경 검사를 받으러 갔다가 의사로부터 “언제부터 여성형 유방이 시작되었나요?”라고 질문을 받았던 경험을 이야기하는 부분이 있다. 이전에는 여성의 유방이었던 것이 ‘여성형 유방’으로 불림으로써, 이제 자신의 가슴이 남성의 가슴으로 인식된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상황은 다르지만, 스타일을 바꾸면서 내가 받은 느낌이 바로 그랬다. 남들이 나를 우연히 남성, 혹은 비(非)여성으로 보는 것은 성별정정 없이도 사회적으로 내가 원하는 젠더로 인식되고 있다는 일체감을 주었다. 여자화장실에서 여성들이 나를 보고 흠칫 놀라는 것도, (조금 미안하긴 하지만) 내가 ‘성공적으로 남성성을 획득’했다는 신호로 여겨졌다.
밖에서부터 온 인식의 변화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신체 불일치감 때문에 호르몬 치료나 수술처럼 물리적인 전환을 고민하기도 했던 것이 거짓말처럼, 나 스스로도 내 몸이 남자의 것이라고 느끼기 시작했다. 볼륨이 거의 남아있지 않은 날렵한 가슴, 음영이 나타나기 시작한 복근과 발달한 어깨의 모양은 영락없는 남성의 상체였다. 여성 속옷을 입지 않는 것도 더 이상 부담스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니까 남자와 여자의 차이는 내 생각보다 미묘한 차이였던 모양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여성의 몸이란 보지와 유방이 있는 몸이라고 여태껏 배우지 않았던가? 생물학적 성별은 염색체와 성기의 종류로 결정되는 것으로, 공고한 물리적 실체를 가지고 있다고 말이다.
하지만 막상 사람들은 보지와 유방이 (작을지언정) 있고 XX 성염색체를 가진 나를, 짧은 머리와 마른 몸 그리고 ‘남자 같은’ 행동거지만으로도 선선히 유사-남성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여성의 몸이 보다 체지방률이 높기는 하지만, 나는 체지방률이 성별을 결정한다는 말은 들어 보지도 못했다. 마치 헤어 디자이너만이 구분할 수 있는 미묘한 차이가 여자 커트머리와 남자 커트머리를 나누는 것처럼, 언제라도 뒤집힐 수 있는 미세하고 자의적인 경계만이 여자와 남자 사이에 그어져 있었다.
여성미와 남성미, 중간 지대의 주민들
▶ 머리가 길었을 때의 나. ⓒ도영원
K-POP 아이돌의 외모를 보면, 역시 여성적인 얼굴과 남성적인 얼굴의 경계는 있는 듯 하면서도 없다. 오히려 남자 아이돌에게 ‘예쁘다’는 말은 잘 생겼다는 말보다도 한 단계 위의 칭찬이다. 그의 아름다움이 성별의 경계를 넘을 정도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중성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면서도, 여전히 여자나 남자 둘 중 하나에 기준점을 두고 평가하고 싶어 한다. 외모로 대중들을 만족시키려면 성별의 경계를 넘나들면서도 ‘본래 성별’에 요구되는 특징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된다. 예컨대 남자 아이돌의 얼굴은 여자처럼 예뻐도 키는 훤칠하게 크고 ‘초콜릿 복근’이 있어야 하는 식이다.
내 젠더 표현은 대체로 성별을 특정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생물학적으로’ 여성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어김없이 여성의 미의 기준이 적용되었다. 그 기준 중 하나는 풍만한 가슴이다. 헬스장에서 만난 주부 친구들은, 내가 살을 빼고 날씬해진 것에 대해서는 부러워하면서도 ‘가슴이 없어져서 어떡하냐’며 나보다 더 아까워했다. 언젠가는 앤틱 숍에 들렀다가 여행을 즐긴다는 개성 있는 여자 사장으로부터 스타일리쉬하다는 칭찬을 들었다. 그런데 내가 웃으며 화답하려는 순간, 갑자기 속옷을 입지 않은 밋밋한 내 가슴을 만지더니 “여기다 뽕은 좀 넣어야겠다!” 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여성이면 지금보다 더 풍만한 가슴을 가져야 하고, 남자라면 더 납작한 가슴을 가져야 하는데, 나는 둘 중 어느 쪽도 만족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내게는 자랑스러운 내 몸이 남들에게는 어딘가 부족하게 보인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왜 이상적인 신체상은 이렇게 이원론적으로 작동하는 것일까?
모순에 부딪히는 순간은 그 때만이 아니었다. 머리를 ‘남성적으로’ 스타일링하고 예쁜 원피스를 입으면, 따로따로는 예뻐도 둘이 도저히 어울리지 않았다. 타인 뿐 아니라 스스로의 전통적인 미감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나는 종종 여성적으로 예쁘거나, 남성적으로 멋있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다. 성별 이분법에 순응하지 않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외모 표현만큼은 남성적이거나 여성적인 기준에 일관적으로 들어맞지 않으면 부자연스럽다고, 즉 아름답지 않다고 느꼈던 것이다.
여성미와 남성미는 아름다움을 거칠게 이분할 뿐 아니라 그 간극마저 너무 큰 나머지, 한 사람의 몸에 표현될 때조차 쉽사리 조화되지 않는다. 남성적이라고 느껴지는 신체를 획득하는 과정에서도, 나는 익숙했던 여성미를 잃어버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당황해야 했다. 연속적인 신체의 스펙트럼에서 여성미에도, 남성미에도 완벽하게 부합하지 않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신에게 해당하는 방향으로 움직여야 한다는 압력을 느낀다. 끝없이 마르고 가냘퍼야 하는 존재와, 이상적인 키의 기준이 한없이 올라가는 존재의 경우처럼 말이다.
키가 작고 마른 나는 쇼핑을 가면 여자 옷 중에서도 가장 작은 사이즈를 입어야 한다. 그러면서도 발달한 삼각근과 밋밋한 가슴 때문에 대부분의 여자 옷에 어깨가 맞지 않고 늘 가슴 부분이 헐렁하다. 주위를 둘러보면 이렇게 평균적인 여성 신체와 남성 신체에 대한 기대 사이에 드넓은 중간지대가 존재하는 예를 흔히 찾을 수 있다. 예컨대 가장 흔한 여성의 신발 사이즈는 230~250mm인데 비해 남성의 신발 사이즈는 260~280mm이다. 그렇다면 발 사이즈가 255mm인 사람은 여성의 발을 가진 것인가, 남성의 발을 가진 것인가?
분리된 여성과 남성의 신발 사이즈는, 성별에 대한 기대뿐 아니라 심지어 특정 사이즈를 가진 사람은 특정한 취향을 가지고 있을 거라는 기대마저 반영하고 있다. 같은 디자인의 신발도 여성용 사이즈로는 흰색과 핑크색이 나오고, 남성용 사이즈로는 검은색과 파란색이 나오는 식이다. 아무리 수요와 공급의 법칙을 따른다 해도, 230mm의 발 사이즈에 검은색 신발을 신고 싶은 사람이나 260mm의 발을 가진 여성이 없을까? 이쯤 되면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성별 이분법이 성별을 떠나 생물학적으로 같은 종(種)인 사람의 몸에 비현실적으로 큰 성차를 기대하게 만들고 있지 않은지 말이다.
자주 듣는 말이지만 근육이 ‘지나치게’ 발달하지 않도록 운동을 적당히 하라든가, 보톡스를 맞으라든가 하는 제안을 받을 때면 늘 당혹스럽다. 내가 추구하는 근육질의 몸매에 도달하기에는 아직도 멀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여자로서 아름답지 않다’는 평가에는 역시 스트레스를 받으며, 근육을 빼야 할지 고민하기도 한다. 여성과 남성은 내 안에서는 결코 분리될 수 없는 동전의 양면 같은 속성인데, 날씬한 여성의 모습을 하고 있는 나는 왜소한 남성이고, 건장한 남성의 모습을 하고 있는 나는 우락부락한 여성이라는 괴리감은 내 자아상에 자꾸만 흠집을 냈다.
어쩌면 트랜스젠더퀴어가 경험하는 젠더 위화감이란 근본적으로 어떤 아름다움을 가질 수 있는가, 가져야 하는가에 대한 반복적인 자문인 것일까? 그러나 우리 몸에 친절하지 않은 미의 기준은 트랜스젠더가 아닌 사람들에게도 끊임없이 신체 불일치감을 선사한다. 왜냐하면 어떤 성별의 미적 기준에도 완벽하게 들어맞는 사람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외모지상주의 사회에서 누군들 신체 불쾌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가?
제3의 미인, 아름다움의 기준이란
▶ 피트니스 센터에서 운동 중인 내 뒷모습. ⓒ도영원
아름다움은 때때로 매우 가혹하다. 생물학적으로 체지방이 더 높은 여성의 몸은 오히려 더 엄격한 날씬함을 요구 받는데, 이 날씬함은 알다시피 ‘충분히 먹지 못하는’ 상태를 암시할 만큼의 마름이다. 또 아름다운 여성의 몸은 남성의 강인함과 대비되는 취약함의 특징을 가진다. 각선미를 해친다고 여겨지는 근육들은 거의 예외 없이 운동능력과 건강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근육이다.
우리는 종종 남성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전제로, 여성은 과도한 미적 기준을 강요받는다고 말하지만, 나는 성별의 경계가 그렇게 명확하고 고정적인 것인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그러나 여성집단에 적용되는 미의 기준이 특별히 폭력적인 이유는, 그것이 긍정적인 신체기능에 역행하는 아름다움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보편적인 아름다움의 기준에 있어서 성별의 차이란, 개인의 성정체성보다는 ‘욕망의 주체가 되는 집단’과 ‘대상이 되는 집단’이라는 가부장적인 역할 기대의 차이에 따른 것이다.
외모의 위계 자체를 문제시하지 않을 거라면, 보편적인 아름다움은 보다 몸-친화적인 기준을 추구하도록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다양한 여성복과 남성복, 그리고 이를 거부하거나 적절히 타협하는 ‘중성적인’ 패션을 만들어서 스펙트럼을 넓히는 일보다 더욱 필요한 것은, 어떤 가부장적 역할도 요구하지 않고 성별의 경계를 의식하지도 않는, 개개인에게 보다 연속적인 신체 기대를 형성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일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를 들면 치마를 여성복 코너에서 끄집어내고, 가슴과 엉덩이가 풍만하고 허리가 잘록한 사람이든, 체지방률이 낮고 직각 어깨를 가진 사람이든, 모든 옷을 무리 없이 입을 수 있게 사이즈 범위를 넓히는 종류의 노력이다.
전통적인 미인과 다른 방식으로 아름다움에 대한 기대를 충족시키는 ‘퀴어 뷰티’(queer beauty)에는 주류 사회와는 다른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의 기대가 반영되어 있다. 여자도 반하게 만드는 여자라는 의미의 소위 ‘걸크러쉬’ 뮤지션이나, 페미니스트 혹은 논바이너리 아이콘이라는 연예인들을 보면, 흔히 반대 성별의 것이라고 여기는 특징을 가지고 있거나, 여성적 외모 표현과 남성적 외모 표현을 고루 드러내고 있는 사람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언젠가 여성적인 것과 남성적인 것으로 분류되는 통속적인 미감에서 벗어나, 긴 머리나 울퉁불퉁한 근육이 어떤 성별의 고유한 특징도 아니라는 사회적 합의에까지 도달하면, ‘양성적인’ 아이콘을 추구할 필요도 없게 된다. 오히려 제3의 아름다움을 위해 둘 중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거나 그 둘을 적절히 섞어야 한다는 발상이야말로 성별 이분법에 매몰되지 않았는가 하는 비판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여성미와 남성미로부터 벗어나고, 그리고 다시 예쁜 남성과 잘생긴 여성을 나누는 간극이 사라지는 순간, 아름다움은 보다 온전해질 것이다. 그것은 몸을 소외시키지 않는 미적 기준을 만족시키는 사람들의 출현을 의미한다. 물론, 외모지상주의는 또 다른 문제로 남아있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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