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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라는 이름에 의문을 품어보자

<혜원의 젠더 프리즘> 전형적인 삶의 플롯을 벗어나


※ 세상을 바라보는 20~30대 페미니스트들의 관점과 목소리를 싣는 ‘젠더 프리즘’ 칼럼입니다. 필자 소개: 혜원. 싸우는 여자, 비혼, 페미니스트, 아직은 한국.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노콘 질싸’…개저씨의 욕망만은 아니다

 

꽤나 파격적인 고백으로 글을 시작해보자. 나는 페미니스트이다. 나는 섹스를 꽤나 좋아한다. 여기까지는 그럭저럭 무난한 진술이겠으나, 진짜 문제는 다음 문장으로부터 시작된다. 나는 이른바 ‘노콘 질싸’(콘돔 없이 질 안에 사정하는 방식의 섹스)를 좋아하는 페미니스트이다. 콘돔을 끼고 섹스 하는 것이 장갑 끼고 악수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냐는 어느 한남 개저씨의 고백에, 나는 크게 고개를 흔들며 동의했다. 점막과 점막을 직접 맞대고 마찰할 때 느껴지는 부드러움과 끈적거림은 내가 섹스를 좋아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요소 중 하나이다. 가장 예민하고 여린 살점을 맞대고 있을 때만큼 감각적이며, 또한 내가 누군가와 함께란 걸 실감할 수 있는 때가 또 어디 있을까?

 

이러한 나의 욕망이 여성에게 ‘노콘 질싸’를 강요하는 몹쓸 한남들의 세뇌 때문인지, 남성의 성적 만족을 가장 우선순위로 두는 수동적인 여성의 모순적 욕망인지, 또는 어디서 주워 본 포르노에서 배운 무의식적 습관일 뿐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그냥 나는 콘돔이 싫고 귀찮다. 내 파트너들 중 이성의 경우 대부분 피임에 철저한 편이었기 때문에 늘 콘돔을 상비하고 다녔지만, 관계 도중 콘돔을 장갑 벗기듯 훌떡 벗겨버리는 것은 언제나 내 쪽이었다.


다만 앞서 말한 한남 개저씨와 내가 다른 점이 한 가지 있다면, 이후 임신의 가능성을 두고 불안과 공포에 빠져야 하는 것은 그가 아닌 나라는 사실이다. 단지 내가 자궁과 보지를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이다. 똑같이 쾌락과 친밀감을 위한 행위를 하더라도 이후 내 몸에 일어날지도 모를 현상을 두고 공포에 질려야 하는 것은 당연히 내 쪽이었다. 나의 이 몹쓸 욕망 때문에 나는 늘 관계 후 물 밀듯 닥쳐오는 임신에 대한 불안과 싸워야 했다.

 

쾌락을 위한 섹스와 재생산을 위한 섹스는 서로 대립하지 않는다. 그저 하나일 뿐이다. 나는 어쩌면 마치 임신에 대한 공포와 불안을 나의 쾌락에 대한 징벌과 같은 것으로 여겼는지도 모르겠다. 나에게 자궁은 오직 내가 ‘임신 가능한 존재’임을 확인시켜주는 지긋지긋한 존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성기와 생식기가 대체 뭐길래

 

▶ 영감을 준 책: 존 콜라핀토 <이상한 나라의 브렌다>(원제: As Nature Made Him, 이은선 역, 알마)


생각해보면 나는 단 한 번도 날 때부터 달고 태어난 이 자궁과 보지에 친밀감을 느껴본 적이 없다. 굳이 따지자면 혐오감 쪽에 더 가까우리라. 쭈글쭈글 겹쳐진 기묘한 모양새의 살점과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구멍으로 이루어진 내 성기를 좀 더 아끼고 이해해보려 애를 쓰던 때도 있었다. 아마 학교 도서관 구석에서 베티 도슨의 <네 방에 아마존을 키워라>(원제: Sex for one)를 찾아 읽었을 무렵인 듯하다.

 

나는 아직도 그가 제안한 자위의 8단계를 기억하고 있다. 거울을 들고 내 성기를 꼼꼼히 살펴보았고, 육감적인 목욕(?)과 마사지를 하고, 나의 몸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려고 온갖 애를 다 썼지만 그닥 사랑하는 마음은 생겨나지 않았다. 또 때로는 자꾸만 자기 몸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라고 말하는 페미니즘이 닭살 돋고 싫기도 했다. 여성으로 태어났음을 축복하라고 말하는 페미니즘도 마찬가지였다. 여신이라니, 아무래도 나는 무리가 아닌가 한다.

 

좀 더 과격하게 말하자면 나에게 있어 보지는 내 팔꿈치나 겨드랑이 뭐 이런 쪽에 가깝다. 내 몸의 일부이긴 하지만 그닥 아끼거나 애착을 두지 않는 무심한 존재. 굳이 거울까지 비춰가며 여러 번 쳐다보고 애지중지하고 싶지도 않다. 섹스할 때 쾌감을 주는 여러 부위 중 하나이기 때문에 물론 위상이 조금 다르긴 하지만. 그마저도 이놈의 오르가슴이라는 것이 어찌나 미스터리한 지, 이게 진짜 맞는지 아닌지도 모를 지경이니 말 다했다.

 

만약 영화 <그녀>(원제: Her, 스파이크 존즈, 2013)에 나왔던 농담처럼, 몸의 다른 부위를 비벼야만 쾌락을 느낄 수 있었다면 차라리 간편했을 지도 모른다. 뭘 어떻게 해야 기분이 좋은지 스스로 깨닫는 데만 한참 걸리는 복잡하고 골치 아픈 여성의 쾌감에 비해, 남성의 쾌락이란 얼마나 단순하고 명쾌한가? 나는 흥분을 하면 외부성기가 크고 단단해지며, 절정에 이르렀을 때 사정을 하는 남성의 오르가즘이 늘 부러웠다.

 

자궁에 대해 생각하면 더 복잡한 심경이 되어버리고 만다. 결혼과 임신, 출산의 계획이 없는 나에게 자궁이라는 존재는 오로지 임신을 가능하게 하는 두려움의 대상에 불과하다. 이것이 있기 때문에 나는 달마다 아기가 생길지도 모르는 상황에 대비해 두툼한 자궁 벽을 준비하고, 또 속절없이 피를 쏟아내는 생리를 경험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리컵을 처음 사용하기 시작하고 몸에서 쏟아져 나오는 피를 처음으로 제대로 목격했을 때의 충격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말 그대로 피바다였다. 마가렛 앳우드의 디스토피아 소설 <시녀 이야기>에 나오듯, 두 발 달린 자궁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오로지 아기를 담아 기르는 그릇으로만 존재하는 여성들은 단지 소설 속에만 등장하는 게 아니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새에 ‘가임기 여성’으로 수치화되어 출산지도에 기록된 경험이 있지 않은가?

 

나는 ‘여자’로 살고 싶지 않다

 

내가 태어났을 때 사람들이 자궁과 보지의 유무에 근거해 나를 ‘여자아이’라고 명명했기 때문에, 나의 성별 정체성은 선택의 여지없이 ‘여성’으로 지정되었다. 여자로 태어나 여자의 삶을 살고 언젠가는 어머니가 되는 존재. 그것이 사회에서 나에게 준 전형적인 삶의 플롯이었다.

 

날 때부터 정해진 이 삶의 강제적 서사에 의문을 던지며 저항해온 것이 나의 삶이라 할 수 있겠다. 정해진 성별에 따라 다른 삶이 예정되는 세상이라니, 그 얼마나 폭력적인가? 더군다나 나는 자궁과 보지의 유무(외부성기), 혹은 염색체의 결정(호르몬)만으로 날 때부터 남성 혹은 여성의 두 가지 성별로만 결정되는 이 성별 이분법의 사회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다.

 

▶ “당신의 젠더를 잘 설명해준다고 느껴지는 단어는 무엇입니까?” 젠더 정체성에 관한 호주 퀸즐랜드 공과대학교 설문에서, 30개 넘는 단어가 제시되었다.    ⓒnews.com.au

 

나는 단 한순간도 성별 이분법 아래의 사회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여성’으로 이름 지어졌기 때문에 그 정체성에 파묻혀 때로는 이를 저주하고 또 때로는 칭송하며 살아왔을 뿐이다. 나의 타고난 성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해본 적은 없지만(그럴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한편으로 나의 주어진 성별에 대해 진정으로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여겨본 적 또한 단 한 번도 없었다. 내가 ‘여성’임을 스스로 받아들이는 과정은 늘 갈등과 불안정과 충돌의 연속이었다. 억지로 맞지 않는 구두에 발을 구겨 넣는 기분이었다.


“젠더 규범은 도달하고 체화해야 하는 기준이면서도 도달할 수 없는 환상이며 불안과 공포를 유발하는 사회 질서다.” -루인 ‘젠더, 인식, 그리고 젠더폭력: 트랜스(젠더) 페미니즘을 모색하기 위한 메모, 네 번째’ 중에서

 

나는 여성이라는 젠더 규범을 완벽히 실천하지 못해 삶의 대부분의 시간 동안 ‘젠더 경합’(gender dysphoria)을 겪어야만 했던 사람이다. 페미니즘 이론을 통해 삶을 다시 돌아볼 수 있게 되어서야 그 불안과 공포의 근원을 마침내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여자’로 살고 싶지 않다. 여자로 정말 살고 싶은 지 아무도 나에게 물어보지 않았으니까.

 

대신 어슐러 르귄의 소설 <어둠의 왼손>(1987)에 나오는 게센인이 되고 싶다. 성별 구분이 없는 무성인으로 살다가 26일마다 찾아오는 발정기에 임의로 원하는 성별을 고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소설의 한 구절을 살펴보자.

 

“이 행성의 모든 인간은 생식이 가능한 생리주기와 그렇지 않은 생리주기를 가지고 있으며, 모든 사람이 수태시킬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임신할 수 있다. 이 사람들의 눈에는 남성-여성으로 평생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영구적 장애나 다름없다.”

 

내가 정말 게센인이었다면, 내가 가진 수많은 연속적인 특성들을 칼로 자르듯 두 개로 나누어 어떤 것은 남성적, 어떤 것은 여성적이라 부르고 따지며 분열을 겪을 필요도 없었을 테고 또 어느 한 성에 대한 끌림을 강요당할 필요도 없었으리라.

 

‘남과 여’ 젠더 이분법을 허무는 페미니즘

 

▶ 영감을 준 책: 주디 버틀러 <젠더 허물기>(Undoing Gender, 조현준 역, 문학과지성사)


나는 자궁과 보지가 달린 것을 단 한 번도 기뻐해본 적 없고, 자지가 달리지 않은 것을 슬퍼해본 적도 별로 없다. 단지 성별이 두 개로 나뉘어졌다고 굳게 믿는 사회에서 태어나 자궁과 보지의 유무로 인해 ‘여성’으로 이름 붙여지고, 그 이름에 따르는 시련 따위 강제로 겪고 싶지 않을 뿐.

 

여성스러움을 부정할 수 없게 만드는 크고 무겁고 거추장스러운 가슴의 존재도 그랬다. 떼고 달고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지금이라도 당장 떼어서 버리고 싶다고 생각하곤 했다. 화장을 오랫동안 그만두었다가 오랜만에 잔뜩 차려입고 나갔던 날은 꼭 여장이라도 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종종 남자 속옷을 입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자지가 달린 나를 상상해보기도 했다. 나는 클럽에서 술만 마시면 추접 떠는 한남들을 멋지게 물리치고 여자들을 꼬시는 구제불능이며, 목소리가 크고 제멋대로라 가끔 개저씨보다 더 개저씨 같다는 소리를 듣는 페미니스트이기도 하다.

 

때문에 최근 SNS 상에서 접하게 된, ‘생물학적 여성’을 앞세워 페미니즘을 이야기하는 주장들은 나에게 많은 혼란을 가져다주었다. 나는 자궁과 보지가 있기 때문에 여성일까? 여성과 남성을 구분하는 이 ‘생물학적 기준’은 과연 온당한가? 페미니즘은 ‘생물학적 여성의 권리 신장’을 위한 싸움인 것일까? 이러한 명제가 옳다면, 우리는 그저 가부장제 사회 아래에서의 젠더 이분법을 받아들이며 그 체제 안에서의 평등만을 외치게 되는 것이 아닌가?

 

이러한 문제의식을 담고 있는 루인 선생님의 논문을 인용하면서, 나의 질문을 더 깊이 던져보고 싶다.

 

“섹스를 생물학적으로 타고나는 것(염색체, 호르몬, 외부성기 등)으로, 젠더를 사회문화적으로 구성되는 것으로 나누어 구분하는 방식은 지금의 페미니즘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구분 방식이 본질적으로 페미니즘이 싸우고자 하는 억압 체계의 논리를 고스란히 반복하고 있다는 점이다. ‘섹스는 마치 변하지 않는 용기와 같다면, 젠더는 용기에 담는 내용물로써 변할 수 있다’는 섹스-젠더 구분 공식은 기존의 지배 질서에서 ‘여성’억압을 호소할 순 있어도 억압과 권력 배치에 어떤 문제 제기도 할 수 없도록 한다. 주인의 도구로는 주인의 집을 붕괴시킬 수 없음에도, 주인의 도구를 사용해 변화를 모색하는 것과 같다.” -루인 ‘젠더, 인식, 그리고 젠더폭력: 트랜스(젠더) 페미니즘을 모색하기 위한 메모, 네 번째’에서 발췌

 

※ 참고 문헌

 

-루인 ‘젠더, 인식, 그리고 젠더폭력: 트랜스(젠더) 페미니즘을 모색하기 위한 메모, 네 번째’, <여성학논집> Vol.30 No.1 이화여자대학교 한국여성연구원, 2013

-주디스 버틀러 <젠더 허물기>(Undoing Gender, 조현준 역, 문학과지성사) 3장. 누군가를 공정하게 평가한다는 것: 성전환과 트랜스섹슈얼의 알레고리

-존 콜라핀토 <이상한 나라의 브렌다>(As Nature Made Him, 이은선 역, 알마)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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