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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에게 맞지 않는 세상’은 가능할까?

[이가현의 젠더 프리즘] 아빠 없이 살기로 하다


※ 세상을 바라보는 20~30대 페미니스트들의 관점과 목소리를 싣는 ‘젠더 프리즘’ 칼럼입니다. 필자 이가현님은 불꽃페미액션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나는 한국여성의전화에서 실시하는 성폭력 전문상담원 교육을 받고 있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성폭력에 대한 상담을 많이 요청해왔기 때문에 도움이 되고자 참여 신청한 것이었다. 그러나 막상 교육을 받다 보니, 내가 겪은 문제에 대한 감정과 감각들이 먼저 올라오기 시작했다. 교육 초기, 가정폭력과 관련된 동영상을 보면서 갑자기 눈물이 쏟아지고 강의에 집중하기가 어려워졌다. 지난 날 아빠에게 마구잡이로 맞았던 경험이 트라우마가 되어있었고, 그 날 봤던 동영상이 그 경험을 떠올리게 했던 것 같다.

 

▶ 성폭력 전문상담원 교육을 받던 도중에, 지난 날 아빠의 폭력이 떠올랐다.  ⓒ이가현

 

# 공포영화의 한 장면 같았던 아빠의 구타

 

고등학교 1학년 때, 아빠와 집에 있었는데 나는 저녁을 먹는 중이었다.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밤길이 어두우니 아빠가 엄마를 데리러 나왔으면 한다는 전화였다. 아빠는 그때 야구경기를 보고 있었는데, 나가기 싫은 눈치였다. 야구를 본다는 말은 못하고 ‘할 일이 있어서 못 나간다’고 엄마에게 핑계를 댔다. 나는 화가 나서 전화를 하는 아빠 쪽으로 소리쳤다.

“야구 보려고 그러는 거잖아요!”

 

그러자 아빠는 전화기를 방바닥에 내려놓고 나에게 달려왔다. 

“그런 말을 왜 해!”

무섭게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내가 뭐라고 답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겁이 났다. 아빠는 다시 안방에 가서 엄마와의 전화를 끊은 다음, 밥을 먹고 있는 나에게 다시 와서는 김이 들어있는 반찬통을 들어 나의 얼굴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씨발”이라는 욕과 함께.

 

내 코에서는 코피가 터졌다. 피가 입까지 들어와서 숨을 쉴 수 없었던 나는 고개를 돌리고 ‘푸’ 하고 바람을 불었다. 피가 내 옷과 바닥, 내 주위의 물건들에까지 여러 곳으로 튀었다. 잔인한 공포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아빠는 휴지를 가져와서 주변에 튄 피를 닦았다. 그리고 내게 코피를 막으라며 휴지를 줬다. 너무 무서웠다. 엄마가 빨리 오기를 기다렸다. 내 방에서 문을 걸어 잠갔다. 계속 울었다. 그리고 너무 화가 났다. 아빠를 칼로 찍어 죽이고 싶었다. 아빠를 사람으로 보지 않기로 했다.

 

내 눈 밑에는 시퍼렇게 멍이 들었다. 엄마가 도착했고, 내 얼굴을 보더니 거실에서 아빠와 이야기를 나눴다. 아마 나에게 사과하라고 했을 것이다. 아빠는 마지못해 방에 들어오더니 흐느끼고 있는 내 옆에 앉았다. 나는 아빠를 쳐다보기 싫었다. 그 쪽으로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한참을 침묵하던 아빠는 ‘미안하다’고 한 마디를 하고 조금 앉아 있다가 방을 나갔다.

 

이뿐만 아니었다. 훈육을 가장한 아빠의 폭력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시시때때로 이루어졌다. 나는 별것 아닌 일로 뺨을 맞았다. 아빠에게 뺨을 맞으면 그 힘에 밀려 바닥에 쓰러졌고, 볼에 손바닥 자국이 그대로 남아서 한동안은 밖에 나갈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항상 아빠가 소리만 지르고 나에게 무섭게 대했느냐면 그것은 아니었다. 아빠는 대부분의 시간은 친절했다. 아침저녁으로 밥을 해주는 것은 물론이고, 초등학생 때에는 여름마다 함께 매미를 잡으러 다녔다. 내가 고등학생일 때에는 야간자율학습이 끝나면 학교 앞까지 데리러 나오기도 했다. 교복을 빳빳하게 다려주기도 했다. 밤늦게 야식이 먹고 싶다는 가족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싫은 내색 없이 떡볶이를 사오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돌아보면 나의 감정은 평화롭던 시절마저도 기본적으로 두려움과 눈치 보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었던 것 같다.

 

# 강남역 사건 이후 떠오른 기억, 친족성폭력

 

▶ 어린 시절의 나. 아빠에게 맞았을 때 얼굴에 반찬고를 붙이고 등교했었다. ⓒ이가현


작년에 강남역 여성살해사건이 있고 난 후, 처음으로 기억이 났다. 초등학교에도 들어가기 전, 내가 잘못을 할 때마다 아빠가 나에게 팬티를 내리라고 하고 눈을 감으라고 한 다음에 가랑이 사이에 뜨거운 바람을 불었던 일이.

 

여성주의를 접하면서, 성폭력이 피해자의 잘못이 아니고 자책할 필요 없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지만, 막상 내 경험에 대해서는 그렇게 생각하기 어려웠다. 나는 잘못할 때마다 훈육을 빌미로 한 성추행을 당했기 때문에, 성추행은 ‘내가 잘못해서 벌어진 일’로 생각했다. 여성주의를 알기 전까지 그 일이 성폭력이라고 인식할 수조차 없었다.

 

나는 지금 어린이성폭력 생존자의 치유를 위한 책 <아주 특별한 용기>(엘렌 베스, 로라 데이비스 지음, 한국성폭력상담소 기획, 이경미 역. 동녘 2012)를 읽고 있다. 성폭력에 노출되었고 아무에게도 보호받지 못했던 나는 어른이 되어서야 내가 겪었던 경험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아서 마치 없던 일처럼 생각해왔지만, 책을 읽으면서 폭력의 기억을 되살리게 되었다. 자신을 위해 슬퍼하고 분노하면서, 고통스러운 감정을 받아들이는 시간을 가졌다.

 

그러면서 한동안 유치원생의 나로 돌아간 듯한 감정 상태로 지냈다. 당시 나는 딸이 아무리 맞아도 경찰에 신고하거나 아빠를 분리시키지 않았던 엄마가 원망스러웠다. 이혼을 하지 않는 엄마가 답답하고 싫었다.

 

# ‘어린 나’를 위로하는 치유여행에서

 

그러나 ‘어린 나’를 위로하기에 나의 일상은 너무 바쁘고 빽빽했다. 상처받은 어린 나와 온전히 둘이만 있고 싶었다. 나는 여행을 떠났다. 내 일생 처음 있는 혼자만의 여행이었다. 많은 친구들이 나의 치유여행을 지지하고 독려해주었다. 나는 스스로를 잘 치유하고 있다는 마음의 확신을 가지고 전라남도행 버스를 탔다.

 

왜 전라남도였을까? 딱히 이유는 없었다. 친구들이 추천해 주기도 했고, 아름다운 자연경관이 이 지역에 몰려있는 것 같았고, 외가와 친가가 모두 전남에 있어서 좀 더 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순천만 담양의 추월산을 두 시간 동안 오르면서 오직 산의 정상만 생각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정상에 가보고 싶어 했는지는 모르겠다. 일상에서 내 마음대로 되는 것에 없다는 데에서 오는 무력감이 너무 싫었다. 세상이 나의 통제권 바깥으로 흘러갈 때, 성폭력을 당하고 아프게 맞아도 아무 저항도 할 수 없었던 그 상황의 내가 떠올라서 더 참을 수 없었던 것 같다. 어린 나는 분노로 울었지만 스스로를 돌보지는 못했다.

 

온전히 나의 의지로 혼자 산을 오르고 또 올랐다. 내려갈 힘이 없으면 어떡하지, 걱정되었지만 중간 중간 쉬어가며 정상 가까운 곳에 올랐다. 추월산에서 담양 풍경이 내려다보이자 웃음인지 울음인지 모를 탄식이 나에게 나왔다. ‘이게 바로 기쁘다는 감정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나는 나의 감정을 돌보는 데에 너무 소홀했거나 아니면 감정을 느끼는 법을 잊고 살았던 것이 틀림없다. 성폭력을 경험한 사람은 감정이나 감각의 한 부분이 마비된다고 한다. 폭력의 경험에서 생존하기 위해 몸이 선택한 전략인 것이다. 아마 나도 그랬던 것 아닐까.

 

홀로 떠난 여행이라 그런지 온전히 나의 마음이 가는대로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에 따라 움직일 수 있었던 경험 자체도, 나에게는 너무나 큰 해방감을 주었다. 내 통제 밖의 경험들에 무력감을 느끼는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는 것만으로도 나의 정신적, 육체적 힘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인생의 모든 경험들을 통제할 수는 없다는 사실에 대해 좀 더 마음이 편해지기도 했다.

 

# 아빠 없는 삶을 선택하다

 

▶ ‘어린 나’를 위로하는 치유여행에서   ⓒ이가현


예전에 나에게 힘이 없다고 생각되었을 때에는 엄마가 아빠와 이혼하는 것만이 아빠를 내 인생에서 퇴출시키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무리 큰 일이 벌어져도 아빠와 이혼하지 않는 엄마를 원망하는 마음이 점점 깊어지고, 무력감도 깊어졌다. 그러나 이제는 내가 아빠가 없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살 수 있다는 것을 안다. 더 이상 아빠의 폭력이나 ‘사고’치는 것의 뒤치다꺼리를 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래서 나는 아빠를 내 마음에서 죽이기로 결심했다. 내 내면의 힘으로, 아빠 없이 살기로 했다.

 

그렇게 아빠 없이 살기로 마음먹고 엄마를 만났다. 엄마에게 이혼하라고 주구장창 말해왔던 나였지만, 아빠 없이 살기로 한 이후에는 그러지 않았다. 엄마가 아빠와 이혼을 하거나 이혼을 하지 않는 것은 엄마의 선택이고 엄마의 삶이니, 내가 더 이상 관여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내가 아빠 없이 살기로 한 것도 나의 선택이자 나의 삶이니 설득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집에 오라고 하지도 말고, 아빠 이야기를 나에게 하지도 말라고 했다. 나에게 가족은 앞으로 엄마와 동생뿐이니, 보고 싶으면 바깥에서 만나기로 했다. 엄마는 고개를 끄덕였고 눈물을 흘렸다.

 

아직도 가끔 친구들과 대화를 하다가 문득문득 아빠의 이미지가 떠오를 때가 있다. ‘너, 그거 우리 아빠 같다’ 하면서 친구를 놀릴 때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내가 아빠와의 관계를 지속하고 싶다는 뜻은 아니라는 것을 안다. 애써서 아빠를 지우고 살기보다는 아빠를 보고 싶지 않고, 그의 삶에 개입하거나 연관되고 싶지 않은 내 마음과 감정을 존중하고 돌보는 것이 내가 이해하는 ‘아빠 없이 사는 삶’ 같다.

 

치유를 하겠다고 결심하기 전에는 이런 기억을 묻고 사는 것이 더 편안했다. 아빠로부터 폭력을 당했을 당시에 슬프고 힘들었어야 했는데, 무의식 속에서 그 고통을 피해왔던 것 같다. 페미니즘 운동을 시작한 이래로 내 경험을 대면하고 내 감정을 살펴볼 힘이 생긴 것 같다. 그래서 치유를 선택했다. 이 치유의 과정을 견딜 수 있는 것은, 지금 읽고 있는 <아주 특별한 용기>에서 ‘이 고통은 결국 지나간다’고 힘주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치유 중이고, 정말로 고통은 조금씩 희미해지고 있다. 치유 속에서 느끼는 기쁨들이 보이고, 내가 그 기쁨을 누려도 되는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잘 하고 있다’며 나를 지지해주는 친구들과 가족, 그리고 상담원에게 정말 고맙다. 누구보다 나를 잘 돌볼 수 있는 나에게도 고마움을 느낀다. 관계를 지속하는 것뿐만 아니라 관계를 끊어내는 것도 나의 성장에 기여한다는 것을 알았고, 이제는 어떤 관계에서든지 나를 숨기지 않고 ‘있는 그대로’ 존재하고 싶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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