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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은 여성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완두의 젠더 프리즘> 여성빈곤이 드러나지 않는 이유



※ 세상을 바라보는 20~30대 페미니스트들의 관점과 목소리를 싣는 ‘젠더 프리즘’ 칼럼입니다. 필자 완두님은 ‘동행동’ 모임을 하고 있습니다. ‘동행동’은 여성들이 처한 현실과 연대의 순간을 기록하며, 일상의 실천과 변화로 페미니즘을 만나는 모임입니다.  *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나는 20대 후반 30대 초반의 두 비혼 여성과 서울에서 살고 있다. 자매인 두 여성 중 디자이너인 A는 집에서 1인 사업을 하고 있고, B는 여러 번 이직을 하다가 현재는 틈틈이 들어오는 일로 생계를 유지하며 몇 개월 째 구직중이다. 나 역시 현재는 정기적인 소득이 없는 상태다.

 

▶ 우리집 공용 달력: 생활비를 절약하려고 일자별 현금 1만원을 달력에 붙여놓고 해당 날짜에 떼어 쓰고 있다.  실제 절약 효과는 체감하지 못하고 있다는 게 함정.  ⓒ완두

 

하루는 집에 자매의 사촌오빠가 컴퓨터를 수리해주러 방문한 일이 있었다. 사촌오빠는 구직이 어려워 힘들다는 B에게 “여자는 그래도 괜찮아. 남자가 문제지”라며 위로(?)했다고 한다. ‘여자는 결혼하면 되지만 남자는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책임이 가중되니까 직장이 없는 게 더 큰 문제’라는 것이다.

 

자매와 연인 관계로 묶인 우리 가족구성원 셋은 방 두개짜리 작은 집의 월세를 1/3로 나누어 내며 살고 있다. 하지만 각종 공과금과 생활비, 각자의 보험이나 세금 부담이 적지 않아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진 않다. B는 취업 준비를 위해 학원을 다니는 것도 큰 부담이 돼 망설이고 있었다. 그런 B는 사촌오빠의 위로에 “나도 충분히 힘들어”라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고 했다.

 

# 여자는 결혼하면 되잖아

 

내 또래 여성들 중에는 맞벌이하는 어머니를 대신해 가사 일을 도맡아 하며 남자형제들을 돌보면서 자란 사람이 많다. “알파걸이 되라”는 교장선생님의 훈화말씀을 듣고 대학에 진학했고, 연애를 하기보다는 학자금 대출을 갚기 위해 잠을 아껴 알바를 하며 대학생활을 보냈다.

 

나는 매달 생리대와 생리통 약을 사는데 적지 않은 돈을 쓴다. 투자라는 명목으로 미용에 신경을 쓰라는 요구를 받고, 집을 구하더라도 보안이 좋다는 이유로 더 비싼 집을 추천받는다. 여성이기 때문에 더 많은 돈과 시간을 필요로 하는 일들이 나이가 드는 만큼 많아졌다. 사회는 여성에게 끊임없이 더 많이 소비하라고 부추기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소비를 감당해야 하는 여성들에게 정작 일자리는 쉬이 주어지지 않는다.

 

대학 재학 중 여자 동기들은 남자 동기에 비해 학업 성취가 우수했고, 취업준비 또한 열심이었다. 그러나 졸업 후 면접을 보러 다니는 친구들은 여전히 면접 자리에서 “남자친구 있느냐”,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면 어떻게 할 거냐”는 사생활을 묻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 우리는 한 사회구성원으로서 당당하게 살아가기 위해 목표를 가지고 도전했지만, 사회는 그런 우리를 당연하게 예비 아내와 예비 엄마로 평가했다.

 

나의 혈연가족 안에서도 3살 터울 오빠에 대해, 아빠는 오빠의 직장생활과 월급에 많은 관심을 보이고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에 비해 나의 저임금 노동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 갖지 않는다고 느꼈다. 가정, 학교, 직장에서 내가 만난 여성들은 생계를 위해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살고 있었지만, 사회는 여성 개인이 생존과 자아실현을 위해 경험하거나 계획하는 것들을 궁금해하지 않았다.

 

▶ JTBC “[팩트체크] ‘싱글세’ 소동…세금, 실제로 싱글이 더낸다?”(2014년 11월 13일자) 방송 캡쳐 화면. 가족 단위 소득공제 시스템으로 인해, 결과적으로 소득활동을 하는 싱글이 세금을 더 많이 내고 있다. 

 

# ‘유연한’ 노동시장의 ‘일시적’ 노동자 취급

 

여성이 살아가는 목적은 소꿉놀이를 하던 3살 때부터, 초경을 하고, 취업 면접을 볼 때도 언제나 결혼과 출산인 것처럼 여겨진다. 요새는 여성도 많이 배우고 일한다고 하지만, 여성은 직장보다 가정에 충실해야 한다는 요구에 큰 변화는 없어 보인다. 이는 남성이 생계를 부양해야 한다는 믿음과 함께 작동해 남성의 가난은 위기이자 사회 문제로 다뤄지는 반면, 여성의 가난은 결혼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시적인 상태로 치부된다.

 

여성들이 한 명의 시민으로서 독립적으로 살아가기 위해 목표를 가지고 도전하는 동안, 사회는 젊은 여성을 ‘합리적’이고 ‘유연한’ 노동시장에 ‘일시적인 노동자’로 동원할 뿐이다. 그러다 보니 결혼제도 안팎으로 남성생계부양자 모델에 맞지 않는 다수의 여성들이 경제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더욱 빈곤한 상태에 놓인다.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않은 나와 내 동거인들은 각자 지원받을 수 있는 제도가 없는지 틈틈이 찾아보기도 한다. 하지만 내가 실제로 소득이 없고 혈연가족으로부터 어떠한 지원도 받지 않은 채 독립적으로 살아가고 있음에도, 나를 부양할 가족이 서류상에 있으면 공적 지원을 받기 힘들었다.

 

최근 동거인 A는 은평구에서 만 19세~39세 미만 청년 기업가를 대상으로 공공임대주택을 공급한다는 입주자 모집 공고를 보고 문의를 했다. 하지만 ‘우리가 (혼인이나 혈연)가족이 아니기 때문에’ 입주 신청을 할 수 없다는 답변을 들었다. 이성애결합 가족의 남성생계부양자 중심으로 빈곤을 이야기하는 사회에서 미혼/비혼 여성의 빈곤은 진지하게 여겨지지 않는 것이다.

 

▶ 신혼부부 국민임대주택 우선공급 혜택   ⓒ서울주택도시공사 공식 블로그

 

# 남성생계부양자 중심으로 빈곤을 다루는 사회

 

대선을 앞두고 각 후보들은 성별임금격차 해소, 블라인드 채용제 도입, 출산휴가 확대 등 성평등한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공약들을 발표했었다. 하지만 신혼부부나 한부모, 결혼, 임신·출산, 양육 중심의 ‘마음 편히 아이를 낳아 기를 수 있는 국가’를 위한 정책들이 다수였다.

 

여성빈곤이 가시화되지 않는 문제는 성차별적인 제도 하에서 여성이 결혼, 출산, 양육의 책임 이외의 삶을 사는 독립된 시민으로서 이해되지 못하는 데에 있다고 생각한다. 여성이 여성이기 때문에 겪는 경험들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바탕으로 여성빈곤 문제에 다차원적인 접근과 개입이 필요한 시점이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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