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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몸은 나의 것’ 선언의 의미
<백목련의 젠더 프리즘> 몸에 대한 해석의 폭을 넓혀가기
※ 세상을 바라보는 20~30대 페미니스트들의 관점과 목소리를 싣는 ‘젠더 프리즘’ 칼럼입니다. 필자 백목련 님은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설 열림터 활동가입니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페미니스트와 ‘외모 관리’의 딜레마
최근 불꽃페미액션의 요청을 받아 20-30대 여성을 대상으로 ‘몸’과 관련한 성교육을 진행했다. 개인적으로 여러 성교육 주제 중에서 ‘몸’이 가장 이야기 나누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내가 여성학을 접한 초기에 겪었던 갈등도 바로 몸이었다. 나는 당시 여성학 수업 시간에 들은 “외모 관리 문화가 여성의 몸을 통제하고 있다”는 명제에 동의했다. 생각과 행동을 일치시키기 위해서, 짧은 머리에 화장기 없는 얼굴, ‘여성성’이라고는 1도 없는 옷차림으로 다니기 시작했다. 마음 한 편으로는 ‘화장하고 싶다! 더 예뻐지고 싶다!’ ‘아, 살랑살랑한 저 원피스 나도 입고 싶다’, ‘하이힐까지 신으면… 아, 어떻게 하지?’ 같은 고민들이 꿈틀대고 있었지만.
사실 그 당시와 같은 스타일을 해본 게 처음은 아니었다. ‘아름다움’에 대한 사회화가 덜 되었던 나는 ‘아름다움’과 ‘여성성’이 연결된 줄 몰랐다. 그래서 내가 어떤 외양을 갖추더라도 아주 수려하지는 않지만 나름 예쁜 편에 속한다고 착각하며 살아왔다. 나는 여중, 여고를 거치면서 공부 잘하고 인사성 밝다며 예쁨 받았기 때문에 ‘(내 입장에서는) 좋은 차별’을 받고 살아왔다. 그러다 대학에 와서야 뒤늦게 내가 타인에게 어떻게 평가되고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인지하게 되었다.
복학생 남자 선배들로 북적이는 단과대 활동을 하면서 나는 ‘예쁘지 않’은데 친하게 지내자고 들이대는, 그래서 은근한 무시의 대상이었던 것 같다. 심지어 관심도 없던 선배가 내가 자기를 좋아한다고 착각하고는 ‘걘 좀 그렇잖아?’ 라는 소리를 하고 다녔다는 일화도 전해 들었다. 당시에는 상대할 가치도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내가 ‘여성’이고, ‘여성은 그런 평가에 더 상처 받는 존재’란 것을 알게 된 이후에는 달라졌다. 동의하지 않았던 외모 평가에 저항하기보다는 외모를 관리하고 싶은 욕망에 활활 타올랐다. 페미니스트라는 갑옷으로 ‘외모 관리하지 않기’를 가까스로 실천했지만 내면의 인정욕구를 계속 억누르기란 쉽지 않았다.
고민을 거듭한 끝에, 내가 저항으로 선택한 스타일과 그것을 실천하는 방식 역시 외모 관리임을 깨달았다. 이분법적으로 억압과 해방을 나누기는 쉽지만, 결국 내 욕망을 통제한다는 점에서 나를 다시 옭아매기 때문이었다. 당시의 내 실천은 페미니스트에 대한 고정관념(예를 들어, 페미니스트는 화장을 하거나 하이힐을 신지 않는다 등)을 반영하고 있기도 했다.
이후 나는 성별에 따른 몸 규범과 내 욕망의 역동을 동시에 살펴보면서, 내가 원하는 방식의 외모 관리를 해나갔다. ‘넌 페미니스트인데 왜 외모에 신경 써?’라는 말에도 잘 대답할 수 있게 되었음은 물론이다.
▶ 2016년 4월, 엠버는 여성 정체성은 규범을 수행하는 게 아니라 자기가 원하는 바를 실천하는 거라고 설명했다.
‘여성의 몸’에 대한 규범과 나의 욕구 사이
내가 성교육에서 ‘몸’에 대해 얘기할 때 중요하게 다루는 것은 ‘내 몸은 나의 것’을 어떻게 설명하느냐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선언을 단순히 ‘화장이나 다이어트, 성형과 같은 성장(盛粧)은 몸에 대한 억압이고 여성에 대한 차별이야’의 차원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내 몸에 대한 결정은 인식의 결과이고, 인식은 사회화의 산물이다. 때문에 우리는 내 몸이 실제로는 완벽한 나의 소유가 될 수 없다는 사실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사회가 강요하는 몸 관리가 어떤 면에서 억압으로 작동하는지, 몸 관리를 하면 내가 얻게 되는 보상은 무엇인지, 이 보상으로 내 욕망 중 어떤 것이 충족되고 있는지, 이 세 차원 사이에서 느껴지는 내적 갈등은 없는지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사회적 맥락을 살펴본다면 ‘내 몸은 나의 것’ 선언은 몸 규범과 자기 욕망이 어떻게 교차하고 충돌하는지를 탐색하는 과정을 가리킨다.
생물학적 성별은 언제부터, 왜, 성기를 중심으로 ‘여성’과 ‘남성’으로 나뉘게 되었을까, 왜 간성(intersex, 間性; ‘3XFTM 다큐멘터리북’에 따르면 좁은 의미로는 여성과 남성의 성적 기관과 특질을 모두 가지고 있는 사람을 뜻함)의 존재는 성별로 범주화되지 않았을까, 성별의 기준은 성기인데 어떻게 확인해보지 않고도 타인의 성별을 인지할 수 있을까, 그것은 오히려 ‘생물학적 여성’과 ‘여성성’, ‘생물학적 남성’과 ‘남성성’ 사이에 과학적 연결고리가 없다는 것을 설명해주지 않을까, 그렇다면 사회 규범으로서 생물학적 성별과 자기 정체화 과정으로서 성별 정체성은 별개의 영역이 아닐까, 생물학적 성별이 ‘여성’인 사람의 말투가 상냥한 경향을 보이는 건 자연발생이 아니라 오랜 훈육의 결과가 아닐까….
생물학적 성별, 성별 정체성, 그리고 스타일(옷차림, 말투 등의 젠더 표현)을 둘러싼 규범을 살펴보는 작업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을 동반한다. 여기에 더하여, 개인의 성 정체성을 구성하는 요소에는 성적 지향 역시 포함된다. 이 네 가지 범주들이 각기 독립적으로 교차한다고 인정되지 않고, 이성애중심주의 정도가 높은 사회일수록 성별 정체성이나 성적 지향에 따른 개개인의 스타일의 차이는 겉으로 드러나기 어렵다. 조금이라도 규범에서 벗어나면 바로 ‘정상성’을 의심받기 때문이다.
몸 규범의 대표적인 주자인 성형은 시술이나 수술 그 자체는 큰 억압이 아닐 수도 있다. 우리 사회에서 성형은 몸을 ‘원하는 방식’으로 변형시키는 기술로서 기능한다. 그러나 대중화된 성형산업은 성형을 ‘주체적인 자기 관리’로 설명하며 끊임없는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여성들이 자기 몸에 만족할수록 산업이 축소되므로, ‘원하는’ 몸의 형태를 계속 바꾼다. 마치 나의 욕망인 것처럼 느껴지지만 실제로는 그 틀에 맞지 않으면 ‘정상적’이지 않은 것으로 간주하도록 설계된다. 만족의 여부에 내가 개입할 여지가 적다는 의미다.
몸에 대한 개인의 욕망은 성별 규범을 실천하면서 받는 보상에 기대어 있을 수도 있고, 때로는 규범의 빈틈을 미묘하게 피해가거나 저항하면서 얻는 운동에서 충족될 수도 있다. 이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억압이냐, 선택이냐 같은 대립 항이 아니다. 몸에 대한 해석을 좀 더 자기 언어로 서술할 수 있도록, ‘OO다움’을 강제할 것이 아니라 ‘OO’ 안에 존재하는 수많은 개인의 특성이 결국 ‘OO다움’이라는 걸 수용해야 한다.(엠버 트위터 멘션을 참고하시라.) 규범의 강요가 아니라, 몸에 대한 느낌과 관리에 있어서 내가 결정할 수 있는 여지를 어떻게 더 넓힐 수 있는지, 그 과정에서 내 욕망이 지나치게 소외되지 않기 위해 어떤 전략이 필요한지 고민해봐야 한다. ※ Yanis Marshall의 ‘하이힐 퍼포먼스’ 연습 동영상: http://bit.ly/1KfETTA
▶ Yanis Marshall의 ‘하이힐 퍼포먼스’는 젠더 표현(스타일)이 생물학적 성별과 독립될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젊은 여성’들을 하나로 규정하는 사회 속에서
하지만 정작 이런 복잡한 맥락을 살펴보기 전에 ‘내 몸은 나의 것’이라는 선언을 당위적 차원에서 반복해야만 하는 현실부터 마주했던 것 같다. <페미들의 성교육> 잇따른 대관 취소 사태(관련 기사: 낙태한 학생은 학생도 아닙니까?)는 가부장제가 사회곳곳에 여전히 촘촘하게 작동하고 있음을 정확히 보여주었다.
성교육 장소 대관 취소 사태의 시발점이 된 한 인터넷 게시판의 글은 다음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다. ‘사랑하는 딸을 신입생으로 입학시킨 아버지’가 선배들이 나누어준 ‘언니들의 성교육’(페미들의 성교육) 안내문을 받아보고 망연자실했다거나, ‘열아홉 스물 정도의 여대생들이 100% 완벽한 피임이 없다는 사실을 알기 어렵고, 또 남녀 간의 성관계가 그저 임신만 안 하면 되는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스스로 깨우쳐 알기도 어렵다’ 등.
딸은 모두 자신을 ‘여성’으로 정체화하는가? 대학에 보낼 정도로 자녀의 성장을 지원하였음에도, 왜 그만한 판단력이 딸에게 없다고 가정하는가? 사람들은 어떤 정보를 그것이 소위 ‘억압’에서부터의 ‘해방’이면 무조건적으로 수용하는가? 성관계는 왜 반사적으로 이성애를 떠올리게 하는가? 등등에 대한 고민은 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는, 즉 규범에 반문하지 않는 ‘남자’ ‘어른’의 ‘문제제기’였다. 그 결과, 시작하기도 전에, 누구의 동의도 얻지 않은 상태에서 성교육 참가자들은 ‘미성숙한’ ‘이성애자’ ‘여성’으로 규정되고 일반화되었다.
우리를 설명할 수 있는 수많은 언어들 중에 어떤 것은 바로 효과가 나타나고, 어떤 것은 삭제된다. 그 기준에는 얼마나 사회의 규범과 맞닿아 있느냐, 즉 ‘정상성’ 범주에 속하느냐가 반영되었다고 본다. 너와 나 사이의 세세한 차이들보다 쉽게 ‘여성’, ‘장애인’, ‘미성년자’, ‘학생’, ‘젊은이들’과 같은 단어로 호명되고 반사적으로 ‘시스젠더’(Cisgender; 생물학적 성별 혹은 지정 성별과 성별 정체성이 일치하는 사람. 즉 트랜스젠더가 아닌 사람을 가리킴), ‘순결해야 하는’, ‘이성애자인’, ‘아무것도 못하는’, ‘미성숙한’, ‘치기 어린’ 등의 고정관념이 소환된다.
이런 맥락에서, ‘내 몸은 나의 것’ 선언은 ‘시스젠더 이성애자 여성’을 둘러싼 당위와 뗄 수 없다. 다만 당위에 붙들리면 규범이 간과하고 있는 ‘나’를 섬세하게 탐색하는 과정은 뒤로 밀려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개인의 정체성을 탐구하기 이전에 ‘시스젠더 이성애자 여성’으로 범주화되는 것, 우리 안의 다양성을 규범의 이름으로 삭제하려는 억압에 저항해야 한다. 몸에 대해 당위와 맥락을 함께 고려하며 이야기할 수 있는 사회가 올 때까지 지겹게 외치자. “내 몸은 나의 것!”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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