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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 내 성차별’ 수면위로 오르다
<남순아의 젠더 프리즘> 두 번째 영화, 찍을 수 있을까
※ 세상을 바라보는 20-30대 페미니스트들의 관점과 목소리를 싣는 ‘젠더 프리즘’ 칼럼입니다. 필자 남순아님은 페미니스트 영화인입니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 다큐멘터리 내 성폭력 얘긴 왜 안 나올까?
작년 10월, 트위터를 중심으로 각 분야의 #OO_내_성폭력 해시태그가 올라왔다. 그 중에는 #영화계_내_성폭력도 있었다. 터져 나오는 목소리에 각종 매체들은 영화계 내 성폭력의 심각성을 다뤘다. 그리고 모범 사례로 영화 <걷기왕>의 성희롱 예방교육을 꼽았다.
그런데 문득, ‘영화계 내 성폭력’에서 ‘영화계’는 어디일까 라는 의문이 생겼다. 거기에 독립 다큐멘터리 영화계(이하 다큐멘터리)는 포함되지 않은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한국사회 어디든 성폭력으로부터 안전한 곳은 없지만, 끝내 다큐멘터리 내 성폭력은 나오지 않았다.
#영화계_내_성폭력 해시태그가 시작된 지 이틀 뒤인 2016년 10월 23일, 이길보라 감독(<반짝이는 박수 소리> 연출)이 젊은 신진 여성 다큐멘터리 작업자들을 초대한 채팅방을 만들었다. 나이와 경력, 젠더에 따른 여성영화인들의 고충을 나누고 다큐멘터리 씬의 여성혐오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는 취지였다.
첫 오프라인 모임에서 우리는 여성감독이 제작한 다큐멘터리를 ‘사적 다큐멘터리’라고 분류하는 젠더화와 사적 다큐멘터리 자체에 대한 폄하, 신진 다큐멘터리 감독 제작 지원을 압도적으로 차지하고 있는 멘토링 제도와 그 멘토링 과정에서 일어나는 위계 및 차별, 그리고 다큐멘터리 전공이 있는 학교와 현장에서 일어나는 성폭력과 성차별 등에 대해 각자의 경험을 털어놓고 문제의식을 공유했다.
# 다큐 작업자들의 ‘가족 같은’ 문화의 함정
다큐멘터리 내 성폭력은 극영화와는 다른 양상을 띤다. 수십 명의 스태프가 모여 두세 달 안에 촬영을 끝내는 극영화와 달리, 다큐멘터리는 대개 혼자 혹은 소수의 스태프가 1년 이상의 촬영 기간을 거쳐 영화를 만든다. 극영화의 경우 정해진 내용을 통제가 가능한 공간에서 약속된 사람들과 찍는 반면, 대부분의 다큐멘터리는 작업자의 통제가 불가능한 촬영 대상자를, 통제가 불가능한 장소에서 찍는다.
그래서 때로 여성 다큐멘터리 제작자들은 촬영을 위해 촬영 대상자의 성희롱 발언이나 심지어 강간의 공포까지도 견뎌야 한다. 또한 ‘감독님’이 아니라 ‘어이’, ‘거기’, ‘아가씨’와 같은 멸시의 호칭과 ‘(여자라서) 위험하니까 돌아가’라는 말을 부지기수로 듣는다.
극영화에 비해 상대적으로 작업자 수가 적기 때문에 다큐멘터리는 씬의 크기도 훨씬 작다. 그래서 개인 작업자들끼리 모여 공동체를 이루거나, 작업실을 공유하며 집단으로 활동하는 경우가 많다. 바로 이 공동체 문화가 다큐멘터리 씬의 ‘가족 같은’ 분위기를 형성한다. 다큐멘터리 전공이 있는 학교도 비슷한 문화를 가지고 있다.
‘가족 같은’ 공동체는 친밀하면서도 가부장적이다. ‘좋은 게 좋은 것’이라며 넘기는 사소한 문제들은 사실은 그 공동체에서 권력을 쥔 이들에게만 사소하다. 이런 ‘가족 같은’ 분위기에서는 문제를 제기한다는 것 자체가 공동체의 분위기를 해치고, 더 나아가 공동체를 해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곤 한다. 그러니 차별과 폭력의 피해자들은 사실을 공론화하기 주저하게 된다. ‘좋게 넘기지 못한’ 피해자는 공동체의 골칫거리가 된다.
여성 제작자들은 남성 동료 제작자에게 외모 품평을 듣거나 스토킹, 데이트 폭력을 당하고서도 피해 사실을 말하지 못한다. 게다가 씬이 좁아 가해자와 마주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가해자의 보복이 두려워 침묵하는 편을 택한다. 피해 사실을 익명으로조차 말할 수 없는 다큐멘터리 씬의 구조적 특징을 고려하지 않은 채, 가시화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영화계 내 성폭력’을 남의 일처럼 보아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 젠더의 위계와 폭력을 ‘공적 언어’로 드러내다
동료 작업자들과 이야기를 나눈 덕분에, 그동안 심증에 그쳤던 불쾌함을 보다 선명한 언어로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경험을 나누는 것 이상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갈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서 다큐멘터리 씬의 차별과 폭력에 대해 직접 말할 수 있는 포럼을 열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우리는 공신력과 주목도를 고려해, 해마다 봄에 열리는 인디다큐페스티발에 우리의 문제의식을 담은 포럼을 제안해보기로 했다.
▶ 다큐멘터리 씬의 차별과 폭력을 말하는 포럼을 두·영·찍, 인디다큐페스티발, 영화진흥위원회 공동으로 주최했다.
해가 바뀌고 1월, 두 번째 오프라인 모임이 이루어졌다. 두 번째 모임에서는 포럼의 제목과 세부 주제를 정했다. 마민지 감독이 제안한 “두 번째 영화, 찍을 수 있을까?”(두·영·찍)라는 제목은 우리 모두의 고민을 담고 있었고, 포럼 제목뿐만 아니라 우리 모임의 이름이 되었다. 그리고 페미니스트 영화/영상인 모임 ‘찍는페미’처럼 지속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단체가 되어, 포럼이 끝난 후에도 계속해서 활동해나가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나눴다. 더불어 같은 다큐멘터리 작업자로서, 서로에게 어떤 존재가 되어줄 수 있을지도 고민했다.
다행스럽게도 인디다큐페스티발은 우리의 포럼 제안을 매우 긍정적으로, 그리고 중요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영화진흥위원회에서도 이 포럼을 의미 있게 여겨, 최종적으로 두·영·찍과 인디다큐페스티발, 영화진흥위원회에서 공동으로 주최하기로 했다.
논의 끝에 발제 주제를 다섯 가지로 정했다. 다큐멘터리 제작에 대한 애정과 다큐멘터리 제작자들의 경제적 고민을 담아 윤가현 감독(<가현이들> 연출)이 “두 번째 영화, 찍을 수 있을까?”를 발제하기로 했다. 정수은 감독(<그 날> 연출)은 사적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제작자의 입장에서 보는 사적 다큐멘터리란 무엇인지, 나아가 사적 다큐멘터리에 대한 새로운 비평을 요구하는 “사적 다큐멘터리, 제작자의 입장에서”를 맡았다.
필자는(<아빠가 죽으면 나는 어떡하지?> 연출) “신진 여성감독에게 가해지는 차별에 관하여”라는 제목으로 다큐멘터리 제작자들 간의 위계와 차별, 멘토-멘티 시스템의 문제를 지적하기로 했다. 출산과 육아의 과정에서 경력단절 문제를 고민하고 있는 명소희 감독(<24> 연출)은 “신진이며, 육아 중인 내가 두 번째 영화를 만들 수 있을까?”를 발제하기로 했다. 마민지 감독(<버블 패밀리> 연출)은 “젠더 관점에서 본 현장 윤리에 관한 고민”을 통해 여성 다큐멘터리 제작자가 현장과 학교에서 경험하는 젠더 위계와 성폭력을 다루기로 했다.
상대적으로 경력이 적고 젊은 이들이 여러 사람들 앞에서 자기가 속한 씬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매우 긴장되는 일이다. 우리가 예민한 것은 아닌지, 우리가 느끼는 문제점이 정말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씬의 문제인지, 우리는 서로에게 몇 번씩이나 다시 확인했다. 누군가 주저하면 옆 사람이 용기를 주었다. 혼자서만 가지고 있던 고민들을 타인에게 설명하기 위한 공적인 언어로 풀어가면서 우리의 고민도 더 깊어졌다.
# 한 손은 카메라, 다른 한 손은 서로의 손을!
마침내 포럼 날인 3월 24일, 평일 낮 시간인데도 포럼 장소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준비한 좌석이 부족해 의자를 더 꺼내왔고, 복사한 발제문도 동이 났다. 윤가현 감독의 매끄러운 사회 덕분에 포럼은 약 세 시간 동안 잘 진행되었다.
▶ 인디다큐페스티발 포럼 <두 번째 영화, 찍을 수 있을까?>에서 발제 중인 필자. ⓒ 인디다큐페스티발
예비군 훈련이 끝난 뒤, 다큐멘터리 전공 학생들이 모여 술을 마시면서 겨울왕국 OST인 ‘Let it go’를 개사해 ‘꼴페미’라고 노래했다는 사례도 나왔다. 남성 제작자가 작업실을 함께 쓰는 여성 동료의 외모를 평가해 이에 문제 제기하자 ‘경찰서 가서 신고해라, 너도’라고 반응했다는 얘길 들었을 땐 발제자와 청중 모두 분개했다.
우리는 수고했다며 서로를 안아주었다.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를 끝없이 의심하게 만들고 괴롭혔던 심증을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하는 동료 감독들의 표정과, 서로 눈빛으로 응원을 주고받은 것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이다.
포럼이 끝난 이후, 다른 신진 및 기성 영화인들의 공감과 지지를 받았다. 그리고 우리가 제기한 문제들의 해결 방안에 대해 함께 고민했다. ‘사적 다큐멘터리’라는 명칭이 이미 오염된 것은 아닌지 논의했다. 출산과 육아로 경력단절의 위기에 처한 여성 감독들을 지원하는 제작지원 제도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영화를 관람하기 위해 혹은 GV(감독과의 대화)에 참석하기 위해 관객이나 감독이 자녀를 데려올 수 있도록, 영화제에 아이 돌봄 서비스를 요구하자는 제안도 제기되었다. 다큐멘터리 전공의 학내 성폭력 해결 방안도 함께 고민해보았다.
이제 우리는 다음 단계를 밟으려 한다. 다음 행사는 “두 번째 영화, 어떻게 찍었어요?”라는 제목의 좌담회를 열 것이다. 우리보다 먼저 고민해온 기성 여성영화인들의 이야기를 듣고, 함께 다큐멘터리 씬의 성폭력과 성차별을 개선할 방법을 찾아 나갈 것이다.
윤가현 감독의 발제문을 빌어 이 글을 마무리한다.
“용기를 내어줄 두 번째 영화를 준비하는, 두 번째 영화를 찍고 싶은, 그렇게 세 번째 영화를 만들고 싶은 신진 여성 다큐멘터리 감독, 그리고 이미 지나온 여성 감독님들께 미리 존경의 인사와 감사의 인사를 보낸다. 한 손에는 카메라를, 한 손에는 우리의 손을 잡자.
그리고 두 번째 영화를 찍자!”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 “두 번째 영화, 찍을 수 있을까?” 페이스북 페이지에서 포럼 발제문 전문 보기 https://facebook.com/docufe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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