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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의 ‘성’을 양지로 끌어내는 소셜벤쳐
<거침없는 2030 여성들의 인생 프로젝트> 인스팅터스 박진아 대표
※ 자신의 젊음과 열정을 바쳐 시작한 프로젝트를 통해 동등한 사회를 향한 변화를 만들어내고 있는 밀레니얼 여성들을 찾아가 인터뷰하는 시리즈입니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누구나 안전하게 사랑할 권리가 있다!’
언뜻 들으면 ‘당연한 거 아니야?’라고 동의할 전제이지만, 현실에서는 이를 누리지 못하는 사회적 약자와 성소수자들을 위해, 26살의 동갑내기 세 청년이 모여 ‘인스팅터스’라는 소셜벤쳐를 창업했다. 그리도 이들이 내건 ‘누구나 안전하게 사랑할 권리가 있다’ 라는 슬로건을 현실화 시키고자 3년째 쉽지 않은 길을 가고 있다.
▶ 인스팅터스 공동대표이자 마케팅 책임자 박진아 씨
건강하고 안전한 성관계를 즐길 권리는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권리처럼 보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한국 사회에서 청소년들은 ‘콘돔은 성인용품’이라는 편견으로 구매조차 힘들고, 남녀 관계에 피임의 부담을 안게 되는 여성들은 주체적으로 자신의 몸에 맞는 피임을 선택하거나 참여하는 문화가 정착되어 있지 않다. 성소수자들은 사랑할 권리마저 인정되지 않는 게 현실이다. 이들을 위해 안전한 섹스를 할 수 있는 도구를 개발하고, 그 접근성을 높여주는 게 인스팅터스의 궁극적 목적이다.
인스팅터스는 영어의 Instinct(본능)와 라틴어 어미의 us(사람), 즉 본능적인 사람들이란 의미로, 사회적 맥락 안에서 왜곡된 성의 본래적 의미를 환기시키는 사람들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이들은 2014년에 “부끄럽지 않아요”라는 이름으로, 미성년자에게 콘돔을 무료로 보내주는 프렌치레터 프로그램으로 시작했다. 그리고 2015년에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개발된 비건 콘돔, 즉 친환경적이며 유해 화학성분을 제거한 ‘이브 콘돔’을 런칭했다. 올해 새롭게 나온 아이템 역시 친환경적이고 인체에 안전한 ‘이브 젤’(lubricant gel)이다.
사업 아이템 외에도, 최근에는 미성년자가 100원에 2개씩 구매할 수 있는 청소년전용 콘돔자판기를 만들어 화제가 되었다. 자판기를 통한 모든 수익금은 서울시립청소녀건강센터 ‘나는 봄’에 기부된다.
인스팅터스의 공동대표이자 마케팅 책임자인 박진아 씨와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블랙-앤-화이트 스트라이프 셔츠와 블랙 수트팬츠를 입고, 허스키한 목소리를 가진 그녀는 간략하고 무게감 있는 톤으로 대화를 이어나갔다.
“청소년전용 콘돔자판기는 프로모션으로 기획한 상품도, 사업화하기 위한 아이템도 아니에요. 소셜벤쳐로서 사회에 환원하는 우리가 선택한 방법이자 소셜 프로젝트인 거죠.”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벤딩머신이기 때문에 단가 100만원이 넘는 비용으로 직접 주문 제작한 제품이다. 거기엔 다음과 같은 위트 있는 문구가 적혀있다.
EVE Dispenser Instruction:
1. 본인이 콘돔이 필요한 청소년(만 19세 미만)인지 양심에 따라 판단한다.
2. 청소년이 아닌 경우, 콘돔은 성인용품이 아니라는 깨달음을 얻고 간다.
3. 청소년인 경우, 동전 투입 전 좌측면의 상품 품절 여부를 먼저 확인한다.
4. 100원 동전을 넣고 측면의 레버를 360도 오른쪽으로 회전한다.
5. 받은 콘돔을 원하는 때에, 원하는 사람과, 안전하게 사용한다 :D
* 명시적 동의(consent), 피임, 상호존중은 안전한 사랑의 필수적 3요소입니다.
▶ 청소년전용 콘돔자판기에 적힌 문구 ⓒ인스팅터스
원래 자판기를 배치하기로 생각한 이상적인 곳은 청소년들이 몰려있는 학원의 메카, 서울 대치동이었다. 또 PC방이나 노래방 근처도 고려했다. 그러나 대치동 근처는커녕 서울시청, 공공기관 등 어디서도 청소년전용 콘돔자판기를 설치할 수 있게 허락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절충한 방법이 섹스토이 가게 앞. 그나마 비치를 허용해 준 사장님들이 운영하는 가게들로, 현재 전국 네 군데, 서울 신논현동과 이태원동, 광주 충장로와 홍성에 설치되었다.
이에 대한 세간의 반응은 인스팅터스의 이브 브랜드에 대한 반응처럼 확연히 다른 반응으로 갈렸다. 좋아하는 사람들은 꼭 필요하고 당연히 보장되어야 하는 것인데 그렇지 못한 현실에서 신선한 방법으로 고민을 해결해주어 고맙다고 하는 반면, 반대하는 사람들은 청소년의 ‘문란한’ 성문화를 조장한다고 비난한다. 최근에는 성인들이 몰래 콘돔을 가져가는 일이 발생해 화제가 되었는데, 박진아 대표는 상기된 말투로 애로 사항을 호소했다.
“프랑스 같은 경우 대부분 국공립 고등학교에 콘돔자판기가 다 비치되어 있어요. 반면에 우리나라 같은 경우는 저희가 기계도 만들고, 콘돔도 제공하고, 설치도 하는데, 그 작은 공간 할애를 안 하는 사정인거죠… 반대하는 분들이 무료 콘돔 말고 청소년을 위한 성교육을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할 땐 회의가 들어요. 저희는 사기업이에요.”
사기업이라지만 분명 인스팅터스는 기존의 기업과는 많이 다르다. 물론 여느 스타트업처럼 7명의 소규모 팀으로 멤버들의 업무는 기본 서너 개의 여러 분야를 맡아서 하는 멀티테스크로, 회사 운영의 린(lean)한 특성은 비슷하다. 그러나 기업으로서 사회 문제를 풀어나가고 그로 인해 이익을 창출해나가는데 우선 순위와 목표를 두는데 있어서 일반 벤처기업과 비교해보면 느슨해 보이기도 하다. 비영리단체처럼 ‘사회환원’ 프로젝트에 주저없이 시간과 투자를 하기도 한다. 십대 성소수자 단체, 여성환경연대, 대학생들이 주최하는 페미니즘 행사 등에 참여했다.
▶ 인스팅터스에서 자체 계발한 이브콘돔체와 로고 설명 ⓒevecondoms.com
흥미롭게도 인스팅터스는 십대의 성문화를 위한, 미성년자들의 대변인 같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만, 90퍼센트가 넘는 이브 브랜드의 고객은 20-30대 여성이다. 한국의 젊은 여성들은(물론 남성들도) 실용적인 성교육을 받고 성에 대한 충분한 고민을 한 경우가 드물기 때문에, 피임 방법을 선택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인식과 환경이 부족한 편이다. 이런 현실을 개선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낀 젊은 여성들에게 인스팅터스는 영감의 대상이자 촉매제 역할을 한 셈이다.
일반 콘돔의 경우 ‘남성의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빨간색과 금색의 패키지 디자인, 003같은 얇은 두께만 강조하는 문구가 대부분이다. 또한 광고에서 그려지는 콘돔은, 특히 여성이 들고 다니거나 준비하는 것은 부끄럽고 껄끄러운 존재이다. 반면에 이브 콘돔은 ‘누구나 안전하게 사랑할 권리가 있습니다’라는 문구를 강조한다. 또한 여성의 입장에서 자신의 몸을 교란시킬 수 있는 기존 콘돔에 들어있는 화학성분에는 어떤 것들이 있고, 어떤 대체 천연성분을 사용하는지, 또 어떤 과정을 거쳐 제작되는지를 설명한다.
엄청난 시간과 투자를 들여 만든 제품이 소비자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으니 “운이 좋다”고 박 대표는 말했다. 또한 제품 출시 시기도 잘 탔다고 했다.
이브 콘돔이 출시되던 당시, 국내 콘돔 시장에서 점유율 1위를 차지했던 영국 브랜드 듀렉스는 가습기 살균제 사건의 최대 가해사인 옥시 레킷벤키저(Oxy-Reckitt Benckiser) 회사 제품으로, 소비자들의 불매운동의 대상이 되었다. 점유율 2위였던 일본 브랜드의 오카모토 역시 일제강점기 일본군 위안소에 콘돔을 공급했던 사실이 알려지면서, 올리브영 같은 헬스앤뷰티샵까지 판매를 중단하는 등 불매운동에 의해 타격을 입었다.
“핵심 성과 지표 같은 것으로 목표나 계획을 정하고 실행하나요?” 라는 질문에 박진아 대표는 “거창하게 계획한 건 없었어요. 누군가가 사용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시작했죠” 라고 말한다.
어찌 보면 나이브(naive)하면서도 이런 순수한 열정과 긍정적 마인드, 우선 실행에 옮기는 행동가(Doer)로서의 접근 방식이 인스팅터스가 쉬지 않고 지금까지 올 수 있었던 원동력인 것 같다. 또한 이들이 지향하는 ‘사회적 인식 변화’라는 막연한 목표는 애초에 수치적 평가가 불가능할 수 있겠다.
“처음 시작한 2014년만 해도 청소년과 콘돔이라는 단어를 같이 쓰는 일 자체가 굉장히 드물었어요. 그렇지만 온라인 매체에 칼럼도 연재하고, 십대들과 상부상조하면서 계속 활동을 하다보니까, 십대의 성에 관한 이슈가 양지화되는 게 느껴져요.”
▶ 청소년전용 콘돔자판기를 배경으로, 아이들과 함께 포즈를 취한 박진아 대표
로열티 높은 이브 브랜드의 소비자층, 커뮤니티에서 보여주는 좋은 반응들이 ‘잘하고 있구나’ 하는 확신을 주고, 계속 나아갈 수 있는 큰 힘이 되었다. 물론 박진아 대표에게서는 순수한 열정과 함께 현실에서 직접 구르고 부딪치면서 생긴 ‘맷집’에서 나오는 현실적인 면모도 보인다.
“소셜벤쳐로서 성공하는데 굳이 수치로 따지자면 저는 노력이 35%, 팀워크가 35%, 그리고 외부 요인이 30%라고 생각해요. 시기와 상황도 잘 맞아야 하죠. 저는 절대 ‘저처럼 노력하면 되요’ 이렇게 말할 수 없어요. 모든 노력이 그만큼 다 보상받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에요. 물론 저는 죽을똥 살똥 노력했다고 부끄럽지 않게 말할 수 있어요. 하지만 운도 많이 따랐다고 생각해요.”
외부 요인이 ‘운 좋게’ 작용했다고 해도 소셜벤쳐로서, 특히 음지에 있던 성문제를 다루는 기업으로 3년 넘게 용기와 인내 없이 달려오기 불가능했을 것이다. 힘든 상황이 올 때마다 어떻게 이겨내는지 물어봤다.
그러자 약간 울컥하며 박진아 대표는 2015년 말에 팀을 한번 떠난 적도 있다고 했다. 팀 멤버들이 각자 대출받아 시작한지 일 년이 넘도록 출시되기로 한 첫 제품 출시는 계속 늦춰지고, 수입 한 푼 없이 일에만 매진하던 때였다.
다시 돌아오게 된 계기는? 박 대표의 직설적인 성격만큼 단순명료했다.
“한 3-4개월 일상으로 돌아가 보니 그냥 다시 이 일이 하고 싶었어요. 나 아니면 안 될 것 같았고,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우리의 비전, 그리고 그 방식이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에 힘든 일도 털고 일어나서 계속할 수 있는 거죠.”
다음 사업 아이템으로 생리컵(menstrual cup)을 준비 중이다. 콘돔과 다르게 생리컵은 아직 한국 시장에 도입조차 되지 않아서 임상실험부터 식품의약품 안전처에 허가 제품으로 등록까지 모든 단계를 직접 해내야 하는 프로젝트이다.
또, 콘돔은 성인용품이라는 잘못된 인식을 뿌리 뽑기 위해 헌법소원도 제기했다. 현재 여성가족부에서는 일부 특수 콘돔을 청소년 유해물건으로 지정하고, 자위기구와 함께 이를 판매하는 곳에 청소년 출입을 금지하고 있다. 이 고시가 ‘개정’이 되면 청소년에게 콘돔을 팔지 않거나 성인용품점의 출입을 금지하는 행위들의 법적 근거가 사라지는 것이다.
최근에는 신입사원과 인턴을 채용하기도 했다. 인스팅터스의 멤버가 되는 조건은 역시 단순명료했다.
“우리와 함께 즐겁게 일할 수 있는 사람은 ‘키보드 워리어’가 아니고, 페미니즘을 지지하는, 즉 성과 관련된 모든 차별을 반대하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인 거죠.”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필자 소개] 강예원 님은 서울에서 외신기자로 활동하였고, 현재 PLATOON이라는 언더그라운드 예술문화를 다루는 잡지와 에이전시에서 에디터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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