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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스럽게 놓고” 바라본 여자사람, 엄마
전지의 <가족구술화 엄마편 ‘있을재 구슬옥’> 

 

 

꽃샘추위가 찾아온 날, 옷깃을 꽉 여미고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을 찾았다. 철공소에서 흘러나오는 기계 소리와 쇳가루 냄새를 맡으며 골목을 따라 돌아 돌아간다.

 

▲ 전지의 <가족구술화 엄마편 '있을 재 구슬 옥'>  © 일다 
 

문을 열고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면 아늑한 느낌의 전시장이 나온다. 이자람과 소규모아카시아밴드의 잔잔한 노래에 몸도 풀리고 마음도 노곤해진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여느 집 앨범에도 한 장씩 들어있을 법한 사진들이 연필로 그린 그림이 되어 걸려있다. 결혼식 사진부터 해외여행 가서 부부가 코끼리 타고 있는 사진, 놀러가서 꽃밭에서 찍은 사진, 유치원 생일파티에서 한복을 입은 딸과 엄마 사진 등등.

 

사진 옆에는 글귀가 적혀있다.

 

“니 할머니네 바닷가야. 나는 바다를 안 좋아해. 바다에 추억이 없어. 한번이라도 바다에 가서 맘 편히 논 적이 없고…… 밥, 그 놈의 밥.”

 

“난 결혼 초반부터 말도 낳고 그래, 지금도.(애교가 많다는 뜻) 근데도 니 아빠는 아직도 ‘여자가 말이야...’ 그놈의 ‘여자가...’. ‘여자가 어떻단 말이야?!’ 그랬어, 내가. 자기가 하는 건 생각 안 하고 나보고 나긋나긋하게 안 한다고.”

 

꾹꾹 눌러쓴 일기에는 “난 명석해”라는 ‘자뻑’ 글귀부터 자식들을 걱정하는 마음, 시어머니에 대한 불만, “여봉”과 외식한 얘기들이 빼곡하다.

 

엄마에게 ‘되돌아보는’ 시간을 주다

 

작가 전지(34세)의 전시 <가족구술화 엄마편 ‘있을재 구슬옥’>이 ‘공간 사일삼’에서 2월 28일부터 3월 9일까지 열렸다. 이 전시는 문래동 북카페 ‘치포리’에서 3월 18일까지 이어질 예정이다.

 

전시는 작가가 엄마 재옥(58세)씨의 구술사(개인이 기억하는 과거 사건과 행위, 그에 대한 해석을 대화와 육성 구술을 통해 기록으로 채록하는 사료수집 방법)를 그린 그림책을 발간하는 과정에서 열리게 됐다.

 

재작년 엄마 재옥씨가 방문 요양보호사 일을 시작한 후, 치매 걸린 할아버지 얘기, 까탈스러운 할머니 얘기를 재미있게 쏟아내는 걸 보고, 작가는 노트를 한 권 건넸다. “요양보호사 일지도 쓰고, 시어머니 험담도 적고, 힘든 마음을 덜어낼 겸” 쓰기 시작한 글. 2년간 5권의 노트를 썼다.

 

         ▲  문래동 '공간 사일삼'에서 열린 전시 <가족구술화 엄마편 '있을 재 구슬 옥'>   © 일다 
 

집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기록하는 것을 좋아했던 딸 전지 작가는 앨범 속 엄마 사진을 몇 장 골라 그리기 시작했고, “그 맛이 너무 좋아서” 작업에 푹 빠져들었다. 엄마랑 같이 앨범을 보면서 엄마 이야기를 듣고 녹음하기 시작했다.

 

“제가 지금 서른넷인데, 엄마가 한창 고생했던 나이가 저보다 어릴 때더라고요. 엄마는 스물 하나에 결혼했으니까. 저보다 어린 친구가 억척스럽게 산 얘기를 들으니까 재미있었어요. 엄마가 여자사람으로 보이면서, 꽤 많은 이야기의 중심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빠를 움직이기도 하고, 저의 심성을 만들어줬고.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저와 연결시켜주는 것도 엄마였어요.”

 

인생의 배경 같았던 엄마가 주인공으로 걸어 나오는 순간이었다.

 

8개월 동안 연필로 그린 그림들을 모아 책을 만들기로 했다. 책은 연필 그림, 재옥씨가 쓴 생활글, 구술사로 구성했다. 가제본을 해서 재옥씨와 같이 편집을 했다. 그리고 이 책의 인쇄비를 마련하기 위해 후원해줄 사람을 모으는 과정에서 이번 전시를 하게 된 것이다.

 

30년 넘도록 몰랐던 이야기
  

전지 작가는 이번 작업을 하면서 30년 넘도록 몰랐던 엄마의 역사를 알게 됐다고 한다.

 

재옥씨는 남편과 약혼을 한 후에 임신을 했는데, 아기를 낳기 전에 결혼식을 올리고 싶어 만삭의 몸으로 신부가 됐다. “숨을 크게 쉬면 터질 수도 있는”, 호치케이스로 겨우 여민 웨딩드레스를 입었다.

 

하나 더. 전지 작가는 자기보다 11살 어린 남동생이 자연스럽게 생긴 줄 알고 있었지만, 아니었다. 장손을 보길 원하는 할머니의 압박이 심했던 것. 재옥씨는 아들 낳게 해준다는 온갖 것들을 따라 해보기도 했다. “자기애가 강한” 시어머니 수발을 드느라 재옥씨는 마음고생이 심했다.

 

어쩌면 특별할 것도 없는 한 여자사람의 역사가 때로는 옅게, 때로는 진하게 연필심으로 채색되어 있다.

 

▲ 전시 관람하는 재옥씨  ©'전지의 작가 시점' 페이스북

 

 

 

재옥씨의 노트에는 “나는 지금 글을 쓰고 있다”, “난 지금 침대에서 글을 쓰고 있다”, “내 딸이 공책을 사줘서 글도 쓴다”, “나는 글 쓰는 여자다” 하는 말이 반복해서 등장한다. 글 쓰는 자신이 만족스러웠나 보다.

 

딸은 엄마가 전시나 책에서 사람들에게 자신의 이야기가 공개되는 걸 꺼려 할까 봐 걱정했지만, 오히려 재옥씨는 긍정적이었다.

 

“아빠 밑에서 조력하는 역할만 했고, 자식들도 늘 서운하게 하는 스타일이라…. 인정을 받았던 적이 없기 때문인 것 같아요.” 

 

평소에 서로 얘기도 잘 들어주고 집안일도 같이 하며 쿵짝이 잘 맞았던 모녀는 서로에 대한 애정이 컸다. 하지만 엄마의 애정이 부담으로 다가올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일부러 엄마를 냉소적으로 대하기도 했다.

 

그 마음을 딛고 이번 작업을 시작했지만, 작업의 과정은 여전히 그런 마음을 확인하게 되는 시간이기도 했다.

 

“엄마가 엄마 자신을 미화하는 것 같은 얘기를 할 때는 듣기 싫어서 녹음기를 몰래 꺼버린 적도 있어요. 전시를 보러 와서도 엄마는 모든 그림이 ‘딸이 나한테 사랑을 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시더라고요.”

 

어린 시절엔 “엄마의 인권 신장에 앞장섰다”고 말할 정도로 아빠에게 따지기도 많이 했다. 밥상에서 엄마에게 심부름 시키는 아빠한테 “손발이 있으니 직접 갖다 드세요” 한 적도 있다. 하지만 “내가 내 남편한테 떠다 준다는데 네가 왜 그러느냐”는 엄마를 보며, 어느 순간 오지랖 떨기를 그만두었다. 엄마에 대한 그림을 딸의 사랑이라고 받아들이는 것도, 그냥 엄마가 보고 싶은 대로 보도록 놓아드리기로 했다.

 

“좀 건조하고 웃픈” 가족드라마

 

“전시를 보러 오시는 분 열분 중에 두세 분은 눈물을 흘리시더라고요. ‘어, 우리도 이런 사진 있는데’ 하면서 자기 가족을 떠올리는 것 같아요. 억지로 감동을 주려고 한 건 아니에요. 우리가 가족을 떠올리면서 감동만 느끼는 건 아니잖아요. 가족을 너무 미화하거나 애정을 담지는 않고, 그냥 가족을 ‘정성스럽게 놓고’ 보고 싶은 마음으로 그렸어요.”

 

작가는 “딸로서 엄마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보았던 경험은 또 하나의 내가, 다른 세상에서 살았던 이야기를 듣는 것 같은” 경험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곧 나오게 될 책은 “대단한 스토리를 가진 건 아니지만, 감칠맛 나는 집안의 대소사를 담은 좀 건조하고 웃픈(웃기면서도 슬픈) 드라마”라고 소개한다.

 

전지의 가족구술화는 <아빠 편>으로 이어질 예정이다. 작가는 “아빠가 분명히 미화하고 거짓말을 할 것”이라고 말하며 웃는다. 아빠는 이번 전시에서 드러난 가족 얘기를 남들이 흉볼까 봐 걱정한다. “왜 집의 우환을 팔아서 전시를 하느냐”며, 제목도 <어머니의 사랑>, <모녀의 애정> 같은 걸로 하라고 잔소리를 했다.
 

         ▲  초상화를 그려주는 이동 상점 '전지의 작가 시점'  ©'전지의 작가 시점' 페이스북 페이지 
  

전지 작가는 평소에 <전지의 작가 시점>이라는 이동 상점을 하고 있다. 자전거에 각종 도구를 넣을 수 있는 수납공간을 달아, 어디서든 자전거를 세우고 도구들을 펼치면 상점이 된다. 만화책도 팔고 초상화도 그린다.

 

생계를 위해 식당에서 서빙 알바도 자주 하는 작가는 ‘문래동 빠른 손’이라는 별명도 갖고 있다고.  나랑 기자
 

* 북카페 치포리(3월 11일-18일까지 전시): 서울시 영등포구 문래동 3가 58-84

* 전지의 아트북 프로젝트 소셜펀딩: https://www.tumblbug.com/ko/famillydrawingbook

* <전지의 작가 시점> 페이스북 페이지: https://www.facebook.com/viewpointofA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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