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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 안에 내 가게가 있다는 게 좋아
<망원시장 여성상인 구술생애사 작가들의 이야기> 문양효숙 작가
※망원시장 여성상인 9명의 구술생애사가 담긴 책 <오늘은 맑음>을 기록한 작가들의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필자 문양효숙씨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기록하고 책을 만드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가끔, 마음이 한없이 가라앉을 때, 시장에 갔다. 무언가를 사고파는 분주한 움직임과 손님을 끌기 위한 상인들의 우렁찬 목소리 사이를 천천히 걷노라면 펄떡이는 에너지가 느껴졌다. 삶의 최전선에서 자신의 힘으로 수레바퀴를 굴리는 사람들만이 지닌 강인한 에너지, 백화점이나 마트에서는 느낄 수 없는 ‘제대로 살아있는’ 느낌이었다. 때로는 너무 강하고 거칠어 압도될 때도 있지만, 시장의 생기는 펄 속으로 가라앉는 듯한 삶을 깨우곤 했다.
그런 에너지가 만나고 모여 있는 공간에서 삶을 만들어 온 여성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집과 그곳에서 사는 사람이 닮듯이, 시장이라는 공간과 그들은 닮았다. 적극적이고 활기찼으며 하루하루의 삶에 더없이 충실했다.
▶ 망원유통 박미자 사장 (사진: 이경훈 작가)
옛날과자를 파는 망원유통 박미자 사장과 만나다
1961년생으로 올해 58세가 된 망원유통 박미자 사장은 망원시장의 왕언니다. 망원시장에서 장사를 한지 23년차인 박 사장은 시장 여성상인회 회장을 수년간 하면서 말 많고 탈 많은 시장 일들을 도맡아 했다. 차분하면서도 단단한 성품에 통이 크고 원칙이 분명해서 상인들 사이에서 중심을 잡기도 했다.
망원유통은 옛날 과자를 파는 가게다. 강정, 전병, 고구마 말랭이에 한과와 각종 사탕까지 다양한 간식을 근으로 판다. 그런데 가게 이름이 ‘망원 전통 과자점’도, ‘망원 옛날 과자’도 아닌 망원유통이다. 게다가 10평이 채 안 되는 가게 안에는 과자를 파는 곳에 있을 법하지 않는 대형 냉장 설비도 들어와 있다. 과자 매대 한 귀퉁이에 ‘하림 닭’이라는 현수막 조각도 보인다. 15년 넘게 닭을 팔다 업종을 변경한지 올해로 5년째다.
“닭이 몇 년간은 정말 잘됐어. 하루에 몇 백 마리 팔았으니까. 여름 복날 가까울 땐 하루에 몇 천 마리도 팔았지. 그런데 그때 AI(조류 인플루엔자)가 오기 시작했어. 처음에 왔을 땐 하루에 한 마리도 안 나갔어. 진짜 무서울 정도였지. 근데 그게 매년 오는 거야. 요새야 방송에서 끓여먹으면 된다고 하니까 손님이 뚝 끊어지진 않지만, 그 때 정말 뚝 끊겼어.
그래서 다시 고민을 했어. AI가 아니라도 닭은 여름 장사야. 겨울엔 주춤해. 또 이 동네 사는 사람이 차츰 젊은 사람들로 변하고, 외식문화가 되면서 집에서 뭔가 해 먹는 게 일반적이지 않게 된 거야. 그때 신랑이 전통과자를 해보라고 했어. 내가 전통과자를 누가 먹냐고 그랬지. 한 2년을 망설였어. 나는 손을 안 대 본거라 자신도 없고, 전통과자란 게 과연 팔릴까 불안했어. 그런데 망원시장이 달라졌어. 망리단길이 생기면서 3-4년 전부터 젊은 사람들 데이트 코스가 됐거든. 너무 붐비니까 장을 보는 주부들은 시장에 잘 안 와. 사람들한테 치인다고. 그러니까 닭도 덜 팔리는 거야. 옷가게, 양말가게 하던 사람들도 이제 다 먹는 걸로 업종을 바꾸지. 새로 들어와도 다 먹는 거야. 사실 시장으로 생각하면 가게가 다양하게 있는 게 좋아. 이것도 있고 저것도 있고 그런 게 좋지 너무 먹는 것만 있으면 좀 그래.”
첫 장사는 닭이 아니라 옷이었다. 박 사장은 스물다섯 살 무렵 이대 앞에서 남편과 함께 장사를 시작했다. 남편은 노점에서 옷 장사를, 박 사장은 작은 식품가게를 했다. 구청에서 단속이 뜨면 물건까지 모두 가져가버렸다. 1986년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노점 철거가 심했던 시기였다.
“구청에서 단속이 나오면 허구한 날 천막도 찢고 옷도 다 가져가는 거야. 단속만 뜬다고 하면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그랬어. 기본 일주일에 한두 번은 단속이 떴거든.”
안정감이 필요했다. 당시 주말에 장사를 하던 망원동으로 자리를 옮겨 꽤 큰 권리금을 주고 가게 자리를 잡았다. 30대 중반에 자리 잡고 시작한 옷 장사는 꽤 잘됐다. 여대 앞에서 장사를 해 본 까닭에 옷을 보는 감각도 있었고 자리도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자리를 잡은 지 3년 만에 IMF 금융위기가 터졌다.
“사람들이 옷을 안사는 거야. 살아야 하니까 먹을 건 사는데, 옷에는 돈을 안 쓰는 거지. 당시에 여기 닭이 두 집 있었는데 잘 됐어. 근데 그때 두 집이 갑자기 없어진 거야. 그래서 생전 해보지도 못한 닭을 해 봐야겠다 했어. 주위에서는 옷만 만지던 사람이 그걸 할 수 있겠냐고 했는데, 나는 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어. 근데 또 마음이 너무 서글프기도 했어. 자신이 있기도 하고, 동시에 과연 될까란 불안감도 있고. 옷이랑 닭은 느낌이 좀 달랐어. 그렇게 서글프더라고.”
망원유통의 업종 변경 역사 안에는 우리 사회의 굵직한 사건들이 들어있다. 1986년 아시안 게임, 1997년 IMF, 그리고 2003년은 국내에 최초로 AI가 발생한 해였다. 한 개인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변화가 닥칠 때마다 박미자 사장은 그 파도에 몸을 실었다. 파도를 피해 숨을 곳도 없었고 부서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무사히 바다를 건너려면 한탄이나 절망을 할 새가 없었다.
“그게 누구 잘못도 아니고, 어딜 탓할 수도 없었지. 사연이 참 많은데 남들한텐 어떻게 표현 말할 수가 없어. 내가 남들한테 힘든 거 표현하는 걸 제일 싫어하거든. 표현을 안 해. 표현한다고 남들이 대신해줄 수 있는 건 아니잖아. 어차피 내가 헤쳐 나가야 하니까.”
▶ 망원유통 박미자 사장 (사진: 이경훈 작가)
‘휴가도 못 써, 가게 문을 어떻게 닫겠어’
구술 작업을 한 시간은 주로 손님이 비교적 뜸한 정오에서 오후 4시 사이, 장소는 가게 한 구석이었다. 다른 사람들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공간에서 더 오랜 시간 인터뷰를 진행하고 싶었지만 쉽지는 않았다. 하루 열두 시간 가게를 여는 박 사장에게는 여유 시간이 많지 않았다.
“10시에 와서 과자 밖으로 다 내 놓는 게 한 시간 정도 걸려. 그럼 11시 정도에 본격적인 장사를 시작하지. 저녁엔 9시 정도 정리 시작하고 10시에 문을 닫아. 요즘은 늦게까지 사람이 많거든.”
하루 열두 시간 한 공간을 지킨다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박 사장은 “처음 시작했을 때에는 밥 먹는 것도, 화장실 가는 것도 맘 편히 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화장실에 제대로 가지 못해서 방광에 탈이 난 적도 있었다. 몸이 아파도 가게를 비운다거나 쉰다는 생각을 해보지 못했다.
“몸 아플 땐 가게 여는 게 너무 힘들어 일단 가게 문을 열고 그냥 아픈 거야. 닭 할 땐 칼을 쓰니까 손목이 너무 아팠어. 몸이 힘들어서 편하자고 과자를 선택한 면도 있어. 근데 반제품(*유과는 가게에서 직접 물엿을 녹여 고물을 묻혀야 한다)을 하면서 이게 더 심해지는 거야. 명절 땐 손님이 어마어마하거든. 그러니까 손끝이 저리고 너무 아프더라고. 병원을 다녀 봐도 뾰족한 수는 없고 수술해야 한다고 하는데 하고 난 다음 쉬어야 하니까. 가게 맡아서 할 사람도 없고.
다행히 건강 체질이라 지금까지 심하게 아픈 적은 없는데 작년에는 힘들었어. 1월 1일부터 내가 아팠거든. 그 와중에 엄마가 갑자기 아프셔서 병원에 들어가셨는데 돌아가셨지. 병원 다녀와서 울고 가게 열고를 반복했어. 장사 하면서 그런 적이 없는데 한 달 가까이 화장을 못했어. 앉아서 찍어 바를 힘도 없더라고. 하루 열고 하루 닫고를 며칠 해봤어. 집에 있으면 가게를 할 수 있을 거 같아. 그래서 열어. 도저히 못하겠어. 그래서 다시 닫아. 평생을 장사하면서 처음 그래 본거야. 병원 가서 링겔 맞고. 1월, 2월 두 달 내내 그렇게 아팠어. 평생 아픈 걸 다 아픈 거 같았어. 거기다 엄마 장례도 있었고. 몇 달 동안 정신을 못 차리게 아팠어. 병원에서 영양주사를 그렇게 많이 맞아본 것도 처음이고. 뭘 먹지를 못했어. 지금도 일을 조금 하면 바로 힘들어.”
휴가나 여행도 쉽지 않았다. 박 사장은 작년에 난생 처음 해외여행을 다녀왔다.
“요즘은 해외여행 많이 가잖아. 그럼 막 열흘씩 빼야 하는데, 가게를 어떻게 열흘씩 닫겠어. 그럴 땐 그만둘까 싶지. 해외여행을 가본 적이 없어. 그 아쉬움이 약간 있어. 지금 친구들 보면, 몇 개국은 다녀오더라고. 그런데 우리는 우리 신랑이랑 나랑 두 가게가 동시에 닫아야 하잖아. 엄청나게 깨지거든. 또 시장이란 데가 내 맘대로 닫기가 좀 그래. 내가 문을 닫으면 옆 가게도 피해거든. 사람이 흘러가니까 같이 열어놔야 좋지. 그러니까 되도록 안 닫으려고 해. 해외여행을 작년 4월에 처음 다녀왔어. 나흘이나 가게 문을 닫고. 시장에서 한 달에 5만원씩 곗돈을 부었거든. 아홉 명이 갔는데 재밌었어. 진짜 큰맘 먹고 간 거지.”
몇 년 전부터는 한 달에 두 번 쉬기로 했지만, 박 사장은 “쉰다고 쉬는 게 아니다”라고 말했다. 우선 상인회 일이 있다. 망원시장 상인회는 규모가 꽤 크다. 사람들을 많이 만나야 하고 따라서 술자리도 많다. 예전엔 일주일에 일곱 번 술자리가 있었다. 사람을 좋아해서 모임도 좋아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몸이 힘들어서 다 나가지는 못한다. 이런저런 상인회 행사도 준비할 게 많다.
“내가 상인회 일을 10년 좀 넘게 한 거 같아. 시장에 큰 일이 있으면, 예를 들어 야유회 같은 게 있으면 그 전날까지 굉장히 긴장이 돼. 100인분 넘는 음식을 다 해야 하니까. 그런 거 준비할 땐 먹어도 자꾸 체하고 그래. 나는 뭘 하든 확실하게 하고 싶은 그런 게 있어.”
▶ 망원유통 박미자 사장 (사진: 이경훈 작가)
효자상을 탄 집안의 맏딸로 태어나…
집안일도 박 사장의 몫이다. 용문 시장에서 반찬과 두부 등을 파는 가게를 운영하는 남편과 일을 마치는 시간은 비슷하지만 대부분의 집안일은 박 사장이 한다. 그나마 지금은 두 아들이 모두 자라서 조금 여유로운 편이지만, 한창 아이들이 자라던 시절에는 해도 해도 언제나 일이 넘쳤다. 박 사장은 자신의 “완벽주의 성격 때문”이라고 말했다.
“내가 어떻게 살았냐면, 1년에 제사를 열 번 지냈어. 시부모님에서 시증조 할아버지, 시증조 할머니까지 제사를 했거든. 그럼 1년에 여덟 번이잖아? 거기에 추석이랑 설 명절 두 번. 요새 사람들은 간편하게 지내기도 하던데, 우리는 꼭 11시 50분이 되어야 시작해. 12시를 넘겨야해. 고모나 고모부들은 다음날 출근도 해야 하니까 좀 빨리 지내자고도 하는데, 그렇게 안 해. 제사 끝나는 시간이 12시가 넘었어. 제사 지내고 먹고 나면 보통 새벽 2시, 나는 치우고 나면 3시. 거의 밤을 샜지.
또 명절에는 시장이 엄청 바쁘거든. 밤늦게 일이 끝나잖아. 그러면 나는 일 끝내고 들어가서 제사 음식을 장만하기 시작해. 그리고 새벽에 제사를 지내. 어느 날은 제사상을 물려놓고 식구가 다 곯아떨어져. 지금까지 그랬어. 나 진짜 일 많이 했어. 친구들은 제사 음식 사다가 쓰라고도 하는데 내가 싫어. 평생 사 버릇을 안 해서 그런가. 마음이 불편해. 지금까지 나물 하나 사서 쓴 적이 없어. 조상한테 올리는 건데 그렇게 하면 굉장히 미안해. 내 자신이 용납이 안됐어. 나는 고모들이 부엌에 왔다 갔다 하는 것도 싫어해. 설거지 하는 것도 싫고. 절대 안 시켜. 내가 할 일이다 싶어. 그냥 와서 먹고 가는 게 좋지. 진짜 완벽주의야. 내 몸을 내가 혹사시키는 거지.”
“집안일도 완벽해야 하고, 가게랑 상인회 일도 완벽해야 하고. 친구관계에서도 욕먹는 거 싫고. 그러니까 내가 힘들지. 아는데도 그게 안 되더라고. 생각해보면, 내가 나를 들들 볶았구나 싶기도 한데, 여유가 없기도 했어. 나는 몸에 뭐가 배어있냐면, 이렇게 가만히 앉아 있으면 불안해. 몸을 계속 움직여야 맘이 편해. 이렇게 앉아있는 자체가 불안해. 일하는 게 훨씬 즐거웠다니까. 근데 이제 나이를 먹어서 몸이 좀 아프니까, 아차 싶은 생각이 드는 거지. 나이 먹는다는 게 참 그래. 아프면 나만 손해잖아.”
박미자 사장은 자신의 ‘완벽주의’에 대해 “타고난 성격도 있지만, 어려서부터 보고 배운 영향이 큰 것 같다”고 했다. 박 사장은 충청북도 음성군 맹동면에서 2남 2녀의 장녀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저녁마다 한 쪽 다리가 없는 할머니를 업고 마실을 다녀오게 했다. 부모님은 군에서 주는 효자상을 탔는데, 박 사장은 “부모님 때문에 내가 행동을 막 하기 어려운 면이 있었다”고 말했다.
“시골에서는 욕먹을 짓을 하면 엄마 아버지 욕을 먹인다고 생각해. 동생들도 그렇지만 나는 장녀라 더 그런 마음이 컸던 거 같아. 맏이라는 그런 게, 있긴 있어. 나는 사람이 도리를 지키는 게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해. 윗사람 아랫사람 챙길 줄 알아야 해. 돈보다 그게 우선이야. 우리 엄마 아부지가 그걸 가르쳐주셨지.”
박 사장의 친정도 종갓집이었다. 1년에 제사가 열 번이 넘었다. 결혼 후 제사가 많다는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익숙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여간해서는 화를 내거나 힘든 내색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막상 결혼을 앞두고 남편과 고향 집에 갔을 때는 “가진 거 없는 사람은 괜찮은데 제사가 그렇게 많아서 어떻게 하려고 하냐”고 걱정스러운 마음을 드러냈다.
충청북도 제천이 고향인 남편은 시누이가 네 명 있는 집의 5대 독자였다. 열여덟 살(1978년)에 서울에 와서 일한 첫 직장에서 만났고, 오래 만나다 스물여섯에 결혼했다. 첫 아이는 어렵게 낳았다. “이대 앞에서 장사를 하던 시절 몸이 힘들어 아이를 두 명 잃었고, 이후에는 아이가 잘 생기지 않았다”고 말했다. 박 사장은 아이를 낳으려고 “그야말로 좋다는 건 다 먹고 좋다는 데 다 쫓아다녔다”고 했다.
“부모는 안 계셨어도 그쪽으로 외삼촌, 시이모님들 계시니까 명절에 가면 한 소리씩들 하시는 거야. ‘너는 5대 독자 집에 시집을 와서는…’ 막 이런 말. 정말 너무 싫은 거야. 그런 말을 또 신랑 없을 때, 부엌에서 일할 때 하시지. ‘넌 애 언제 갖니?’ 이런 말 자체가 너무 싫었어. 어른들이라 어떻게 내색도 못했지. 어렸을 때 우리 엄마가 나랑 내 동생 딸 둘을 연달아 낳고 할머니한테 무슨 속옷을 입으면 아들 낳는다더라, 닭 뭐를 먹으면 아들을 낳는다더라, 이런 말을 들었어. 그땐 당연한 걸로 받아들였는데, 내가 결혼해서 아이가 잘 안 생기니까 그런 생각 들더라고. ‘엄마도 우리 둘 낳아놓고 서러웠겠다.’”
▶ 망원유통 박미자 사장 (사진: 이경훈 작가)
육십을 앞두고, ‘지금이 참 좋다’
많은 사람이 내 집을 마련했을 때 갖는 어떤 안정감을, 박 사장은 어린 두 아들과 제사를 지낼 때 느꼈다.
“나는 ‘틀’이 없어서 평생 그 틀을 만드느라고 애쓴 거 같아. 완전히 제로에서 시작해서 집을 산거라 기분이 좋긴 했지만, 그런 틀이 생겼다고 느낀 건 내 집이 생겼을 때가 아니었던 거 같아. 언제였냐면, 아이들이 좀 자라서 술 따르는 걸 배우고 신랑이랑 애들이랑 세 명이 제사 지내고 나는 밖에 있을 때였어. 그 때 ‘아, 우리도 틀이 생겼구나’ 느꼈지. 처음엔 제사를 신랑이랑 나랑 둘이 지냈거든. 또 독자 집안에서 아들을 낳았다는 게 나도 든든하잖아. 돈이 없어서 그렇지 어느 정도 틀은 만들어진 것 같았어.”
집 대출금과 가게 빚을 모두 다 갚은 뒤, 박 사장은 거금을 들여 남편이 젊어서부터 갖고 싶어 한 할리 데이비슨 오토바이를 샀다. 남편에게 “빚이 하나도 없으면 그때 사주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자신은 특별히 갖고 싶은 게 없었다.
“막 뭘 원했으면 그거 샀겠지. 그런데 그런 게 없어. 저 사람이 뭘 샀으니까 나도 뭘 하나 사야지 그런 게 아니라. 나도 열심히 살았지만 남편도 열심히 살았으니까, 저 정도는 해줘도 되지 않겠나 싶었어. 신랑의 만족을 내가 더 편안하게 생각하는 거 같아.”
자신에게 주어진 매 순간에 더없이 충실했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사람이었다. 크게 바라는 게 없는 건 주어진 것 이상 욕심내지 않는다는 삶의 태도 때문이기도 했다.
“나는 내 현실에 맞춰서 살아가는 사람이야. 없으면 안 쓰고 있으면 맛있는 거 해먹고 남한테도 베풀고 그런 사람. 나한테 있는 만큼만 생각하니까 편해. 주어진 것 이상으로 뭔가를 해야지 하면 머리 아프잖아. 난 있는 만큼만 생각하고 살아.”
박 사장은 곗돈이 ‘터지고’, 현금 몇 백만 원이 들어 있는 지갑을 날치기 당하고, 이자율 20% 넘는 일수를 찍으며 장사를 하고, 미처 수금을 못한 장부를 몇 년씩이나 안고 살았던 이야기를 담담하게 하면서 “지금이 제일 편하다”고 말했다.
“생각해보면 지금이 내 생애 최고로 편한 때인 것 같아. 내가 뭘 안했다고 뭐라고 하는 사람도 없고, 애들도 다 커서 자리 잡았고, 안정화 된 게 느껴져. 돈도 뭐, 그냥 밥 먹을 정도는 되고. 쉰 넘으면서는 내 나이에 밥 먹으면 나갈 데 있다는 게 그렇게 좋았어. 친구들은 ‘내가 지금 나가서 뭘 하겠어’ 그러거든. 내 가게가 있다는 거, 이런 공간이 있다는 게 좋은 거 같아. 40대 때에는 ‘내가 장사는 왜 하나. 여기서 뭐하는 건가’ 그런 생각으로 한참 힘든 적도 있었거든. 이제 애들이 다 크고 집안이 편안해지니까 ‘아, 지금이 참 좋다’ 이런 생각을 많이 해.”
※ 덧붙이는 이야기
<오늘은 맑음> 책이 나온 뒤, 뒤풀이를 겸해 모인 자리였다. 가게 문을 닫기 위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던 박미자 사장은 웃으면서 아쉬움을 토로했다.
“내가, 말 못 한 게 많아. 아직은 남편도 있지, 시댁 식구들도 있지. 다들 아직 얼굴 보고 사는데 어떻게 다 말하겠어.”
이 말을 듣고 곁에 있던 최현숙 선생은 “여든 넘어서 한 번 더 합시다. 그땐 걸리는 것도 없고 못다 한 말 다 말할 수 있어요.” 라고 말했다.
세상에 나온 삶의 이야기는 자신에게 더는 체기가 남아있지 않은 것들이리라. 하지만 삶에는 세상의 시선이나 목소리에,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게 충분히 소화되지 않은 부분들도 여전히 있다. 완전히 분해되어 몸과 영혼에 녹아들어간 삶은 어디까지일까. 들을 때마다 그 보이지 않는 경계에 조심스럽게 닿고 싶었다. 동시에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는 날이면 어쩔 수 없이 묻게 되는 질문. 나는 지난 삶을 어디까지 소화해내었나.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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