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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성’과 ‘글쓰기’의 관계를 모색하다
82명의 동서고금 여성작가 작품을 담은 [와세다문학 여성호]
작년 9월, 일본에서는 [와세다문학 증간 여성호]가 나오자마자 큰 반향이 일었고 그 여운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흰 종이에 페일핑크로 쓰인 ‘Waseda Bungaku’라는 레터링, 숲 속에서 여유롭게 책을 읽는 여성이 그려진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표지를 열면, 556페이지에 달하는 분량 안에 82명의 동서고금 여성작가들의 작품이 담겨있다.
<“어차피 그런 거지” 그렇게 말하며 당신에게 뚜껑을 덮으려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아직도 그런 소릴 해?” 하고 웃으며 당신에게 등을 돌리는 사람들에게, 부디 “이건 단 한 번뿐인 제 삶의 진짜 문제입니다”라고 표명할 용기를. 그것이 진짜 왜인지 잘 알 수 없는 구조인 한 번뿐인 ‘삶’과 ‘죽음’처럼 아직 아무도 알지 못하는 ‘여성’이 있습니다. 아직 이야기되지 않은 ‘여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말과 이야기가 건지지 않았던/못했던, 목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살고 있는/살았던 ‘여성’이 있습니다. 그와 함께 ‘이야기된 적 없었던, 여성 이외의 것과 사건’을 비춥니다.>
-와세다문학 여성호 권두언 중에서
가와카미 미에코 작가 “이것이 내 인생의 진짜 문제”
평소 문예지를 찾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지만, [와세다문학 여성호]는 발매되자마자 순식간에 매대에서 사라졌다. 와세다문학 시리즈 중에서 이례적으로 증쇄에 들어갔다. 여성호를 펴낸 책임편집자는 일본의 권위 있는 문학상인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한 가와가미 미에코(1976년 오사카 출생) 작가다.
“큰 반응을 얻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이런 걸 읽고 싶었다, 읽길 잘했다고 말씀해주셨어요. 문학과 멀어져 있었는데, 매일 밤 잠들기 전에 한 작품씩 읽고 있다는 분도 계셨습니다.”
▶ [와세다문학 증간 여성호] 표지. 책임편집 가와카미 미에코, 발행 와세다문학회, 발매 치쿠나쇼보.
시를 비롯해 아쿠타가와상 수상작가인 츠무라 기쿠코의 신작 소설, 논고, 일본어로 처음 번역된 버지니아 울프의 단편, 한국 아티스트 이랑과 나이지리아 이보민족 출신 마만다 아디체의 에세이, 가와카미 편집자가 직접 현대어로 번역한 히구치 이치요의 <섣달 그믐>, 가와카미 편집자와 기리노 나츠오 작가의 대담…. 다양한 작품이 그려내는 여성의 욕망, 삶의 어려움, 기쁨, 나이 듦, 섹슈얼리티와 노동.
“이것은 단 한 번뿐인 내 인생의 진짜 문제들이다.” 책장을 넘기다보면 때로는 마음 깊이 다가오고, 때로는 용기를 주는 보석 같은 말들과 만나게 된다.
“2017년이라는 시점에 문학의 이슈로서 ‘여성’을 특집으로 잡아보고 싶었어요. 그 이유는 최근 10년에서 15년 사이, SNS가 등장하면서 여성이라는 데에서 오는 위화감을 캐주얼하게 표명하고 공유할 수 있는 상황이 만들어졌어요. 물론 ‘여자’라는 것만으로 굳건하게 연대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 ‘우연한 연대’가 이뤄지고 있다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다들 ‘우연한 연대’들이 있잖아요? 아빠들 모임, 엄마들 모임처럼요. 여성도 그 중 하나인 셈이죠. 같은 여자라고 현실에서 뭐든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니 픽션으로, 문학으로 ‘여성’을 특집으로 잡고 ‘여성’과 ‘글쓰기’의 관계를 모색해보고 싶었어요.”
인생에서 위로 받고 격려 받았던 글들
[여성호]에 대한 반향은 긍정적인 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여성을 특집으로 삼는 것은 너무 편협하다”, “글쓰기는 성별을 뛰어 넘어서 한다”는 등의 비판도 있었다.
“긍정적인 반향의 에너지도 대단했지만, 거부 반응도 만만치 않았어요(웃음). 문예지는 워낙 거의 남성들로 구성되니까요. 다른 특집에는 그런 비판이 없어요. 라면의 달인 특집을 한다고 해서 ‘파스타나 우동은 어쩌고?’ 라고는 아무도 말하지 않잖아요. 그런 반응들까지 포함해서 지금, 여성을 호명하고 그에 대해 말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저 스스로가 궁금했어요. 여성을 호명한다고 해서 ‘인간’을 손상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죠. 더구나 저는 [모두의 여성호]를 만들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나’라는 한 명의 인간이 편집하는 여성호를 만든 거예요.”
가와카미 씨의 이야기대로 지금까지 그가 인생에서 위로 받고 격려 받았던 글들, 지금이야말로 읽었으면 하는 글들을 모은 것이다.
“여성호에 대한 긍정, 부정을 포함한 엄청난 반향을 보며 ‘젠더’라는 것이 인간이라는 존재의 근간과 연관된다는 것을 편집 단계에서 알게 되어, 지금까지의 제 인간관계도 이해가 되었어요. 덕분에 정리했고요.(웃음)”
[여성호]에는 시가 많다. 평소에 시를 별로 접한 적이 없는 필자지만, 태어나 처음으로 싱그럽고 아름다운 시의 언어에 마음이 흔들렸다. 시마다 색깔과 촉감이 다른 종이를 쓰는 등 “마치 커튼처럼” 디자인도 아름답다. 작품 배열에도 가와카미 씨의 고집이 엿보인다. 권두시는 1920년대에 활약한 미국 시인 에드너 세인트 빈센트 밀레이의 “첫 번째 무화과”.
내 초는 양쪽에서 타들어가지
새벽까지도 버티지 못해
하지만 아, 나의 적들이여 그리고 오, 나의 친구들이여
얼마나 사랑스럽게 빛나는지
“에드너의 시는 친구, 적이라는 구별을 의미 없는 것으로 만드는 의미로도 읽혀요. ‘혐오가 만연한 지금 시대에도 딱 들어맞죠’라고, 이 시를 번역해주신 오자와 에이미 씨도 그런 이야기를 해주셨고요.”
시가 많은 점에 대해서는 [여성호] 발간 기념 심포지엄에서 일본근대문학 연구자인 베니노 고노 켄스케 선생이 ‘여성들은 가사, 육아에 쫓겨 짧은 글밖에 쓸 수 없었고, 장편을 쓰는 것은 남성의 몫이었다. 그래서 시가 많다는 것은 여성의 역사 그 자체’라고 분석했다고 한다.
가와카미 씨가 현대어로 번역한 히구치 이치요의 <섣달 그믐>은 마지막 반전까지 조마조마 두근두근. 고전이 이렇게 재미있을 수가?!
“슬프지만 밝죠. 말괄량이 같아서 정말 좋아요. 결말도 밝아서 깔깔 웃었어요. 이치요가 글을 쓴 건 고작 몇 년이지만, <섣달 그믐>이나 <키 재기>는 기적적인 발군의 작품입니다. 이치요는 정말 삶의 생명력 있고 이에제도(일본판 호주제) 하에서도 여자로서 가계를 이은 상징적인 특권이 있어서 글을 쓸 수 있었던 거예요. 지금 시대에도 글을 쓸 수 있는 여성은 운이 좋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 [와세다문학 증간 여성호] 책임편집인이자 작가인 가와카미 미에코 씨 (제공 사진)
시인, 소설가 그리고 “페미니스트입니다”
사춘기에는 철학서에 탐닉했다는 가와카미 씨.
“당시 저는 ‘여성은 2등 시민’이라는 것을 내면화한 채 살았어요. 학교에서 여자만 호출당해 브래지어를 하라는 둥, 속치마를 입으라는 둥 하는 소릴 들었는데, 그건 남자들이 공부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거예요.”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자립하기 위해 여러 아르바이트를 했고, 성희롱이나 갑질 같은 개념이 절대 통하지 않는 직장을 다닌 적도 있어요. 그때는 언어화하지 못하지만, 신체적으로는 너무 힘들었죠. 하지만 사람은 어차피 죽는데 왜 태어나는가, ‘나’라는 개념은 무엇인가, 존재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런 철학에는 남녀가 따로 없었죠. 저에게는 굉장히 철학이 필요했어요.”
시를 문예지에 투고하던 시절에 소설 집필을 권유 받았다. 첫 소설 <와타쿠시리츠 인 치아, 또는 세계>는 어금니에서 자신의 실존을 느끼는 여성 주인공의 이야기로 철학적 사고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다.
<젖과 알>에서 갱년기와 2차 성징을 각각 맞는 엄마와 딸의 당혹과 동요를 그린 가와카미 씨에게 “젠더에 대한 생각이 가속화된” 계기는 2012년에 아들을 출산한 것이다.
“임신, 출산이라는 이상 상황, 비상사태를 경험한 영향이 컸어요. 우에노 치즈코 씨도 ‘여자는 유모차를 미는 순간부터 장애인이 된다’고 했잖아요. 어디를 가는 것도, 혼자 있는 것도 심신 모두 자유롭지가 않은 거예요. 게다가 아빠와는 달리 엄마는 그 자격을 항상 질문 받죠. 개인일 자유조차 없어요. 인간에게는 다양한 상황과 측면이 있다는 사실을 하나하나 돋보기로 들여다보는 것 같은 경험이었습니다. 젠더에 관해 생각하는 것은 개인과 가족, 사회에 관해 생각하는 것 그 자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언론에서도 “페미니스트입니다”라고 공언하길 꺼리지 않는다. “저는 페미니즘을 어떤 성별이라는 차별 받거나 우대받는 것에 대해 이의 제기하려는 태도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저는 페미니스트죠. 거기에는 어떤 망설임도 주저도 없습니다. 부고 같은 데 짧게 이력이 적히잖아요. 제가 죽으면 꼭 시인, 페미니스트, 소설가, 이렇게 써줬으면 좋겠어요(웃음)”
[여성호]에는 이바키기 노리코의 시 <어린 딸이 생각한 것>도 수록되어 있다. “‘남의 아내 어깨에 쌓이는 그 부드러운 것’은 그냥 피로거든? 같은 내용 정말 최고죠. 서른 살의 저였으면 싣지 못했을 거예요. 지금이니까 ‘노리코, 말 한 번 잘했다’ 생각하죠.”
중요한 건 ‘젠더 교육’ 아니겠어요?
가와카미 씨는 현재 5살 난 아들과 젠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고 한다. 아들은 세 살적부터 ‘남자가 여자를 지키는 것’ 같은 소릴 하기 시작했다고.
“지금 대략 40대 이후의 아저씨들이 기득권을 포기할 리 없고, 달라질 생각도 없으니 상대해봤자죠. 불가능해요. 지금부터 애들을 교육해야죠. 그걸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성별에 따른 특권 따위 없고, 위대한 것도 없다고. 유치원에서도 남녀가 굉장히 강조되지만, 너를 말할 때 제일 처음 따라오는 게 성별이 아니라고. 게다가 인간에게는 남성과 여성 두 종류만 있는 게 아니라고. 조금씩 섞인 사람도 있고, 마음과 몸이 각각 다른 사람도 있고, 그렇게 세상에는 정말 다양한 사람이 있으니 ‘이러이러한 게 정상’이라는 건 없다고, 다 동등한 거라고.”
“아들이 상대의 반응을 재미있어 하면서 ‘고추 고추’하기에 왜 그러냐고 했어요. 그랬더니 남자는 그런 말해도 된다고. 그거 별로라고 하는 거예요. 고추는 중요한 거고, 상대 재밌으라고 그렇게 말하는 것이나, 남자니까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이나 너무 후지다고 얘기해줬어요. 그런데도 또 그렇게 말하면 아들이 ‘고추’라고 말한 횟수만큼 저도 ‘보지’로 맞받아칩니다. 꼭. 비대칭을 만들지 않아요.” 남자만 남자의 성기에 대해 얘기해도 되고, 여자는 안 되는 상황을 만들지 않는다고 할 정도로 철저하다.
지금 여섯 살 된 필자의 딸은 네 성기는 ‘보지’라고 가르쳐줘도 주변 눈치를 보면서 말하지 않는다고 얘기했더니, 가와카미 씨는 이렇게 답한다.
“우리가 마음을 강하게 먹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기죽지 않고, 흠칫 하지 않고. 저는 생리에 대해서도 아들에게 얘기해요. 생리 때 아들이 같이 목욕하자고 해서요. 구시대적 가치관이었다면, 배가 아파서 어쩌고저쩌고 하며 속였겠지만, 여성은 보지에서 피가 나오니 혼자서 목욕하라고 해요. 생리하면 배가 아프다고 했더니 이제 아들이 괜찮냐고 물어봐요. 어릴 때 저는 엄청 보수적인 집에서 생리가 금기어였던 것은 물론, 제 몸이 어른이 되어가는 게 부끄럽고 더럽혀지는 것 같아 정말 싫었어요. 그걸 바꾸고 싶어요. 지금도 완벽하게 바뀐 건 아니지만, 제 가치관을 항상 의심하고 싶어요.”
※ <일다>와 제휴 관계를 맺고 있는 일본의 페미니즘 언론 <페민>(women's democratic journal)에서 제공한 기사입니다. 가시와라 토키코님이 작성하고 고주영님이 번역하였습니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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