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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 시내보다는 육지의 시골이 좋아

[비혼여성의 시골생활] 가마솥 불 냄새를 좋아하는 사람, 은희


※ 시골살이를 꿈꾸는 비혼·청년 여성은 점차 늘고 있지만 농촌에 그들을 위한 자리는 ‘없다’. 그들 대부분이 농촌사회에서 상대적으로 취약한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문화기획달>은 농촌에서 비혼·청년 시절을 경험한 일곱 명의 여성들과 만나, 그들의 생생한 삶의 현장을 들여다보고 삭제된 ‘개인’의 목소리를 기록했다. 인터뷰를 진행하고 원고를 쓴 이들 모두 농촌에서 비혼·청년의 삶을 경험한 남원시 산내면의 여성들이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제주도 토박이의 뭍 나들이


제주도에서 태어나서 고등학교까지 다녔던 은희(가명)는 제주 시내에서 살았다. 그래서 제주 외곽 시골마을에 있던 외가나 친가를 방문한 기억 외에는 농촌에 대한 기억이나 경험이 거의 없었다. 처음으로 대학 진학을 위해 섬을 떠나게 되었는데, 민가가 드문 산골 마을에서 하숙을 하면서 제주와는 전혀 다른 육지 시골 생활을 접하게 됐다. 시골 마을이기는 해도 학생이었기 때문에 마을 주민들과 교류하며 시골살이를 했던 것은 아니었다.


은희는 사회복지학을 전공하면서 선배의 제안으로 다른 지역 시골 마을의 문화예술교육단체를 2~3년간 오가면서 자원봉사 활동을 했다. 처음에는 폐교를 리모델링한 공간에 대형 기숙사처럼 여자 방과 남자 방만 분리한 채 공동합숙 생활을 하다가 차츰 개인 방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같이 자고 같이 밥해 먹는 공동생활이 쉽지만은 않았다. 특히 봉사 활동은 여자건 남자건 다 같이 하는데도 불구하고, 밥을 짓는 일은 자연스럽게 여자만 하는 것으로 흘러갔다. 술을 같이 마실 때도 술상을 차리고 치우는 건 여자들이 하는 것이 관례였다. 당시에 은희는 후배였기 때문에 선배들 눈치가 보여서 이런 점을 지적하기가 어려웠다.


이런 저런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가마솥에 불 때서 밥을 해 먹고 불 냄새를 맡는 게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귀농·귀촌인들이 주축이 된 단체여서 학교가 위치한 마을주민들과 만날 기회는 별로 없었지만, 현장에서 다양한 자원봉사자들이나 단체에서 운영하는 캠프, 프로그램 참가자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즐거운 추억거리가 됐다.


‘조부모와 손녀’같은 관계 맺기


사회복지를 공부하면서 지역사회 조직(Community Organization)에 관심을 갖게 된 은희는 대학 졸업 후, H지역의 시골 마을로 거처를 옮겼다. 지역사회 조직이란, 지역사회 단위로 주민들과 지역사회 사업가가 자주적으로 협력하고 협동해 지역의 문제를 해결하는 사회사업 방법 중 하나이다. 예를 들면 학부모 모임이나 공동체 모임, 마을 만들기 같이 지역사회의 밀도를 높이는 작업이다. 활동가로 일할 생각은 없었지만, 지역에 들어가서 조직을 만들어가는 일원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은희를 그곳으로 이끌었다.


▶ 제주 시내에서 살았던 은희는 섬을 떠나 육지로 와서 시골 생활을 접하게 되었다. ⓒ촬영: 이리


은희는 운 좋게도 마을에서 할머니와 할아버지 두 분이 사는 집에 들어가서 같이 살게 되었다. 월세도 받지 않고 밥까지 챙겨주셨던 그분들과의 인연은 은희가 마을에 정착하는 데에 큰 디딤돌이 되었다. 읍내 일부에서는 은희를 ‘정미소집 막내딸’로 오해하기도 했는데, 사실이 아니었으나 굳이 아니라고 밝히지 않았다.


결국엔 ‘원티댁네 아가씨’라는 칭호까지 얻으며 명실공히 마을 사람으로 인정받았다. 여기에서 원티댁은 택호인데, 택호란 고향 이름 등을 따와서 그 집을 부르는 말이다. 시골 마을에서는 집집마다 택호가 붙여지는데, 택호는 그냥 마을에 이사 들어온다고 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세대가 대대로 내려온 집이거나 오래 살아서 마을주민으로 눈도장을 확실히 찍은 경우 마을 사람들이 그렇게 불러주는 것이기 때문에 마을에서는 주민등록증보다 확실한 주민확인용 호칭이다.


집의 방 한 칸을 흔쾌히 은희에게 내주셨던 두 내외분은 은희의 개인 공간을 확실하게 지켜주고 개인적으로 간섭한다거나 사생활을 침해하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시골에서는 프라이버시라는 개념 자체가 없는 편인데, 이분들은 은희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했다. 사람을 좋아하는 분들이라서 집에 누군가 있다는 것 자체를 그냥 좋아하셨고, 은희도 주말이면 경운기를 같이 타고 나가서 농사일을 도와드리거나 자식들에게 보내는 농산물 택배 일도 대신해드렸다. 짬 날 때는 같이 동네 마실도 다니고, 목욕탕에 가서 사우나도 함께 했다. 이렇게 사이좋은 조부모와 손녀처럼 오순도순 행복하게 살았다.


은희가 어른들을 어려워하지 않고 낯도 가리지 않는 외향적인 성격인 데다 일손도 척척 거드는 등, 손녀처럼 잘했기에 가능한 관계임은 분명했다. 그러나 이런 세련된 매너를 가진 할머니, 할아버지는 시골에서 드문 분들임을 강조했다.


80만원의 수입으로도 넉넉했던 이유


할머니는 은희가 늦게 일어나면 깨워서라도 아침밥을 차려주셨고, 인근 초등학교에서 청소하는 일자리도 알선해주시면서 여러모로 살뜰하게 챙겨주셨다. 처음에는 청소 일이 꺼려지기도 했으나 막상 해보니까 일이 손에 익으면서 요령도 생기고 일하는 시간도 길지 않은 편한 일이었다. 할머니, 할아버지께서도 마을 사람들에게 “얘는 아침밥 먹고 밖에 나가서 일한다.” 이렇게 말씀해주시고 마을 밖에서 맺은 기존의 관계에서도 하는 일의 가치를 알아줘 “저 학교에서 청소일 합니다.” 이렇게 당당하게 말할 수 있게 됐다. 청소 일에 대한 편견은 말끔히 사라졌다.


마을 사람들도 ‘나가서 일하고 돈 버는’ 은희에 대해 인정하면서 부녀자들의 소임을 강요하지 않았다. 월 80여만 원을 벌었는데, 집과 식사를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다 해결해주셨기 때문에 생활하기에 꽤 넉넉한 돈이었다. 그러니까 월세를 내고, 밥도 직접 해결해야 하면 부족한 돈이라는 말이다.


학교 청소 일을 1년 정도 한 후, ‘다문화가정 방문지도사’라는 새로운 일을 시작했다. 주 16시간 근무, 4주 기준 80만 원에 유류비가 별도로 나왔다. 이 일을 3년 정도 했는데, 돈보다 시간이 더 중요했던 은희에게는 ‘꿀 보직’이었다.


다정했던 할머니와 할아버지와의 생활도 좋았지만, 늦은 퇴근 시간과 교통 문제가 힘들어졌다. 더불어 개인적인 시간이 더 갖고 싶어진 은희는 읍내에 방을 구해서 마을을 나오게 되었다. 건물 2층을 썼는데, 보증금 500만 원에 월세 20만 원이었다. 월세 외의 생활비는 거의 들지 않았고, 종종 밤 공장에서 경리 아르바이트도 하고, 어버이날 카네이션 만들기 아르바이트 등 짭짤하게 소득을 올릴 수 있는 일거리들이 들어왔다. 저축은 충분히 가능했지만 굳이 하지 않았고, 아끼려면 더 아낄 수 있었지만 굳이 아끼지 않았다.


오토바이 한 대를 구입해서 전국을 놀러 다녔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월 80만 원의 수입이었지만 200만 원 같은 든든함과 넉넉함이 느껴졌다. 읍내에서는 카페나 미용실 등 이곳저곳에 들러서 친분을 쌓았다. 같이 얘기도 하고, 놀기도 하고, 밥도 먹고, 정말 원 없이 하고 싶은 일 다 하면서 지냈다. 마을에서는 ‘세상 팔자 좋은 친구’로 부러움을 많이 샀다.


그러나 은희에게 그곳의 시골 생활과 읍내 생활이 마냥 즐겁고 신나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는 법, 본격적으로 당시의 어두운 부분을 파헤쳐봤다.


시골에선 ‘여성성’을 드러내면 안 돼


그곳에서 알게 된 친구 중에 무척 여성스럽고 보호 본능을 자극하는 한 여성이 있었다. 이 친구가 위험한 상황에 많이 처하는 것을 보고 난 후, 은희는 ‘시골에는 20대의 여성스러운 여자가 들어가서는 안 된다, 강해져야 한다, 나를 함부로 보지 못하게 이미지를 만들어야 한다.’ 이런 마음을 갖게 되었다고 했다. 도대체 그 친구가 무슨 일을 당했기에?


친구는 여성스럽고 연약한 이미지로 주변 남성들에게 인기가 많았는데, 남자친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 저 사람들이 집적거리곤 했다. 게다가 전 남자친구는 이별 후 다시 찾아와 “헤어지고 나서 너 때문에 몸이 달아오르는데 풀 데가 없다. 책임져라.” 이러면서 집에 쳐들어오려고 했다. 당황한 친구는 동네 사람에게 전화해서 도움을 요청해 간신히 위기를 면했다.


은희는 원래도 꾸미는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이 친구가 당하는 것을 보면서 ‘여성성을 드러내면 안 되겠다. 여성성을 드러내면 여기에서 지내는 데 위험할 수 있겠다’ 이런 생각을 굳혔다. 보호 본능을 자극하는 여성은 남자들로부터 보호를 받는 게 아니라 오히려 폭력에 시달렸다.


은희는 그곳에 사는 동안 삭발을 했다. 꼭 여성성을 감추려고 그랬던 건 아니었는데, 결과적으로 여성성을 소거하면서 만만해 보이지 않는 인상을 주게 됐다. 처음에는 의도적으로 거친 정체성을 가지려고 노력하기도 했지만, 나중에는 이런 모습이 자연스러워져서 마음 가는 대로 거침없이 행동하기도 했다. 덕분에 ‘쟤는 원래 저런 애, 건드리면 안 되는 애’로 인식이 굳어졌다. 은희도 ‘동네 노는 애’로 사는 게 편했다.


동네 노총각들, ‘갔다 온 사람들’(이주 여성과 결혼했는데 이후 아내가 도망간 경우를 이렇게들 말한다), 그리고 지역주민 아저씨들에게 여성성을 어필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굳어졌다. 남자친구가 있을 때나 없을 때나 보험 차원에서 늘 ‘남자친구가 있다’고 말하고 다녔다. 술 먹기 전에는 패배감에 절어 있다가, 술 먹고 나면 ‘근자감’(근거없는 자신감)이 솟구치는 일부 남성들을 보면서 환멸까지는 아니라도 실망감이 많이 들었고, 인간 별거 아니구나, 이런 생각도 들었다. 나이가 많다고 해서 특별히 존경해야 할 이유를 느낄 수도 없었다.


그래도 읍내에 살 때는 여성성을 일부러 죽이거나 하지 않고 원래 ‘나’대로 평범하게 행동했다. 그래서인지 주변에서 소개팅과 선 자리를 주선해주기도 해서 몇 번 나가기도 했었다.


▶ 시골에서 20대의 여자는 ‘여자라는 걸 들키면 안 된다’고, 은희는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촬영: 이리


다문화가정의 생태…‘정상가족’은 없다


다문화가정 방문지도사 일을 하면서 느꼈던 것을 물어보자, 은희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정상가족은 환상이다.” 라고 답했다. 이게 무슨 말일까?


은희는 5세부터 초등학생까지의 다문화가정 아이들을 돌보는 방문지도사였는데, 이주여성들의 처지가 무척 힘들어 보였다. 남편이 정신질환자인 경우가 몇 명 있었는데,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하고 사기결혼을 당해서 온 이주여성들의 삶은 고되고 팍팍했다. 한 여성은 매일 “당신 미쳤어, 당신 미쳤어”를 외쳐댔다. 게다가 정신질환이 집안 내력인 집에서는 시누이가 칼을 휘두른 보낸 사례도 있었다.


이주여성들은 한국말을 거의 하지 못해 의사소통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런데도 많은 이주여성 남편들은 부인에게 “애 교육은 네 책임이다.” 라며 자녀교육을 떠넘겼다. 은희가 돌봄교사로 가면 엄마들은 아이들이 학교 수업을 따라가기는커녕, 글 익히고 이름 쓰는 것만이라도 제대로 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은희는 이주여성들이 20대인 자신과 나이는 비슷한데, 아이도 있고, 깡 시골에 살며 농사일은 많고, 남편의 심리적 상태는 정상이 아니고, 외국 여자라고 무시당하는 이런 상황을 어떻게 견디는지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고 했다.


반면, 국제결혼 사기 브로커들이 있어서 아예 이주여성들에게 ‘돈 벌자’고 꼬드기는 사례도 있다고 했다. 여기에 응한 이주여성의 경우 결혼 후 1~2년 살다가 도망가고 또다시 다른 이름으로 서너 번씩 결혼하는 식으로 브로커들과 짜고 사기결혼을 했다.


은희가 방문지도사 일을 하며 가장 힘들었던 건, 동물 다루듯이 아이를 방치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었다. 극단적인 예로, 한 남성이 자신보다 마흔 살 이상 어린 이주여성과 재혼한 경우가 있었다. 아이가 다섯 살이었는데, 아빠가 아이를 보다가 밖에 나갈 일이 생기면 아이 허리를 줄넘기 줄로 묶어서 문고리에 걸어두고 나가곤 했다. 엄마는 친정에 돈을 보내기 위해 어떻게든 공장을 나가고 싶어 해서 아이를 아빠에게 맡기고 공장에서 일했다.


농촌 노총각들을 장가보내기 위해 지자체에서 세금까지 써 가면서 지원사업을 벌이는 마당인데, 정작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사랑도, 가족 만들기도 아니었다. 남편과 아내와 자식이 있는 행복한 가정을 외쳐대면서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를 전파하려고 하지만, 돌아가는 상황은 지극히 비상식적이고 비정상적이었다. ‘남성의 주체할 수 없는 성욕’을 채워주고 대를 이어야 하는 과업을 수행하기 위해 국가가 나서서 지원한 매매혼이자 사기결혼인 경우가 많았다. 실제로 은희는 대만의 자연농 공동체에 방문했을 때, 자신이 한국에서 다문화가정 아이들을 위해 일한다고 했더니 ‘매매혼을 지원하는 일을 한다’는 말을 들었다고도 했다.


시골에는 유독 노총각과 노년 남성들의 성욕을 해소해줘야 한다는 믿음이 더 강하다. 동의 받지 않은 성욕 해소는 강간일 뿐이다. 그리고 그 이전에, 성욕은 주체할 수 없는 것도 아니고, 누가 채워주거나 대신 해소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는 남성들, 이 믿음을 부추기는 사람들을 보면 정말 인간 별거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 경제적인 이유로 지금은 다시 고향 제주에 돌아왔지만, 조만간 다시 뭍으로 나갈 계획이다.  ⓒ촬영: 이리


언젠가 다시 해방의 땅, 뭍으로


2015년, 은희는 읍내에 얻었던 집 계약이 연장되지 않아 새로 집을 알아봤지만 도시와 육박하는 월세를 못 이기고 그곳을 나왔다. 은희의 농촌 생활은 여기에서 일단락됐다. 이후 도시에서 2년 정도 지내다가 다시 고향인 제주로 돌아갔다. 제주도는 고향이라서 아는 사람들 눈치가 보여 매사에 조심스럽다. 그래서 다시 뭍으로 나갈 계획이다. 다시 나가려면 보증금을 마련해야 하기 때문에 돈을 좀 벌어야 한다.


은희는 일단 제주도에서 쉬면서 H지역 시골 마을에서 함께 지냈던 할머니, 할아버지와의 정겨웠던 3년여 간의 시간을 정리하려고 한다. 이 이야기를 책이나 카툰으로 내고 싶다고 했다. 얼마 전 두 분이 비슷한 시기에 돌아가셔서 그리움이 더하다. 집에서 멧돼지를 키워서 잡아먹거나, 늦가을에 둘러앉아 텔레비전을 보면서 곶감을 깎았던 일, 같이 밥을 먹던 일, 같이 마실 다녔던 일도 어린 시절 추억담처럼 꺼내놓고 싶다.


은희가 다시 돌아가게 될 육지는 도시일까, 시골일까? 이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녀는 여전히 육지에 대한 환상을 품고 있다. 기본적으로 ‘육지에 나가면 하고 싶은 거 다 해보자, 제주도에서는 이런 거 못 하니까’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육지 생활에서 느끼는 해방감 같은 것이랄까. 필자는 시골에 가면 해방이 아니라 오히려 억압받는다고 여겼는데, 제주도 토박이의 의견은 반전이었다.


여기에 더해 은희에게는 ‘뭔 짓을 해도 은희니까 할 수 있지.’ 이런 자신감이 깔려 있다. 스스로 개척한 브랜드라고 할까? ‘똘짓’을 해도 주변 사람들이 ‘쟤는 저런 애’ 이렇게 넘어간다고.


“자신의 이미지를 자신이 만들어가는 게 중요해. 타인의 시선에 갇히지 않고, 나는 어떤 사람이야! 이렇게.”


은희가 다음에 선택할 해방구는 뭍의 어디쯤일까? (글, 사진: 이리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 농촌 비혼여성 인터뷰는 삼선복지재단 지역청년 지원사업의 후원을 받아 진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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