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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혼자 귀촌하기엔 시골은 ‘험한 곳’이죠

[비혼여성의 시골생활] 산자락에서 읍내로 나간 해민


※ 시골살이를 꿈꾸는 비혼·청년 여성은 점차 늘고 있지만 농촌에 그들을 위한 자리는 ‘없다’. 그들 대부분이 농촌사회에서 상대적으로 취약한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문화기획달>은 농촌에서 비혼·청년 시절을 경험한 일곱 명의 여성들과 만나, 그들의 생생한 삶의 현장을 들여다보고 삭제된 ‘개인’의 목소리를 기록했다. 인터뷰를 진행하고 원고를 쓴 이들 모두 농촌에서 비혼·청년의 삶을 경험한 남원시 산내면의 여성들이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지리산 산골 마을에 ‘혼자 사는 젊은 여자’


서울에서 살던 해민(가명)은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산에서 사는 삶을 꿈꾸어왔다.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 삼십 대 중반 무렵 텃밭 농사와 귀농·귀촌 관련 교육을 받으며 준비를 한 후, 그해 바로 지리산 자락의 작은 산골 마을로 이주했다. 꿈이 이루어지는 듯했다.


제대로 된 집을 구하기 전 임시거처로 마련한 첫 번째 집은 방과 화장실이 딸린 마을 안 자그마한 가공공장이었다. 정부 지원을 받아 지어놓고 활용하지 않은 건물이어서 방 안 가득 곰팡이가 피어 있는 상황이었다. 도배를 새로 하고 구석구석을 쓸고 닦고 간단한 수리를 마치고 나니 휑하던 공간이 그럴듯한 살림집으로 변신했다.


▶ 산에서 사는 삶을 꿈꾸었던 해민은 텃밭 농사와 귀농.귀촌 교육을 받고서 지리산 자락의 마을로 이주했다. ⓒ해민


그곳에 살면서 해민은 1년간 지역 귀농학교에서 시골살이에 필요한 다양한 교육을 받았다. 그 사이 인근 초등학교와 중학교에서 방과 후 교사를 하기도 했다. 마을에는 대략 12가구 정도가 살았는데, 마을 어르신들은 모두 농사짓느라 바쁘고 해민과는 활동 시간대가 다르다 보니 길에서 마주칠 때 인사를 드리고 안부를 묻는 것이 관계의 전부였다.


“마을회관에도 자주 들르고, 밥도 먹고 가라고 하셔서 처음에는 몇 번 갔어요. 그런데 되게 불편한 거예요, 그곳 풍경이. 마을에 할아버지가 두 분, 할머니는 일고여덟 분 정도 계신데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식사를 따로 하세요. 근데 같은 크기의 상에 할아버지상은 아주 잘 차려져 있고, 할머니상은 반찬도 다르고 그릇 놓을 공간도 모자라 바닥에 밥그릇을 내려놓고 드세요. 밥은 할머니들이 다 차리시고요.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가만히 앉아서 받아먹겠어요? 일찍 가서 밥상 차리는 거 도와드려야죠. 그리곤 저도 할머니들 틈에 끼어 밥그릇은 손에 들고 국그릇은 바닥에 두고 밥을 먹는데, 마음도 몸도 편치 않으니까 밥 먹는 내내 빨리 먹고 나가고 싶다는 생각만 들더라고요. 또, 먹고 그냥 갈 수 있나요? 전부 설거지하고 치워야지. 몇 번 가고 나선 바쁘다는 핑계로 안 가게 되더라고요.”


해민을 불편하게 한 것은 마을회관 풍경만이 아니었다. 만나는 사람마다 “왜 혼자 사느냐”, “누구 아들 괜찮은데 한 번 만나봐라” 하며 억지로 갖다 붙이려 했다. 그래서 다른 마을에 집을 알아보려 다닐 때는 혼자 사는 걸 숨기려고 ‘남편이 일 때문에 해외에 나가 있다’고 거짓말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여전히 일부 아저씨들의 무례함은 피할 수 없었다.


시골 마을에서 여자 혼자 살면 성범죄에 노출될 위험도 크다. 해민도 한 번은 한밤중에 누군가 집 뒷문을 따고 들어오려고 한 적이 있었다. 문을 열려고 하는 소리가 들려서, 안에서 문을 발로 쾅 차고 다시 한 번 이곳저곳 문단속을 했다. 그리곤 한 손에는 몽둥이를 들고 한 손에는 112를 누르려고 핸드폰을 들었다. 그 소리에 놀라서 가버렸는지 다행히 아무 일도 생기진 않았다. 누군지 짐작 가는 사람은 있었다. 하지만 추정만 가지고는 섣불리 대응할 수 없었기에, 해민은 불안을 안은 채 지내야 했다.


그렇게 1년 반 정도의 시간이 지난 후, 아랫마을 지인의 집 바깥채가 귀농인의 집으로 선정되면서 그곳에 들어가서 살게 되었다. 아랫마을에서의 삶은 그래도 윗마을보단 수월했다. 독립된 한 가구로 보았던 윗마을과는 달리, 아랫마을에서는 대문을 같이 쓰는 주인집 안 별채에 살다 보니 그 집에 잠깐 와 있는 사람쯤으로 여겨 마을에서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하지만 시골에서는 흔치 않은 재택근무를 하다 보니, 일하는 것 자체를 존중받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생겼다.


“시골에 살고 1년 지나고부터는 평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신문사 편집기자로 일을 했는데, 시간을 지켜야 하는 일이었어요. 그런데 같은 마을은 아니지만 인근에 사는 귀농한 남자분이 연락도 없이 벨을 누르고 차 한 잔 달라며 찾아오곤 했어요. 친분 있는 분이니 차를 드리긴 했는데, 오면 30분 이상 앉아 있다 가는 거예요. 집에 혼자 있는데다 또 제가 일하는 중이라는 걸 알면서도 몇 번을 이러니까 언짢아서 현관문에 ‘10~5시까지 근무시간이니 급한 볼일 외에는 미리 연락주세요’ 라고 써 붙여 놨어요. 이후에는 안 오더라고요. 그리고 나중에 누가 묻더라고요. 그 사람 무슨 일로 집에 다녀갔냐고. 시골에서는 사람들 눈이 CCTV예요. 괜한 오해 살 일도 하지 말아야 해요.”


▶ 산골 마을에 살 때 자연환경은 좋았지만 주위에 마음 맞는 사람들이 없었다. ⓒ해민


도저히 시골 정서와 간극 좁힐 수 없어, 다시 이주


“그곳에 살 때 집을 짓고 싶어 계속 땅을 알아보다가 마음에 드는 땅을 샀어요. 마음 맞는 친구들이랑 같이 살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시골에 특색 있는 카페와 게스트하우스를 만들까 했거든요. 마음 맞는 친구들을 불러들여 재미있는 공간을 꾸려보고 싶었어요. 농장을 만들어 우프(WWOOF, 유기농 농가에서 방문객들이 일손을 도와주는 대가로 농장주에게 잠자리와 식사를 제공받는 글로벌 네트워크 활동, 1971년 영국에서 시작되어 세계 각국으로 확산되었음)도 운영해보고 싶었고요. 그러려면 우선 땅과 집이 필요했는데, 문제는 공간을 준비하는 과정 동안 친구들이 와서 살 곳이 없다는 거예요. 워낙 폐쇄적인 동네다 보니 혼자 오는 외지인한테는 집을 잘 빌려주려 하지 않았어요. 누군가 와서 준비 기간을 가져야 하는데, 그럴 수 있는 집이 없으니까 오려는 사람도 없죠. 자연환경은 좋은데 사람이 없었던 거예요. 어느 순간, 나는 너무 환경만 고집하고 이곳으로 온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정작 중요한 건 사람인데…. 내가 여기를 나가야 하나, 하는 고민이 계속 들어 두 달간 생각도 정리할 겸 여행을 떠났어요. 여행에서 돌아와서는 완주로 가기로 결심했고요.”


여행에서 무슨 특별한 계기를 만나게 된 걸까?


“사실 여행 전, 이미 마을을 떠나기로 마음을 굳힌 계기가 있었어요. 여행 떠나기 바로 전, 여자 집주인분이 병원에 입원해서 문병을 갔어요. 병실에 들어가니 마침 그 분이 친구와 전화통화를 하고 있었는데, 절 보더니 친구한테 ‘야, 너 주위에 노는 남자 하나 없냐? 우리 집 문간방에 아가씨 하나 사는데, 소개시켜 주려고’ 이러더라고요. 너무 충격이었어요. 나름대로 가깝다고 생각했는데, 이 분 마음속에는 나를 ‘하자 있는 사람’이라고 여기고 있었던 건가 싶어서. 나는 결혼하지 않을 것이라고 누누이 말했는데 무시당한 느낌이었어요. 게다가 ‘노는 남자’라니. 거기다 내 앞에서. 무슨 뜻으로 한 말인지 모르겠지만 그때 느꼈어요. ‘이게 시골 사람 정서구나’ 라고. 그나마 친하다고 생각했고 잘 어울렸던 이분조차도 이렇게 생각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오죽하겠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 얘기를 듣는 순간 떠나야겠다 정리가 딱 됐죠.”


산이 좋아 지리산 자락의 마을로 들어갔던 해민은 자신이 시골 마을에서 혼자 살기엔 아직도 어린 것 같다고 회고했다. 사실 지방으로의 이주가 처음은 아니었다. 20대 중후반에 제주도에서 2년간 지낸 적이 있다. 당시엔 귀농·귀촌 개념도 없었고, 제주도가 지금처럼 ‘핫’하지 않을 때였다. 여자 혼자, 게다가 20대 젊은 여자 혼자 내려오는 경우가 거의 없다 보니 사람들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해민을 바라보았다. 새롭고 즐거웠지만 ‘육지 것’이라서 쉽지 않았던 생활이었다. 몇 차례 불쾌하고 부담스러운 경험을 하고 난 후에 다시 서울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때는 제주도에서 겪는 어려움이 섬이 가진 특수성 때문이라고 생각했어요. 나이 어린 외지인이 섬에 들어와서 겪을 수 있는 좌충우돌이라고. 그러면서 마흔 살쯤 되면 모든 게 안정될 테니 어떤 일에도 휘둘리지 않을 거라는 막연한 믿음이 있었어요. 어렸던 거죠. 또, 쓸데없이 남자들이 들이대거나, 스토킹을 당하거나, 나와 상관없는 오지랖 넓은 이들로부터 결혼을 독촉하는 얘기도 듣지 않게 될 거라고 생각했죠.”


하지만 이것은 해민의 착각이었다. 도시에서 10년이라는 시간을 보내고 다시 감행한 시골로의 이주, 그곳에서 해민은 여전히 안전하지 못했다.


“마흔이 가까워도 시골에서는 아직 애송이고, 비혼 여성에게 남자 갖다 붙이는 건 여전했어요. 성희롱이나 성차별도 달라진 게 없고요. 무엇보다, 아직 그런 환경들을 이겨낼 만큼 내가 성숙해지지도 못한 것 같아요.”


그렇다면 비혼 여성은 언제쯤 시골에 갈 수 있는 적당한 나이가 될까? 여자 나이 오십? 완주로 간 해민의 이야기를 더 들어보자.


▶ 도시와 시골의 경계지점, 그 중간지대에 있는 완주 읍내로 이주했다. ⓒ해민


전망 좋은 곳이 최고? 정말 중요한 건 사람들!


“완주 와서는 삶이 너무 편안해졌어요. 주위 시선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완주는 비슷한 시기에 귀촌한 해민의 또래 지인들이 여럿 살고 있어 종종 왕래하던 곳이었다. 완주에서는 ‘혼자선 절대 시골 마을에는 안 들어갈 거야.’ 이런 생각으로 읍내에 있는 한 빌라에 살고 있다. 시골도 아니고 도시도 아닌 것이 동네가 묘했다. 아침에는 경운기 소리가 들리는데, 편의점도 있고, 조금만 차 타고 나가면 영화관도 있고 전주 시내도 가까웠다. 산골 마을에 살 때는 차를 타고 7km를 나가야만 조그만 동네슈퍼가 하나 있었는데, 그나마도 저녁 6시면 문을 닫았다.


이사한 집과 마주 보는 빌라엔 청년귀촌캠프를 통해 알게 된 또 다른 친구도 살고 있었다. 그 친구와는 서로의 집을 오가며 같이 밥도 먹고 자주 어울렸는데, 일 년 후 친구의 집이 계약 만료되면서 아예 해민의 집으로 들어와 지금은 함께 생활하고 있다. 집과 차를 공유하고, 생활비도 반반씩 부담하는 생활공동체를 일구었다.


“다행히 친구와 성향이나 여러 가지가 잘 맞는 편이에요. 나는 정리와 청소를 잘하고, 같이 사는 친구는 요리를 잘해요. 서로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면서 살 수 있어 좋아요. 둘 다 채식을 한다는 공통점도 있고요. 생활비는 통장을 만들어서 살림에 들어가는 비용을 공유해요. 집과 차를 공유하고, 텃밭을 통해 채소를 얻다 보니 생활비가 크게 들진 않아요.”


지난해 말에는 또래 친구 여러 명이 같은 동네로 이사 오게 되면서 일주일에 두세 번은 친구 집에 모여 밥을 먹고 다양한 취미생활도 함께 한다. 그렇게 작지만 행복한 일상 속에서 해민은 삶의 안정을 찾아가고 있다. 같이 늙어가는 것을 고민하고 서로의 안부를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곁에 있다는 것이 큰 위로가 된다며, 이렇게 덧붙였다.


“나는 이제껏 내가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어요. 혼자 있는 걸 가장 좋아하고 혼자 노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더라고요. 좋은 사람들과 어울리며 사니까 그것 자체가 평화롭고 행복해요. 이게 시골에 살기 전에는 몰랐던 사실이에요.”


몇 년 살다 나간다고 실패는 아냐…‘정류장’에서 충전 중


자신이 뭘 잘하고, 어떤 걸 하면서 살고 싶은지 잘 모르겠다면 우선 배울 기회가 많은 곳으로 가는 것이 좋다고 해민은 추천했다. 현재 그녀가 사는 완주도 그런 곳이다. 완주는 귀농·귀촌인에 대한 지원이 많고, 취미부터 기술까지 배울 수 있는 환경이 잘 조성돼 있는 편이다. 특히 청년들을 위한 지원 정책도 많고 예술인을 위한 문도 열려 있다. 예술인들의 경우엔 한 달이나 일 년 정도 집과 작업실을 제공받을 수 있는데, 일주일에 한 번 정도 교육 등의 재능기부를 하면 된다. 이 사람들이 와서 예술교육이 늘어나기도 했다.


“내가 목표한 곳에 바로 가서 거기에서 평생 살아야 한다, 이런 부담을 갖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몇 년 살다가 나간다고 실패나 잘못은 아니잖아요. 자기한테 맞고 원하는 곳을 찾기까지는 정말 어려워요. 사람이 어떻게 한 번에 그걸 정할 수 있겠어요? 소도시나 귀농·귀촌인들이 많아서 인프라가 어느 정도 갖추어져 있는 곳에 와서, 이것저것 안 해 본 것들에 도전해보고 경험을 쌓는 것을 추천하고 싶어요. 그런 후에 내 재능을 발견하거나, 시골에 가서 원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을 수도 있을 거예요.”


해민은 이렇게 자기를 알아가는 과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는 비단 시골살이에 국한된 얘기는 아닌 듯하다. “자기에 대해 잘 아는 것, 이게 단단해진다는 것 같아요. 나를 채우고 유연해지고, 그 이후에 어디든 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딘가를 거쳐 가는 것도 결국은 그런 경험을 통해 나를 들여다보라는 뜻 같아요. 저 역시 스스로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다고 생각했는데도 나를 잘 몰랐던 거 같아요. ‘숲이 있고 공기와 물만 좋으면 혼자 얼마든지 살 수 있어.’ 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거죠.”


▶ 일주일에 서너 번씩 식탁에 둘러앉아 밥을 먹고 일상을 나누는 이웃 친구들 ⓒ해민


귀농·귀촌의 정류장, 완충지 같은 완주에서 해민은 얼마나 더 단단해졌을까? 주변에 어울리고 마음 맞는 친구들이 생겼는데, 그렇다면 이들과 같이 다시 시골 마을에 들어갈 생각을 하는 것일까?


“완주에 대한 만족도는 높지만, 장기적인 주거에 대한 고민은 들어요. 친구들과 마을을 이뤄 사는 건 어떨까 얘기하기도 해요. 다만, 마을 안에 들어가 사는 것은 한참 후에나 가능할 것 같아요. 지금 시골 마을에 살고 계시는 분들과는 삶의 방식이 너무 다르다 보니 당장 어우러져 사는 건 힘들 것 같아요.”


해민은 함께 사는 친구의 직장이 있는 곳에 소규모 저층 임대주택이 들어설 예정이라는 소식이 있어, 그곳에 들어가는 것도 잠깐 고려해 봤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그 친구와는 한집에서 같이 살지 못한다. 가족이 아니기 때문이란다. 이게 무슨 말일까?


“임대주택은 법률상 가족이나 1인 가구만 들어갈 수 있어요. 1인 가구의 경우엔 작은 평수만 가능하고요. 친구와 저는 법률상 가족이 아니라서 각자 집을 따로 구해야 해요. 그래서 같이 사는 친구가 농담으로 이런 말도 해요. 나보고 자신을 입양하라고. 내가 나이가 더 많으니까 자기를 입양할 수 있다고. 그래서 생활동반자법이 꼭 만들어져야 한다고 봐요. 서로 의지하면서 오랫동안 함께 살면 모두 가족 아닌가요? 친한 친구나 연인, 그 외에도 여러 다른 형태의 가족들이 있을 수 있는데, 한국의 현실은 혼인신고를 한 부부와 자녀만 ‘정상가족’으로 분류해요. 그래도 가구 형태가 점점 다양해지고 있으니 10년 이내에는 가능하지 않을까요?”


과연 한국에서 정상가족 이데올로기가 깨질 수 있을까? 생활동반자인 해민과 친구에게 임대아파트의 문턱은 너무나도 높았다.


시행착오 겪은 귀농귀촌인들을 많이 만날 필요가 있다


“농촌에 사는 젊은 비혼 여성이라서 겪었던 일들이었어요.”


해민은 농촌에서 자신이 겪었던 일을 이 한마디로 정리했다. 세상일을 많이 겪어보고 내면이 단단해지면 그런 일을 겪을 때 상처는 덜 받았겠지만, 어쨌든 그런 일 자체는 피할 수 없다는 거다.


“사실 내가 더 단단해지기 전에 남한테 피해를 주는 사람이 없어져야 하는 게 맞는 거죠. 왜 피해자한테 조심하라고 하고 가해자를 예방하지 않는 건지 이해는 안 돼요. 하지만 지금 한국 현실에서는 내가 나를 지키는 수밖에 없어요. 시골에서 성차별은 너무나 흔하고, 때론 내가 알던 상식이 전혀 통하지 않기도 해요. 더군다나 오랫동안 그렇게 살아온 어른들을 저 혼자 어떻게 바꾸겠어요.”


혼자 사는 여성이 시골에 들어가면 그냥 각오하고 들어가야 한다는 것일까?


“너무 슬픈 일인데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다’라는 것을 사전에 인지하고 들어가야 하는 거죠. 원래는 내가 조심해야 하는 게 아니라 (어디서든) 차별이나 성폭력 문제가 발생하지 않아야 하는 게 맞는데, 아직 현실은 그렇지 못하니까요.”


그래서 혈혈단신 시골행을 택한 여성들이 결국 결혼을 통해 남편이라는 울타리를 만드는 선택을 강요당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또 어찌 됐든 시골에서는 남자의 기술과 힘이 필요할 때가 있다는 얘기가 정설로 자리 잡고 있으니까.


“남자의 기술과 남자의 힘이 필요한 게 아니라, 그냥 힘과 기술이 필요한 거죠. 여자여도 힘이 세고 기술이 좋을 수 있어요. 다만 그동안 기회가 없었을 뿐이에요.”


그렇다. 여자들이 힘이 세다는 걸 자신들도 잘 모르고 있을 때가 있다. 해보면 된다. 여성들을 위한 생활기술 캠프도 열리는 만큼 여성들이 자신의 힘과 기술을 연마하는 것이 필요하다.


중요한 건 나이가 아니라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해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조언했다.


“만약 20대가 시골살이를 고민하고 있다면 30대 이후에 가라고 말하고 싶어요. 세상 경험을 더 많이 한 뒤에 시골로 들어갔으면 좋겠어요. 북적거리는 도시에서도 살아보고 여행도 많이 해보고 나서 시골에 오면, 시골이 얼마나 가치 있는 곳인지 더 잘 알게 되는 거 같아요. 또, 도시에서만 살다가 시골에 가면 환경이 완전히 달라지는데, 경험이 없으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르거든요. 조금 더 연륜이 생긴 다음에 새로운 상황에 놓이는 게 나을 것 같아요.


물론 무모한 것도 중요할 때가 있어요. 무모하지 않으면 시행착오를 안 겪으니까. 시행착오를 겪고 자기에 대해서 알고 나면 그다음에 더 나은 삶을 사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시행착오를 겪는 과정에서 오는 고통이 깨달음보다 힘들다면, 가급적 안 겪었으면 해요. 너무 무모하게 하지 말고 중간 지점을 발견해서 자기의 재능을 계발해 볼 기회를 가져보고요, 앞서 귀농·귀촌해서 시행착오를 겪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으면 좋겠어요. 잘 사는 사람들이나 억대 매출 올리는 농부 말고.”


시골살이가 세상 경험의 하나일 수도 있는데, 왜 시골은 이처럼 험한 곳이 되었을까? 세상에서 이것저것 다 겪어보고 온갖 풍파에 휩쓸려본 다음에야 살아남을 수 있는 곳, 왜 이런 무시무시한 곳이 되었을까? 왜 여기는 젊은 여자들이 들어오면 상처 받고 나가야 하는 곳일까? 해민과 인터뷰를 마치며 또 한 명의 귀촌여성으로서 이런 질문들이 꼬리를 이었다.


시골은, 시골에 사는 사람들은,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은 변하지 않는다? 대를 이어 내려온 그들의 생활방식과 문화를 무조건 존중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하지만 지금 결과는 ‘지방 소멸’이라는 암울한 현실뿐이다. 경제활동이 없어서 지방에서 사람이 빠져나간다고 하지만, 사람이 모여들면 그 안에서 경제활동이든, 문화활동이든 생겨나기 마련이다. 귀농·귀촌의 중심지가 된 곳을 보면 알 수 있다. 사람이 빠져나가기만 하고 들어가지 않는 지역은 변해야 한다. ‘나는 죽을 때까지 가부장적인 문화를 고수하면서 살 거야’라고 하면 그 마을은 이미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여태껏 이렇게 살아온 사람들을 어떻게 지금 바꾸냐고? 너무 서두르지 말라고? 아니다. 이게 대물림 된다. 전 세대가 없어진다고 끝나는 일이 아니다. 지금도 늦었다. 늦어도 너무 늦었다. 언제까지 사람을 내보내기만 하는 농촌의 여성차별적인 문화를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끌어안고 살 것인가? 마을이 텅 빈 우물이 되면 다시 물을 채워 넣을 수 없다. 더 늦기 전에 마을도, 농촌도, 농촌의 문화도, 농촌에 사는 이들도, 사람을 아끼고 존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 사람 안에 여자도 포함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인터뷰 & 정리: 이리)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 농촌 비혼여성 인터뷰는 삼선복지재단 지역청년 지원사업의 후원을 받아 진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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