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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애쓰지도, 매이지도 않고 ‘한량’처럼…

[비혼여성의 시골생활] 부러졌던 자리가 단단해지다, 김이인


※ 시골살이를 꿈꾸는 비혼·청년 여성은 점차 늘고 있지만 농촌에 그들을 위한 자리는 ‘없다’. 그들 대부분이 농촌사회에서 상대적으로 취약한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문화기획달>은 농촌에서 비혼·청년 시절을 경험한 일곱 명의 여성들과 만나, 그들의 생생한 삶의 현장을 들여다보고 삭제된 ‘개인’의 목소리를 기록했다. 인터뷰를 진행하고 원고를 쓴 이들 모두 농촌에서 비혼·청년의 삶을 경험한 남원시 산내면의 여성들이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김이인(가명, 37세) 샘을 처음 만난 건 6, 7년 전 마을학교에서였다. 샘은 마주칠 때마다 고른 치아를 드러내며 밝게 웃었다. 어떻게 늘 저렇게 같은 얼굴이지 싶을 만큼. 연기에 관심이 있다는 이인 샘 덕분에 오랜만에 영미 희곡을 훑어보고 간단한 즉흥극을 만들면서 함께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얼마 후 샘은 학교를 떠났다. 몇 번 마을에서 마주치다 그 인연도 그만, 다시 서울로 올라갔다는 소식을 들은 건 더 나중이었다. 나는 늘 산내에 살던 여성들이 산내를 떠나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했다. 왜 산내를 떠났는지, 지금은 어떻게 지내는지. 그래서 산내와 서울을 벗어나 이제 제주살이 3년 차에 접어든 이인 샘을 찾았다. 오랜만에 만난 이인 샘은 왜 서울에서 산내로 내려왔어야 했는지, 그리고 또다시 산내를 떠나 제주에서 살고 있는지 그간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 “늘 떠날 준비를 해요”  ⓒ촬영: 정상순


내달리다 뚝, 하고 부러진 삶


치료 때문에 산내를 떠났어요. 도시로 나가야 했죠. 마을학교 그만둘 무렵부터 하혈을 시작했어요. 내가 너무 날 몰아쳤나 싶었죠. 처음엔 ‘뭐지?’ 했고, 두 번째는 ‘조심해야겠네’ 그랬는데, 세 번째가 되니까 너무 무서웠어요. 확 두렵더라고요. ‘아, 여기서 혼자 있긴 어렵겠구나’ 싶대요. 병원은 멀고, 버스 타고 갔다 올 일도 아니고, 피는 계속 흐르는데 누구한테 부탁하기도 쉽지 않고요. 119는, 접수는 쉬울지 몰라도 올 때까지도 그렇고 병원까지 이송되는 시간도 한참 걸려요.


결국 아무한테도 도움 안 청했어요. 자주 연락하는 분이 있긴 했지만 그거랑은 별개죠. 개인적인 영역까지 보여주고 싶은 사람을 어디서든 못 만났어요. 깊숙이 사람을 담으니까 상처를 잘 받아요. 그래서 거리감이 필요해요. 근데 너무 멀리 둬요. 안 그러려고 노력해도 소용없더라고요. 나만 힘들어져서…. 그래서 지금은 그냥 나는 이런 사람인가보다, 해요.


평소에 스스로 에너지 넘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철인3종 경기도 했으니까요. 근데 치료해주시는 분이 이래요. 오랫동안 쌓인 게 약한 부분부터 터지는 거다, 공기 좋은 시골 산다고 다 괜찮은 거 아니다, 말하자면 몸이 통째로 ‘뚝’ 하고 부러진 거다. 그래서 물었죠. 다시 붙나요? 안 붙는대요. 너덜너덜해진 상태로 살다 가야 한대요. 예전처럼 붙일 수는 없다는 거예요. 치료받으면서 격한 운동 못 하게 됐을 땐 환장했어요. ‘스트레스는 어떻게 푸나. 술도 못 마시고... 뭘 어쩌라는 거야!’ 하면서 발광했어요.


열아홉 살부터 일했어요. 아니, 알바까지 치면 열다섯부터. 상고 졸업하고 취업했다가 다시 대학 진학하고, 졸업한 다음엔 산내 오기 직전까지 법무법인에서 일했어요. 동시에 여러 건을 담당해야 겨우 월급이 나오는 구조였죠. 사건을 의뢰한 사람들은 거의 가족이나 다름없어요. 근데 의뢰인 얘기 듣는 게 제일 힘들어요. 스트레스 때문에 불면증과 우울증 앓는 의뢰인들도 있고요. 진술 다 해놓고 막상 재판할 때 그런 말 한 적 없다고 번복하기 일쑤고…. 그래서 의뢰인 감정까지 케어해야 끌어갈 수 있어요.


1심에서 대법까지 가는 데 5년 걸려요. 재판 도중 의뢰인 세 분이 자살했죠. 그 법인에 5년 다녔어요. 이 일 더 하면 안 되겠다 싶데요. 의뢰인을 의뢰인으로만 봐야 하는데, 내가 그 사람 인생도 책임져야 할 것 같은 마음이 드니까. 새벽에라도 의뢰인한테 전화 오면 바로 나가야 해요. 얘길 들어줘야 하니까요. 지금도 전화벨 울리면 불안해요. 문자 받는 것도 싫고요. 술도 마셔보고, 10킬로 15킬로씩 뛰어봤지만 소용없었어요. 회사는 그만둬야 하는데 명분이 없으니까 공부라도 해야겠다고, 부모님들한텐 대학원 진학하는 조건으로 그만두겠다고 했어요. 논문 쓰고 일자리 찾다가 마을학교를 발견했죠. 산에 가고 싶었는데, 학교가 산에 있더라고요.


“여기 왜 왔어요?” 질문을 받다, 직면하다


산이 있어서, 그래서 산내를 선택했어요. 그게 제가 산내에 머문 이유의 처음이자 끝이기도 해요. 근데 산은 좋았는데 학교는 답답했어요. 대안학교라고, 공동체라고, 엄청 대단한 거 하는 것처럼 그러는데 막상 들여다보니까 아니에요. 아무리 많이 알아도 행동으로 안 옮기면 그건 아는 게 아닌데…. 본인은 실천 안하면서 남한테는 안내하고 강요해요. 아니, 자기도 안 되는데 무슨. 공동체에 대해서 맨날 얘기해요. ‘공동체’, 참 좋은 단어죠. 근데 학교 때문에 지금도 저한테 안 좋은 이미지로 남은 단어가 그런 거예요. ‘마음 나누기’랄지, ‘드러내기’랄지, 이런 말들에는 여전히 부정적이에요.


실은 학교 들어가자마자 보였어요. 시간이 지나면 이해될 거라 생각했죠. 여기 구조는 이렇게 돌아가니까 이럴 수밖에 없겠다, 그렇게 이해하려고 했어요. 근데 시간이 지나도 이해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예요. 결국 내 안에서 문제를 봤죠. 학교 오기 전 직장도 생각해보면 별반 다르지 않았어요. 언행일치가 안 되는 거, 공사 구분 못하는 걸 엄청 힘들어해요. 일찍 직장생활을 시작해서 그런가, 깔끔하게 자기 일 못하면 미쳐요. 근데 여기나 저기나 뭐 하나씩 흘리고 다니는 사람들, 비서가 필요한 사람들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문제 제기했죠.


근데 외려 이런 질문을 받았어요. “선생님은 여기 왜 왔어요? 어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왔어요? 선생님은 아직도 도시에 물들어서 자본주의에서 얘기하는 거 반복하러 온 거예요? 그 시각으로 우리를 평가하는 거 아니에요?” 그래서 생각해 볼게요, 했죠. 근데 시간이 지나도 좁혀지지 않았어요. 출퇴근할 때마다 걸으면서 생각했어요. 내가 왜 아웅다웅하고 있지? 좋은 점도 많고 배울 점도 많은 사람들인데, 내가 여기 관리하고 감시하러 온 것도 아닌데, 왜 쓸데없는 데 포커스를 맞추고 날 좀먹고 관계도 해치면서 이 좋은 데서 이러고 살까…. 2년 지나고 놨어요. 마음을 놓으니까 애착도 없어지데요. 그럼 밥벌이 70만 원 때문에 다녀야 하나? 그건 옳지 않다, 아까운 내 인생 이렇게 쓰지 말자, 좋게 인사 나누는 마을 주민으로 살아도 충분하지 않나, 싶었죠.


▶ 김이인 샘의 책상달력. 소소한 일상의 기록.  ⓒ촬영: 정상순


내 안의 힘을 찾게 해준 ‘사람책’들!


다들 제가 학교 그만두면 당장 산내 떠날 줄 알았대요. 아니라고, 전셋집 얻었다고 하니까 선생님들이 놀랐죠. 그때부터 비로소 마을 주민으로 살았어요. 여성농업인센터에서 주관하는 문해교실을 진행했는데, 솔직히 학교에서 받았던 상처를 어머님들과 수업하면서 회복했다 싶어요.


그동안은 내 안에 힘이 없었기 때문에 돈과 명예가 전부인 줄 알고 살았어요. ‘나 자신이 누군지’, 내 실체에 대해 서른까지 고민해 본 적이 없어요. 그럴 여유가 없었어요. 그래서 선생님들한테 질문 받았을 때 멍했어요. 기분 나빴죠. 실은 질문 자체를 이해 못 했어요. 짜증 나더라고요. 한마디로, 똥인지 된장인지 몰랐으니까. 돌이켜보면 꼭 필요한 질문이었어요. 근데 외부에서 질문을 받으니 거부감이 드는 거예요. 그 질문이 내 안에서 올라올 수 있었던 건 어머님들 수업 덕분이고요.


어머님들이랑 수업하는 건 수업이라기보단 거의 뭐, 인생 그 자체인 ‘사람책’? 그래요. 말 그대로 사람책 읽는 거예요. 부모님 연세가 많으셔서 그런지 어머님들 사이에 있는 게 좋았어요. 예쁨 받는다는 느낌이랄까, 사랑받는 느낌. 도시에서 한창 지쳐있을 때 바로 학교로 갔기 때문에 힘들었는데, 어머님들 그냥 보고 있으면 좋았어요. 어머님들 표현이 살갑진 않지만 살아온 얘기를 듣는 게 좋았어요. 내가 뭔가 좀 더 열심히 해야겠다 싶었어요. 어머님들 한글 가르쳐 드리러 간 건데 오히려 내가 어머님들 기를 받아서 새로 공부를 시작하기도 했고요. ㄱ, ㄴ부터 시작하신 어머님이랑 지금은 문자도 해요. 놀랍죠.


그전까진 산책하거나 산에 가거나 몸을 힘들게 해 에너지를 고갈하면서 겨우 정신을 또렷하게 만들었는데, 그럴 필요가 없어졌어요. 어머님들이랑 웃고 떠드는 거로 충분했으니까. 한글교실이 아니라 거의 노래교실이에요. 어머님들이 막 졸거든요. 스트레칭도 했다가 노래도 불렀다가. 진도는 거의 안 나가는데 나중에 보면 다 아세요. 어머님들이 그렇게 꾸준히 하시는 거예요. 모두들 어머니, 며느리, 부녀회장, 이런 직책 떼고 소학교 다니던 기분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전 그런 어머님들이 너무 사랑스럽고, 어머님들은 저한테 막 고맙다고 하시고.


어머님들 삶은 단순한 것 같으면서도 명확해요. 그분들과 자연스럽게 살아온 얘기도 하고 에너지를 주고받으면서 내가 어렸을 때 고생했던 것들을 솔직히 풀었다고 봐요. 내가 누군지 모를 때는 두려웠고 직면하기 싫어 계속 피했어요. 법인 그만둘 때 직감적으로 때가 왔다 싶었죠. 여행 다니면서 내 실체가 드러났고, 구슬이 꿰어진 건 마을학교예요. 어머님들이랑 시간 보내면서 더 단단해졌고요. 그 시절이 없었으면 생태, 평화, 인권 이런 것을 접할 기회도 없었을 거예요. 학교생활이 너무 순조로웠으면 내 생각을 확장하지 못했을 텐데, 의심할 수 있는 힘을 학교가 줬어요. 그러면서 벗어나는 계기도 됐고.


도시의 삶은 아닌 것 같아요


딱히 공간이 중요하진 않아요. 돈 벌면 여행하고 또 돈 모이면 여행하고 그런 경험 때문에 자신감이 생겼어요. 기본적인 생계가 유지되면 국내든 국외든 안 가려요. 생계가 안 되거나 기반이 없으면 심리적으로 요동치는데, 그다음부터는 신경 안 써요. 근데 아무리 그래도 도시의 삶은 아닌 것 같아요. 산내 있다가 다시 서울 가서 일하는데 딱 신호가 오더라고요. 못 살겠다, 떠나야겠다.


근데 앞으로의 삶을 위해 참아야 할 순간이 있긴 해요. 경력이 있어야 다른 데로 자유롭게 움직이잖아요. 새로운 걸 시작할 때 어렵게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에요. 그래야 오래 남으니까. 덕분에 서울에서 2년 버티면서 한 일을 여기 제주에서도 밥벌이로 삼고 있죠. 지금 사는 곳도 시내는 아니에요. 앞으로도 도시적인 삶보다는 이런 삶을 선택할 것 같아요. 그게 그냥 편해요. 혼자 오롯이 집중할 시간도 있고. 말로 설명하긴 어렵지만, 스스로 꾸미지 않고 본래의 모습 그대로 가만히 놔둘 수 있는 곳에 살고 싶어요.


일상도 아주 단출해요. 오후 1시에 출근하고 집에 오면 밤 10시 40분쯤 돼요. 씻기 전에 스트레칭이랑 근력 운동하고, 11시 15분이나 20분쯤 씻은 다음 책 읽으면서 빈둥대요. 그러다 보면 12시. 잠은 7시간 정도 채우면 자연스럽게 눈이 떠져요. 사과, 삶은 달걀. 라떼 한 잔. 이게 아침 식사예요. 8시쯤엔 집에서 나가요. 걸으러. 9시 반이나 10시쯤 돌아와서 샤워하고, 점심 먹을 거 준비하고, 10시 반부터 햇살 아래서 책을 봐요. 그리고는 12시 10분이나 20분쯤 집을 나서서 12시 50분에 직장에 도착해요. 10분 전에 도착하는 거, 아주 오래된 습관이에요.


▶ 김이인 샘의 아침식사. 사과, 삶은 달걀, 라떼 한 잔. ⓒ촬영: 정상순


날씨가 참 중요해요. 도시 살 땐 그런 거 없었어요. 전혀 인식 못 했죠. 커리어 우먼으로 바쁘게 일하는 거, 이동하면서 김밥 한 줄 먹으면서 전화 받는 거, 멀티플레이어로 일하는 거, 그런 게 잘사는 건 줄 알았어요. 지금은 달력에 한 끼 한 끼 뭐 먹었는지까지 다 기록하는데, 그땐 그럴 시간이 어디 있어요. 날 내몰면서 살았어요. 나 스스로 상품이면서 세공사면서 그랬죠. 지금의 나처럼 사는 사람 보면 빈둥댄다고 욕했어요. 지금 난 엥겔지수만 높으니 경제에 도움 되는 인간이 아니죠. 그땐 자본주의가 원하는 인간이었는데, 지금은 아니에요. 야간 근무라 어쩔 수 없이 차를 가지고 다니지만 주로 대중교통 이용해요. 자가용으로 다니는 것보단 기차가 좋고요. 혼자 차 몰고 다니는 거 정말 아까워요. 내가 뭐 특별히 생태적이라서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습관이에요.


10년 후에도 사는 모습은 지금이랑 별반 다르지 않을 거예요. 마흔일곱이든 쉰일곱이든 밥벌이하고 있을 걸요? 한량처럼. 제 생각에 진정한 한량은 자기 몸뚱이로 사는 사람이에요. 자기 인생 책임지면서 사는 사람. 애쓰지 않고 되는대로, 매이지 않고.


그 여자의 연애란


아, 근데 요즘 노력하는 게 하나 있어요. 연애요. (웃음) 여기 와서 소개팅 세 번 했어요. 37년 동안 한 번도 안 했던 소개팅을. 노력에 비해 성과는 없어요. 노력한다고 되는 게 있고 안되는 게 있잖아요. 연애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어요. 맘에 드는 사람 있으면 적극적인데…. 혼자 있는 게 익숙하면 남이랑 같이 있는 게 어렵잖아요. 혼자 있으나 같이 있으나 상관없어야 안 매이는 건데, 자연스럽게 안 되네요.


사랑하는 사람을 십 년 동안 못 만났어요. 왜 외국까지 나가겠어요. 이렇게 적극적으로 인생을 개척하는데 왜 못 만나는지… 3초 끌림이라고 하잖아요. 사람이다, 남자다 딱 구별돼요. 남자 못 만났어요. 섹스하고 싶어요. 보통은 자위로 해결하죠. 자위에 만족하며 지낸 세월이 너무 오래됐어요. 십 년 동안 자위로 해결했는데 십 년 후에도 그럴 거라고 생각하면 아, 정말 너무 슬퍼요. 근데 원나이트는 할 수 없더라고요. 난 행위 자체보다 어떤 사람과 하느냐가 중요해요. 그 사람하고만 하고 싶어요. 연애 자체가 힘든 성향이에요. 섹스만은 또 안 되고. 골치 아파요.


함께 부대끼고 싶어요. 근데 몸이 부대끼기 전에 정서적인 교감이 있어야 하니까 노력 중이긴 한데, 내 성향을 아니까 쉽진 않겠다 싶어요. 50대 초반 지인한테 나 연애하고 싶어요, 했더니 “아이고, 그냥 살던 대로 살아. 인연이 있으면 같이 사는 거고 인연 없으면 그냥 사는 거지. 니 짝이 스님인 갑다” 그러시대요. 그건 진짜 아닌데. (웃음)


▶ 다이아몬드 모양의 김이인 샘의 발  ⓒ촬영: 정상순


이인 샘 집을 나설 즈음 밤새 내리던 비가 그쳤다. 현관엔 신발 두 켤레가 문을 향해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샘은 늘 떠날 채비를 한다고 했다. 늘 여권을 가지고 다닌다고 했다. 짐을 쌌다 풀었다 하는 것이 일상이라고도 했다. 무지외반증(엄지발가락 관절이 돌출되면서 휘어지는 족부관절 질환)을 앓는 다이아몬드 모양의 발로 그는 달리다 걷다 비로소 멈춰 섰다. 발길 닿는 곳 어디든 늘 그가 그의 편이 되어주었으면 좋겠다. (글 사진. 정상순)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 농촌 비혼여성 인터뷰는 삼선복지재단 지역청년 지원사업의 후원을 받아 진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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