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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스트를 위한 나라는 없다

<심미섭의 젠더 프리즘> 뉴욕 여성행진에 참여하다


※ 세상을 바라보는 20-30대 페미니스트들의 관점과 목소리를 싣는 ‘젠더 프리즘’ 칼럼입니다. 필자 심미섭님은 여성주의 정당 창당을 위한 모임 페미당당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일다) feminist journal ILDA 바로가기

 

트럼프 취임 이튿날, 끝없는 페미니스트 시위행렬

 

뉴욕 여성행진에 함께하기 위해 사전 온라인 신청을 진행하다가 당황하고 말았다. 행진 시작은 오전 10시 30분이라는데 오후 2시부터 참여하면 된다는 안내를 받은 것이다. 시위대가 한 번에 너무 많이 몰릴 상황을 염려한 운영진이 참여자 성(姓)별로 행진에 합류하는 시간을 다르게 정했다는 메시지였다.

 

뭐야? 그럼 아침 열 시 반부터 두 시 넘을 때까지 새로운 사람이 끊임없이 들어오며 행진이 계속된다고? 의아해하며 묻자 옆에 있던 뉴요커 친구는 왜 그러냐는 듯이 쳐다보며 대답했다. 당연하지!

 

▶ "나는 뉴욕 여성이다"라고 쓰인 팻말을 들고 행진하는 참가자  ⓒ심미섭

  

1월 21일 강남역 10번 출구에서 출발한 서울 여성행진(Women’s March on Seoul)에 눈 맞으며 참여한 친구들이 보내준 사진을 구경하다가 잠들고 일어났다. 미국 여성행진을 시작할 차례였다. 페미니즘 스티커와 뱃지로 꾸며놓은 자켓을 입고 축제 가는 기분으로 나섰다. 뉴욕에서 태어나고 자란 이모와 이모부는 이미 직장 동료와 함께 시위에 참여하겠다고 집을 떠난 후였다.

 

지하철역부터 분홍색 털모자를 쓴 사람들이 몰려있었다. “보지모자(#pussyhat)”라고 이름 붙여진 털모자는 미국 여성행진의 상징물이었다. 행진에 나서지 못하는 사람도 직접 털실로 분홍색 모자를 만들어 주변이나 주최 측에 전달하는 방식으로 시위에 함께할 수 있었다.

 

열성적인 페미니스트는 이미 새벽에 주(主)시위가 열리는 워싱턴으로 출발하고 난 이후였다. 워싱턴으로 향하는 모든 교통편이 매진되었다는 뉴스를 보았기에, 뉴욕엔 그렇게 많은 시위대가 몰리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짐작하였다. 큰 착각이었다. 그랜드 센트럴 역에서 내려 행진에 합류하기 전부터 시위 인파에 갇혀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다.

 

뉴욕 여성행진이 한국에서 경험한 페미니즘 시위와 다른 점은 시위대가 다양한 젠더, 연령대, 인종으로 구성되었다는 것이다. 중장년 여성이 행진 선두에 서거나, 어깨에 아이를 올려놓은 부부가 참여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직접 만들어온 다양한 손팻말이 색색으로 거리를 메운 모습도 눈에 띄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모인 가족이나 친구끼리 박스 종이를 뜯어 기발한 문구를 쓰고 꾸며서 들고 나오는 모습이 쉽게 상상되었다.

 

트럼프 반대, 동일노동 동일임금, 안전한 임신중절권 보장, 퀴어 권리 주장 등 다양한 문구를 들고 모인 시위대는 맨해튼 도심을 점령하고 트럼프 타워를 목표로 걸어갔다. 오전에 시작된 여성행진은 두 시를 훌쩍 넘겨 해가 질 때까지 끝나지 않았다.

 

차별적이고 반여성적인 언행으로 페미니스트의 규탄 대상이 된 트럼프가 취임 선서를 한 지 만 하루만이었다.

 

▶ 시위대가 이번 여성행진의 상징인 분홍 털모자를 쓰고 모여 있다.   ⓒ심미섭


세계의 페미니스트여 함께 걷자 

 

선거 당일까지 뉴욕에 사는 페미니스트 친구들은 당연히 힐러리가 당선될 것으로 생각하였다고 한다. 미국 첫 여성 대통령이 탄생하는 장면을 지켜보기 위한 파티가 도시 곳곳에서 열렸다. 친구와 함께 개표 방송을 보다가 소리 지르고 울면서 파티장을 나왔다는 이야기를 서로 다른 사람에게 몇 번이고 반복해 들었다.

 

결국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힐러리가 감동적인 패배 인정 연설을 하고 난 이후에도 미국의 페미니스트는 포기하지 않았다. 워싱턴을 비롯한 미국 전역에서 대규모 여성행진을 준비하였다. 미국 바깥에서도 “자매 행진”에 함께하려는 페미니스트가 모여 국제적인 공동 행동을 조직하였다.

 

몇몇 한국 언론은 전 세계에서 동시에 일어난 여성행진을 “트럼프에 반대하는 시위”라고 소개하였다. 이 시위를 그렇게 규정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 왜 미국 페미니스트가 워싱턴과 미국 지역 곳곳뿐 아니라 세계 전역의 페미니스트에 연대를 구하였는지, 왜 트럼프 대통령과 직접 상관없는 타국 페미니스트까지 이 행진에 동참했는지에 대하여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미국이 세계에 영향이 큰 “초강대국”이기 때문에 세계 페미니스트가 “동참했다”고 생각한다면, 이 역사적인 국제 연대에 대해 크게 착각하게 된다.

 

과거 여성주의 운동은 나라별로 시차가 굉장하였다. 미국과 유럽에서 여성 투표권을 요구하는 서프러제트(suffragette) 활동이 치열하던 시기, 아시아에서는 이와 관련된 행동이 없다시피 했다. 자유로운 임신중절권을 요구하며 싸우던 서구의 전통도, 한국의 낙태죄 폐지 투쟁과는 다른 결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시차 때문에 어쩌면 과거 개발도상국 페미니스트는 이미 발전한 “서구에서 배우자”는 태도를 전략으로 취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현재 페미니즘 상황은 조금 다르다. 적어도 젊은 페미니스트에게 있어서는 그러하다. 최근 페미니즘 부흥은 각 국가 내부에서 여성주의 전통이 단절된 현실적 배경과 전 세계적 동시대성을 특징으로 한다.

 

뉴욕에서 활동하는 페미니스트 친구가 증언하길, 미국에서도 얼마 전까지만 해도 페미니스트라고 하면 “앵그리 페미니스트”로 치부하는 경향이 강했다고 한다. 그런데 요즘은 생활 속 어디서나 페미니즘을 접할 수 있다. 페미니스트라고 선언하는 사람이 늘어났고, 옷가게에 가면 페미니즘 문구가 새겨진 티셔츠가 걸려있다. 서점 베스트셀러 목록은 페미니즘 이론이나 에세이 서적이 차지하였다. 뉴욕에서 인기 있는 페미니즘 서적은 이미 한국에서도 번역되어 출간된 경우가 많았다. 우리는 같은 글을 읽고 같은 영상을 보며 같은 구호를 공유하고 있다.

 

▶  뉴욕에 거주하는 한인 친구들과 함께 행진하였다.   ⓒ심미섭

 

심지어 매일매일 접하는 답답한 상황도 똑같았다. 한 뉴욕 페미니스트는 직장 상사에게 외모에 대한 언급을 듣고 성차별이라고 지적했더니 “칭찬인데 어떻게 차별이 되느냐”라는 대답을 들었다고 불평하였다. 반(反) 페미니스트 세력은 페미니스트에게 “팩트가 없다”고 공격하며 “페미니즘이 아니라 이퀄리즘(equalism)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고 했다. 성폭력 사건이 일어나면 미국 언론은 “좌절된 가해자의 꿈”에 대해 보도한다고 했다. 대화 내내 한숨 섞인 외침을 숨기지 못했다. 뭐야, 한국이랑 똑같잖아!

 

서울에서 미국의 페미니즘을 지켜볼 때, 나와 친구들은 미국 상황은 우리보다 훨씬 나을 것이라고 막연히 상상하였다. 물론 제도나 사회적 인식 차원에서 보았을 때 미국 여성 인권은 한국 여성이 처한 그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발전해 있다. 하지만 최신 페미니즘 이론을 익히고 인터넷을 통해 세계와 소통하며 자신이 발 디딘 사회를 바꿔나가려는 젊은 페미니스트가 마주한 상황은 미국이나 한국이나 비슷하였다.

 

“보지를 움켜잡(grab her by the pussy)”으며 성추행한 경험을 자랑스럽게 떠벌리며, 여성 경쟁자에게 “추잡한 여자(nasty woman)”라고 욕하는 트럼프에 대항하는 것은 미국 페미니스트뿐만이 아니다. 우리 모두 트럼프‘들’이 내보이는 여성혐오‘들’에 맞서고 있다. 트럼프의 당선으로 세계의 페미니스트는 알아버린 것이다. 우리는 모두 비슷한 혐오와 싸우고 있으며, 페미니스트를 위한 나라는 없다는 사실을.

 

세계의 페미니스트는 단순히 미국 대통령이 반여성주의자라는 점에 항의한 것이 아니다. 여성행진이 가부장제 박살, 성폭력과 여성혐오 규탄, 여성에 대한 취업 차별과 임금 차별 철폐 등 다양한 페미니즘 이슈를 주장하지 않았다면 세계 여성행진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 따라서 이번 행진은 “반트럼프 시위”로만 규정할 수 없다. 미국 외 다른 나라의 여성은 미국 페미니스트를 따르거나 배워야 할 대상이 아닌, 같은 문제에 대해서 싸우고 있는 동료라고 여겼다. 이번 여성행진을 통하여 세계의 페미니스트는 시차 없는 국제 연대를 이루었다. 우리는 먼 이국의 타인이 아니라 조국 없는 “자매”로서 함께 걸었다.

 

[심미섭 필자 소개] 대학원에서 철학을 공부하는 중 난세에 휩쓸려 페미전사가 되어버렸다. 여성주의 정당 창당을 위한 모임 페미당당에서 활동하고 있다. 학업과 운동을 둘 다 아름답게 이루려고 노력중이다. (일다) feminist journal ILDA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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