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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켄즈’의 얼굴
[잇을의 젠더 프리즘] 드러내기와 모자이크
연말에 <위켄즈>(이동하, 2016)를 봤다. 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의 중창단 지보이스를 담은 뮤지컬 다큐멘터리로, 그들의 음악만큼이나 꾸밈없는 영화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온몸으로 부르는 노래 위에 흐르는 지보이스 단원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이다. 특히 연대의 현장에서, 지치고 멍든 사람들의 곁에서 지보이스가 열심히 노래하는 순간을 보여줄 때 그들의 노래는 그 어떤 다짐들보다 큰 위로로 닿는다. 표정이 풍부한 그 얼굴들은 관객을 자신의 삶으로 초대하는 것 같다.
▶ 이동하 감독 다큐멘터리 영화 <위켄즈> 2016
나는 원하지 않게 얼굴을 모자이크 당한 적이 있다. 성폭력상담소에서 일했던 지난여름의 일이다. 사진을 모자이크할 줄 알았다면 애초에 찍지 않거나, 차라리 얼굴이 아예 드러나지 않는 방향으로 했을 것이다. 촬영에 동의했는데도 내 얼굴을 모자이크를 했다는 게 무척 당혹스러웠다. 성폭력 피해자로 보일세라 알아서 ‘신경’써준 것이었을까, 아니면 성폭력 피해자‘다운’ 이미지를 원했던 것일까. 이용당하거나 침해당했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 경험이었다.
촬영에 두려움이 없진 않다. 여성으로 ‘보이는’ 사람들은 늘 시선으로 품평당하는 일상을 살고 있고, 카메라는 그러한 폭력의 도구다. 사진 유포는 강남역 여성살해 사건 당시 추모참여자들을 가장 광범위하게 괴롭힌 방법이다. 연예인에 의한 성폭력 사건이 지난해 연일 보도될 때, 피해를 호소한 사람들에 대한 흔한 공격은 얼굴을 공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진실공방 속 어느 ‘진실’과도 무관한, 피해자의 얼굴을 원했다. ‘얼굴을 가리고 살아가는 게 좋을 것이다!’ 얼굴은 우리의 삶으로 초대하는 초대장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을 짓밟고 싶은 자들이 몰려드는 입구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내 얼굴은 ‘보호’와 ‘배려’가 필요했을까? 익명으로 남겨지는 것은 우리를 안전하게 만드는가? 안전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동시에 위험할지도 모른다. 나는 가끔 익명채팅을 하는데, 내가 나에 대한 정보를 통제하기 때문에 보다 안전하리라는 계산을 염두에 둔다. 우리는 대체로 우리를 덜 드러내는 것이 더 안전하다고 믿는다. 그러나 때로는 익명채팅 이용자 스스로도 익명의 상대를 위험하다고 상상하는 것을 본다. 사회가 익명채팅에 유해하고 위험한 인상을 부여하고 있고, 우리는 통념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이 사회는 언제든 내 얼굴을 지울 준비가 되어 있다. 그것이 ‘안전하니까’. 모자이크는 마치 나를 위한 배려처럼 행해지지만, 그것이 우리를 가면 씌우는 방법은 아닌지 의심한다. 내 얼굴 사진이 함부로 돌아다녀도 좋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다만 철저히 잘 보호되는 것이 우리가 바랄 수 있는 변화의 전부는 결코 아니라는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안전은, 존엄은, 인권은, 얼굴을 드러내도, 내가 나 자신으로 존재해도 좋은 것이어야 한다. 그것을 위해 우리는 세상이 상상하는 대로 남겨지지 않고 다채로운 표정과 힘 있는 목소리를 드러내왔을 것이다.
▶ 이동하 감독 다큐멘터리 영화 <위켄즈> 한 장면. 2016
<위켄즈>의 한 장면. 동성결혼식의 축가를 부르는 지보이스에게 누군가 오물을 뿌린다. 무대를 마치고 한 단원은 ‘이렇게 착하고 예쁜 사람들’을 향한 혐오폭력에 분노한다. 이 착하고 예쁜 사람들. 그 말은 유독 아름답거나 선한 사람들이 아니라, 내 주위의 많은 얼굴들을 불러왔다. 어떤 기쁨과 슬픔을 느끼고 사는지 세상이 주목하지 않을, 나 같은 사람들의 얼굴.
그러나 영화는 그 작은 우리들이 지보이스 같은 공동체의 힘으로 나날이 우아해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우리는 서로의 용기야’ 라는 말처럼, 서로는 서로의 용기가 되어서 변화를 앞당기고, 우리를 보고 싶어 하지 않는 세상 속에 우리의 얼굴을 만들어간다. ‘세상아 너의 죄를 사하노니’는 그래서, 세상을 향해 부를 수 있는 노래가 된다. 이 용기에 답가가 있기를. (잇을) feminist journal IL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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