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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순수하게 여성일까?
<이가현의 젠더 프리즘> 2030 여성 페미니스트 캠프를 준비하며
※ 세상을 바라보는 20~30대 페미니스트들의 관점과 목소리를 싣는 ‘젠더 프리즘’ 칼럼입니다. 필자 이가현님은 불꽃페미액션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 일다 feminist journal ILDA
젠더 정체성에 의문을 갖기 시작하다
나는 시스젠더(Cisgender. 신체적 성과 사회적 성이 일치하는 사람. 트랜스젠더의 대응 용어) 여성이다. 질을 가지고 있고, 아직까지는 스스로를 여성이라고 생각한다. 지난 해 강남역 여성살해 사건을 보고 피해자와 깊은 동질감을 느꼈고, 무력감과 공포 그리고 분노를 동시에 느꼈다. 보건복지부의 인공임신중절 의료인 처벌 강화안을 마주했을 때는 자궁을 가진 사람으로서 또 분노했다. 여성에게 가해지는 차별과 폭력, 여성의 몸을 ‘소유물’로 간주하는 사회에 당사자로서 분노했다. 그런데, 나는 언제부터 ‘여자’였던 걸까?
▶ 2030 여성 페미니스트 캠프 기획단의 ‘나의 페미니즘 나무 만들기’ 프로그램 시연 모습.
2월 10~12일에 열리는 ‘2030 여성 페미니스트 캠프’(이하 페미캠프)를 준비하고 있다. 이번 페미캠프는 참가자를 여성(여성으로 정체화하는 사람)으로 제한했다. 소위 ‘한남’으로 불리며 남성성을 떨치는 사람들의 참가를 제한한 것이다.
이유는 대략 이렇다. 페미니즘 이야기를 할 때조차 남성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계속하면서 여성들이 말 할 기회와 시간을 앗아가는 결과를 낳거나, 남성으로 보이는 사람이 있을 때 여성들이 깊은 이야기를 꺼내놓지 못하는 검열이 일어난다는 증언이 있었기 때문이다. 남성으로부터의 성폭력 경험이 있는 여성들이 남성과 함께 있는 것을 불편해 할 수 있으니, 심리적으로 안전한 공간에 있어야 마음을 열 수 있게 될 것이라는 이유도 있었다.
하지만 캠프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고민이 깊어지기 시작했다. 남성과 여성을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 보지가 있으면 여성이고, 자지가 달려있으면 남성인가? 아니면 외모가 남자 같으면 남성이고 여자 같으면 여성인가? 성확정 수술을 하지 않은 MTF 트렌스젠더는 외모만 보았을 때는 남성으로 간주될 수 있지만, 젠더는 여성인 경우다. 반대로, 보지가 있고 외모가 여성으로 보여도 자신을 남성 또는 여성 어느 것으로도 정체화하지 않는 젠더퀴어의 경우도 있다.
케이트 본스타인이 쓴 <젠더무법자>(조은혜 역, 바다출판사, 2015)를 보면 순수한 정체성은 없다고 한다. 여성, 여성으로 정체화한 사람이 순수한 여성일까? 나는 꽤 오랜 시간 동안 나를 여성으로 생각했지만 <젠더무법자>를 읽고 지금은 내가 순수한 여성이라고 확신하지 않는다. 나를 구성하고 있는 많은 성질들은 여성으로 규정할 수 없는 것들도 많다. 그럼에도 나를 여성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까?
▶ 케이트 본스타인 <젠더무법자>(조은혜 역, 바다출판사, 2015) 중에서
우리 개개인은 다양한 정체성으로 구성돼있다
“△△아, 넌 너를 남성이라고 생각하니?”
“음… 그렇게 생각하진 않아…. 사회적으로 규정된 남성으로 나를 설명하기에는… 안 맞는 게 너무 많아서…”
“뭐가 안 맞는뎅?”
“난 쿨하지 않고… 겁이 많고, 불안이 많고, 소심한 사람이라… 이런 부분이 안 맞는 거 같아.”
“그럼 난 남성과 사귀고 있는 게 아닌거넹.” -애인과의 카톡 내용
나는 살면서 이성애 연애만 해왔다.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편안하다고 느꼈다. 여성은 남성에게 끌리고 남성은 여성에게 끌리는 것이 ‘정상’이라고 생각되는 사회에서, 나는 관성적으로 남성과 사랑을 하려고 결정했다. 하지만 나의 젠더 정체성을 의심하기 시작하니, 나의 성적 지향에 대해서도 의심을 하게 되었다.
애인을 비롯해 주변 남성들에게 물어본 결과(물론 페미니즘을 공부한 남성들이다), 자신을 순수하게 남성이라고 정체화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고 싶지 않다거나, 사회에서 요구하는 남성성의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다거나 하는 이유들이 근거가 되었다. 그러면 내가 지금까지 사귀었던 사람들이 남성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단지 고추가 달렸다는 이유로 남성을 규정하지 않는다면, 나는 이성애 연애를 해왔다고 말할 수 없지 않을까? (혼란)
이렇게 어떤 몸으로 태어났느냐가 정체성의 기반이 되는 것이 아닌 것 같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떤 몸으로 태어났느냐가 내 의사와 상관없이 나의 정체성을 구분 짓고 계속해서 확인시키기도 한다. 여성의 몸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 아니 여성의 몸이 아니어도 치마를 입었거나 머리가 길다면 자연스레 여성으로 간주되어 혐오와 폭력의 대상이 된다. 내 지인은 남성인데 머리가 길다는 이유로 ‘아가씨’라고 부르는 사람들을 자주 마주쳤다. 운전을 하는데 대뜸 ‘아줌마가 왜 운전하러 나왔냐’며 욕을 먹기도 한다.
젠더 정체성을 구분하고 제한하는 것이 모호한 일이라는 것을 페미캠프를 준비하며 새삼 깨닫고 있었다. 기획단의 결론은 지정성별과 관계없이 여성으로 정체화한 사람이거나, 자신을 여성으로 정체화하지 않더라도 지정성별이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사회로부터 차별과 억압을 경험한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 매우 어려운 토론이었고 ‘행동하는 성소수자 인권연대’에 자문을 받으면서도, 답이 없는 질문에 직면할 때가 많았다.
젠더가 그런 것 같다. 답이 명확한 젠더는 아무래도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내가 여성이라고 하더라도 나는 다양한 정체성으로 나를 구성하고 있고, 아마 다른 여성들도 그러할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 ‘여성’이라는 정체성으로 만나서 어떤 이야기를 나누고 어떤 감정들을 경험할 수 있을지 정말 기대가 된다. 더 많은 사람들이 페미캠프에 함께하길 바란다! (일다) feminist journal ILDA
※ 2030 여성 페미니스트 캠프 페이스북 페이지: https://facebook.com/2030feminist
참가비: 65,000원/ 40,000원(부분 참가) 신청하기: http://goo.gl/E0D2z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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