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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평범한 OO
[머리 짧은 여자, 조재] 한때 크게만 보였던 꼰대 스승에 대하여
휴대폰이 울린다.
“관장님”
흠칫 놀라서 전화를 받았다. 번호는 왜 바꿨느냐, 오늘 뭐 하느냐 등등 안부를 물어왔다.
두 달 전, 이상한 연락도 많이 오고 번호도 꽤 오래 써서 겸사겸사 번호를 바꾼 참이었다. 휴대폰에 있던 연락처를 1/5 정도로 줄여, 앞으로 연락을 계속하고 싶은 사람들에게만 번호가 바뀌었다고 문자를 보냈었다. 관장에게 바뀐 번호를 알려드리지 않았는데, 어찌 내 번호를 알아내 전화를 한 것이다.
어쨌든 요지는 단증과 관련된 엑셀 파일을 수정해 달라고 전화를 한 것이었다. 예전에 체육관에서 사범으로 일할 때, 협회의 유단자 목록을 엑셀 파일로 만들어 놨었다. 아마 손 봐야할 곳이 생긴 모양이었다. 마침 그날 일정이 일찍 끝나 오랜만에 체육관에 들르기로 했다.
▶ 그녀 혹은 그 ⓒ일러스트레이터 조재
거의 일 년 만에 가본 체육관은 여전했다. 운동하는 아이들은 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지만, 공간만은 여전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체육관을 대충 둘러보고 관장님이 부탁하신 엑셀 파일을 손봤다. 다른 프로그램 설치도 부탁하셔서 컴퓨터로 이것저것 만지고 있었는데, 관장님이 왜 바뀐 번호를 안 알려줬냐며 또 말을 걸어왔다. 자연스럽게 왜 번호를 바꿨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이상한 사람이 연락해서 바꿨어요.”
“이상한 사람? 남자야?”
“네, 뭐 거의.”
“너한테 관심 있나 보다.”
“한 번 본 사람이고, 일 년 만에 갑자기 카톡 프로필 사진을 보고 연락한 거예요.”
(첫 연재 때 언급했던 무례한 사람이 일 년 만에 카톡을 보냈었다.)
“그러니까 널 좋아하는 거지. 아니면 네가 꼬리친 거 아냐?”
여기까지 말이 나오니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 건조하게 “아니요” 라고 대답하고 컴퓨터 모니터를 노려봤다. 내가 왜 일을 도와주러 와서 이런 소리나 듣고 있어야하는지…. 새삼 이곳에서 몇 년간 운동을 했다는 사실이 놀랍게 느껴졌다. 원래부터 관장님이 막말을 많이 하는 편이라, 불편하긴 했지만 그게 어느 지점에서 불편한 건지 그때는 마땅한 언어가 없었다. 언어가 없으니 설명할 길이 없어 내가 괜히 예민하게 생각하는 건가 싶기도 했다.
‘너는 머리가 짧아서 더 애처럼 보인다. 사범이 너무 어려보이면 학부모들이 무시하니까 머리를 좀 기르고 화장도 해봐’, ‘네가 애마부인이야? 왜 올라타’(같이 운동하던 친구가 뜀틀 넘기를 하다가 들었던 말), ‘여자애가 좀 사근사근한 맛이 있어야지.’ 그 외에도 어깨동무를 한다거나, 허리와 엉덩이를 밟는 마사지를 시킨다거나 등등. 나열하면 한도 끝도 없다.
처음 내가 사범으로 운동을 계속하고 싶다고 말했을 때, 관장님은 여자 사범은 처음이라 신경이 많이 쓰인다고 말했다. 그래서 예전에 지도했던 남자 사범들을 대하던 것처럼 때리거나 혹독하게 대하진 않았지만, 말을 조심해야 한다는 건 몰랐던 모양이다. 사실 상대가 여자건 남자건 상대에게 막말을 내뱉고,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건 잘못된 일인데 말이다.
예전에는 크게만 보였던 그였는데, 거리를 두고 보니 그저 그런 보통의 꼰대 한국남자로 보인다. ‘내가 다른 관장님에게 운동을 배웠더라면 그만두지 않고 계속 운동을 했을까?’ 생각해봤다. 대다수 무술계를 잡고 있는 사람들은 남성이고,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 같다. 날 지도해주신 관장님도 아주 평범한 사람이었으니까. 아주 평범한. (조재) feminist journal IL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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