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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게임 히스토리

[머리 짧은 여자] ‘남성 캐릭터’를 선택하는 이유


 

‘남성 캐릭터’를 고를까 ‘여성 캐릭터’를 고를까, 잠깐 고민하다가 결국 ‘남성 캐릭터’를 선택하기로 했다. 게임을 할 땐 그러는 편이 이롭다. 게다가 증강현실 게임이라니. 


▶ 가면   ⓒ일러스트레이터 조재

 

첫 번째 게임 역사

 

초등학교 6학년. 당시 유행하던 클래식 RPG게임을 시작했다. 성별을 지정할 수 있는 게임이었고, 별 생각 없이 여성 캐릭터를 골랐다. 초보자 수준에서 할 수 있는 건 마을을 돌아다니거나 마을 바로 앞에서 닭 같은 걸 사냥하는 게 전부였다. 그래도 그게 좋다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마을 구경, 사람 구경을 했다.

 

그렇게 돌아다니던 와중 어떤 사람이 말을 걸었다. 게임에서 낯선 사람과 대화하는 건 흔한 일이었기에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는데, 갑자기 대화가 이상한 쪽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상대는 가슴이 어쩌고, 보지가 어쩌고 떠들어댔다. 자리를 피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 다른 쪽으로 뛰어갔지만 그 사람은 계속 나를 따라오며 같은 말을 반복했다. 네 가슴이 어떻다, 네 보지가 어떻다. 끝까지 나를 따라다니면서 같은 말을 반복해대는 그 사람 때문에 결국 게임을 꺼버렸다.

 

두 번째 게임 역사

 

중학생이 되어서는 FPS게임을 시작했다. 군인이 되어서 상대편을 제거하거나 폭탄을 설치하는 등 미션을 성공시키는 것이 게임의 목표였다. 캐릭터는 따로 성별을 지정하지 않았지만 군인은 당연하게 ‘남성’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여성은 이런 게임을 하지 않는다거나 못한다는 생각이 당시에 통용되고 있었다. 내가 여성임을 말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당연히 나를 남성으로 생각했다.

 

그렇게 오래 게임을 하다 보니 나중에는 길드에 가입해서 활동하게 됐다. 길드에서 내가 여자인걸 알게 되자, 사람들은 깜짝 놀라 ‘어떻게 여자가 게임을 이렇게 잘하지?’, ‘진짜 여자야?’라며 떠들어댔다. 그 중 한 사람은 메신저 아이디를 교환하자고 했다. 그때는 길드에서 만난 사람들과 친해지는 게 마냥 좋아서 덜컥 아이디를 넘겨줬다. 그는 자신의 우울을 인질삼아 너무 힘들다며 나를 만나 위로 받고 싶다고 말했다.

 

세 번째 게임 역사

 

최근에는 모바일 온라인 게임을 시작했다. 물건으로 변신해 숨거나 술래가 되어 사람들을 찾는 아주 간단하고 아기자기한 숨바꼭질 게임이다. 모바일 게임인데도 채팅창이 있어서 신기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헐. OO님 여자에요?” 지겨운 레퍼토리 시작이다. “OO님 예쁘실 것 같아요. ㅎㅎ”

 

요즘 가장 유명하다는 FPS게임을 하는 여성들 사이에서는 분노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다. 게임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 제공되는 음성채팅 기능에서 여성의 목소리만 들리면 성희롱을 해대거나, 역시 여자는 게임을 하면 안 된다며 구박하는 경우가 많은 모양이다. 뻔하다. 어렸을 때부터 너무 많이 겪어봤으니까. 요즘은 이런 상황에서 상대에게 지지 않고 눌러버리는 대사가 여성들 사이에 팁으로 돌아다닐 정도다.

 

다시 돌아와, 증강현실 게임. 이전 게임들과는 다르게 사용자가 직접 이동해야 하는 게임이다 보니 더 두려운 게 사실이다. 실제로 먼저 서비스를 시작한 지역에서는 게임을 이용한 범죄가 성행하기도 했다니, 괜한 걱정이 아니다. 언제까지 게임하면서 안전을 걱정하고 성희롱 당하지 않기 위해 대책을 마련해야하는지 정말 지긋지긋하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남성 캐릭터’로 게임을 한다. 과연 이게 최선인가는 모르겠지만, 개인으로서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니까.  (일다) feminist journal IL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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