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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녀가 야수를 물어버리면 어떤 일이 생길까?

[최하란의 No Woman No Cry] 내면의 전사 깨우기


※ 여성을 위한 자기방어 훈련과 몸에 관한 칼럼 ‘No Woman No Cry’가 연재됩니다. 최하란 씨는 스쿨오브무브먼트 대표이자, 호신술의 하나인 크라브마가 지도자입니다.  Feminist Journal ILDA

 

디즈니 공주들과 사랑에 빠진 조카를 보며

 

사랑하는 조카가 있다. 우리는 만나면 항상 신나게 달리고, 높은 곳을 기어오르거나, 방방 뛰고, 레슬링을 한다. 그러다 한숨 돌리며 내가 “지금 기분이 어때?”하고 물으면 “행복해요! 정말 기분이 좋아요!”라고 외친다. 조카는 작은 웅덩이를 보면 “도전!”하고 외치며 폴짝 뛰어 건넌다. 때로는 자기 키만한 웅덩이를 뛰어 건너려다 뒤돌아 나를 쳐다본다. “도와주면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그 웅덩이를 뛰어 넘고 나서 얼굴에 번지는 표정은 멀리뛰기 세계기록 갱신자의 의기양양함이다.

 

4년 6개월이 된 조카는 활동적이고, 민첩하고, 힘이 세고, 모험심 넘치는 ‘여자아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조카는 에리얼, 라푼젤, 엘사 등 온갖 종류의 공주들과 사랑에 빠졌고, 나는 미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아직 왕자님을 찾고 있진 않으니 다행인 걸까?’

 

영화 <킬 빌>(쿠엔틴 타란티노, 2003)에서 우마 서먼이 입은 것 같은 (내 눈에는) 멋진 트레이닝복을 선물했지만 눈길조차 주지 않고 오로지 치마 사랑에 빠진 조카를 마주했을 때, 게다가 사실인지 상상력의 산물인지 모르겠지만 유치원 갈 때 “바지 입으면 친구들이 놀려요”라고 말하면서 치마를 고집했을 때, “작은 엄마는 왜 머리가 짧아요? 남잔가?”하고 큭큭 웃으며 장난칠 때도, 그리고 어느 순간 갑자기 “나는 약해” 라고 흘리듯 말했을 때, 나는 모든 상황이 그냥 지나쳐지지 않았다.

 

조카의 행동 변화에 약간의 고민이 들 때쯤 <뷰티 바이츠 비스트>(Beauty Bites Beast, 엘렌 스노틀랜드) 트레일러 영상을 보게 되었다. 강아지, 아기 고양이, 아기 사자들이 레슬링하며 노는 영상 위로 내레이션이 흐른다. “새끼들은 놀이를 통해 자기방어와 사냥을 배우고, 어미들은 새끼가 암컷인지 수컷인지 나누지 않고 몸으로 그것을 배우게 합니다.”

 

미녀, 야수에 맞서다

 

▶ 엘렌 스노틀랜드 저 <미녀, 야수에 맞서다>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설연구소 울림 옮김, 사회평론, 2016)


<미녀, 야수에 맞서다>(Beauty Bites Beast)가 한국어로 번역, 출간됐다. 이 책은 작가이자 연기자 그리고 실천가인 엘렌 스노틀랜드가 쓴 자기방어에 관한 책이다.

 

“매년 국민 중 6천 명이 익사하고, 50만 명은 익사에서 겨우 살아남는 나라가 있다고 하자. 당신은 아마도 ‘세상에, 왜 저 나라 사람들은 수영을 배우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은 수영을 배워서는 안 된다거나 배울 수 없다는 통념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성폭력을 대하는 사람들의 자세는 사뭇 다르다. 대부분 사람들은 여성은 폭력 앞에서 자신을 방어하거나 타인을 보호할 수 없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 이 책은 이러한 믿음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드러내고자 한다.”

 

저자는 열여덟 살 무렵 최악의 홍수 피해에서 살아남았고, 그 피해를 복구하던 중 주 방위군에게 성추행을 당할 위기를 겨우 모면했다. 그래서 생존 기술을 반드시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서른여섯 살이 될 때까지 미뤄두다가, 집안에 든 도둑을 마주하고 나서야 자기방어 프로그램에 등록하게 되었다.

 

엘렌은 폭력 앞에서 자신이 할 줄 아는 유일한 행동이 ‘비명 지르기’였다는 사실에 화가 치밀었다. 하지만 자신의 태도가 개인적 결함이 아니라 사회문화적 현상임을 깨닫고, 자기방어 능력이 다른 독립성 못지않게 여성 행복의 중요한 요소임을 탐구하게 되었다.

 

“(자기방어) 방법을 설명해주는 책”이냐는 친구의 질문에 “원인을 설명해주는 책”이라고 그녀가 대답했던 것처럼 <미녀, 야수에 맞서다>는 각종 자기방어 기술들에 대한 설명서는 아니다. 자기방어가 필요한 이유와 효과를 주장하고 사회적 오해와 무지, 왜곡을 고발하는 책이다. 자기방어를 배우고 나서 자신의 삶이 어떻게 변했는지 얘기하고, 사회가 어떻게 여성과 소녀들이 ‘내면의 전사’를 믿지 못하게 속여 왔는지 설명하고 있다. 특히 책에 소개된 여러 여성들의 자기방어 성공 사례들은 정말 호쾌하다.

 

내면의 전사를 깨우다

 

<미녀, 야수에 맞서다>에는 자기방어 프로그램 참가자들의 인터뷰도 실려 있다.

 

다양한 연령, 체격, 직업, 성격, 경험을 가진 그들은 자신이 자기방어 기술을 제대로 배울 수 있을지, 수업을 잘 따라갈 수 있을지 걱정하기도 했다. 별 기대 없이 등록한 참가자도 있었고, 기대한 만큼 신체적으로 강해지지 못했다고 느낀 참가자도 있었다. 평소 자기방어를 배울 필요성을 느낀 적이 없었던 참가자도 있었고, 심리상담사의 추천으로 등록한 참가자도 있었다. 누군가를 때린다는 생각만으로 속이 메스꺼워진 참가자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 모두 처음에는 자기방어에 대해 전혀 몰랐지만, 훈련을 받은 이후 상상도 못할 만큼 많은 것을 얻었다고 한다.


“자기방어 수업에서는 모두가 초보, 걱정할 필요 없죠.” -로즈

“십대 때 강간당했던 경험을 극복했어요.” -아이리스

“처음으로 내 삶이 안전할 거라는 확신이 들었어요.” -캐서린

“싸움의 기술을 배웠지만 더 평화적인 사람이 됐습니다.” -안드레아

 

“여자니까 당연히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마릴린

“성폭력 피해생존자인 저에게는 인생 최고의 선물이었어요.” -론다

“밤늦게 일하는 여성들에게 적극 추천합니다.” -지나

“나를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 당연한 게 아니라 끔찍한 일이죠.” -린다

“자기방어 수업이 그 어떤 다이어트보다 자존감을 높여줬어요.” -데브

 

“끔찍한 악몽과 대면하는 것은 쉽지 않죠.” -헤더

“폭력 상황에서도 얼어붙지 않아요. 분노와 마주했을 때 싸울 용기도 얻었죠.” -소피

“자기방어는 남성 혐오가 아니라, 스스로 강해지는 것입니다.” -데미

“위험에 대한 과도한 예민함이 사라졌어요.” -캐서린

“폭력이라는 주제 자체가 불쾌했지만 강인해지는 경험이었어요.” -레이첼

 

▶ 지난 6일 열린 <미녀, 야수에 맞서다> 번역·출간 기념 북콘서트  ⓒ스쿨오브무브먼트

 

비폭력적으로 폭력을 이겨내는 방법

 

저자 엘렌 스노틀랜드는 자기방어가 폭력에 대한 예방 백신이라고 말한다.

 

“물리적 자기방어는 면역력을 갖추고, 폭력으로 인한 신체적·정신적 위험을 막아내는데 중요한 요소다. 전 세계 여성들이 건강해진다면, 스스로 투지를 이용할 수 있다면, 그리하여 자신과 타인들을 폭력에서 보호할 수 있다면 얼마나 환상적이겠는가. 천연두가 사라진 것처럼 우리는 폭력 근절에 일조할 수 있다.”

 

엘렌은 처음 자기방어 수업을 들었던 때를 회상한다. 자신처럼 대부분 실제 폭력 사건을 겪고 나서, 즉 발등에 불이 떨어진 후에야 여성들은 자기방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엘렌은 자신이 자기방어에 대해 굉장한 확신을 갖게 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책은 이렇게 시작한다. “내일이면 늦으리, 자기방어 훈련을 당장 시작하라.”

 

<미녀, 야수에 맞서다>는 자기방어가 전 세계적으로 여성해방의 중요한 열쇠이며, 오랫동안 희망해온 ‘비폭력적으로 폭력을 이겨내는 방법’이라고 말한다.

 

“자기방어는 여성들이 평등과 자유를 향해 가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 정서적, 신체적, 정신적 억압을 거부하는 여성들이 결국 세상을 새롭게 만들어갈 것이다. 그리고 그 세상은 누구에게나 더 좋은 세상이 될 것이다.”

 

▶ 2016년 세계여성폭력추방의 날 기념 자기방어 수업 참여자들과.  ⓒ스쿨오브무브먼트

 

책에는 두 개의 부록이 실려 있다.

 

부록1에서 저자는 자기방어 훈련에 대한 열세 가지 질문과 걱정들을 소개한다. 아래의 다섯 가지는 한국에서 자기방어 지도자로 활동하는 내가 미국에서 활동하는 저자와 공통으로 접한 질문과 걱정을 뽑아놓은 것이다. 독자들은 <미녀, 야수에 맞서다>에서 다음 질문들에 대한 저자 엘렌 스노틀랜드의 대답을 읽을 수 있다.

 

- 왜 여성들은 자기방어를 배워야 합니까? 공평한 것 같지 않아요.

- 반격하면 가해자를 더 화나게 만들어 상황을 악화시키지 않나요?

- 저는 그렇게 강하지 않습니다.

- 자기방어를 배우면 더 겁을 먹게 되거나, 아니면 너무 자만하게 되지는 않을까요?

- 저는 성폭력 생존자입니다. 자기방어 수업이 제가 경험한 사건을 연상시켜 힘들어지지 않을까요?

 

부록2는 여성 자기방어 훈련 프로그램들을 소개하고 있다. 원서에는 미국 단체들만 소개돼있지만, 한국어 번역판을 출간하면서 한국성폭력상담소 울림에서 국내단체 여섯 곳을 추가했다. 자기방어 훈련에 참가하고 싶은 이들에게 유용할 것이다.  (최하란)  Feminist Journal IL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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