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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계 성폭력…기록하고 기억해야 하는 이유
성폭력의 경험은 연결되어 있다
아주 멀리서도 들리는 목소리의 생존
성폭력에 대한 여성들의 목소리를 기억한다. 강남역 살인사건 희생자를 추모하는 자리였다. 한명, 한명의 발언이 이어지고 그녀가 마이크를 잡았다. 오랜 시간 삼켜온 말의 첫 마디는 가늠할 수 없는 통곡이었고, 곧 이어 자신의 성폭력 경험에 대해 이야기했다. 듣는 내내 마음이 ‘쿵’하고 내려앉았다. 부끄럽게도 그녀의 목소리를 듣기 전까지, 성폭력이라는 말의 무게를 내 옆에 두지 못했다. 피해당사자라는 틀을 만들어두고 그 이야기에 공감하는 사람으로서 거리두기를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녀의 목소리가 도착한 이후, 내 안에서는 크고 작은 변화들이 꿈틀거렸다.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사람이 되어보는 것, 들리지 않는 것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보는 것, 생각에 머물지 않고, 내가 그 사람이 되어보는 것. 아래에서부터 올라오는 무언가를 더듬더듬 찾는 긴 여정을 거쳐, 아주 멀리서도 들리는 목소리의 생존.
사회적으로 공감이 부족한 영역일수록 말하는 이는 고립되고, 더 많은 싸움을 해야 한다. 성폭력 또한 마찬가지이다. 한 사람의 목소리가 겹겹이 쌓인 편견을 뚫고 나오는 일이란 용기라는 말로도 부족하다. 또한 우리도, 잠재되어 있는 성폭력의 환경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네가 안전하지 못하면, 나 역시 안전하지 못해.” -앨런 긴즈버그(Allen Ginsberg) <울부짖음>
그래서일까? 10월 중순 트위터에서 시작된 문학, 미술, 오타쿠, 영화 등 문화예술계 내 성폭력이라는 해시태그로 올라온 당사자들의 목소리에 더욱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나는 영화, 패션, 사진, 미술 등 문화예술 영역에서 활동해온 이력을 가지고 있다. 그녀들이 예술현장에서 겪어야만 했던 경험들이, 내가 지난 시간 겪고 보고 들어왔던 경험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 장소가 어디든 성폭력의 경험은 연결된다.
예술이라는 자유롭고 숭고한 권력
▶ 1985년 뉴욕에서 결성된 급진적 좌파페미니스트 그룹 게릴라걸스. ‘여성이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들어가려면 발가벗어야 하나? 현대미술 분야 3%만이 여성인 반면, 83%의 누드가 여성이다.’
트위터를 통해서 점점 번져나간 문화예술계 내 성폭력 경험들은 공통적인 부분들이 참 많아 보인다. 대표적으로 가해한 이와, 피해를 받은 이들의 사회적 관계망 속에 선명하게 드러나는 위계이다. <은교>의 박범신 작가는 방송작가 및 팬들과 동석한 자리에서 성희롱과 성추행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나이든 여성을 ‘늙은 은교’, 젊은 여성을 ‘젊은 은교’로 부르며 모든 여성을 자신의 ‘은교’로 호명할 수 있는 힘은 그가 중반을 넘은 남성이며, 동시에 작가로서 브랜드가 쌓인 자리에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또한 배용제 시인은 시를 가르친다는 명분으로 문하생을 자처하는 미성년자 여성들을 대상으로 성적 발언과 추행을 한 것으로 드러났다. 미술계 내 성폭력 사례로 일민미술관의 함영준 큐레이터 역시 대부분 이제 미술작업을 시작한 젊은 작가들에게 성추행을 했다는 고발이 수십 건이 된다. 이쯤 되면 문화예술계 내부의 수직적인 구조가 성차별과 성폭력을 강화시키는 요인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대학에서 예술대학은 여성의 비율이 훨씬 높고, 예술 장르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여성작가들의 활동도 활발하다. 그럼에도 결정권을 행사하는 주요 관직, 교수, 심사위원, 관장, 대표의 기회가 누구에게 주어지는지, 누가 말할 수 있는 주체인지, 나아가서 문화예술계 안에서 여성 장애인의 비율, 사회적으로 커밍아웃한 레즈비언의 비율은 과연 얼마나 되는지 등등. 누가 더 많은 권위를 쥐며, 네트워크를 형성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 예로 미디어 아티스트 그룹 뮌(최문선,김민선)은 미술계의 네트워크와 영향력을 3차원 지도로 만드는 작업을 했다. 독일에서 한국으로 귀국한 그들은 정신없이 작업을 했지만 미술계안의 ‘보이지 않는 벽’을 계속해서 느꼈고, 그 실체를 파악하고자 이러한 작업을 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이 네트워크 지도를 통해서 한국의 미술계가 하나의 이너서클만 강화되는 독점구조가 마치 재벌의 혼맥도(재벌이 결혼을 통해서 더 튼튼한 공동체를 만드는)와 닮아있다고 말한다.
아티스트 그룹 뮌의 작업을 통해 살펴볼 수 있는 미술계의 이러한 독점구도는 젊은 예술가들에게 ‘너를 키워주겠다’는 달콤한 기회이자, 그 대가로서 누군가의 무릎에 앉아 내 허벅지를 내어 줘야하는 일쯤은 무감각해져버리게 만들기도 한다. 예술이라는 자유롭고 숭고한 성적 판타지는 과연 누구에게 승인되는 일인가?
문화예술계 내 가스라이팅 효과 걷어차기
이번 사례를 통해서 조명되어야 하는 부분은 여성예술가들이 자신들을 경험을 재해석하기 시작하면서, 문화예술계 내에서의 성폭력에 대해서 발화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여성으로서의 성적 대상화가 일상적으로 너무 만연화되었기 때문에, 불편하지만 차마 이야기하지 못한 것들을 예민하게 보기 시작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나는 이 발화의 시작이 문화예술계 내 가스라이팅 효과(gaslighting, 영화 <가스등>에서 유산을 노린 남편은 상황을 조작하여 아내의 현실감과 판단력을 잃게 만듦으로써 정신질환자로 몰아간다. 아무도 모르게 사람을 조종하고 지배력을 행사해 결국 한 사람을 황폐화시키는 것을 의미하는 심리학 용어)를 과감히 걷어 차버리는 시작점이라고 생각한다.
예술계의 가스라이팅 효과는 이러하다. 이제는 운영하지 않는 한 대안공간에서 젊은 작가들이 첫 개인전이 자주 열렸다. 오프닝 현장에는 미술계 선배들이 아티스트 토크에 참석한다. 첫 작품을 선보이는 것이 긴장의 연속이지만 작가들이 곤욕을 치르는 부분은 정작 다른 곳에 있었다. 선생과 선배들이 ‘너를 아껴서 하는 말인데’로 시작되는 대화는 ‘첫 전시에서는 모든 걸 다 보여주면 안 돼’, ‘작가노트는 이렇게 써야 해’, ‘좀 더 좋은 작가가 되려면…’ 등의 말로 이어진다. 작가로서 이렇게 해야 한다는 끊임없는 주입과 세뇌를 ‘비평’이라고 말하고 작가를 ‘키우는’ 일이라고 믿는다.
작가가 스스로 외부성을 가지지 못하게 하는 말들, 그들이 나에게 기회를 주는 좋은 선생이라는 우위의 자리를 차지하고 작가들을 종속시키는 방식은 언제든지 ‘남자 맛을 알아야 예술을 할 수 있다’, ‘네 몸을 바쳐서라도 기회를 만들어야지’와 같이 그녀들의 몸을 함부로 침범할 수 있도록 구성하는, 보이지 않는 폭력이다.
화가 조지아 오키프는 이렇게 말했다. “남자들은 저를 ‘최고의 여성화가’라고 가치절하하려 하지만, 제가 보기에 전 ‘최고의 화가’ 중 하나예요.” 여성들에게 끊임없이 덧 씌워지는 것들, 차이를 만들어 차별화시키는 전략들을 과감히 걷어 차 버리자.
▶ <일상서>_video_송진희. 조은지 작가의 전시노트에서 발췌한 글을 인용하여 예술-노동에 대서 이야기했다.
#부산문화예술계_내_성폭력, 변화를 꾀하다
일주일 간 폭주하는 문화예술계 내 사례들은 대부분 서울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지역 문화예술계 내에는 성폭력이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내가 주로 활동하고 있는 부산 문화예술계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연결하고 고민해나갈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그래서 이 사태를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는 미술작가 세 명이 모이게 되었다.
우선 문화예술계 내에서 벌어진 성폭력 사태임에도 불구하고, 부산은 그 어느 곳에서도 공식적으로 이 문제를 다루지 않았다는 점에 문제의식을 느꼈다. 이러한 침묵 상태에 대해 우리는 분통이 터졌다. 부산 문화예술계 내부의 좁은 관계망과 이해관계 속에서, 성폭력을 말하는 것 자체가 굉장히 두려운 일이다. 하지만 가만히 있는 것이 더 두려운 일이라는 것을, 어느덧 우리는 감각적으로 알게 되었다. 말하지 않고 행동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변할 수 없다는 것을 서로 확인하고, 어렵더라도 외면하지 말자고, 목소리를 내자고 결의를 다졌다.
이 가난하고 연약한 세계 속에서, 비명을 지르며 페이스북에 #부산문화예술계_내_성폭력(bit.ly/2fvLa0e)이라는 작은 둥지를 틀었다. 페이지의 시작은 우리의 이야기를 꺼내는 작업이었다. 각자가 경험한 부산 문화예술계 내에서의 성폭력 사례들을 다시 재해석하고 글로 옮겨보기로 했다.
멤버로 함께 하고 있는 은지씨는 너무나도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성희롱 문화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전시나 레지던시를 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밥을 먹게 되고, 뒤풀이 자리에서 사람들과 어울리게 된다. 그런 자리에서 듣게 되는 말들이 자리에 동석한 여성들의 외모품평이거나 ‘여자는 여자다워야지’라는 훈계, ‘처음 봤을 때 솔직히 꼴렸다’는 비상식적 농담. 이런 상황들이 반복이 되면 예술 현장에 대한 회의감이 밀려 올 때가 있고, 작업에도 많은 영향을 준다고 했다.
또 다른 멤버인 은주씨 역시 비슷한 이야기를 꺼냈다. 최근에 예술인 심리 상담을 받게 되었는데, 작업 활동 전반에 걸쳐 수많은 분노가 쌓여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상담을 진행하면서 외부적인 것으로부터 받는 분노들은 바꾸기가 힘들기 때문에, 대부분의 고민을 내면의 문제로 돌리게 된 자신을 만났다고 했다. 그 분노의 한 부분에는 미술계의 수직적인 위계 속에서 여성으로서 겪어야 하는 경험들이 있었다.
미술대학에 진학해 선배들로부터 가장 많이 들었던 말 중에 하나는 ‘여성이 작가가 되려면 결혼은 포기해야 한다’, ‘여성작가로 이슈를 만들려면 누드 작업을 해라’, ‘매니큐어를 바를 시간에 작업이나 더 해라’와 같은 말들. 좀처럼 끝이 보이지 않는 수많은 차별의 말들이 쌓여 우리들의 뼈 속에 분노로 남아 있다.
나는 이 분노에 대해 쓰는 과정 속에서 생각지도 못한 실타래들을 만났다. 나의 몸을 침범하던 ‘손’들이 여기 저기 얽혀있었다. 영화 일을 했을 때, 사진을 배웠을 때, 스타일리스트 일을 했을 때, 내가 좋아하는 뮤지션과 술을 마셨을 때, 내 몸과 그녀들의 몸을 희롱하는 일들은 너무 쉽게 이루어졌지만, 서로 감겨있는 나와 그녀들의 경험을 모두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너무도 어려웠다.
우리들의 말은 아직 마침표를 찍지 못했다. 끊임없이 ‘다시 쓰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너무나 일상적이어서 스스로조차 섬세하게 쓰다듬지 못했던 경험의 조각들을 이어서 ‘다시 태어나는 일’이다. 그 이후 우리들의 삶은 조금 달라져있을 것이다. 아래에서부터 올라오는 무언가를 더듬더듬 찾는 긴 여정을 거쳐, 아주 멀리서도 들리는 목소리로 생존할 테니.
▶ 그래픽 디자인계 성폭력을 가시화하고 변화를 촉구하는 아카이브 페이지에서. ⓒask-answer-2016.info
기록한다, 그리고 기억한다
어지러운 나날들 속에서 “우리는 2016년 10월 22일 이후를 기록한다”는 아카이브 페이지(ask-answer-2016.info)를 발견했다. 10월 22일은 가시화되지 않았던 문화예술계 내 성폭력 피해 사례들이 수면위로 올라 온 날이다. 또한 여성들의 목소리가 모여 봉쇄된 길을 열어 젖힌 날이기도 하다. 이 목소리들이 사라지지 않도록, 그래픽 디자인 영역에서 아카이브 하는 활동을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문화예술계 내의 성폭력은 여성 한명, 한명의 경험이 쌓여 수백 건이 되어야만 문제로 인식이 된다. 그만큼 사전에 보호할 수 있는 장치들이 예술계 내에 없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2016년 10월 22일 이전으로 돌아가지 말자. 누군가 똑같은 싸움을 반복하게 하지 말자. 우리 한명 한명이 선례를 남기자. 이 격렬한 과정을 좀 더 나은 변화로 만들자. 2016년 10월 22일 이후의 목소리들이 남기고 있는 이 자국들을 선명하게 기억하자. (송진희/ 예술가) Feminist Journal IL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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