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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 ‘여성혐오’ 얘기할 시국이냐고?

대통령 퇴진과 성차별 반대, 함께 외치는 페미니스트들  Feminist Journal ILDA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가 거센 가운데, 박근혜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하는 목소리도 높아져 가고 있다. 그런데, 그 와중에 두 인물의 성별인 ‘여성’에 대한 혐오와 차별 발언도 난무해 이에 대한 문제 제기가 시작되었다.

 

국정농단 사태에 대한 분노와 비판 속에 ‘여성혐오’가 비집고 들어서는 예는 다음과 같다.

 

박근혜 대통령은 ‘여성리더십의 실패’를 보여준 장본인이 됐다는 평이 나오고,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집회의 공식석상에서 ‘OO년’ 같은 용어가 사용되며,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댓글이 가장 많은 추천을 받는다. 최순실 씨에 대해 ‘아녀자가’, ‘강남 아줌마가’라는 수식어가 붙으며, “돈은 많은데 왜 얼굴은 그 모양이냐?”는 식의 외모를 헐뜯는 말들도 가세한다. 최순실 씨의 딸 정유라 씨는 이미 ‘된장녀’로 불리기 시작했고, 인터넷에는 성형 전과 후를 비교한 사진이라며 이미지가 돌아다닌다.

 

많은 여성들이 이를 불편해하고 있으며, SNS 상에서 ‘여성혐오’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는 이들도 꽤 있다. 그러나 이러한 목소리에 대해 “지금이 여성혐오 얘기할 할 시국이냐”, “여성혐오 얘기하는 사람은 모두 최순실(이 고용한 댓글)알바로 간주하겠다”는 식의 반응이 돌아오곤 한다.

 

▶ 박근혜 하야를 만드는 여성주의자 행동(박하여행)이 생겼다.

 

우리가 ‘OO년’ 소릴 듣고 있어야 할 이유는 없다

 

이러한 분위기에 비판의 목소리를 내는 페미니트들의 흐름도 가시화되고 있다. ‘박근혜 하야를 만드는 여성주의자 행동’(이하 박하여행)이 그 중 하나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부정한, 심각한 권력남용의 책임자 박근혜 대통령의 하야를 만들기 위해 활동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번 사태가 ‘대통령이 여성이기 때문에’ ‘근본을 알 수 없는 저잣거리 아녀자 최순실’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고 바라보는 시각을 반대합니다”라고 밝힌 박하여행은 열 명의 여성들이 모여 기획한 모임으로, 현재 1백여 명이 가입했다.

 

박하여행은 “박근혜 하야를 찬성한다는 이유로 집회 현장에서 ‘OO년’ 같은 여성비하 발언을 듣고 있을 이유가 없다”고 말한다. 이들은 매주 토요일 집회에 참석해서 ‘박근혜 대통령 하야’를 위한 캠페인을 진행하는 한편, 집회 현장에서 일어나는 성차별 발언이나 행동에 대해서도 모니터링 하겠다고 밝혔다.

 

박하여행이 행동에 나선 계기는 단순히 지금 국면에서 들리는 여성혐오 발언들 때문만은 아니다. 운영자인 박지아씨는 이렇게 말한다.

 

“그동안 집회에 참가할 때마다 실시간으로 성차별적인 발언을 들어야 했고 당혹감과 분노를 느꼈어요. 그 자리에서 항의를 하기도 하고 추후에 문제 제기를 하기도 했지만 바뀌는 게 없었죠. 이렇게 반복되는 상황은 여성주의자들에게 극단적인 선택을 강요해 왔습니다. 그냥 참고 견디거나, 아니면 이 대열을 떠나거나.”

 

박하여행은 더 이상 ‘참기만 하거나 떠나버리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박지아씨는 “누군가를 비판하기 위해 또 다른 차별의 방법을 사용하는 것은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하는 것을 가로막는 일이 될 뿐”이라고 지적한다.

 

▶ 박하여행은 박근혜 대통령 하야를 위한 캠페인과, 집회 현장의 성차별에 대한 모니터링을 동시에 진행한다.

 

서울 지역에 사는 페미니스트 이신율(30)씨는 페이스북에서 ‘박하여행’ 페이지를 발견하고 집회에 나가볼 마음이 생겼다고 말한다.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모인다니까 반가운 마음이 들었지만 선뜻 못 갔던 이유가 있었다. 사회자가 여성혐오 발언을 한다거나 주변 남성들이 큰소리로 ‘00년’이라고 욕하면서 자기가 진보라는 자부심을 온 몸으로 표현할 텐데 상상만 해도 정말 싫었다”고.

 

이씨는 “누군가에게는 그 자리가 축제겠지만, 나한테는 또 여성혐오를 들어야 하는 피곤한 공간으로 생각됐다. 그런 와중에 ‘박하여행’을 보고 반가웠고 집회에 나가봐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덧붙였다.

 

집회문화와 사회운동 내 소수자 차별에 경종을

 

대구에서는 ‘평등한 연대’라는 이름의 모임이 평등한 집회 만들기에 나서고 있다. 진냥 활동가는 “얼마나 큰 잘못을 한 공인이든, 대통령이든 ‘OO년’이라는 말이 없으면 비난할 수 없다는 빈곤한 사고가 놀랍다”고 말한다.

 

“박근혜 대통령은 병원에 가야 한다, 아픈 사람이다 등의 발언들도 많아요. 장애인이라고 말하는 경우도 있었고요. 아프거나 장애가 있으면 판단을 잘 하지 못할 것이고 제대로 된 정치활동을 할 수 없다는 (장애인 비하) 인식이 깔려 있는 거죠. 또, 장애인이나 환자라고 호명하면 대통령을 비판하는 것이라는 인식도 정말 끔찍할 만큼 차별적이에요.”

 

▶ 평등한 연대가 만든 "평등한 집회를 하자" 웹자보 중에서.


‘평등한 연대’는 청도삼평리 송전탑 건설 반대운동에서 발생한 성폭력과 위계폭력에 대해 공론화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졌다. ‘나이 어린’, ‘여성’들이 집회와 농성에서 겪게 되는 일들에 대해 대응할 수 있는 틀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의기투합했다.

 

진냥 활동가는 “이번 달에 트위터에서 ‘(뜻에) 동의하지만 집회에 가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요?’라는 설문을 진행했었다”고 전했다.

 

“90명이 설문에 응답해주셨는데, 31%가 집회 내 권위주의나 성폭력, 비하 때문에 집회에 참여하지 않는다고 답하셨어요. 낯설어서 안 나올 거라고 추측했는데, 낯설어서 그렇다는 응답(28%)보다 권위주의나 성폭력, (소수자) 비하가 더 많은 응답을 차지했습니다. 집회나 시위가 헌법에 보장된 기본권인만큼, 폭력이나 비하에 대한 두려움이나 분노 없이 집회나 시위에 참여할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평등한 연대’ 측은 “앞으로 꾸준히 시민사회단체의 집회 및 행사에 대한 모니터링을 진행하고, 교육과 캠페인을 통해 ‘나이 어린’, ‘여성’들과 더 많은 소수자들이 발언하고 싸울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나가겠다”고 밝혔다.

 

권력의 사유화를 여성 개인의 문제로 보면 곤란

 

일각에서는 이번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두고 “여성 리더십의 실패”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동안 수많은 남성정치인들의 독재와 비리가 있었음에도 이를 ‘남성성’이나 ‘남성 리더십의 실패’라고 평가하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다음 대통령은 남자가 돼선 안 된다’는 여론도 없었다.

 

이윤소 한국여성민우회 미디어본부 사무국장은 “정치는 원래 남자들이 해야 할 일이고 남자들은 하다보면 망칠 수도 있지만, 여자인 박근혜 대통령이 본연의 역할이 아닌 정치를 하다보니까 나라를 망쳤다는 인식에서 나오는 발언”이라고 이러한 시각에 일침을 가했다.

 

이윤소 사무국장은 가십성 기사를 쏟아내는 언론에 대해서도 비판했다. “최순실의 구두, 명품 가방, 최순실이 조직폭력배를 찾아가 ‘정유라의 동거남을 떼어놔달라’고 했다는 등의 가십성 기사들은 사건의 본질을 흐린다. 이번 사건은 권력의 사유화가 핵심적인 문제임에도, 여성혐오를 기반으로 하는 이런 기사들은 이번 사건을 비정상적인 여성 개인의 문제로 축소시킨다”는 설명이다.

 

녹색당도 지난 7일 “민주주의는 여성혐오와 함께 갈 수 없다” 제하의 논평을 통해, “부적절한 표현이라는 비판에도 계속해서 나오는 여성혐오 프레임의 언론 보도들은 한국 사회에서 여성혐오가 얼마나 사소한 일로 여겨지는지, 또한 여성혐오 콘텐츠가 가십거리로서 얼마나 잘 팔리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고 일갈했다.   (나랑 기자)  Feminist Journal ILDA

 

▶ 평등한 연대에서 만든 <평등한 집회를 위한 체크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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