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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다만 불안에 익숙해질 뿐이다

<한국에서 젊은 여자로 산다는 것>⑱ 어디에나 있는 여성혐오


※ 2016년 <일다>는 새로운 페미니즘 담론을 구성하기 위하여, “한국에서 젊은 여자로 산다는 것”을 주제로 청년여성들의 기록을 연재합니다. 이 기획은 한국여성재단 성평등사회조성사업 지원을 받습니다.   Feminist Journal ILDA

 

길거리 괴롭힘을 경찰에 신고한 이후…

 

▶ 으슥한 골목에선 으레 무례한 태도를 보이는 남성이 항상 있다. ⓒ나늘


2016년 8월, 시계는 밤 10시 02분을 지나고 있었다. 평범했던 기분은 편의점을 나서면서 불쾌하고 짜증이 난 상태로 바뀌었다. 계산하던 남성점원이 본인 또래의 남자손님에겐 존댓말을 쓰더니 나에겐 대번에 말을 낮추며 하대한 것에 대해 분노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능글맞은 표정으로 “아, 내가 잘못 찍었다. 다시 줘봐. 환불해줄게. 영수증 줘?”하던 그가 정말 싫었다.

 

편의점을 나와 다시 길을 걸으며 방금 있었던 일에 대해 친구와 대화를 나눴다. 그때, 단지 잘못된 것이 있었다면 술에 취한 채 낄낄대는 두 남성을 지나치고 있었다는 것이다. 내 말을 듣고 있던 친구는 내가 하던 말 뿐만 아니라 우리가 지나쳐 가던 두 남성 중 한 남성의 발언도 들었다.

 

“시발년들… 존나 예쁘네.”

 

그 소리를 들은 친구는 화가 나 그 자리에서 낮게 욕을 읊조렸다. 그때만 해도 영문을 모르는 나는 깜짝 놀라 친구를 빤히 쳐다봤다. 우리에게 욕을 배설한 그 남성도 친구의 말을 들은 듯했다. “아니, 원피스가 존나 예쁘다고. 내가 뭐라 그랬냐!”라며 난데없이 고함을 질렀다. 이 말은 나도 분명하게 들을 수 있었고, 자세히는 몰라도 그 놈이 우릴 희롱한 상황이란 걸 대번에 눈치 챘다. 그러자 옆에 있던 다른 남성이 말리려는 듯이 “야야, 너 그러다가 신고당해. 그만해.”라며 진정시키려 했다. 그래도 그 남성은 뭔가 아니꼽다는 듯이 “신고하려면 신고하라고 해. 내가 지들을 따먹는다 그랬어? 뭐 어쨌어. 그냥 원피스가 예쁘다고 시발!” 하며 분노에 차 소리를 질러댔다.

 

화가 치밀었지만, 이마저도 나에겐 평범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편의점의 그 남성도, 술에 취해 나에게 막말을 하는 이 남성도 그저 나의 일상을 채우는 보통의 남성들이었기 때문이다. 골목에선 으레 길거리의 인사치레라도 되는 듯이 무례한 태도를 보이는 남성은 항상 있다. 정말, 늘 있기에 익숙하고, 늘 반쯤 체념해 있다. 그런 그들을 째려보거나, 큰소리로 욕을 해보기도 했지만 오히려 본인은 잘못한 게 없다는 태도를 보이며 나를 더 조롱하고 위협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요즘에는 자칫 저항했다간 ‘나에게 염산을 들이 붓는 치졸함을 보이지는 않을까’, ‘여성혐오 살인을 저지르진 않을까’, ‘날 몰래 찍어 신상을 터는 것은 아닐까’에 대한 불안으로 도무지 대응할 용기가 나질 않는다. 설령 용기를 냈다 하더라도 날 무례하게 대한 타인이 알아듣도록 설명하고 설득하는 건 엄청난 감정노동이자 에너지를 쏟게 한다. 경험으로 축적되어진 이 깊은 체념에 따르면, 그런 놈들은 무시가 답이었다.

 

당시 나에겐 그런 일은 일상이었지만, 친구에겐 늘 겪는 일이 아닌 것 같았다. 술에 취했다는 이유만으로 여성에게 저딴 말을 ‘아무렇지 않게’ ‘악의 없이’ 내뱉는 그들을 신고하고 싶어 했다. 친구의 요구대로 경찰에 신고하기 위해 우린 가던 길을 멈춰 섰다. 그런 우릴 본 그 남성들은 눈치를 챈 듯 했다. 나는 들킬까 싶어 그들을 쳐다보고 있던 시선을 황급히 거뒀지만 이미 늦었음을 깨달았다. 막말을 지껄였던 남성이 우릴 향해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뒤에서 들리는 쫓아오는 발소리에 본능적으로 통화하고 있던 친구의 팔을 다급하게 채서 무작정 앞으로 걸었다.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뛰고 있었다. 그리고 내 뒤에는 그 남성이 쫓아오고 있었다. 죽기 싫다면 더 필사적으로 뛰어야 했다. 나는 이미 최선을 다해서 뛰고 있는데 잡힐까봐 자꾸만 겁이 났다. 이대로 내 삶이 막을 내릴 수 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친구와 잡은 두 손은 땀으로 질척거렸다. 이 모든 게 거짓일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거짓이여야만 했다. 두렵고 놀란 내 몸과 정신은 이성을 잃은 채 어쩔 줄 모르며 허둥대고 있었다. ‘어떡해…’를 마음속으로 수천 번 되뇌이며 근처 마트로 전력 질주했다.

 

어떻게 마트 안까지 뛰어갔는지도 잘 모르겠다. 계산하고 있던 사장을 지나쳐 물건 진열대 사이로 숨어들었다. 내가 지나쳐 온 문이 또다시 열리는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리자, 우리를 뒤따라 그 놈이 마트로 들어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숨 막히는 눈치게임은 끝날 줄 몰랐고, 물건 진열대를 사이에 두고 소리만으로 그의 움직임을 쫓았다. 그가 움직이는 반대방향으로 가야했고, 오차가 있어서는 절대 안 되었다. 정신을 집중하고 싶었지만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마트는 꽤 가까운 거리였는데, 수 천 미터는 뛴 것처럼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네다섯 번은 그놈을 피해 진열대 사이를 왔다 갔다 했다. 진열대 끝에서 그가 얼굴을 들이밀기라도 할까봐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경찰이 와도 저 놈을 놓쳐서 보복범죄를 당하면 어떡하지. 내일부터 어떻게 집에 오지. 경찰은 오기나 할까. 여기서 죽으면 어떡하지…’ 등등 정말 죽음을 마주한 극심한 공포를 느꼈다. 너무 두려워서 울고 싶었다.

 

경찰이 마트에 오기 얼마 전, 그 놈은 마트 밖으로 나갔다. 도착한 경찰이 우리의 이야기를 듣더니, 그들이 우리에게 내뱉은 ‘시발년’이란 말은 모욕죄로 고소할 수 있다고 했다. 그리 걱정할만한 일은 아닌 것 같다는 충고와 함께 말이다. 별 것도 아닌데 신고했다는 경찰의 비난어린 눈빛이 과연 내 착각이었는지 아직도 의문이다.

 

▶ 정부가 강남역 여성살해 사건을 ‘묻지마 살인’으로 규정한 것에 대해 규탄하는 퍼포먼스. ⓒ나늘

 

귀갓길 ‘집에 가는 법’을 얘기하는 여성들

 

나는 지나가는 여성에게 함부로 말을 걸고, 위협할 수 있는 사회, 언제든지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기분이 나쁘다면 소리를 지를 수 있는 이런 사회가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다. 내가 도움을 요청한 경찰들조차도 ‘술취한’ ‘남성’이라면 으레 “그럴 수 있지”라는 태도를 보이는 것을 견딜 수 없다. 길거리 괴롭힘이 발생해도 이것은 남성의 생물학적인 본능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고, 더군다나 술에 취해 저지른 것이기 때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들을 이해하며 그들에 대한 분노를 가라앉히고, 미래에 발생할 비슷한 일을 불안해하지 않는 것이다. 그냥 가만히 있어야 한다. 내 영역에 함부로 침범한 그들로 인해 쌓인 불안을 나는 따져 물을 곳이 없었다. 이것은 ‘흔히 있는’ ‘늘 일어나는’ 일이지만 ‘별 일 아닌’ ‘사소한’ ‘내가 예민하게 받아들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경찰은 우리를 집까지 데려다 주며 모욕죄는 가벼운 벌금형이 선고될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고소를 고민하던 우리는, 그가 잘못을 뉘우치기보다는 벌금만 내고 끝낼 것 같다는 판단이 들어 포기했다. 그리고 만에 하나 고소했다가 우리에게 앙심을 품어 보복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했다. 사후처리를 어떻게 해야할 지 고민하고 걱정하던 우리에게 경찰은 자꾸만 별일 아니라며 너무 불안해하지 말라고 했다. 경찰은 나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 놈을 피해 마트로 뛰어가는 순간엔 정말 죽을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시달렸다는 것을. 그리고 어떤 마음으로 고소를 포기했는지도.

 

사건이 일단락 된 후 집에 오니 긴장이 풀려서인지 온몸이 욱신거렸다. 그리고 걱정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그 일은 경찰의 말대로 일상의 ‘사소한 사건’으로 여겨지지 못하고 나의 미래를 침범했다. ‘여기서 못 살면 도대체 어디 가서 살지?’ ‘지금 당장 집을 어떻게 구하지?’ ‘집 얻을 돈은 어디서 구하지?’란 걱정이 들었다. 돈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는 이상 나는 이 집에서 살아야 했기에, 나의 생활을 위해 생존을 내걸어야 했다. 친구는 그토록 가고 싶어 했던 인도여행을 (성폭력을 당할까봐) 다시 생각해 봐야겠다고 했다. 나에겐 익숙한 불안이 친구에게도 퍼져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럴수록 불안해하지 말라는 경찰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이게 과연 나와 친구만의 불안일까. 정말 우리가 유별나서 어쩌다 있을 법한 일을 잊지 못해 어리석게도 두려움에 머물러 있는 걸까.

 

다음날 동료들에게 내가 겪었던 일을 들려주었더니, 다들 귀갓길에 자신이 집에 가는 해결책을 알려주었다. 내 이야기를 들은 여성 중 그 어느 누구도 나의 불안이 너무 과도하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한 이는 단 한명도 없었다. 여성인 우리는 언제 일상이 위협 당할지 모르기 때문에 늘 불안해한다. 우리는 다만 ‘흔히 있는 일’이기에 불안에 익숙해질 뿐이다.

 

이런 일상의 경험은 과거의 나를 자책하게 하고, 미래의 나를 자유롭지 못하도록 얽맨다. 나를 움츠러들게 할 만한 사건이 일어나면 나는 ‘하필 그 시간’에 ‘하필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을 후회한다. 또한 내가 ‘~하지 않았으면’ 안전했을 것이라는 가정을 무수히 만든다. 더 나아가 미래의 나를 검열하게 한다. 또 다시 같은 공포를 느끼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허락하지 않은 우리의 영역에 침입해 우리를 평가하고 막말을 지껄이던 그들에게는 한번 킬킬 거리며 넘겨 버렸을 일화일지 몰라도, 친구와 나는 각자 일주일 간 집에 들어가지 못했다. 경찰에 신고하고도 끝내 고소하지 못한 우리는 ‘바보 같다’고, ‘우린 왜 이럴까?’라며 질책했다. 그 동안 그들은 아마 두 다리 쭉 뻗고 술에 취해 잤을 것이다.

 

우리는 그날 입고 있었던 옷을 올해는 입지 않기로 다짐했다. 그날 들고 있던 가방도 되도록 매지 않기로 했다. 나의 여성으로서 역사에 또 하나의 불안이 늘었다. 으슥한 길을 갈 때마다 이제는 30초에 한 번씩 뒤를 돌아보고 마음속으론 ‘제발 집에 무사히 돌아가게 해주세요’ 라며 주문을 외운다. 불안의 흔적들은 쌓이다 못해 나를 결국 ‘공황장애’라는 벼랑으로 내몰았다.

 

▶ 강남역 여성살해 사건 이후 ‘여성혐오’에 반대하는 시위를 보도한 기사에 달린 댓글들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 이후 시작된 공황장애

 

내가 처음 공황장애를 앓게 된 건,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이 발생하고 며칠 뒤였다. 그 시각, 강남역에 없었다는 이유만으로 우연히 생존한 나는 더 이상 여성혐오 살인사건을 두고 볼 수 없었다. 거리로 나가 희생자 추모 집회에 참가하고, 행진을 했다. 그 과정에서도 끊임없는 길거리 괴롭힘을 당했다. 행진하는 우리를 향해 고함을 지르는 중년 남성이 있었고, 욕을 하며 지나가는 술 취한 남성들도 있었다. 또 스스럼없이 다가와 ‘이런 거 하지 말고 집에나 가라’고 꼰대질 하는 남성이 있었고, 행진 행렬을 따라다니며 참여한 여성들의 얼굴을 찍어대는 남성이 있었다.

 

집회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나는 언론에 노출되었고, ‘일베’를 비롯한 남초 커뮤니티에 내 사진이 올랐다. “저런 년들은 강간 당해봐야 정신을 차린다”라거나, “공포에 질린 표정 보고 싶다”는 댓글들이 달렸다. 이렇게 추악한 현실은 물밀듯이 썩은 내를 풍기며 나에게 다가왔지만, 나는 밀어닥친 현실에 대한 마음의 준비가 전혀 되지 않은 상태였다.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 ‘여성혐오 범죄’를 인정하지 않는 경찰청에 항의하기 위해 기자회견을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묻지마 살인’으로 포장된 ‘여성혐오 살인사건’ 사례를 조사하는데 그 수가 어마어마했다. 최근 사례 위주로 찾아도 순식간에 수십 건을 찾을 수 있었다. 여자인 내가 아직도 살아있는 게 기적처럼 느껴졌다. 희생자 혹은 생존자가 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위로나 안도감을 전혀 주지 못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사건들이 댓글들과 오버랩 되면서 가슴이 답답해지고 심장이 쿵쿵 뛰었다. 그렇지만 나를 압도하는 불안감에도 불구하고 아무렇지 않게 일상을 유지해야 했다. 일을 해야 했고, 사람을 만나야 했다. 점점 정리되지 않은 감정과 위태롭게 유지되던 일상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결국 공황발작을 겪었다. 하루는 강남역 사건 이후 줄곧 답답해지던 가슴을 부여잡은 채 애써 달래가며 침대에 누워 있다가 얼핏 잠에 들었다. 숙면을 취하지 못하고 몇 시간 만에 깨어났는데 느낌이 묘했다. 평소보다 더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갑갑했다. 심호흡도 하고 정신도 차릴 겸 화장실에 갈 생각으로 일어서 화장실 문을 닫는 순간 ‘갇혔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사방의 벽이 가까워졌고, 머리가 뱅뱅 돌았다. 쏟아지는 눈물과 함께 소리를 지르며 화장실을 뛰쳐나왔다.

 

그렇게 3주간 집에 들어가지 못했다. 도저히 혼자 잘 자신이 없었다. 침대에 눕는 순간 그 때의 느낌이 자꾸만 떠오르고 숨을 쉴 수 없었다. 친구나 선배, 후배 가릴 것 없이 하루만 재워 달라고 부탁하며 떠돌이 생활을 했다. 잘 곳을 구하지 못하면 나도 모르게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에서 눈물을 후두둑 떨구곤 했다. 내 감정을 내가 통제할 수 없었다. 모든 걸 다 그만두고 사라지고 싶었다.

 

불편하다. 어느 순간 또 죽을 것만 같은 불안감에 엄습하게 될지 몰라서, 글 쓰고 있는 지금도 그때의 기억이 떠올라 숨이 잘 쉬어지질 않는다. 의사에게서 앞으로 1년은 넘게 약을 먹어야 한단 소릴 들었다. 속상했다. 약을 먹고 치료가 필요한 건, 아무래도 여성을 쉽게 살인할 수 있는 이 사회가 아닐까 싶었다.

 

▶ 결국 나는 공황장애를 겪었고, 앞으로 1년은 넘게 약을 먹어야 한다는 진단을 받았다. ⓒ나늘

 

‘불안’은 불편한 동반자…그래도 저항을 포기하진 않아

 

이 원고의 초안을 작성하고서 내가 쓴 글을 찬찬히 읽어보았다. 해결되지 못한 감정의 덩어리들이 글로 짜임새 있게 풀어지지 못해 보였다. 또한 여성이 겪는 일상적인 길거리 괴롭힘에 내가 ‘죽을 것 같았다’라고 쓴 표현들이 유독 많이 보였다. 여전히 나는 강남역 사건을 비롯해 죽을 것처럼 극심한 불안을 느끼는 공황장애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걸 느꼈다.

 

나는 오늘도 무수한 나와 싸운다. 그게 뭐라고 공황장애까지 걸리고 말았냐며, 스스로 ‘피해자성’에 갇혀있음을 자책하는 나와, 왜 더 열심히 싸워서 (정부로부터) 여성혐오 살인사건으로 확답 받지 못했냐며 질책하는 나와, 그래도 애썼다고 위로해주는 나와, 오늘은 무사히 살아 돌아왔다고 안도하는 나와, 우연히 살아남은 주제에 안도하는 나를 경멸하는 나…. 복합적인 내가 하루에도 수백 번 나를 미워하기도, 화를 내기도, 안타깝게 여기는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앞서 ‘용기’라는 말을 썼다. 사실 나는 불안한 여성에게 용기를 내라고, 주체적으로 살라고 부담과 죄책감을 주는 걸 몹시 싫어한다. 내가 불안하고 싶지 않다고 해서 진짜 불안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건 사실 용기의 문제가 아니다. ‘사소한 일’로 치부되는 일을 폭력이자 억압이라고 드러내는 우리의 삶은 이미 투쟁이고, 저항이고,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다.

 

불안은 나의 인생을 함께하는 익숙하지만 불편한 동반자다. 나는 이마저도 나의 소중한 삶이기에 껴안기로 했다. 미친 듯이 불안하고 죽을 것 같은 나의 마음을, 이제는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 말은 내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싸워나갈 것을 뜻하는 다른 말이기도 하다.  (나늘)  Feminist Journal IL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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