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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자궁은 나의 것” 낙태죄 폐지운동 점화
한국판 여성들의 ‘검은 시위’ 번진다
10월 15일 오늘, 서울 종로 보신각 앞에 4백여 명의 시민들이 모였다. 이들은 폴란드의 ‘전면 낙태 금지법’ 반대 시위를 모티브 삼아 검은 옷을 입었다. (10월 초 폴란드에서는 전면 낙태 금지법 의회 통과를 앞두고 2만 명이 넘는 여성들이 거리 시위를 벌였고 결국 이 법안을 폐기시켰다. 당시 폴란드 여성들은 “여성의 재생산권(reproductive rights)은 죽었다”고 말하며 애도의 뜻으로 검은 옷을 입었다.) 인공임신중절이 불법인 사회에서, 안전하지 않은 방법으로 스스로 임신중절을 하는 것을 상징하는 ‘옷걸이’를 든 여성들도 있었다.
‘불꽃페미액션’, ‘페미당당’, ‘강남역 10번 출구’ 등의 페미니스트 단체와 개인들이 함께 주최한 이 날 집회에서 참가자들은 “여자도 사람이다. 낙태죄를 폐지하라”, “내 자궁은 나의 것. (의료계는) 거래를 중단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종로 일대를 행진했다.
▶ 2016년 10월 15일 낙태죄 폐지를 외치며 검은 옷을 입고 서울 종로 보신각 앞에 모인 시민들. ⓒ일다
낙태 논의에서 늘 배제돼…어떻게 이럴 수 있나
이번 시위의 발단은 보건복지부가 지난 9월 22일 입법 예고한 ‘의료관계 행정처분규칙’ 개정안이다. 보건복지부가 의료진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겠다고 밝힌 ‘비도덕적 진료행위’에 △대리수술 △진료 중 성범죄 △허가받지 않은 주사제 사용 등과 함께 ‘임신중절수술’을 시술한 경우가 포함된 것. 보건복지부는 인공임신중절 수술을 한 의사를 최대 12개월까지 자격 정지시키는 내용을 개정안에 포함시켰다.
이에 10월 9일 대한산부인과협회는 보건복지부 개정안에 반대하며 “비도덕적 진료행위에서 ‘인공임신중절’을 삭제하지 않을 경우, 개정안이 시행되는 11월 2일부터 모든 인공임신중절 시술을 거부하겠다”고 선언했다.
상황이 이렇게 전개되자, 그동안 쌓여왔던 여성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국가가 나서서 여성의 임신과 출산에 대한 권리를 통제하고, 여기에 반대하는 의사들마저 여성의 몸을 볼모로 삼는 현실에 대한 분노다.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에서 시작된 여성들의 움직임은 온라인에 머물지 않고 거리행동으로 이어지기 시작했다.
임신, 임신중지, 출산은 여성의 몸에서 벌어지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에서 당사자의 목소리는 늘 배제돼 왔다. 군부 독재시절인 1960~1970년에 박정희 정권은 경제발전을 위한 인구 억제 정책을 펼치며, 피임약 복용과 불임 수술을 강요하는 한편 암암리에 시행되던 불법 인공임신중절 시술을 방조했다.
수십 년간 이런 상황이 이어져오다 갑자기 ‘저출산’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자, 한국 정부는 낙태율을 줄이겠다며 그동안 쉬쉬하던 ‘불법 낙태’ 행위를 집중 단속하겠다고 나섰다. 2010년에는 ‘프로라이프 의사회’가 인공임신중절 시술을 한 병원 네 곳을 고발하고, 한 여성이 남자친구로부터 ‘낙태죄’로 고소를 당하는 사건이 있었다. 이로 인해 인공임신중절 비용이 치솟고, 수술을 받으러 해외까지 나가는 ‘원정낙태’가 이뤄지는 등 ‘낙태 고발 정국’이 형성되기도 했다.
임신, 임신중단, 출산의 권리는 여성에게 있다!
ⓒ안전한 임신중지권을 요구하는 국제단체 women on waves
15일 개최된 집회에서 참가자들은 낙태를 한 여성을 살인마로 몰아가는 사회적 분위기에 대해, 그리고 아이를 낳아 키울 사회적 조건은 만들지 않은 채 애만 낳으라고 하는 사회에 대해 함께 분노했다. 또 “임신은 혼자 하나?”라고 물으며, 임신에 막중한 책임이 있는 남성은 빠져나가고 여성과 의료인만 처벌을 받는 현행법을 비판했다.
참가자들은 자유발언대에서 자신의 임신중절 경험과 생각을 솔직하게 털어놓기도 했다. 예술가 홍승희씨는 지난 5월 임신중절을 한 경험을 털어놓았다. 인도를 여행하고 있던 중, 한국에서 낙태 반대 시위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어제 귀국했다는 그녀는 “낙태를 했을 때 마치 단 한사람만 갇히는 감옥에 갇힌 것처럼 고립감에 힘들었다”고 당시 심경을 말했다.
“낙태를 하고 보니, 이렇게 힘든 일인데도 낙태는 사회적인 문제가 되지 않고 있었어요. 왜 여성의 몸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사회적 문제가 되지 못할까요? 원하는 임신을 할 권리, 원치 않는 임신을 중단할 권리가 저에겐 있습니다. 저는 살인을 한 적이 없습니다. 예비신부, 엄마이기 전에 우리는 인간입니다. 제 자궁은 공공재가 아닙니다.”
부산에서 왔다는 유예빈씨는 자신을 “낙태당하지 않고 태어난 비혼모의 딸”이라고 소개했다.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가 술을 드시고 오면 ‘너를 낙태했어야 했다’, ‘너를 왜 낳았는지 모르겠다, 후회한다’는 말을 수없이 들어왔다”고 말했다.
그녀는 “낙태당하지 않고 태어난 아이는 ‘사생아’가 됩니다. 낙태하지 않고 애 낳으면 ‘미혼모’가 됩니다. 왜 책임지지 않는 남자를 지칭하는 말은 없습니까? 저는 사생아고 엄마는 미혼모입니다. 그런데 왜 생물학적 아버지를 지칭하는 단어는 없을까요?”라며 성차별적인 우리의 현실을 꼬집었다.
‘고3 페미니스트’라고 자신을 소개한 한 여성은 “12년째 학교에 다니고 있지만 학교에서 한 번도 제대로 된 성교육, 피임 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고 말했다.
“피임법을 몰라서, 혹은 상대 남성이 콘돔 사용을 거부해서 임신을 했을 때 그게 누구의 잘못입니까? 교육을 하지 않은 정부의 잘못이고 콘돔을 사용하지 않은 남자의 잘못 아닙니까? 그런데 이 사회는 (십대가 임신하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게 섹스나 하고 다니고 임신이나 했다’고 비난합니다.”
페이스북 페이지 <강남역 10번 출구> 관리자인 안현진씨는 “매해 20만 명이 넘는 여성들이 임신중절 수술을 한다는데, 보건복지부의 입법예고안이 통과되면 여성들은 안전한 임신중절수술을 받기 더 힘들어진다. 법 개정을 촉구해야 할 산부인과의사회가 임신중절수술을 전면 거부하겠다고 정부를 협박하는 것을 보고 ‘도대체 여성의 삶은 누가 결정하는 걸까?’ 의문이 들었다”고 말했다.
안씨는 이어서 “여성은 출산 기계가 아니다. 자신의 몸과 관련한 행위를 온전하게 선택할 권리가 여성에게 있다”고 외쳤다.
▶ 10월 15일 낙태죄 폐지를 외치는 한국판 여성들의 ‘검은 시위’ 행렬. ⓒ일다
여성단체와 온라인 커뮤니티도 ‘낙태죄’ 폐지운동
여성단체와 온라인 커뮤니티 등도 이 물결에 동참하면서 복지부의 ‘입법예고안’ 철회와 형법상 ‘낙태죄’ 폐지운동이 빠르게 전개되고 있다.
장애여성공감, 건강과 대안 ‘젠더연구팀’,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 등이 모인 ‘성&재생산 포럼’은 “의료법 개정안에서 해당 항목이 삭제된다고 하더라도 형법상 낙태죄가 존재하고 있는 이상, 법과 현실 사이의 모순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고 진단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들은 “사실상 인구 억제 정책, 한센병 환자 강제낙태시술 등으로 생명과 삶을 가장 많이 무시해 온 건 (여성이 아닌) 국가”라고 비난하면서, “그런 국가가 도덕과 법을 내세워 여성들에게 책임을 전가해 온 것이 바로 ‘낙태죄’의 본질”이라고 주장했다.
“임신중지는 처벌하거나, 그 사유를 국가에 증명하고 허가받아야 하는 일이 아니다. 임신도, 임신중지도, 출산도 삶의 과정에서 누구에게나 불가피하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자, 충분한 사회경제적 지원 아래 당사자가 직접 결정해야 할 일이다.”
‘성&재생산 포럼’은 10월 17일 기자회견을 시작으로, 낙태죄 폐지 행동에 돌입하겠다고 밝혔다.
한국여성민우회도 “더 이상 국가가 여성의 몸을 출산의 도구, 통제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을 묵과하지 않겠다”며 ‘낙태죄’ 개정을 위한 1만 명 서명운동을 시작했다. 온라인 커뮤니티 ‘워마드’도 10월 23일과 30일에 광화문역 앞에서 시위를 벌일 예정이다. (나랑 기자) 여성주의 저널 일다
※ 보건복지부 의료법 개정 입법예고안 철회와 형법 ‘낙태죄’ 폐지 요구 10월 17일 기자회견 공동성명 연서명하기: http://bit.ly/2e9wy7c
※ 여성의 임신·출산에 대한 결정권을 침해하는 형법 제27장 ‘낙태의죄’ 개정 1만 명 서명운동: http://bit.ly/2dRKcf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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