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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전화 1388 “동성애는 치료를…” 황당한 상담

상담원들, 성소수자에 대한 정보와 이해 부족



열일곱 살 미성(가명)씨는 레즈비언이다.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학교에서 왕따를 당했다. 괴로움을 견디다 못한 미성씨는 학교를 자퇴했다. 자퇴를 하고 나서도 비슷한 또래 친구들을 보면 속이 울렁거렸다. 우울증으로 정신과 진료도 받았다.

 

학교를 자퇴하는 문제나 정신과 진료를 받기 위해서 미성씨는 엄마에게는 커밍아웃을 했다. 딸의 얘길 들은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다른 가족들은 동성애에 대한 거부감이 심하니까 말하지 말아라.” 답답하고 힘든 마음을 털어놓을 곳이 없었던 미성씨는 ‘헬프콜 청소년전화 1388’에 카카오톡 상담을 신청했다.

 

그런데 1388 상담선생님의 얘기를 듣고 더 큰 충격을 받았다. “아직 청소년이니까 치료를 받는 게 좋겠다”고 말한 것. 상담선생님은 “동성애라는 주제로 상담을 받고 나서 동성애자로 살지 말지 결정해라”, “성인이 되기까지 동성애자라고 확신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등의 얘기도 했다.

 

혼란 속에서 하루 종일 울다가, 미성씨는 ‘청소년 성소수자 위기지원센터’ <띵동>으로 연락했다. 그곳 상담선생님에게 “동성애자는 치료 대상이 아니다. 많은 성소수자들이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얘길 듣고 나서야, 겨우 혼란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 한국성소수자연구회(준)에서 올해 6월 발간한 <성소수자에 대한 12가지 질문>  ⓒlgbtstudies.or.kr

 

동성애는 질병 아냐…전환 치료는 정신건강에 해롭다

 

동성애가 질병이 아니라는 사실은 이미 상식이 된 지 오래다. 지금으로부터 43년 전인 1973년에 미국정신의학회는 정신과 진단의 표준을 제시하는 ‘정신장애 진단 및 통계 편람 3판’에서 동성애를 정신과 진단명에서 삭제하기로 결정했다.

 

한국의 다양한 분야 교수와 연구자들의 모임 ‘한국성소수자연구회(준)’이 올해 6월 발간한 <성소수자에 대한 12가지 질문>에서도, “동성애는 정말 질병인가요?”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미국 심리학회가 밝힌 내용을 인용하고 있다.

 

“현재까지 효과가 입증된 동성애 전환 치료는 존재하지 않으며, 성적 지향을 억지로 바꾸려는 치료는 치료 대상자의 우울, 불안, 자살 시도 등을 증가시켜 오히려 동성애자의 정신 건강을 악화시킬 수 있다.” -미국심리학회 <성적 지향에 대한 올바른 치료적 대응> 2008년

 

그럼에도 한국 사회의 대표적인 청소년 상담기관에서는 버젓이 동성애 ‘치료’를 권해 동성애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유포하고, 청소년 성소수자에게 오히려 고통을 가중시키고 있는 것이다.

 

미성씨는 ‘청소년 성소수자 위기지원센터’ <띵동>에서 상담을 받으며 이렇게 털어놓았다고 한다. ‘1388에 상담을 하면 마음이 가벼워질 줄 알았는데 (안 좋은) 생각만 많아졌어요. 그 상담을 받고 제 마음이 더 닫혔어요.’

 

이인섭 <띵동> 상담팀장은 “한국의 대표적인 청소년 상담기관인 1388에서도 성소수자에 대한 이해가 없다는 사실에 놀랐고, 화가 났다”고 말한다.

 

▶ 올해 3월 9일에 열린 성소수자 전환 치료 근절 기자회견. ⓒ출처: 청소년 성소수자 위기지원센터 <띵동> 

 

여성가족부 “동성애는 청소년기 단순한 호기심”

 

1388은 여성가족부와 한국청소년상담복지개발원이 함께 운영하고 있다. 전문상담원이 24시간 상주하며 전화, 문자, 인터넷 등을 통해 상담을 한다. 청소년의 일상적인 고민부터 가출, 학업 중단, 인터넷 중독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한 상담서비스를 제공한다.

 

그렇다면, 상담원들은 성 정체성에 대한 정확하고 올바른 정보를 교육받고 있을까? 이에 대해 정의당 이정미 의원실에서 여성가족부에 자료 제출을 요구해 분석했다. 1388 상담원들은 매달 1회 네 시간의 통합교육을 받지만, 이 가운데 성소수자 관련 교육은 없었다.

 

이정미 의원실에서 질의한 “성소수자 관련 내용의 교육을 하는지 궁금하다”는 질문에 대해, 여성가족부는 “청소년 성상담 대응 교육을 하고 있다”는 애매한 답변을 했을 뿐이다.

 

또한 1388의 청소년 성소수자 상담 현황에 대한 질의에 대해, 여성가족부 담당자는 “아직 청소년기인데 동성애는 단순한 호기심일 수도 있어서 (상담 현황에) 카테고리를 만들지 않았다. 성 문제 안에 다 포함돼있다”고 답했다. 이정미 의원실 측은 “성소수자라는 말 자체를 쓰기 꺼려하는 느낌을 받았다”고 전한다.

 

청소년 성소수자 위기지원센터 <띵동>의 정민석 대표는 “1388은 청소년들에게 접근성이 높은 기관인 만큼 성 정체성을 고민하는 청소년들이 전화할 확률도 높다”고 얘기한다. 정 대표는 “이 문제를 이렇게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하다 보니, 사회적 편견이 고스란히 반영된 상담이 이뤄졌다고 본다”고 진단한다.

 

1388 “동성애는 일시적인 것” 혐오를 내포한 말

 

▶ 1388 고민해결백과 코너. 성 정체감(동성애 포함) 이상성행동(노출증, 관음증, 가학성 등)이 같은 카테고리에 묶여 있다. ⓒcyber1388.kr


이인섭 <띵동> 상담팀장은 “청소년들이 학교나 상담복지센터에서 성 정체성에 대한 고민으로 상담을 하면, 성소수자라는 정체성 자체를 문제로 삼는 경우가 많다”고 말한다. 심지어 “청소년 쉼터에서는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퇴소 권유를 받기도 한다”고.

 

1388 홈페이지에 있는 ‘고민해결백과’ 코너에도 “성 정체감(동성애 포함)”과 “이상 성행동(노출증, 관음증, 가학성 등)”이 같은 카테고리에 묶여 있다. 동성애를 ‘문제적인 것’으로 보는 시각을 반영하고 있다.

 

또 홈페이지에 게재된 학부모 지침서 <손에 잡히는 性(성)>에는 “청소년기에 흔히 가지게 되는 일시적인 동성애적인 성향”, “우리나라는 서양에 비해 남녀공학이 적어 부담 없이 가까이 할 수 있는 것이 동성이어서 (동성애에) 쉽게 빠져든다”, “일시적인 이러한 잘못된 행동” 식으로 동성애를 언급하고 있다.

 

성 상담 전문가들은 “청소년기의 일시적인 것이니 아직 결정하지 말라”는 말이 겉으로 보기에는 청소년 성소수자를 배려하는 말 같이 보이기도 하지만, 실상은 당사자에게 더 큰 상처를 주는 성소수자 ‘혐오 발언’일 수 있다고 지적한다.

 

정민석 <띵동> 대표는 “동성애는 일시적인 것이라고 보는 시선 안에 이미 동성애에 대한 가치 판단이 들어있다. 청소년기에 해서는 안 되는 유해한 것으로 취급하는 것이다”라고 설명한다.

 

“청소년 성소수자들을 만나보면, 그들은 이미 진지한 자기 성찰과 탐색을 하면서 중요한 시기를 보내고 있다. 일시적인 것인지 영원한지는 본인이 판단하는 것이다. 주변에서는 이들이 충분히 자신의 시간을 갖고 고민할 수 있도록 지켜봐줘야 한다. ‘청소년기는 이래야 돼’라는 편견을 들이밀면서 성 정체성 문제를 유보시키는 건, 이들의 성장에 도움이 안 된다.”

 

청소년기에 이성과 연애를 한다고 해서 “이성애를 주제로 일단 상담을 받고, 성인이 된 다음에 이성애자로 살지 말지 결정해라”라고 조언하는 이는 없다. 청소년을 미숙한 존재로 보는 시선, 더불어 동성애를 일시적인 ‘탈선’으로 취급하는 성인들의 왜곡된 인식이 청소년 성소수자들을 더 힘들게 한다.

 

더군다나 청소년 상담을 하는 상담원의 입에서 그런 이야기가 나온다면?

 

정민석 <띵동> 대표는 “1388은 청소년들이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돕는 고유 목표에 어긋나, 오히려 위기를 가중시키는 상담을 하고 있다”고 일침을 가한다. ‘청소년 성소수자 위기지원센터’ <띵동>에서는 “1388은 이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청소년 성소수자 인권과 관련한 상담원 교육을 의무화하라”고 촉구하고 있다.  여성주의 저널 일다

 

※ 한국성소수자연구회(준)이 발간한 <성소수자에 대한 12가지 질문> lgbtstudies.or.kr

※ 청소년 성소수자 위기지원센터 <띵동> 02-924-1224 ddingdong.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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