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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피부 아래엔 끔찍한 기억이 꽂혀있어요”
영화 <더 라스트 릴> 감독 소토 퀄리카
자기 나라의 어두운 역사와 마주하는 것은 얼마나 괴롭고 힘든 작업일까. 캄보디아 영화 <더 라스트 릴>(The Last Reel, 소토 퀄리카 연출, 2014)이 보는 사람들의 뇌리에 남기는 것은 그야말로 그 어려움과 희망이다.
영화는 사소한 우연으로부터 어머니의 과거를 발견한 여자대학생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가족사를 더듬어 찾아가는 그녀를 통해 웅대한 국가의 암흑에 다가가는 의욕 넘치는 작품이다. 여기엔 감독 자신의 인생이 짙게 반영되어 있다.
▶ 크메르 루주를 다룬 영화 <더 라스트 릴>(The Last Reel, 소토 퀄리카 연출, 2014) 중에서.
작품이 해외에서도 상영되는 첫 캄보디아 여성감독이 된 소토 퀄리카(Sotho Kulikar). 1973년 프놈펜에서 출생한 그녀는 통역 등의 직업을 거쳐 영화계에 종사하게 되었다. 자전적 요소를 담은 <더 라스트 릴>(일본에서는 <씨어터 프놈펜>이라는 제목으로 2016년 개봉)로 감독 데뷔했는데, 이 작품은 2014년 도쿄국제영화제에서 스피릿 오브 아시아상을 수상했다.
다큐멘터리가 아닌 상업영화로 크메르 루주(Khmer Rouge, 캄보디아 공산주의 반군. 1975 정권 장악에 성공한 후, 농민을 위한 정치를 펴겠다고 하였으나 잔혹한 보복정치로 수 백 만에 달하는 국민을 학살했다)를 묘사한 것도 캄보디아에서 최초다. 소토 씨는 “중요한 것은 새롭게 알게 된 과거 속에 갇혀 우는 것이 아니라, 그걸 뛰어 넘어 자신의 발로 서는 것”이라고 말한다.
국민 넷 중 하나가 목숨을 잃은 크메르 루주
1975년 4월. 혁명을 내세운 크메르 루주가 수도 프놈펜을 제압하자, 도시의 시민들은 농촌으로 대거 이주를 당하고 국가는 통째로 강제 노동수용소가 된다. 그리고 정권이 붕괴한 1979년 1월까지 국민 네 명 중 한 명꼴인 17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고문, 처형은 물론 가혹한 노동과 기아에 의한 죽음이 많았다.
겨우 두 살 반이었던 소토 씨도 가족과 함께 수도에서 쫓겨나 북부 마을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부모와 강제로 헤어져, 유아 백 명과 함께 집단생활을 해야 했다. 그 무렵에 겪은 일 중에서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이 있다.
▶ 크메르 루주를 다룬 영화 <더 라스트 릴>(The Last Reel, 소토 퀄리카 연출, 2014) 중에서.
몬순의 계절이었다. 지내던 건물이 폭풍으로 무너지고 많은 아이들이 죽었다. 이를 알게 된 어머니가 홍수를 뚫고 딸의 안부를 확인하러 달려왔다.
“멀리서 어머니가 보이자, 돌봐주던 여성이 저를 높게 들쳐 올려줬어요. 살아있는 저를 보고 긴장이 풀렸는지, 엄마는 그만 물속으로 꼬꾸라졌어요. 그 때 돌봐주던 여자 분이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어요.”
모든 어린이는 국가의 소유물이었다. 부모가 죽어도 울어서는 안 되었다. 육친의 정이 깊은 사람은 처형당해야 할 반혁명분자로 취급당했다.
당시 기억에는 항상 비가 내리고 있었다. 병으로 쓰러진 엄마를 만나러 병원을 찾았을 때도 침대가 물에 잠겨 자기도 가슴까지 진흙탕투성이가 되었다.
“지금도 빗소리를 들으면, 그 때의 고독과 슬픔이 되살아나요.”
쓰다듬듯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며 감독은 몇 번이고 목이 메었다. 아버지의 이야기가 나오는 대목에선 더욱 그랬다.
민간항공사의 조종사였던 아버지는 일찌감치 크메르 루주에게 끌려갔는데, 군 입대를 거부해 처형당했다고 한다. 소토 씨가 열네 살 되던 해 엄마는 “너에게 이런 아버지가 있었다”며 작은 여권용 사진을 보여줬다. 그것을 확대 복사해 방 안에 붙였다. “저는 아버지를 많이 닮았어요.” 기억에 없는 아버지에 둘러싸여 있는 것이 기뻤다.
‘모두가 잊으려 하는 기억을 넌 왜 파헤치니?’
▶ 캄보디아의 아픈 역사, 크메르 루주를 다룬 영화 <더 라스트 릴> 감독 소토 퀄리카. ⓒ사진 제공: 오치아이 유리코
딸 때문에 씩씩하게 어려움을 헤치며 살아남은 엄마도, 아버지 이야기가 나오면 울며 무너졌다. 그런 어머니를 보는 것이 힘들어 언젠가부터 소토 씨는 과거를 밀봉해버렸다.
“캄보디아의 가족은 전부 마찬가지예요. 저희 피부 아래에는 그 끔찍한 기억이 꽂혀 있어요. 하지만 부모님은 이야기해주지 않고, 학교에서도 가르치지 않아요. 저보다 젊은 세대들은 아무 것도 모릅니다.”
이 끔찍한 과거가 역사교과서에 기재되기 시작한 것은 1995년의 일이다. 소토 씨도 2004년 BBC(영국방송협회)가 제작한 폴 포트(Pol Pot, 1928~1998. 크메르 루주 정권을 장악한 이) 평전에 참여하며 처음으로 깊이 배웠다. 그리고 직접 조사를 맡아 당시 제2권력자였던 누온 치아를 만나고 고문, 처형시설 전속 사진가였던 사람도 만났다.
그 과정에서 어머니가 무심결에 입 밖으로 낸 말을 잊지 못한다.
“평생에 걸쳐 잊으려고 하는 기억을 넌 왜 그렇게 파헤치니?”
하지만, 잊어버린 시늉을 한들 상처는 낫지 않는다. 아이도 부모를 이해하지 못한다. 침묵과 무지로 꾸며진 사회는 안쪽에서부터 병든 것처럼 느껴진다. 과거를 알고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모르면 국가도 가족도 사랑할 수 없다. 모두가 감추고 싶어 하는 과거와 현재에 다리를 놓아야 한다. 이렇게 처음으로 스스로 메가폰을 잡으면서 감독 소토가 탄생한 것이다.
젊은 여성의 눈으로, 캄보디아 과거와 미래에 다리놓기
“과거를 모르는 세대에게 전하기 위해 지금 젊은이들의 눈을 통해 묘사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젊은 여성은 저예요.”
가부장제가 뿌리 깊은 사회에서 여성이 진정으로 해방되고 자긍심을 갖고 살기 위해서도, 역시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알아야 한다고 소토 씨는 생각한다.
역사 청산은 법정에서도 끝도 없이 늦어지고 있다. “캄보디아 특별 법정을 가식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국민들은 그들이 충분하게 정의를 판단하고 있다고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공개처형을 하고 돌을 던져도 가라앉지 않을 정도예요. 하지만 그렇게 하면 그들과 똑같아집니다. 진실을 규명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소토 감독에게 큰 질문을 던졌다. 농민의 빈곤을 해소하고 평등의 개념으로 사회를 바꾸려고 했던 집단인 크메르 루주가 왜 그렇게 대량학살로 달려갔을까?
“도시주민과 농민을 ‘역전’시킴으로써 평등을 실현한다고 했던 것은 ‘착각’이죠. 평등이란, 서로를 이해하고 존경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 나카무라 후미코 작성, 고주영 번역 - 여성주의 저널 일다
※ <일다>와 제휴 관계를 맺고 있는 일본의 여성주의 언론 <페민>에서 제공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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