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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동료는 여자’ 지금 만나러갑니다

<한국에서 젊은 여자로 산다는 것>⑫ 일하는 여자들의 네트워킹



※ 2016년 <일다>는 새로운 페미니즘 담론을 구성하기 위하여, “한국에서 젊은 여자로 산다는 것”을 주제로 청년여성들의 기록을 연재합니다. 이 기획은 한국여성재단 성평등사회조성사업 지원을 받습니다.   여성주의 저널 일다

 

입사에서 퇴사까지, 끊임없는 저글링

 

한국에서 여성으로 살기 위해서는 여러 조건을 동시에 만족시켜야 한다. 저글링(둘 이상의 물체를 교대로 공중으로 던지고 잡으면서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는 곡예)과 비슷하다. 보편적으로 호감을 살 수 있는 외모와 매력, 데이트할 때 더치페이를 하는 센스와 매력 따위가 조건에 포함된다. 하나를 놓쳐서도 안 되고, 어느 하나만 유달리 잘해서도 안 된다. 마른 몸매가 아닌 여성은 아무리 똑똑해도 ‘자기관리를 하지 않는 사람’이고, 개인의 성취나 목표에 집중하는 여성은 드세거나 독한 사람이 되는 식이다.

 

그만둘 수 없는 저글링을 한다면 누구라도 긴장과 피로를 느낄 것이다. 부당하다고 생각했어도 버텼던 이유는, 잘하고 싶어서였다. 실제로 모든 조건을 맞춰내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 사람이 흔히 멋지다고 여겨진다. 나도 해내고 싶었다. 정말 노력하면 해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그게 착각이라는 것을 알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지만 말이다.

 

▶ 주중에 일할 때 언제나 알람을 맞춰두고 일이 밀리지 않게 했다. 많을 땐 알람이 하루에 10번 울렸다.  ⓒ 두둥쿠


자꾸만 싸한 느낌이 들었다. 친구네 회사는 군복무가 경력으로 인정받았고, 남자 동기는 같은 일을 하더라도 연봉을 더 받고 승진도 빨랐다. 내가 다니던 회사도 예외는 아니었다. 내가 여자라서 일찍 집에 보내야 한다는 이유로, 나 없이 진행된 3차 술자리에서는 대형 프로젝트의 윤곽이 잡혔다. 당연히 나는 그 계획에 없었다. 내가 담당하는 업무의 외부미팅은 다른 사람이 나갔다. 클라이언트가 하얗고 상냥한 30대 여직원을 좋아한다나.

 

퇴사하는 순간에도 ‘어린 여자라 책임질 것이 없어서 회사에 대한 충성도가 낮을 것 같았다. 이래서 남자를 뽑아야 되나 보다. 이래서 배운 여자는 안 된다’는 말을 들었다. 그 당시를 생각해보면, 난 미련할 정도로 회사에서 최선을 다했었다. 그러나 상사에게는 아무 상관이 없었나 보다.

 

퇴사할 당시 ‘탄력적으로 일할 수 있는 조직에서 일을 더 배우고 싶다’고 말했었다. 그러자‘결혼을 생각하는 거면, 그런 직장은 어렵지 않겠냐’고 했다. 아마 내가 일을 하는 이유는 맞벌이 하는 괜찮은 아내가 되기 위해서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함께 일하는 동안 내가 이 직업에 대해서 갖고 있는 비전에 대해서 말해왔지만, 상사는 믿지 않았나 보다.

 

열심히 했기 때문에 그만큼의 보상과 인정을 기대했다. 포상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면 빈번히 내 이름은 없었다. 새로 결혼하는 대리, 셋째가 태어난 과장이 나보다 먼저였고 매번 이유가 있었다. 나는 부당한 대우를 받았고, 이것이 분명히 배신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저글링을 잘 해내도 처음부터 나에게 약속된 몫은 없었던 것 같다.

 

회사에서 느낀 불편함을 이해받아본 적이 없다

 

언젠가 전 직장팀장이 ‘술을 먹다가 생각이 났다’며 지금 어디냐고 문자를 보내왔다. 남자친구랑은 잘 지내냐는 말도 덧붙였다. 그 사람과 일을 할 때가 생각났다. 나는 머쓱할 때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는 버릇이 있는데, 그 모습이 귀엽다며 업무 중에 난데없이 지금도 넘겨볼 수 있겠냐고 했었다.

 

그 팀장이 끈적하게 보내온 문자에 대해서 남자동료에게 말했다. 나와 같이 역겨워 해주길 기대했는데, 동료는 이내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게 드러나는 얼굴로 ‘과민하게 그런 말을 섣불리 퍼뜨리면 팀장께 누가 되지 않겠냐’고 했다. 나는 과민하고 ‘좀 그런’ 사람이 되었다.

 

이 사건을 제하고라도, 회사에서 느낀 불편함에 대한 이해를 받아본 적이 없다. 오히려 자고 일어나서 긍정적으로 생각해보라거나, 생리하기 직전이 아닌지 되물어보는 사람이 많았다. 내가 좀 예민한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 뒤로는 자연스럽게 내가 느끼는 불편이 타당한 불편인지에 대해서 검열을 하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면 말도 안 된다. 타당한 불편함이라니.

 

아무래도 그간 해온 저글링을 한 번에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한번 나를 다그치기 시작한 내 안의 ‘어른스러운 나’는 끊임없이 나를 괴롭혔다. 불편하고 당황스러울 때마다 내가 어른스럽지 않으며, 세상물정을 잘 모르는 것이고, 버티고 배워야 하는 것이라고 스스로를 타일렀다.

 

안타깝게도 나는 ‘어른스러운 나’가 시키는 대로 할 수가 없었다. 쉽게 우울해졌기 때문이다. 몸이 아팠다. 회사에 너무 가기 싫어서 아프다는 핑계로 나가지 않은 적도 있다. 일할 때 나의 자세는 움츠러들고 말수도 적어졌다. 회사 동료들은 하하호호 하며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로 자신의 사생활을 꺼내면서 친해졌는데, 나는 그 사이에 낄 수 없었다. 내가 막내라서 다들 나에게 무어라도 흥미로운 20대의 이야기를 해보라 했지만,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어쩌다가 내 이야기가 흘러나올 때면 나도 모르게 신경질적으로 굴고서는, 혼자 있을 때 그렇게 행동했던 나를 또 혼냈다.

 

배신-자기검열, 분열-우울로 이어지는 과정이 나 혼자 겪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지인이 여자이기 때문에 느낀 부당함에 대해서 토로할 때면 나는 언제나 힘을 주어 같이 화냈다. 그리고 마치 나에게는 전혀 일어나지 않을 일처럼 욕을 했다. ‘맞서지 그랬냐’며 지인을 부추기도 했다. 치사하게도, 그래야만 같은 사건이 나에게 벌어져도 나는 헤쳐 나갈 수 있을 거라고 안도할 수 있었다.

 

사실 지인의 푸념을 들어주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나에게는 재수 없게 저런 부당한 일이 벌어지지 않기를 비는 것이 최선이다. 나에게 벌어지는 일만도 이미 버거웠다. 지인에게 공감하게 되면 더 큰 피로함을 마주할까 무서웠다. 지인에게는 미안했지만, 나는 빠져나가기 바빴다.

 

강남역 살인사건, 잊을 수 없는 그 날 새벽

 

아직도 그 날 새벽이 생각난다. 문자 여러 건과 부재중 통화가 와있었다. 강남역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했다. 어떤 사람이 강남역 근처의 공용화장실에서 여자만 들어오길 기다렸다가 죽였다고 했다. 연일 뉴스 보도는 이것이 ‘묻지마 살인’이고 피의자의 정신질환에 의한 우발적인 범죄라고 했지만, 도통 위안이 되지 않았다. 내가 그 곳에 있었다면 내가 죽었을 것이다. 이번에는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며칠 회사를 쉬고 강남역에 나가 있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그 장소에 온 사람들의 표정과 감정을 놓치기 싫었다. 어느 때보다 다양한 여성의 경험을 읽고, 들었다.

 

▶ 강남역 10번 출구에 붙어있던 무수히 많은 메모와 추모의 꽃다발.  ⓒ 두둥쿠

 

그만큼 배신감도 더욱 날 것으로 다가왔다. 같은 팀 차장님은 이 사건이 왜 여성혐오 범죄인지에 대해서 나에게 따지며 ‘그 시간에 나돌아 다니지 말았어야 한다. 운이 없으려니’ 하고 혀를 찼다. 그 전날에도 나는 밤 열두시까지 야근을 했고, 집에 도착할 때는 새벽 한시였는데 말이다. 수차례 설명하고 여성으로서 겪은 나의 가장 아픈 경험을 꺼내면, ‘이렇게까지 진지하고 무섭게 달려들어야 하냐’며 발 빼기 급급했다. 과민하게 굴지 말라거나, 편 나누지 말라고, 자신을 잠정적인 범죄자 취급을 하지 말라고, 되려 화내는 사람도 만났다.

 

한번은 강남역 근처를 지나면서 길에서 담배를 피우는 남자에게 ‘그러지 말아 달라’ 말했는데, 그 사람은 여기는 강남역이라고 하며 조심하라고 협박했다. 어떤 지인은 강남역 근처에서 웬 남자가 손목에 붉게 자국이 남도록 잡아끌어 당겨서 무서워 소리를 질렀는데, 그 사람이 웃으며 도망갔다고 했다. 나는 무섭다기보다는 화가 났다.

 

여자로서의 경험을 꺼내는 일은 유쾌하지만은 않다. 말하면서도 수많은 자기검열을 해서 머리가 아픈데, 그 경험을 들은 상대방은 내 얘길 계속 검증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강남역에 포스트잇으로 붙어있는 이 감정과 말들이 터져 나오기까지, 여성들은 얼마나 자신을 부정하고 검열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그렇게 하니까. 그리고 그 과정을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허겁지겁 몇 지인에게 연락해서 강남역에 붙은 메모를 사진으로 남기고 SNS 계정을 만들어 보관했다.

 

이 때 함께 했던 지인의 제안으로, 여자라서 겪었던 경험을 나누는 말하기 모임을 꾸렸다. 짧은 메모나 SNS 게시글이 아닌 글로 자신을 풀어내고 서로 공감하면서, 각자 사건의 기억으로부터 회복할 에너지를 나누고 싶었다. 지인 몇 명을 초대해 참석자의 경험을 나눌 글을 써와서 읽는 형태였다. 참석자 간에는 접점이 없었기 때문에 모임이 잘 진행될 수 있을까 걱정도 되었지만, 말하기 모임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열 명 남짓한 인원이 9시간을 이야기해도 시간이 모자랐다. 초면인 사람의 경험이 내 것처럼 느껴질 때 친밀감이 들기도 하지만 계속 입에 쓴맛이 돈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태어나도 ‘여자라는 이유로’ 같은 과정의 괴로움을 느껴야 한다는 건 조금 소름 끼친다.

 

▶ 말하기 모임에서 나눈 포트럭 음식. 푸짐하고 맛있었다.  ⓒ 두둥쿠

 

‘업계 페미니스트 모임’을 준비하며

 

말하기 모임을 하고 힘이 났다.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를 들을 용기가 났고, 일을 함께 벌이고 싶었다. 나와 비슷한 상황의 사람부터 만나야겠다고 생각해보니 일이 생각나서 ‘업계 페미니스트 모임’을 준비하고 있다.

 

대개 내가 속한 업계의 네트워킹은 대기업 남자 과-차장 중심으로 업계 트랜드에 대해서 영어를 섞어가며 짧게 브리핑하고, 서로 명함을 교환하고, 회사 사정을 운운하는 식이다. 나름의 인맥을 형성하는 과정이다. 이 때 여자는 누락되기 쉽고, 애초에 그 자리에 끼는 것 자체가 의아한 일로 받아들여진다. 불필요한 성취욕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언젠가 업계 모임에 갔다가 ‘이곳에 올 정도면 회사에서 강제로 보냈거나 야망이 큰 여자사원’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니까 말이다. 저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허허허 웃음을 덧붙인다. 그 말에 화를 내면 또다시 예민하다는 식으로 몰고 갈 수 있게, 미리 물 타기하는 심술보다.

 

내가 꿈꾸는 네트워킹은 업계에서 일하는 페미니스트로서의 고민을 공유하는 것을 기본으로, 서로의 네트워크에 기반한 ‘구인구직’에서부터 시작하려고 한다. 나에게 맞는 회사를 찾을 때 주로 얼마나 여성친화적인 환경에 가까운지를 살피는데, 내부에 기민한 사람이 없다면 이를 파악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향후에는 이 네트워크 기반으로 동호회도 하고, 모임의 구성원이 개인 프로젝트를 운영하는 일을 돕는 방식도 계획하고 있다.

 

여성으로 살기 위한 기준을 맞추는 동안 획득한 기술과 능력은 기본적으로 ‘경쟁에서 이기는데’ 그 목적이 있다. 계속해서 자신을 다그쳐 동급생보다 점수를 잘 받아야 대학에 진학하고, 수많은 지원자들보다 능력이 뛰어나야 취직을 할 수 있다. 나 자신을 있는 대로 받아들이거나 동료를 만드는 방법은 배우지 못했다. 더욱이 우린 사회적으로 ‘여자의 적은 여자’라고 배우기 때문에 서로를 헐뜯는 시선에 더 익숙하다. 그 결과는 배신이었고, 스스로를 검열하는 나와 우울이었다. 그래서 내 기술과 능력을 이제는 나를 위해서 쓰려고 노력 중이다. 동료를 만나서 협업하고, 폭력적이지 않은 대화방법에 대해서 계속 고민하고 있다.

 

강남역 살인사건이 나의 어떠한 지점을 건드려서 사람들을 만나게 했는지 모르겠다. 사람을 만난다고 해서 자기검열 성향이 없어진 것도 아니고, 만성적인 우울함에서 자유로운 것도 아니다. 하지만 우울과 무기력이 연쇄적으로 나를 덮쳐올 때, 그 악순환을 끊어준 것이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 귀 기울인 경험이라는 사실이 아직도 신기하다. 다시 힘을 내서 사람을 또 만나고 힘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소중한 경험이다.

 

회사에서 야근할 때는 정말 몸을 의자에 눌러 앉혀서 억지로 일하는 느낌이었는데, 나에게 도움이 될 일이라고 생각하며 모임을 준비하고 사람을 만나는 일은 밤을 새도 그렇게 신날 수가 없다. 지금 하는 일을 좋아하기 때문에 얼마간 회사를 더 다니겠지만, 지금처럼 동료를 만나고 그 사람들을 이어서 조금 더 우리 스스로가 행복할 수 있는 일을 꾸리고 싶다.  (두둥쿠)   여성주의 저널 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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