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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마을에 부는 변화의 바람
<농촌 성문화 다시보기> “이제 퉁 치지 말자” ⑤
※ ‘문화기획달’에서 한국여성재단의 후원으로 2016 농촌 페미니즘 캠페인 <농촌 성문화 다시보기 “이제 퉁 치지 말자”>를 진행 중입니다. 이 캠페인의 배경과 진행 과정, 그 안에서 제기된 쟁점과 대안에 대해 예민하게 짚어보는 연재 기사를 싣습니다. -- 여성주의 저널 일다
‘지금, 우리가 페미니즘과 만나야 하는 이유’
지리산 <산내마을신문>은 전북 남원시 산내면 일대에 무료로 배포되는 월간 마을신문이다. 5월호 테마는 ‘여성’이었다. 1면에는 “지금 여기, 여성이 함께 살고 있습니다” 라는 타이틀이 걸렸다. 하루 종일 종종거리면서 바깥일과 집안일을 해내는 여성들의 삶을 포착하고, 남성 경영주 중심으로 짜인 농업 예산을 비판하는 기사가 실렸다.
‘리뷰’ 코너에는 페미나(페미니즘 세미나라는 공부모임)의 남성회원이 한국 페미니즘의 교과서로 불리는 <페미니즘의 도전> 서평을 실었고, 여성의 눈으로 본 20대 총선 이야기가 ‘마을 밖 소식’란을 채웠다. 당연시 여기던 농촌 부녀자들의 쉼 없는 노동과 고단한 삶을, 익숙한 일상이 아니라 새로운 생각과 언어로 바라보려는 시도였다.
▶ 여성을 테마로 한 지리산 <산내마을신문> 2016년 5월호. ⓒ 문화기획달
<산내마을신문>에서 원고 청탁을 받은 ‘문화기획달’은 “지금, 우리가 페미니즘과 만나야 하는 이유”라는 제목으로 <농촌 성문화 다시보기 “이제 퉁 치지 말자”> 캠페인을 소개했다. 불평등한 성문화와 가부장적 성역할에 머문 시골의 관행을 없애고, 우리가 계승해야 할 새로운 전통을 만들어나가자고 호소했다. 모두가 평화롭고 안전하게 살 수 있는 마을을 만들기 위해 ‘페미니즘 캠페인’에 시동을 걸었으니, 함께 씽씽 달려 보자고 제안했다. ‘손잡이 꼭 잡으시라’는 간곡한 당부도 잊지 않았다.
지금 이 캠페인에 탑승하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손잡이를 놓쳐서 허우적대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제동을 걸고 싶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캠페인에 관여한 사람들은 ‘고분고분하지 않고 말 안 듣고 센 여자’로 낙인찍힌 건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낙관적인 부분은, 여자들이 왜 이런 활동을 하는지 궁금해 하는 사람들을 위해 마을신문에서 지면을 할애해주었다는 것이다.
이뿐 아니다. 여성들을 의식하는 활동이 조금씩 생겨나고 있다. 남성들의 단합과 교류의 장으로 자리매김한 마을행사 ‘산내면 족구대회’는 여성들에게는 즐거운 행사가 아니다. 남자들이 공놀이하는 내내 음식 서빙과 설거지를 해야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올해 처음 족구대회 주최 단체에서 아이들 지킴이, 음식 서빙, 설거지 종목에 ‘남성’ 자원봉사자를 모집했다.
실제로 하겠다고 지원한 남성주민은 거의 없었다. 족구대회 현장에서도 수차례에 걸쳐 남성들에게 설거지를 함께 하자고 요청했으나, 기존에 해오던 몇 사람 외에는 응하는 이가 많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갈 길이 멀다 싶다. 하지만 마을행사인 족구대회에서 여성들이 즐기지 못하고 있다는 걸 누군가 알아챈 것만으로도 긍정적 신호라고 본다. ‘아름답고 정겨운 살래골 화합한마당’이라는 족구대회 캐치프레이즈가 빛을 발하려면 더 분발해야겠지만.
설거지도 남자가 하면 기사거리
작년 복달임날, 한 마을에서 약속이라도 한 듯이 젊은 부녀자들이 마을회관에 거의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할머니들이 상을 차리고 젊은 남자주민들이 설거지를 하는 일이 ‘발생’했다. 마침 이 장면이 <산내마을신문> 기자의 카메라에 포착되었고, 그 사진이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나왔다. 여자주민들이 설거지를 했다면 공기처럼 자연스러운 일상이었겠지만 남자주민들이 설거지를 한 것은 대서특필될 특종이었다. 의외성, 신기성, 흥미성을 고루 갖춘 사건이기 때문이다. 농촌에서 평생을 살아온 할머니, 할아버지들에게는 세상이 개벽할 일이기도 할 것이다.
이 사건은 여성과 남성이 ‘평등한 마을’이라는 걸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가 되었다. 이후 그 마을에서는 행사 때 남자주민들이 같이 설거지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 일’이 되었고, 할머니들도 무척 좋아하신다고 전해진다.
지난 7월 17일 초복 날, 또 다른 마을에서 일어난 일이다. 남자주민들이 마을회관에서 밥을 먹고 나서 그 중 누군가 “설거지 하러 갑시다” 했더니 남자 어르신들이 “가지마” 하고 말렸다고 한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남성들이 주방에 들어와 설거지를 했다. 주방에서 한 여자 어르신들이 “남자들이 설거지를 다 해주고…” 하자, 옆에 있던 젊은 여성이 “좋으시죠?” 하고 물었다. 여자 어르신은 “암만!” 하며 흐뭇해하셨다고 전해진다.
부엌에는 남자를 들이지도 못하게 하던 옛날 풍습과는 확실히 달라졌다. 남자 어르신들은 이런 변화가 자못 못마땅한 모양이지만, 여자 어르신들에게는 숙명처럼 견뎌왔던 부엌 노동의 짐을 조금이나마 나누어 주는 젊은 남성주민의 손길이 반갑기만 하다. 음식 준비를 한 것도 아니고 고작 설거지를 한 걸 가지고 한편에서는 칭찬해주고 기 살려주고, 한편에서는 생색내고 의기양양해 하는 모습이 씁쓸하지만 말이다. 결국은 남성들의 설거지가 사건이 되고 신문에 보도되는 현실의 한계와 맞닿아 있다.
남성들이 가만히 앉아서 받아먹기만 하던 습관을 어색하고 불편하게 느끼게 된 것만으로도 박수를 치며 기뻐해야 할까? 아니면 여자들이 하면 당연하고 눈에 띄지도 않을 일을 남자들이 하면 대단히 자랑스럽고 으쓱할 일이 되는 현실에 쓴웃음을 지어야할까? 밥을 얻어먹고 설거지를 하는 남자들의 등장이 변화의 시작이 될지, 과대 포장된 요식행위가 될지는 아직 미지수다.
▶ 올해 2월, 낭만세상이 진행한 <버자이너 모놀로그> 첫번째 낭독회에서. ⓒ 문화기획달
주민의 대표는 누구? ‘여성도, 청년도 여기 살아요’
농촌마을에서 지역 문제를 다루고 의사결정을 하는 기구나 회의체는 예외 없이 남자주민들로만 구성된다. 이 중 최근에 생긴, 지역 의제를 풀어가는 모임의 운영위원회가 40~50대 남성 10여 명으로 조직되어 활동 중이다. 이에 대해 한 여성주민이 운영위원회에 여성과 청년이 참여하도록 제안했다. ‘문화기획달’도 지역의 여성주의 활동을 하는 단체로서 참여 의사를 밝혔다.
기존의 남성 운영위원들은 여성주민들과 여성주의 단체, 청년들의 등장에 당황하는 모습이었다. 중장년 남성들로만 구성된 운영위원회에서 사용하는 언어와 대화의 양상은 낯설고 불편했다. 밤늦은 시간 술자리에서 진행되는 회의는 정상적인 방식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다른 세대, 다른 성별을 가진 사람들 또한 마을의 구성원으로서 대표성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다른 언어와 다른 문화를 이해하고 수용한 경험이 없는 남성중심의 조직문화였다.
결국 ‘문화기획달’은 내부적인 논의 끝에 이후 운영위원회에 참석하지 않겠다고 알렸다. 기존의 판에 들어가서 스스로를 억압하는 질서에 따르면서 동시에 싸우고 쟁취해내기 위해 에너지를 소모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 우리의 문제 의식에 공감하는 사람들을 찾고, 우리의 문화를 담을 수 있는 새 판을 짜고, 우리의 언어로 새롭게 구성하는 자리를 만들어나가기로 했다.
기존의 판에서 남성들의 언어와 소통방식을 견뎌내면서 얻을 수 있는 것도 있긴 하다. 일례로, 주민 화합을 위한 예산을 편성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운영위원들은 으레 해오던 대로 음식과 술을 마시는 마을행사를 제안했다. 그러자 여성 운영위원이 ‘또 부녀자들 동원해서 음식 하라는 거냐’고 말하며, 힘들어서 못하겠으니 그런 행사는 반대한다는 의견을 냈다. ‘여성’ 운영위원이 없었다면 막아내지 못했을 행사 기획이었다. 덕분에 운영위원회는 새로운 상상력을 발휘해야 했다.
“여성에게 자유를!” 금기에 맞선 그녀들
그럼, 이번에는 여성들이 존재감을 드러내는 새로운 여성주의 활동을 들여다보고자 한다. ‘낭만세상’(낭독으로 만나는 세상)이라는 낭독모임이 있는데, 올 한 해 산내에서 <버자이너 모놀로그>(The Vagina Monologues; 1996년 극작가 이브 엔슬러가 2백여 명의 여성을 인터뷰해서 만든 연극) 낭독회를 정기적으로 갖고 있다. ‘낭만세상’은 “당신의 보지를 노래하라”라는 타이틀로 포문을 열었고, “3월 8일 여성의 날, 말할 자유를 허하라!”로 두 번째 공연을 올렸다.
▶ 올해 7월에 열린, 낭만세상의 세 번째 <버자이너 모놀로그> 낭독회 ⓒ 문화기획달
‘버자이너’(vagina)가 여자주인공 이름인줄 알고 공연을 보러 왔다가 그게 ‘보지’라는 사실을 알고 당황했다는 한 관객은 ‘보지’를 통해 여성들의 아픔과 사랑, 상처를 나눌 수 있었다고 말했다. 낯선 이름으로 등장한 ‘버자이너’가 내민 화해의 손짓을 통해, 이제 그 이름은 친숙한 ‘보지’가 되었고, 입에 담지 못할 말이라는 금기어에서 풀려나는 중이다.
‘낭만세상’을 이끄는 똥폼은 <버자이너 모놀로그>를 읽고 낭독회를 여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나의 몸과 마음에 손을 내미는 행위’이자 ‘여성들에게 손을 내미는 행위’라고. 그리고 당당하게 몸을 받아들이고 보지의 이름을 되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보지는 더 이상 몸에서 배제된 채 거기, 아랫도리, 짬지, 조개라는 말로 대체되거나 숨겨야 할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똥폼은 세 번째 공연을 준비하면서 ‘여성들이 어기고자 했던 금기’에 대해 이야기했다. ‘우리를 여전히 묶어두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싶다고 했다. “사라진 여성들-금기에 대하여”라는 주제로 올린 세 번째 <버자이너 모놀로그>에는 시대와 장소를 넘나들면서 역사와 문학작품 속에서 금기와 싸웠던 여성들의 목소리가 담겼다. 관습에 항거하고 주체적으로 새 질서를 구축하고자 했던 여성들, 그녀들의 목소리가 2016년 한국여성들의 목소리와 겹쳐졌다.
시골에서 <버자이너 모놀로그> 낭독회가 열리는 것에 대해 외부에서는 놀라워한다. 보수적인 농촌에서 너무 파격적인 거 아니냐고. 시작 전의 우려와는 달리, 움츠러든 여성의 몸과 마음에 스며들 듯 들어가서 문을 열게 하는 무대의 힘은 부드러우면서도 강력했다. 이 공연을 소화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릴 것 같다고 말하는 관객도 있고, 직접 낭독에 참여해보고 싶다는 주민들도 있다. 낭독회에 참석한 한 남성주민의 소감을 들어보자.
“뻔한 사실을 아는 것보다 중요한 건 뭘까? 늦긴 했지만 이 촌구석에서도 이제 겨우 보지들이 더듬더듬 자기 말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이고,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이다. 자지들아 인정하자. 질투 섞인 '사물의 소유'보다 동등하고 자유로운 인간과의 결합이 천 배는 기쁘고 행복하다는 것을.”
낭독회를 경험하면서 농촌의 가부장적 문화에 함몰되었던 여성들 그리고 남성들이 깨어나고 있다. 우리는 그렇게 조금씩 누군가 내민 손을 마주 잡으면서 억눌렸던 목소리를 발견하는 중이다. <버자이너 모놀로그>가 당당하게 <보지의 독백>으로 불리게 될 날을 기대하며, 올 한해 ‘낭만세상’의 낭독회를 응원한다.
우리 지금 만나, 당장 만나!
여성과 남성이 유달리 유별한 농촌에서 대놓고 페미니즘을 거론한 지 네 달이 지났다. 그동안 페미니즘에 대해 공부하고 토론하는 페미니즘 세미나 모임이 결성되었고, “페미니스트 앞이니까 알아서 조심하겠습니다” 라며 알아봐 주는 사람도 생겼다. 친밀함의 표현이나 재미있는 농담으로 둔갑해버린 성희롱과 성추행에 대해 더 이상 수용하지 않겠다는 의사표현을 하는 사례도 있었다. 기존의 질서와 규범을 비판적으로 볼 수 있는 언어와 지식을 습득하고 가부장병을 치료하고 싶다는 자성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반면 “할 말이 많으니 따로 만나서 얘기 좀 해야겠다”는 사람도 있다는데, 아직 연락은 없다. 진짜 할 말이 많은 우리들은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 지금 당장 만나서 얘기 좀 하자고. “가족과 마을을 위해 끊임없이 밥을 차리고, 빨래를 하고, 아이를 낳고, 아픈 이들을 돌보는 역할을 여성들에게 전가하기 위해 여성들을 길들여야 한다”(나영, 경향신문 향이네 [페미니즘이 뭐길래] 7회 기사에서 인용)는 생각은 집어치우고, 같이 좀 살아보자고. (명심/ 문화기획달) 여성주의 저널 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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